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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직 신앙고백서
(The Belgic Confession)
제1조 유일하신 하나님에 관하여
우리 모두는 단일 본질이시며 영적 존재이신 유일하신 한 분 하나님만 계신다고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고백합니다. 그분은 영원하시고, 파악될 수 없으시고, 보이지 않으시고, 불변하시고, 무한하시고, 전능하시고, 완전히 지혜로우시고, 의로우시고, 선하시고, 모든 선이 넘쳐흐르는 원천이십니다.
제2조 하나님을 아는 것에 관하여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그 첫째는 우주를 창조하시고 보존하시며 통치하시는 것을 통하여 아는 것인데, 이 우주는 우리 눈앞에 있는 가장 훌륭한 책과 같고 그 안에 있는 크고 작은 많은 피조물들은 글자와 같아서, 그것들은 사도 바울이 말한 대로(롬 1:20)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속성들인 그분의 영원한 능력과 신성을 우리로 묵상하도록 인도합니다. 이 모든 것은 사람들에게 죄를 깨닫게 하기에 충분하며 그들로 변명할 수 없게 합니다.
둘째,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거룩하고 신적(神的)인 말씀으로 자기를 우리에게 더 분명하고 더 충분하게 알리십니다. 즉 현세에서 하나님의 영광과 우리의 구원에 관하여 우리가 알 필요가 있는 만큼 우리에게 알리십니다.
제3조 성경에 관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의 뜻으로 말미암아 전달된 것이 아니고 사도 베드로가 말한 대로 거룩한 사람들이 성신의 감동을 받은 대로 말한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 후에 하나님께서는 또한 우리와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특별히 배려하셔서 그분의 종들과 예언자들과 사도들이 그분의 계시하신 말씀을 글로 쓰도록 명령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친히 그분의 손가락으로 율법의 두 돌판에 기록하기도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글을 일컬어 성경(聖經)이라고 부릅니다.
제4조 성경의 정경들에 관하여
우리는 성경이 구약과 신약 두 책으로 되어 있고 이 책들은 정경이어서 이 책들에 대하여서는 어떠한 이의도 있을 수 없다고 믿습니다.
이 책들은 하나님의 교회 안에서 다음과 같은 이름들로 불립니다. 구약성경의 책들: 모세오경인 창세기와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그리고 여호수아, 사사기, 룻기, 사무엘상하, 열왕기상하, 에스라, 느헤미야, 에스더, 욥기, 다윗의 시편, 솔로몬의 세 책들, 즉 잠언, 전도서, 아가서, 그리고 네 권의 대예언서들, 즉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및 다니엘, 그리고 열두 권의 소 예언서들, 즉 호세아, 요엘, 아모스, 오바댜, 요나, 미가, 나훔, 하박국, 스바냐, 학개, 스가랴, 그리고 말라기.
신약성경의 책들: 4복음서들, 즉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 바울의 13통의 편지, 로마서, 고린도전후서, 갈라디아서,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데살로니가전후서, 디모데전후서, 디도서, 빌레몬서, 그리고 히브리서, 그리고 그 외의 일곱 편지들, 즉 야고보서, 베드로전후서, 요한일서, 요한이서, 요한삼서, 유다서, 요한계시록.
제5조 성경의 권위에 관하여
우리는 이 모든 책들을, 우리의 신앙을 규율하고 근거를 제시하며 따라서 확증하는 거룩하고 정경적인 책들로서 받아들입니다. 우리가 아무 의심 없이 그 안의 모든 내용을 믿는 것은, 교회가 이 책들을 정경으로 받고 또 동의하였기 때문만이 아니라 무엇보다 성신께서 우리 마음 가운데서 그것들이 하나님께로서 왔음을 증언하시기 때문이고, 또한 성경의 책들 안에 그 자신에 대한 증거가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눈먼 자들도 그 책들 가운데 예언된 일들이 이루어진 사실을 깨달아 알 수 있습니다.
제6조 정경과 외경의 구별에 관하여
우리는 이러한 성경을 외경들과 구별합니다. 외경으로는 제3, 제4 에스드라서, 토빗트, 유딧, 지혜서, 예수 시락, 바룩, 에스더 부록, 가마솥 속의 세 자녀의 노래, 수산나의 이야기, 벨과 용의 이야기, 므낫세의 기도, 마카베오의 두 책들이 있습니다. 이 모든 외경들은 정경의 책들과 일치하는 한 교회가 읽고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외경들은 우리가 그 책의 증거에서부터 신앙과 기독교의 어떤 요점이라도 확정할 만한 힘도 그럴 만한 권위도 없습니다. 더구나 이 외경들을 가지고 정경의 권위를 저하시키는 데에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제7조 성경의 충족성에 관하여
우리는 성경이 하나님의 뜻을 완전히 담고 있으며, 사람이 구원을 위하여 믿어야 할 모든 것을 충족하게 가르치고 있다고 믿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예배의 전체 방식이 성경 안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심지어 사도라 할지라도 지금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내용과 다르게 가르치는 것은 부당합니다. 사도 바울이 말하듯이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무엇을 보태거나 거기서 무엇을 빼는 일이 금지되어 있으므로(신12:32) 성경의 교훈은 모든 면에서 가장 완전하고 완성된 것입니다.
사람이 쓴 글은, 그 저자가 아무리 거룩한 사람이라 해도 성경과 동등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여겨서는 안 됩니다. 또한 관습이나 혹은 다수에 속한 것이나, 오래된 것, 시대와 사람들을 거쳐 전승된 것, 종교회의들, 칙령이나 법규 등을 하나님의 진리와 동등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여겨서도 안 됩니다. 하나님의 진리는 모든 것을 초월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사람은 모두 다 거짓되고(시 116:11), ‘입김보다도 가볍기’(시 62:9)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무오한 규칙과 일치하지 않는 것은 무엇이든지 마음을 다하여 배척합니다. 이것은 사도가 우리에게 가르친 것이기도 합니다. “영들이 하나님에게로부터 왔는지 시험해 보라”(요일 4:1). 마찬가지로 “만일 누가 너희에게 와서 이 교리를 전하지 않거든 그를 너희 집에 받아들이지 말라”(요이 10).
제8조 하나님께서 본질에서 한 분이시며 동시에 세 위격이신 것에 관하여
이 진리와 하나님의 이 말씀을 따라서 우리는 유일하신 한 분 하나님을 믿으며, 그분이 하나의 단일 본질이신 것과 그 안에서 삼위로, 곧 그분들의 교환할 수 없는 특성을 따라서 구별되게 실제로, 참으로, 그리고 영원히, 성부와 성자와 성신 삼위로 계신 것을 믿습니다. 성부께서는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모든 것의 원인이시고 근원이시며 시작이십니다. 성자께서는 말씀이시고 지혜이시며, 성부의 형상이십니다. 성신께서는 성부와 성자에게서 나오신, 영원한 능력과 힘이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구분으로써 하나님께서 세 분으로 분리되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성경에서는 우리에게 성부와 성자와 성신께서 각기 그 특성들로써 구별되는 위격이시나, 이 세 위격이 오직 한분 하나님으로 계신다고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성부는 성자가 아니시고 성자는 성부가 아니시며, 마찬가지로 성신은 성부도 아니시고 성자도 아니심이 분명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구분된 세 위격은 서로 나뉘거나 혼합되지 않으십니다. 왜냐하면 성부께서 우리의 살과 피를 입으신 것도 아니고 성신께서 그러하신 것도 아니고 오직 성자께서만 그렇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성부께서는 성자 없이 계신 적이 없으시고 성신 없이 계신 적도 없으십니다. 왜냐하면 이 삼위는 하나의 동일 본질 안에 계시고 영원히 동등이시기 때문입니다. 거기에는 첫째 되신 분도, 또한 나중 되신 분도 없으십니다. 왜냐하면 세 위격은 진리와 능력과 선하심과 자비하심에서 모두 하나이시기 때문입니다.
