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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 너머에서 울려오는 전통의 목소리
남기혁 문학평론가·군산대 국문학과 교수
전통주의 시의 계보
송수권 시인의 시는 깊다. 여기서 ‘깊다’는 것은 공간적 의미와 시간적 의미를 동시에 지니고 있다. 그의 시는 깊고 유현한 세계, 정신적으로 아늑하고 아득한 저 깊이에의 침잠을 보여주는가 하면, 우리의 육체에 아로새겨져 있는 저 시간의 흔적을 거슬러 올라가게 한다. 시간적, 공간적 깊이로의 침잠을 통해 송수권 시의 언어는 경험적 세계에서는 맛볼 수 없는 근원적 세계로 우리를 인도한다. 근원적 세계로의 리드미컬한 비약, 그것은 우리의 현존이 보다 근원적이고 영원 세계에 맞닿아 있다는 감각을 확인하는 것이다. 송수권의 시가 담아내고 있는 민족적 정서와 세계 인식, 질박하면서도 아름다운 토속어와 민요적인 가락, 국토 기행을 통해 쏟아내는 우리의 자연 환경과 문화유산에 대한 재발견, 풍요하기 그지없는 토종 식물과 음식의 세계. 국토에 대한 순례자로서, 민족어의 파수꾼으로서 송수권이 펼쳐내는 전통적 서정시는 개별자의 삶을 원천적으로 규정하는 보편적 토대로서 소위 ‘민족적인 것’이 우리의 육체와 정신 속에 얼마나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는가를 다시 한 번 확인시켜준다. 이것은 우리가 ‘민족적인 것’을 의식하고 사느냐의 여부와 상관이 없다. 민요와 판소리의 애달픈, 때로는 신명 나는 가락을 만날 때 우리의 몸에 잠재하고 있는 운율 의식이 작동하여 그 세계에 자연스럽게 동화되듯이, 송수권의 언어는 우리 몸 안에 잠재하고 있는 민족적 정서와 전통의 질서를 작동시키는 독특한 미적 체험을 제공한다. 이를 이른바 전통주의 시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송수권의 전통주의는 한국 근대시에 잠재하고 있는 모더니티 지향성과 근대 지향성의 대립에 대한 우리 시대의 응답이다. 이는 단순히 언어와 기법의 차원에 그치는 문제가 아니라 세계를 바라보고 인식하는 방식의 문제, 더 나아가 아직 오지 않은 시간에 대한 비전을 제시하는 문제에 연결된 것이다. 혹자는 그의 전통주의를 시대착오적인 것, 혹은 낡은 방식에 의존하는 것이라고 간주할지도 모른다. 근대를 지배하였던 저 거대한 계몽 담론들조차 도도한 해체의 물결 앞에서 무너져내리고 있는 시대에, 이미 지나간(혹은 청산된) 구시대의 낡은 정신을 붙잡고 감읍에 빠지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냐는 논리일 것이다. 하지만 김소월, 김영랑, 백석, 서정주, 박재삼 등 한국시에 등장했던 전통주의 시인들의 작품이 우리 근대시의 중요한 유산으로 평가받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은 전통주의적 작품 창작을 통해 이 시인들이 자기 시대의 문제 즉 근대성의 위기에 대해 미학적 저항을 시도하였다는 점일 것이다.