제9조 삼위일체 교리에 대한 성경의 증언들
이 모든 것을 우리는 성경의 증언들로부터, 그리고 삼위께서 각기 행하시는 일들, 특히 우리가 깨닫는 바 우리 안에서 행하시는 삼위의 사역들을 통하여 압니다. 우리로 이 삼위일체의 교리를 믿게 인도하여 주는 성경의 증언이 구약에도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구절들을 다 열거할 필요는 없고 신중하게 몇 구절만 택하여 말하는 것으로 충분할 것입니다.
창세기 1:26-27에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자’ 하시고,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다고 말합니다. 또 창세기 3:22에서는 하나님께서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같이 되었으니” 하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자’ 하신 말씀을 보면, 하나님 안에 한 위격 이상이 계심을 말하는 것이 분명해 보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창조하셨다’ 하는 표현에서는 한 분 하나님이 계심을 나타냅니다. 물론 여기서 위격의 수에 대하여서는 말하지 않고 있지만, 구약 성경에서 다소 모호하게 보였던 것이 신약 성경에서는 매우 선명하여집니다.
우리 주님께서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실 때에 하늘로부터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하는 성부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그리고 성자께서 물에 계셨고, 성신께서는 비둘기 모양으로 나타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신자에게 베풀 세례 의식을 제정하실 때에 “아버지와 아들과 성신의 이름 안으로 세례를 주라” 하고 사용할 문구를 정하여 주셨습니다. 누가복음에서는 천사 가브리엘이 우리 주님의 어머니 마리아에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성신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으리라”(눅 1:35). 마찬가지로 다른 곳에서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신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고후 13:13) 하고 말합니다. 이 모든 구절들은 세 위격이 단일한 한 신적 본질 안에 계심을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비록 이 교리는 인간의 모든 이해력을 뛰어넘는 것이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에도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이 교리를 믿으며, 또한 장차 하늘에서 그에 대한 완전한 지식과 그 유익을 누릴 것을 고대합니다.
이와 더불어서 우리는 이 삼위의 구별된 직분과 우리를 향한 각 위격의 사역들에 대하여 살펴보아야 합니다. 성부께서는 그분의 능력 때문에 우리의 창조주로 불리시며, 성자께서는 그분의 피로 인하여 우리의 구주와 구속주로 불리시고, 성신은 우리 마음에 거주하심으로 인해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는 분으로 불리십니다.
삼위일체의 교리는 사도시대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참된 교회 안에서 유대교와 회교도에 대항하여, 또한 말시온, 마니, 프락세아스, 사벨리우스, 사모사타의 바울, 아리우스 등과 같은 자들에 대항하여 항상 변호되고 보존되어 왔습니다. 정통 교부들은 정당하게 그러한 자들을 이단으로 정죄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교리에 관하여 세 신조, 곧 사도신경과 니케아 신경과 아타나시우스 신조가 가르치는 것을 기꺼이 받아들이며, 마찬가지로 교부들이 이 신조들에 일치하게 합의한 것도 받아들입니다.
제10조 예수 그리스도는 참되고 영원한 하나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신성을 따라 하나님의 독생자로서 영원 전에 나셨으며, 피조물이 아니시므로 그분은 조성(組成)되거나 창조되지 않으셨고, 성부와 동일 본질이시고 동일하게 영원하시며,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고(히 1:3), 모든 점에서 그분과 동등하심을 믿습니다. 그분은 우리의 본성을 취하셨을 때부터만 아니라 영원부터 하나님의 아드님이십니다.
이것은 구약과 신약의 여러 구절들이 다음과 같이 우리에게 증거하는 바와 같습니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셨다고 말하고, 사도 요한은 모든 것이 말씀, 곧 그가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그분에 의하여 지음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또한 히브리서에서는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통하여 만물을 지으셨다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바울 사도도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만물을 창조하셨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하나님, 말씀,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라고 불리는 그분은 만물이 창조될 때에 존재하셨으며 그 만물을 창조하신 바로 그분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그러므로 그분께서는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요 8:58) 하고 말씀하실 수 있었습니다. 또한 그분은 “아버지여, 창세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요 17:5) 하고 기도하셨습니다. 따라서 그분은 전능하신 분이시고 참되시고 영원하신 하나님이시며 우리가 그 이름을 부르고 예배를 드리며 섬기는 분이십니다.
제11조 성신님은 참되고 영원한 하나님
우리는 또한 성신께서 영원부터 성부와 성자에게서 나오시고 따라서 그분은 조성(組成)되거나 창조되거나 나신 분이 아니고 다만 성부와 성자 두 분에게서 나오시는 분임을 믿고 고백합니다. 그분은 삼위일체의 제3위이시고, 성부와 성자와 함께 하나의 동일한 본질과 존귀와 영광을 지닌 분이시며, 따라서 성경에서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처럼 참되고 영원한 하나님이십니다.
제12조 세상의 창조와 천사에 관하여
우리는 성부께서 말씀으로, 즉 그분의 아드님을 통하여 아무것도 없는 중에서 하늘과 땅과 모든 피조물을 하나님 보시기에 좋으신 때에 창조하셨으며, 또한 각각의 피조물에 그 존재와 형태와 모양을 주시고 자기의 창조주를 섬기도록 특별한 과업과 기능을 주셨다고 믿습니다. 또한 그분의 영원하신 섭리와 무한하신 능력으로 만물을 계속 보존하고 다스리셔서 만물이 사람을 섬기도록 하시고, 그리하여 궁극적으로 사람이 자기 하나님을 섬길 수 있게 하심을 믿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또한 천사들도 선하게 창조하셔서 그들로 그분의 사자들이 되어 택하신 사람들을 위해 봉사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런데 일부 천사들은 원래 하나님께서 창조하셨던 탁월한 상태에서 타락하여 영원히 멸망하게 되었고, 그 외의 천사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계속하여 원래의 상태를 계속 유지하고 있습니다. 마귀들과 악한 영들은 너무도 타락한 나머지 하나님과 모든 선한 일의 원수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온 힘을 다해 교회와 그 각각의 회원들을 해치고 자신들의 악한 계략으로 모든 것을 파괴하려고 마치 살인자들처럼 숨어 기다리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자신들의 악 때문에 영원한 정죄를 받아 날마다 무서운 고통을 기다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영들과 천사들의 존재를 부인하는 사두개파 사람들의 오류와, 또한 마귀들은 창조된 것이 아니라 독자적인 기원을 가진 존재라고 주장하고 또 그들이 타락한 것이 아니라 원래부터 본성이 악하다고 주장하는 마니교의 오류를 배격하며 혐오합니다.
제13조 하나님의 섭리에 관하여
우리는 이 선하신 하나님께서 만물을 창조하신 후에 그냥 내버려 두시거나 운명이나 우연에 맡기시지 않고 그분의 거룩하신 뜻에 따라서 다스리시고 통치하셔서 그분의 명령이 없이는 아무 일도 세상에서 일어나지 않게 하셨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죄의 창시자가 아니시며 또 죄의 책임이 그분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분의 능력과 선하심은 지극히 위대하고 우리의 이해를 뛰어넘는 것이어서, 심지어 마귀와 악인들이 불의하게 행할 때라도 그분은 지극히 뛰어나고 공의로운 방식으로 자기의 일을 정하시고 수행하시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인간의 이해를 뛰어넘는 그분의 행사에 관하여 우리는 우리의 능력이 허용하는 한도를 넘어서까지 호기심 어린 질문을 하려 하지 않습니다. 다만 최대한의 겸손과 존경심을 가지고 우리에게는 감추어진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을 찬양하며, 우리가 그리스도의 학생이라는 사실에 만족하여 이 한계들을 넘는 일이 없이 오직 하나님께서 그분의 말씀에서 가르쳐 주신 것들만을 배워야 할 것입니다.
이 교리가 우리에게 말할 수 없는 위로를 주는데, 그 까닭은 어떠한 일도 우리에게 우연히 닥치지 않고 오직 가장 은혜로우신 하늘 아버지의 지시를 따라서 일어난다는 것을 가르쳐 주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버지와 같은 배려로써 우리를 돌보시고 모든 피조물을 그분의 권세 아래에 두시기 때문에, 우리의 머리털을 다 세고 계시며 그 한 올도, 또한 참새 한 마리도 우리 아버님의 뜻이 아니면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하십니다(마 10:29-30). 이러한 사실을 우리는 확신합니다. 왜냐하면 그분이 마귀와 우리의 모든 원수들을 제압하고 계셔서 그분의 뜻과 허락 없이는 그들이 우리를 해칠 수 없음을 우리가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에피쿠로스주의자들의 생각, 곧 하나님께서는 세상 아무것에도 상관하지 않으시고 모든 것을 우연에 맡기신다는 저주받을 오류를 배격합니다.
제14조 인간의 창조와 타락과 부패에 관하여
우리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땅의 티끌에서부터 창조하시되 자기의 형상과 모양에 따라서 선하고 의롭고 거룩하게 지으셨다고 믿습니다. 그렇게 하심은 사람이 모든 면에서 하나님의 뜻에 일치하도록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이렇게 고귀한 위치에 있는 동안에 이것을 깨닫지도 못하고 그 고귀함의 가치를 귀하게 여기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사탄의 말에 귀를 기울였고 의도적으로 자기를 죄에 복종시키고 따라서 사망과 저주에 복속시켰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하나님에게서 받은 생명의 계명을 어겼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그는 자기 죄로 말미암아 그의 참생명이 되시는 하나님에게서 끊어졌고, 그의 본성이 모두 부패하게 되었습니다. 이 모든 것으로써 그는 자신을 육체적인 죽음과 영적인 죽음에 이르게 하였습니다.
사람이 그의 모든 길에서 이렇게 악하고 패역하고 부패하였기 때문에, 그는 하나님에게서 받았던 고귀한 선물들을 모두 상실하였습니다. 이제 사람에게는 자기를 핑계치 못하게 할 만한 정도의 조그마한 흔적 외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안에 어떤 빛이 남아 있든지, 그것은 어둠으로 바뀌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빛이 어두움에 비치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요 1:5)는 성경 말씀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것과 같습니다. 이 구절에서 사도 요한은 사람을 ‘어두움’이라고 부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사실과 어긋나게 사람의 자유의지에 대하여 가르치는 모든 교훈을 배격합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모두 죄의 종에 지나지 않고(요 8:34) ‘하늘에서 주시지 않으면 사람이 아무것도 받을 수 없기’(요 3:27)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요 6:44) 하고 말씀하셨는데, 어떤 사람이 스스로 선을 행할 수 있다고 감히 자랑할 수 있겠습니까?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롬 8:7) 하는 말씀을 이해하였다면, 누가 자신의 의지를 자랑할 수 있겠습니까?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신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고전 2:14) 하고 말씀하는데, 누가 자기의 지식에 대하여 말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무슨 일이든지 우리에게서 난 것같이 생각하여 스스로 만족할 것이 아니니 우리의 만족은 오직 하나님께로서 났느니라”(고후 3:5)는 말씀을 깨달을 때에 누가 감히 조금이라도 자기의 것으로 주장할 수 있겠습니까?
따라서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빌 2:13) 하고 사도가 가르친 것을 확실하고 굳게 붙들어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사람 안에서 역사하지 않으신다면,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는 것도 없고 하나님의 뜻에 일치하게 행하려는 것도 없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나를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 15:5) 하고 가르쳐 주신 것과 같습니다.
제15조 원죄에 관하여
우리는 아담이 불순종함을 통하여 원죄가 모든 인류에게로 전가된 것을 믿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본성 전체가 타락한 것이고 유전되는 악으로서 심지어 태중에 있는 아이들까지도 전염이 되는 것입니다. 원죄는 뿌리로서 사람 안에서 모든 종류의 죄를 만들어 냅니다. 따라서 원죄는 하나님 보시기에 참으로 더럽고 혐오스러운 것이어서 그분이 인류를 정죄하시기에 충분합니다. 심지어 세례로도 원죄를 말소하거나 제거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마치 물이 샘에서 솟아나듯이 죄는 이 두려운 원천으로부터 솟아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사실에도 불구하고 원죄는 하나님의 자녀가 정죄에 이르게 되도록 전가되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에 의하여 그들은 죄 사함을 받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신자들이 자기 죄 가운데서 평안하게 잘 수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러한 부패함을 깨달아 앎으로써 이 사망의 몸에서 구원받기를 간절히 기다리며 종종 탄식하게 합니다.
이 점에서 우리는 이 죄가 단지 모방의 문제일 뿐이라고 말하는 펠라기우스파의 오류를 배격합니다.
제16조 선택에 관하여
우리는 아담의 모든 후손이 이렇게 첫 조상의 죄로 인하여 파멸에 떨어지자 하나님께서 그분의 어떠하심, 곧 그분의 자비하심과 공의로우심을 나타내신 것을 믿습니다. 그분의 자비하심은 그분의 영원하시고 변치 않으시는 뜻에 따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택하신 사람들을 그들의 행위대로가 아니라 그분의 선하심 가운데서 이러한 멸망에서 구하시고 보존하여 주시는 데서 나타납니다. 또한 그분의 공의로우심은 다른 사람들을 그들 자신이 빠진 타락과 멸망의 상태에 그대로 버려두시는 데서 나타납니다.
제17조 타락한 인간의 구원에 관하여
우리는 자비로우신 우리 하나님께서 사람이 그와 같이 육신의 죽음과 영적인 죽음에 떨어지게 된 것을 보시고, 두려움 가운데 그분에게서 도망하던 인간을 그분의 놀라운 지혜와 선하심으로 찾기 시작하신 것을 믿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아드님을 주셔서 여자에게서 나게 하심으로써(갈 4:4)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하시고(창 3:15) 인간을 복되게 하시겠다는 약속으로 그를 위로하셨습니다.
제18조 하나님의 아드님의 성육신에 관하여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분의 거룩한 선지자들의 입을 통하여 조상들에게 약속하신 대로 그분이 정하신 때에 자기의 독생하신 영원하신 아드님을 세상에 보내심으로써 그 약속을 이루셨다고 고백합니다. 그 아들은 종의 형체를 취하셔서 사람과 같이 되셨습니다(빌 2:7). 그분은 모든 연약함을 지닌 참된 인성을 실제로 취하셨으나 죄는 없으십니다. 왜냐하면 사람의 행위가 아니라 성신의 능력으로 복된 동정녀 마리아의 태에서 수태되셨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참인간이 되시기 위하여 육체만이 아니라 참된 인간 영혼에서도 인성을 취하셨습니다. 인간은 육체만이 아니라 영혼도 타락하였기 때문에, 두 가지를 구원하기 위하여 그분은 두 가지를 모두 취하실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그의 어머니에게서 육신을 얻으신 것을 부인하는 재세례파의 이단에 반대하여, 그리스도께서 자녀의 몸과 피에 참여하셨다고 고백합니다(히 2:14). 그분은 다윗의 허리에서 나오신 자손이시고(행 2:30), 육신을 따라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롬 1:3), 동정녀 마리아의 태의 열매이시고(눅 1:42), 여자에게서 나셨고(갈 4:4), 다윗의 가지이시고(렘 33:15), 이새의 줄기에서 나온 가지이시고(사 11:1), 유다 지파에서 나셨고(히 7:14), 육신을 따라서는 유대인에게서 나셨고(롬 9:5), 아브라함의 후손들을 붙들어 주려고 하시기 때문에 아브라함의 씨로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분은 모든 면에서 그의 형제들과 같이 되셨으나 죄는 없으십니다(히 2:16-17; 4:15).
이러한 방식으로 그는 참으로 우리의 임마누엘, 곧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나님이십니다(마 1:23).
제19조 그리스도의 한 위격 안에 있는 두 본성에 관하여
우리는 이 잉태에 의하여 하나님의 아들의 위격이 사람의 본성과 나뉠 수 없게 연합되고 결합되었으며, 따라서 하나님의 아들이 두 분이시거나 혹은 두 위격이 계신 것이 아니라 한 분의 단일한 위격 안에 두 본성이 연합되었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각 본성은 그 구별되는 속성들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분의 신성은 항상 창조된 것이 아닌 자존(自存)의 상태로 있으며, 시작도 없고 끝도 없으며(히 7:3), 하늘과 땅을 채우고 있습니다. 또한 그분의 인성도 그 속성들을 잃지 않아서, 시작된 날이 있고 피조(被造)의 상태로 있습니다. 이러한 그분의 인성은 유한하며 실제 육신의 특성을 모두 갖고 있습니다. 심지어 부활로써 자신의 인성에 불멸성을 부여하셨을 때에도 그분의 인성이 진정한 인성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구원과 부활은 또한 그분의 몸의 실제성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두 본성은 한 위격 안에 매우 긴밀하게 연합되어 있어서 그분의 죽음에 의해서도 나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돌아가실 때에 그분이 자기 아버지의 손에 부탁하신 것은 자기 육체를 떠난 실제 인간의 영혼이었습니다. 그 후에도 그분의 신성은 항상 그분의 인성과 연합되어 있었으며, 심지어 그분이 무덤에 누워 계실 때에도 그러하였습니다. 비록 어렸을 때에는 그분의 신성이 얼마 동안 크게 나타나지는 않았지만 그때에도 신성이 그분 안에 계시지 않은 때가 없었던 것처럼, 신성은 항상 그분 안에 임재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분이 참하나님이시며 참사람이심을 고백합니다. 즉 그분은 참하나님으로서 그분의 권능으로 사망을 정복하셨으며, 참사람으로서 자기 육신의 연약함을 따라 우리를 위하여 돌아가신 분이시라고 우리는 고백하는 것입니다.
제20조 그리스도의 안에서 나타내신 하나님의 공의와 자비에 관하여
우리는 온전히 자비롭고 의로우신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보내셔서 전에 불순종이 자행되었던 그 본성을 취하게 하신 것을 믿습니다. 그렇게 하심은 아드님으로 하여금 그 동일한 본성 안에서 속상(贖償)하시고 그분의 가장 고통스러운 고난과 죽음으로써 죄에 대한 형벌을 짊어지도록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악을 아드님에게 담당시키셨을 때에 그분의 공의를 아드님에게 나타내셨고, 또한 죄를 범하여 지옥 형벌을 받아 마땅한 우리에게 그분의 선하심과 자비를 쏟으셨습니다. 가장 완전한 사랑으로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아드님을 우리를 위하여 죽음에 내어 주셨고, 우리의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그분을 다시 살리셨습니다. 그렇게 하심은 그분을 통하여 우리가 썩지 아니함과 영원한 생명을 얻도록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제21조 우리의 대제사장 그리스도의 만족게 하심[속상,贖償]에 관하여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맹세로써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르는 영원한 대제사장이 되심을 믿습니다. 그분은 우리를 대신하여 그분의 아버지 앞에 서셔서 완전한 속상으로써 하나님의 진노를 만족시키셨고, 우리의 죄를 씻어 없애시려고 친히 십자가의 나무에 달려 보혈을 쏟으며 자신을 드리셨습니다. 이러한 일은 선지자들이 예언한 것과 같습니다. ‘그분이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습니다. 그분은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과 같았고,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입었습니다’(사 53:5, 7, 12). 그분은 본디오 빌라도에 의하여 범죄자로 정죄되었는데, 사실 처음에는 무죄하다고 선언되었습니다. 그분은 ‘취하지 않은 것도 물어 주게 되었습니다’(시 69:4). 그분은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여’ 죽으셨습니다(벧전 3:18). 그분은 우리의 죄로 인한 무서운 형벌을 느끼시면서 몸과 영혼으로 고난을 받으셨고, ‘그분의 땀은 땅에 떨어지는 커다란 핏방울과 같았습니다’(눅 22:44). 마지막으로 그분은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 27:46) 하고 외치셨습니다. 그분은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려고 이 모든 일을 견디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바울 사도처럼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고전 2:2) 이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 옳습니다. 우리는 ‘예수, 우리 주를 아는 것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에 다른 모든 것은 잃어버린 것으로 여깁니다’(빌 3:8). 우리는 그분의 상처에서 모든 위로를 얻으며, 단번에 드려진 이 유일한 희생 제사, 곧 신자를 영원히 완전하게 하는 이 제사 외에 하나님과 화해할 수 있는 어떤 다른 방법을 찾거나 고안해 낼 필요가 없습니다(히 10:14).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천사도 그분의 이름을 예수, 곧 구주라고 가르쳐 주었던 것입니다.
제22조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롭다 하심
우리는 우리로 하여금 이 위대한 신비에 관한 참된 지식을 얻게 하시려고 성신께서 우리 마음속에 참된 믿음을 불러일으키심을 믿습니다. 이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그분의 모든 은덕과 함께 껴안고, 그분을 자기의 소유로 삼고, 그분 외에는 아무것도 구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구원에 필요한 모든 것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지 않든지, 아니면 모든 것이 그분 안에 있어서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소유한 자들이 완전한 구원을 얻든지, 둘 중의 하나만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로는 충분하지 않고 그분 외에도 무엇이 더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엄청난 신성 모독입니다. 그렇게 되면 결국 그리스도께서 절반의 구주이실 뿐이라는 말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도 바울이 이야기한 것처럼, ‘우리는 율법의 행위가 아니고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 하고 정당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롬 3:28). 그러나 엄격히 말하면, 믿음 자체가 우리를 의롭게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믿음은 우리가 우리의 의이신 그리스도를 껴안는 도구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분의 모든 은덕들을, 그리고 그분이 우리를 위하고 우리를 대신하여 행하신 모든 거룩한 일들을 우리에게 전가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의이시고, 믿음은 우리로 하여금 그분의 모든 은덕들에 참여하면서 그분에게 연합시키는 도구입니다. 그러한 은덕들이 우리의 소유가 되면, 그것들은 우리를 우리의 죄로부터 넉넉히 용서하고도 남습니다.
제23조 하나님 앞에서의 우리의 의로움
우리는 다윗과 바울이 가르친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우리의 죄가 용서받은 그 사실에 우리의 복이 있으며,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의가 바로 거기에 있다고 믿습니다. 그들은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행복에 대하여”(롬4:6;시32:1) 말합니다. 바울 사도는 또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 3:24) 하고 가르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이 확실한 기초를 붙잡습니다. 우리는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고, 그분 앞에서 우리 자신을 겸비케 하고, 우리의 있는 모습 그대로를 시인합니다. 우리는 아무것도 우리의 것으로 돌리거나 우리의 공로로 주장하지 않으며,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한 순종만을 의지하고 의뢰합니다. 우리가 그분을 믿을 때에 그분의 순종이 우리의 것이 됩니다.
그분의 순종은 우리의 모든 죄악을 덮기에 충분하고, 또한 우리로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확신을 얻게 할 만큼 충분합니다. 따라서 그분의 순종은 우리의 양심을 두려움과 무서움 그리고 큰 공포에서 해방시키고, 우리로 우리 첫 시조 아담이 두려워 숨으려 애쓰고 무화과나무 잎으로 자기를 가리려 하였던 것과 같이 하지 않게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서야 할 때에 행여 지극히 조금이라도 우리 자신을 의지하거나 혹은 다른 피조물을 의지한다면, (우리에게 화가 있을진저!) 우리는 소멸되고야 말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다윗처럼 기도해야 합니다. “주의 종에게 심판을 행치 마소서! 주의 목전에는 의로운 인생이 하나도 없나이다”(시 143:2).
제24조 거룩하게 하심과 우리의 선행에 관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과 성신님의 사역을 통하여 사람 안에 일으키는 이 참된 믿음이 사람을 중생시키고 새사람으로 만드는 것을 믿습니다. 이 믿음은 사람을 새 생명 가운데 살게 하고 죄의 노예 상태에서 해방시킵니다. 따라서 죄인을 의롭게 하는 이 믿음이 사람으로 하여금 선하고 거룩한 삶에 무관심하게 만든다는 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오히려 반대로 이 믿음이 없이는 아무도 하나님에 대한 사랑으로 어떤 일을 하려고 할 자가 없고, 그저 자기에 대한 사랑이나 혹 정죄에 대한 두려움에서 어떤 일을 할 뿐입니다.
따라서 이 거룩한 믿음이 사람 안에서 활동하지 않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우리가 말하는 믿음은 헛된 믿음이 아니라 성경이 “사랑으로써 역사(役事)하는 믿음”(갈 5:6)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이 믿음은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그분의 말씀에서 명령하신 일들을 힘써 행하도록 인도합니다. 믿음이라는 좋은 뿌리에서 나온 이러한 행위들은 하나님 보시기에 선하고 받으실 만한 것들인데, 왜냐하면 그 행위들이 그분의 은혜에 의하여 모두 거룩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행위들이 우리를 의롭다 하는 데에 기여하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 어떤 선행보다도 앞서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하여 의롭다 하심을 받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하는 일들은 선한 것이 될 수 없습니다. 그것은 나무 자체가 좋지 않으면 그 나무의 열매가 좋을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선행을 하지만 공적을 쌓기 위하여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무슨 공적을 쌓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하는 선행에 관하여서는, 우리가 하나님께 빚진 것이지 그 반대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너희[우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우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빌 2:13) 하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 받은 것을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의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눅 17:10) 하고 기록된 말씀을 마음에 새깁시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선행에 대하여 상을 주실 것을 부인하지는 않지만, 그분의 선물들에 관을 씌워 주시는 일은 바로 그분의 은혜로 말미암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우리는 선행을 하지만 그것을 우리 구원의 근거로 삼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로서는 우리의 육신으로 더럽혀지지 않은 일, 따라서 심판을 받아 마땅하지 않은 일을 단 하나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설령 우리가 한 가지 선행을 보일 수 있다고 해도, 하나님께서 기억하시는 우리의 한 가지 죄악만으로도 그분이 우리의 일을 거부하시기에 충분합니다. 그러므로 만일 우리의 양심이 우리 구주의 죽으심과 고난의 공효를 의지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항상 아무런 확신도 없이 의심 가운데서 이리저리 흔들릴 것이고, 우리의 가련한 양심은 항상 고통을 당할 것입니다.
제25조 율법의 완성이신 그리스도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써 율법의 의식과 상징들이 폐기되고 그림자들이 모두 성취되었음을 믿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그러한 것을 더 이상 사용하지 말아야 합니다. 다만 그 실질과 내용은 율법을 성취하신 그리스도 안에서 여전히 우리를 위한 것으로 남아 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우리는 여전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서 얻은 증언들을 가지고서, 복음의 교훈을 우리에게 확증하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그분의 영광을 위하여 우리의 삶을 모든 단정함 가운데 정돈하기 위하여 사용합니다.
제26조 그리스도의 중보에 관하여
우리는 유일한 중보자이시고 대언자이신 의로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서는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음을 믿습니다. 이 목적을 위하여서 그분은 신성과 인성이 결합하여서 사람이 되셨고, 그리하여 우리 사람들이 하나님의 위엄에 막힘없이 나아갈 수 있도록 하여 주셨습니다. 그런데 성부께서 그분과 우리 사이에 세우신 이 중보자께서는 그분의 위대하심으로 인해 우리가 겁을 먹은 나머지 다른 중보자를 상상하고 찾도록 두지 않으십니다. 왜냐하면 하늘과 땅의 어떤 피조물 가운데서도 예수 그리스도만큼 우리를 사랑하는 이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근본 하나님의 본체이시나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입으시고 우리를 위하여 종이 되셨고(빌 2:6-7), ‘모든 점에서 자기 형제들과 같이 되셨습니다’(히 2:17).
따라서 만일 우리가 다른 중보자를 찾아야 한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아직 그분의 원수 되었을 때에(롬 5:8, 10) 우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신 그분보다 우리를 더 사랑하는 이를 찾을 수 있겠습니까? 만일 우리가 권위와 능력을 가진 이를 찾는다 하여도, 성부의 오른편에 좌정하여 계시고 하늘과 땅의 권세를 가지신 그분보다 더 크신 이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또한 하나님께서 ‘나의 사랑하는 자’라고 친히 밝히신 그분보다 더 빨리 하나님의 응답을 받을 수 있는 자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성인(聖人)들 운운하며 그들이 한번도 행하거나 요구한 적이 없는 일들을 행하면서 성인들을 영예롭게 하려는 관행들은 사실 그들을 불명예스럽게 만드는 일이고, 순전히 믿음이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오히려 그들의 글을 보면 알 수 있듯이, 그들은 자신들의 직무를 행할 뿐 그러한 영예 받기를 항상 거부하였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무가치함을 이야기해서도 안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 자신의 가치를 근거로 기도를 드린다는 말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직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곧 믿음을 통하여 그분의 의로움이 우리의 것이 되는, 그리스도의 탁월하심과 공효에 근거하여 기도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히브리서 기자는 우리에게서 이 어리석은 두려움 혹은 불신앙을 제거하기 위하여 다음과 같이 바로잡아 이야기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충성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구속하려 하심이라. 자기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시느니라”(히 2:17-18). 더 나아가서 우리가 그분께로 더 나아가도록 다음과 같이 격려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있으니 승천하신 자 곧 하나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 4:14 -16).
동일한 서신에서 이렇게도 말합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참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히 10:19, 22). 또한 “예수는 영원히 계신고로 그 제사 직분도 갈리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서 저희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히 7:24-25).
이것 이외에 무엇이 더 필요하겠습니까? 그리스도께서도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으니라”(요 14:6). 우리가 다른 대언자를 찾을 이유가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자기 아드님을 우리의 대언자로 주기를 기뻐하셨습니다. 우리는 다른 이를 찾으려고 그분을 떠나지 않아야 하고, 달리 표현하면 결코 찾을 수도 없는 다른 대언자를 기대해서도 안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인 됨을 매우 잘 아시고서 그분을 우리에게 주셨기 때문입니다.
결론으로 말하면, 우리가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에서 배운 것처럼, 그리스도의 명령을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유일한 중보자이신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늘의 아버님을 부릅니다. 우리는 그분의 이름으로 성부께 구한 것은 모두 얻을 것을 분명히 확신합니다.
제27조 보편적 교회에 관하여
우리는 하나의 보편적 혹은 우주적인 교회를 믿고 고백하니, 이 교회는 참된 기독교 신자들, 곧 그들의 모든 구원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기대하며 그의 피로 씻음을 받고 성신에 의해 거룩하게 되고 인침을 받은 자들의 거룩한 회중이고 모임입니다.
이 교회는 세상의 처음부터 존재했고 마지막 날까지 있을 것인데, 그리스도께서 영원한 왕이시고 백성이 없을 수 없는 왕이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비록 잠시 동안 사람의 눈에는 매우 작게 보이고 거의 사라진 것처럼 보일 때도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온 세상의 분노에 맞서 이 거룩한 교회를 보존하십니다. 따라서 아합의 폭정 동안에도 여호와께서는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아니한 칠천 명을 자신을 위해 보존하셨습니다.
또한 이 거룩한 교회는 어떤 특정한 장소나 어떤 사람들에게 국한되거나 제한되지 않고 전세계에 뻗어 있고 흩어져 있습니다. 그러나 한 분 동일한 성신 안에서 믿음의 힘에 의하여 마음과 뜻이 연결되고 연합되어 있습니다.
제28조 교회에 가입할 의무
이 거룩한 모임과 회중은 구속(救贖)받은 자의 모임이며 여기를 떠나서는 구원이 없기 때문에 우리는 어떠한 사람도 그의 지위나 신분을 막론하고 여기에서 물러나 혼자 있는 것에 만족해서는 안 된다고 믿습니다. 모든 사람은 각각 교회에 가입하고 연합되어야 할 의무가 있으며, 교회의 하나 됨을 유지하며 교회의 가르침과 권징에 복종해야 하고 그 목에 예수 그리스도의 멍에를 메며 동일한 몸의 지체로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은사를 따라서 형제들을 세우기 위해 봉사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을 좀 더 효과적으로 유지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모든 신자는 교회에 속하지 않은 자들에게서 떠나 어느 곳에든지 하나님께서 세우신 이 모임에 가입할 의무가 있습니다. 그들은 심지어 통치자들이 반대하고 군주의 칙령들이 금할지라도 그리고 죽음이나 육체적인 형벌이 따른다고 할지라도 그렇게 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교회에서 물러나는 자나 가입하지 않는 자는 모두 하나님의 규례를 거슬러 행하는 것입니다.
제29조 참된 교회와 거짓 교회의 표지(標識)에 관하여
오늘날 세상에 있는 모든 분파들이 스스로 교회라고 자처하기 때문에 우리는 무엇이 참된 교회인지를 하나님의 말씀에서 부지런히 그리고 매우 조심스럽게 분별해야 함을 믿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선한 자들과 함께 교회에 섞여 있으나 교회의 한 부분으로서가 아니라 단지 외적으로만 그 안에 있는 외식하는 자들의 무리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교회로 자처하는 모든 분파들과 구별되어야 할 참된 교회의 몸과 그 교제에 관하여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참된 교회는 다음과 같은 표지들로써 알 수 있습니다. 그 교회는 복음을 순수하게 전합니다. 그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대로 성례를 순수하게 집행합니다. 또한 죄를 교정하고 벌하기 위하여 교회의 권징을 시행합니다. 요약하면 교회는 하나님의 순수한 말씀을 따라서 스스로를 다스리며 거기에 거스르는 것은 모두 거부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유일하신 머리로 인정합니다. 이러한 표지로써 참된 교회는 분명하게 알려지며 아무도 거기에서 분리할 권리를 갖고 있지 않습니다.
교회에 속한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의 표지로써 알려지게 됩니다. 즉 그들은 믿음이 있어 예수 그리스도를 유일하신 구주로 믿고 죄를 멀리하여 의를 추구하고 참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며 좌로나 우로 치우침이 없고 그들의 육신을 그 행위와 더불어 십자가에 못 박습니다. 비록 그들 안에 큰 연약함이 남아 있지만 그들은 평생 동안 성신을 힘입어 그 연약함에 맞서 싸웁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을 믿는 믿음으로 죄 사함을 얻은 그들은, 끊임없이 그분의 보혈과 고난과 죽음과 순종에 호소하여 나아갑니다.
거짓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보다도 교회 자체와 교회의 규례들에 더 많은 권위를 부여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멍에에 자신을 굴복시키려 하지 않습니다. 그러한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말씀에서 명하신 대로 성례를 집행하지 않고 자기들에게 좋게 생각되는 대로 더하기도 하고 빼기도 합니다. 그들은 교회의 기초를 예수 그리스도보다 사람에게 둡니다. 그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거룩한 삶을 사는, 그리고 거짓 교회에 대하여 그 죄와 탐욕과 우상 숭배를 책망하는 자들을 핍박합니다.
이 두 교회들은 쉽게 식별되며 구분할 수 있습니다.
제30조 교회의 치리에 관하여
우리는 이 참된 교회가 우리 주께서 그분의 말씀에서 가르치신 영적인 질서에 따라서 통치되어야 함을 믿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고 성례를 집행할 목사가 있어야 하며 또한 목사와 함께 교회의 치리회를 구성할 장로와 집사가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해서 그들은 참된 종교를 보존하되, 참된 교훈이 전파되고 악한 자들이 영적인 방식으로 징계를 받고 억제되며, 가난하고 고난을 당하는 모든 자들이 그들의 필요에 따라서 도움과 위로를 얻도록 보살피게 됩니다.
바울 사도가 디모데에게 명한 규칙에 따라서 충성된 자들이 선출되면, 이러한 방법으로 교회 안에서는 모든 일이 적합하고 질서 있게 이루어집니다.
제31조 교회의 직분자들에 관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의 사역자와 장로와 집사의 직분이 하나님의 말씀에 규정된 대로, 기도하는 가운데 선한 질서를 따라서 교회의 합법적인 선거에 의하여 선출되어야 함을 믿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부정당한 방법으로 살짝 들어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하며, 그의 소명이 주님께로부터 왔다는 분명한 증거를 갖게 되고 그럼으로써 소명의 확신을 갖기 위하여, 그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을 때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말씀의 사역자들은 그들이 어느 자리에 있든지 그 권위와 권한이 서로 동등한데, 왜냐하면 그들 모두가 유일하신 보편적 감독이시며 교회의 유일한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종들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이 거룩한 규례가 훼손되거나 배척되는 일이 없도록, 모든 사람은 교회의 말씀 사역자들과 장로들을 그들의 직무로 인해 특별히 존경하여야 하며, 가능한 한 그들과 화평하고 원망과 다툼이 없어야 합니다.
제32조 교회의 질서와 권징에 관하여
우리는 교회의 치리를 맡은 자들이 몸 된 교회를 유지하기 위해서 어떤 질서를 세우는 것이 유익하고 좋지만, 그럴 때에 그들이 항상 우리의 유일한 주인이신 그리스도께서 명령하신 것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에 어떤 방식으로든 양심을 속박하고 강제하는 모든 인간적인 고안이나 규범들이 도입되는 것을 배격합니다. 우리는 오직 조화와 일치를 보존하고 증진시키며 모든 사람이 하나님께 순종하고 나가도록 하는 일에 적합한 것만을 받아들입니다.
그러한 목적을 위해서 권징과 출교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시행되어야 합니다.
제33조 성례에 관하여
우리는 은혜로우신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의 무감각함과 연약함을 돌아보셔서 그분의 약속들을 우리에게 인 치시고 우리를 향한 그분의 선하신 뜻과 은혜의 징표들로 삼으시려고 성례를 제정하셨음을 믿습니다. 그렇게 하신 것은 우리의 믿음이 지속되고 양육을 받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성례를 복음의 말씀에 덧붙여 주셨는데, 그렇게 하심으로써 그분의 말씀으로 우리에게 선포하시고 우리 마음 가운데서 내적으로 행하신 일들을 우리의 외적 감각에 더 잘 나타내시려 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그분은 우리에게 베푸신 구원을 우리에게 확증하십니다. 성례는 보이지 않는 내면적인 어떤 것에 대한 보이는 표와 인이며, 이 수단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성신의 능력으로 우리 안에서 역사하십니다. 그러므로 표들은 공허하거나 무의미한 것이 아니며, 따라서 우리를 속이는 것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성례가 나타내는 진리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고, 그분을 떠나서는 성례가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와 더불어 우리는 우리 주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제정하신 성례가 두 가지라는 사실에 만족합니다. 이 두 가지 성례는 세례와 성찬입니다.
제34조 세례의 성례에 관하여
우리는 율법의 마침이 되신(롬 10:4)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의 흘리신 피로써, 그때까지 속죄와 속상(贖償)을 위하여 행하여지도록 하시고 실제로 행하여지던 다른 모든 피 흘림을 종식시키셨음을 믿고 고백합니다. 그분은 피 흘림이 따랐던 할례를 폐지하시고 그 대신에 세례의 성례를 제정하셨습니다.
세례를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교회에 들어오게 되고, 다른 모든 사람들과 거짓 종교들로부터 구별되어 전적으로 그분께만 속하게 되며, 그분의 표와 인장(印章)을 지니게 됩니다. 이러한 세례는 그분이 영원히 우리의 하나님이시고 은혜로우신 아버지가 되심을 우리에게 증거합니다.
그러므로 그분은 자기에게 속한 모든 사람이 일상적인 물을 가지고서 “아버지와 아들과 성신의 이름 안으로”(마 28:19) 세례를 받도록 명하셨습니다. 이것으로써 그분은 우리에게, 마치 물을 부을 때 물이 우리 몸의 더러운 것을 씻어내듯이, 또한 물을 세례 받는 사람에게 뿌릴 때에 우리가 그 물을 볼 수 있듯이, 그리스도의 피가 성신의 사역을 통하여 영혼에 동일한 일을 내적으로 행한다는 것을 나타내어 주십니다. 즉 그 피는 우리의 영혼을 죄로부터 씻어 깨끗하게 하며 진노의 자녀이었던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나게 합니다.
이러한 일은 물 자체로 인해 생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의 보혈을 뿌림으로써 되는 것이며, 그분은 우리의 홍해가 되시므로 우리가 바로의 폭정 곧 사탄의 지배에서 피하여 영적인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려면 반드시 그 바다를 통과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목사들로서는 우리 눈에 보이는 성례를 베풀지만, 우리 주님께서는 그 성례가 표시하는 보이지 않는 선물들과 은혜를 주십니다. 그분은 우리 영혼에서 모든 불결하고 불의한 것들을 씻으시고 정결케 하시고 깨끗하게 하시며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하시고 모든 위로로 채우시며 그분이 우리의 선한 아버지가 되신다는 참된 확신을 주시고, 새로운 성품으로 우리에게 입혀 주시며 옛 성품을 그 모든 행위와 함께 벗겨 주십니다.
그러므로 영생을 간절히 바라는 사람은 오직 한 번만 세례를 받아야 한다고 우리는 믿습니다. 우리가 두 번씩 중생할 수 없기 때문에 세례는 결코 반복되어서는 안 됩니다. 더구나 세례는 물이 우리에게 뿌려지고 우리가 그것을 받는 순간만이 아니라 우리의 전 생애를 통하여 유익을 줍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재세례파 사람들이 세례를 오직 한 번만 받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또한 신자의 어린 자녀에게 세례 주는 일을 정죄하는 것에 대하여, 그러한 오류를 배격합니다. 우리는 과거 이스라엘의 어린아이들이 우리의 자녀가 받은 약속과 동일한 약속에 근거하여 할례를 받았던 것처럼 오늘날 신자의 자녀도 세례를 받음으로써 언약의 표로 인 침을 받아야 한다고 믿습니다. 참으로 그리스도의 피 흘리심은 어른들만을 씻기시기 위한 것이 아니라 신자의 자녀들을 위한 것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율법에서 어린아이가 태어나면 곧바로 어린양을 제물로 드리도록 명하셨듯이, 우리 아이들도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위하여 행하신 일들을 나타내는 표인 성례를 받아야 합니다. 이러한 성례는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을 나타내는 성례입니다. 이전에 할례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지녔던 의미와 지금 세례가 우리 자녀에 대하여 갖는 의미가 동일하기 때문에, 바울은 세례를 가리켜 “그리스도의 할례”라고 부릅니다(골 2:11).
제35조 성찬의 성례에 관하여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미 중생하게 하여 그분의 가족으로, 곧 그의 교회로 연합시키신 자들을 양육하고 보존하시기 위하여 친히 성찬의 성례를 제정하셨음을 믿고 고백합니다.
거듭난 사람에게는 두 가지 생명이 있습니다. 하나는 그들이 처음 태어날 때에 받은 물질적이고 현세적인 생명으로서 모든 사람에게 공통됩니다. 또 다른 하나는 그들이 두 번째로 태어날 때에 받은 신령하고 천상적인 생명으로서, 그리스도의 몸과의 교제 안에서 복음의 말씀으로 태어난 생명입니다. 이 생명은 모든 사람에게 공통된 것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만 갖는 것입니다.
이 땅에 속한 물질적인 생명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는 이 땅에서 물질적인 떡을 정하여 놓으셨습니다. 이 생명이 모든 사람에게 있는 것처럼, 이 떡 또한 모든 사람에게 공통됩니다. 한편 신자들이 소유한 신령하고 천상적인 생명을 위하여서는 하나님께서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요 6:51)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는데, 신자들이 그분을 먹을 때에, 다시 말해 신자들이 믿음으로 그분을 받아들이고 영적으로 자신의 소유로 삼을 때에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의 영적인 생명을 양육하고 유지시키십니다.
신령하고 천상적인 그 떡을 우리에게 나타내시기 위하여, 그리스도께서는 지상의 보이는 떡을 그의 몸의 성례로, 포도주를 그의 피의 성례로 제정하셨습니다. 우리가 성례를 우리의 손으로 받아 쥐고 우리의 입으로 먹고 마실 때에 우리 육신의 생명이 유지되는 것만큼이나 확실하게, 우리가 믿음을 통하여 우리의 유일한 구주이신 그리스도의 참된 몸과 참된 피를 우리의 손과 입으로 우리 영혼 가운데 받음으로써 우리의 영적 생명이 유지된다는 것을, 그분은 우리에게 확언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성례를 우리에게 헛되이 명하신 것이 아님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따라서 그분은 이러한 거룩한 표로써 우리에게 나타내신 모든 일들을 우리 안에서 행하십니다. 우리로서는 하나님의 성신의 감추인 활동을 파악할 수 없는 것처럼 이 일이 이루어지는 방식도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리스도의 참된 실제 몸과 피를 먹고 마신다고 표현해도 틀린 말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그것을 먹는 방식은 입을 통해서가 아니라 믿음을 통해서 영혼으로 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항상 하늘에서 성부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계시면서도 동시에 끊임없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그분과 교통하게 하십니다. 이 만찬은 영적인 식탁으로서, 그리스도께서는 이 자리에서 우리로 하여금 그분께 참여하고 또 그분의 모든 은혜에 참여하게 하시며, 우리에게 은혜를 주셔서 우리로 그분을 즐거워하고 또 그분의 고난과 죽음의 공효를 누리게 하십니다. 그분은 우리를 그의 살로 먹이심으로써 우리의 가난하고 낙담한 영혼을 먹이시고 힘을 주시고 위로하시며, 그의 피를 마시게 하심으로써 우리 영혼을 소성케 하시고 새롭게 하십니다.
성례는 그것이 상징하는 대상과 연결되어 있지만, 모든 사람이 이 두 가지를 다 받는 것은 아닙니다. 경건치 않은 자는 실로 성례를 받음으로써 자신을 정죄하는 데에 이를 뿐이고, 성례가 표하는 진리는 받지 않습니다. 유다나 마술사 시몬은 성례를 받았으나 그것으로 상징된 그리스도는 받지 않았습니다. 오직 믿는 사람들만 그분께 참여할 수 있습니다.
끝으로, 우리는 이 거룩한 성례를 하나님의 백성의 회중 가운데서 겸손함과 경외함으로 받으며, 또한 함께 우리 구주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념하고 우리의 믿음과 기독교 신앙을 고백합니다. 그러므로 이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심으로써 자신에 대한 심판을 먹고 마시지 않도록 하려면, 어떤 사람이라도 자신을 조심해서 살피지 않고는 이 상에 나오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고전 10:28-29). 간단히 말해서 우리는 이 성례를 시행함으로써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뜨거운 사랑을 품게 됩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성례에 덧붙이거나 새로 고안해 내서 혼합시킨, 저주받아 마땅한 모든 것들을 우리는 신성 모독으로 여기고 배격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그의 사도들이 가르친 규례에 만족해야 하며 그들이 전한 대로 말해야 한다고 단언합니다.
제36조 정부가 맡은 과업
우리는 사람이 타락하였기 때문에 은혜로우신 하나님께서 왕들과 군주들과 정부 관리들을 임명하셨음을 믿습니다. 그분은 세상이 법과 규범으로 다스려지기를 원하시는데, 그럼으로써 사람의 방종이 억제되고 모든 일이 선한 질서에 따라 행하여지도록 하시려는 것입니다. 이러한 목적을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정부의 손에 칼을 주셨고, 그것으로 악한 자를 처벌하고 선을 행하는 자들을 보호하도록 하셨습니다(롬 13:4). 이렇게 억제와 보존이라는 그들의 과업은 공적 질서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교회와 교회의 사역이 보호를 받는 일도 포함합니다. 그럼으로써 그리스도의 나라가 임하고 복음의 말씀이 편만하게 전파되어, 하나님께서 그분의 말씀에서 요구하시는 대로 만민이 그분께 존귀를 드리고 그분을 섬기도록 하시려는 것입니다.
더불어 그들이 처한 형편이나 지위나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모든 사람은 공직자들의 다스림을 받아야 하며 세금을 납부해야 하고 또한 공직자들을 존중하고 존경해야 하며, 하나님의 말씀에 어긋나지 않는 한 모든 일에서 그들에게 복종하여야 합니다. 우리는 그들을 위하여 간구하되, 하나님께서 그들의 모든 길을 인도하시고 “우리가 모든 경건과 단정한 중에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딤전 2:1-2) 할 수 있도록 구하여야 합니다.
이러한 이유에서 우리는 재세례파를 비롯하여 반란을 선동하는 사람들, 또 일반적으로 권위나 공직자들을 인정하지 않고 공의를 무너뜨리려 하는 자들, 재산의 공동 소유(共産) 제도를 도입하는 자들, 하나님께서 사람들 가운데 이룩하신 단정함을 혼잡하게 만드는 자들을 정죄합니다.
제37조 최후의 심판
마지막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주께서 정하신, 그러나 모든 피조물에게는 알려지지 않은, 그때가 이르고 택함 받은 자의 수가 차게 되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전에 크신 영광과 위엄 가운데 승천하셨을 때처럼 육신을 가지신 채로 눈에 보이게 하늘로부터 오셔서(행 1:11) 죽은 자와 산 자의 심판을 선언하실 것이고, 불로써 이 낡은 세상을 태워 정결케 하실 것을 믿습니다.
그때에는 세상의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살았던 모든 사람이, 남자와 여자와 아이 할 것 없이 모두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에 소환되어, 이 위대하신 재판장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살전 4:16). 그때에는 전에 죽었던 모든 사람이 땅에서 살아날 것이며, 그들의 영혼은 전에 있었던 자신들의 몸과 다시 연합될 것입니다. 또한 그때까지 살아 있는 사람들은 다른 이들처럼 죽지 않고, 그 순간 변화되어 썩을 몸이 썩지 않을 몸으로 바뀔 것입니다.
그리고는 책들이 펼쳐질 것이고(계 20:12), 죽었던 자들은 그들이 세상에 살 때에 선악 간에 행하였던 일들에 따라 재판을 받을 것입니다(고후 5:10). 참으로 그때에는 모두가 세상에서는 그저 오락과 농담으로 치부하는 무익한 말들을 했던 것들에 관하여 일일이 해명하여야 할 것입니다(마 12:36). 또한 그때에는 사람들의 비밀과 위선이 만천하에 드러날 것입니다. 그러므로 악하고 불경건한 자들에게는 이러한 재판을 생각한다는 것이 매우 무섭고 두려운 일이 될 것입니다.
하지만 택함 받은 경건한 자들에게는 그 생각이 큰 소망과 위로가 됩니다. 왜냐하면 그때에 그들의 구원이 완성될 것이며, 그들이 감당하여야 했던 고생과 수고의 열매들을 얻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결백함이 만인에게 알려질 것이며, 이 땅에서 그들을 박해하고 탄압하고 괴롭히던 악인들 위에 하나님의 맹렬한 보복이 임하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악인들은 또한 그들의 양심이 스스로를 죄 있다고 증거할 것입니다. 그들은 불멸할 것이나, 마귀와 그의 사자(使者)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원한 불에서 영영히 고통을 받을 것입니다(마 25:41).
그러나 반대로, 택함 받은 신실한 자들은 영광과 영예의 관을 쓰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아드님께서 성부 하나님과 그의 택하신 천사들 앞에서 그들의 이름을 인정해 주실 것입니다(마 10:32). 그때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닦아내실 것입니다(계 21:4). 그리고 세상의 많은 재판장과 통치자들로부터 이단이나 불경건한 자들로 정죄되었던 그들의 대의(大義)가 그때에는 하나님의 아들의 대의인 것이 드러날 것입니다. 그때에 주님께서는 사람의 마음이 전에 전혀 생각해 보지 못한 영광을 은혜의 보상으로 그들에게 내리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장차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약속들을 충만히 누리게 될 이날을 대망합니다.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이 번역은 독립개신교회신학교 교장 김헌수 목사가 번역한 것입니다.
출처: 벨직 신앙고백서 | 리고니어 미니스트리 (ligonier.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