사실 송수권 시의 어떤 부분들은 김소월, 정지용, 백석, 서정주, 박재삼과 같은 전통주의 시인들 목소리와 매우 흡사하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온전하게 송수권 시의 전통주의적 특질을 온전히 지배하고 있지는 않다. 송수권의 전통주의 시에는 선배 시인들의 전통지향의 미의식과 세계관을 계승하면서도 산업화 시대에 진입한 이후의 한국적 현실이 반영되어 있기 때문이다. 어떤 면에서 보면 송수권의 전통주의는 훨씬 불리한 조건에 놓여 있다. 우리 시대만큼 전통에 대한 교양이 부족한 시대, 전통에 대해 적대적인 시대가 없었기 때문이다. 송수권은 사회 구성원의 대다수가 정부 주도의 근대화 프로젝트에 매달려 끊임없는 자기부정을 향해 맹목적으로 달려왔던 개발의 연대를 전통에 대한 견실한 믿음 하나로 살아온 시인이다. 그는 전통주의적 시 창작을 통해 그 숨 막히는 시대에 대한 미학적 부정을 시도한 것이다. 특히 송수권의 전통주의가 유교적 교양주의에 입각한 낭만적 반자본주의의 미학 대신에 역사 속에 살아 숨쉬는 민중의 언어와 정신에 맞닿아 있는 점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는 억눌린 것의 자리를 되찾아주고, 과거로부터 희망을 길어 올려 미래로 투사한다. 그는 과거와 전통을 빌려 애써 화해할 수 없고 화해해서도 안 되는 것들과 화해하라고 우리에게 강요하지 않는다. 화해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한 분노의 힘을 억눌린 것의 해방에서 찾는 방식, 송수권의 전통주의 시가 갖는 의미는 바로 이것이다.
저녁과 그늘, 경계의 시공간
송수권의 시에는 유난히 경계의 시공간과 관련된 이미지가 많다. 저녁노을이 지는 서해의 갯벌을 그린 시(〈대역사大役事〉 〈뻘물〉 등), 그늘의 공간을 묘사하고 있는 시(〈산문에 기대어〉)가 좋은 예이다. 밝음과 어둠, 생명과 죽음이 교차하는 경계의 시공간에 천착하는 송수권 시의 미학은 근대에 대한 미학적 반응의 결과이다. 근대란 무엇인가? 어둠에 대한 계몽, 아니 어둠(타자)의 영역을 의도적으로 설정하고 진보의 이념으로 그것을 처단함으로써 자기 존립의 근거를 마련하는 정신이 바로 근대이다. 문제는 근대성 그 자체가 지니고 있는 어둠의 구조에 대한 은폐에 있다. 그러니까 근대의 일방적인 향일성向日性은 그것에 포섭되지 않는 타자들에게는 폭력이 아닐 수 없다. 송수권 시에서 드러나는 경계의 시공간은 어둠 속에서도 드러날 수 없었고, 햇빛 아래에서는 더더욱 드러날 수 없었던 것들이 자신의 존재 증명을 요구하고 미학적으로 인지되기를 기대하며, 더 나아가 자신을 은폐하고 억압하는 시대의 광기를 고발할 수 있는 그러한 세계이다. 이를 일컬어 그늘의 미학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이러한 ‘그늘의 미학’이 김소월 시에 이미 훌륭하게 발현되었다는 사실을 안다. 〈시혼〉에서 김소월은 근대적 시공간이 야기하는 불안과 공포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과거적 시간(전통)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전통주의적 사유 방식을 보여준 바 있다.
도회의 밝음과 짓거림이 그의 문명文明으로써 광희光輝와 세력勢力을 다투며 자랑할 쾒에도, 저, 깁고 어둡은 산山과 숩의 그늘진 곳에서는 외롭은 버러지 한 마리가, 그 무슨 슬음에 겨?는지, 수임없이 울지고 잇습니다. (중략) 일허버린 고인故人은 켊에서 만나고, 놉고 맑은 행적行蹟의 거륵한 첫 한 방울의 기도企圖의 이슬도 이른 아츰 잠자리 우헤서 퓅습니다.
〈시혼〉에서 김소월은 ‘도회의 밝음과 짓거림’을 등지고 나와 깊고 어두운 산과 숲의 ‘그늘진 곳’으로 들어가서 ‘일허버린 고인故人’을 만나 그의 ‘놉고 맑은 행적行蹟’을 듣고 있다. 이는 그의 시 〈무덤〉에서 이미 표현되었던, ‘내 넉슬 잡아켮러헤내는 부르는소리’ 즉 ‘옛 조상祖上들의기록記錄’을 묻어둔 무덤(죽은 자의 세계)으로부터 퍼져 나와 산 자의 세계에까지 들려오는 전통의 목소리에 소환되는 것을 의미한다. ‘깁고 어둡은 산과 숩의 그늘진 곳’으로 표상되는 전통의 세계와의 소통에 소환되는 김소월의 전통주의적 시학은 송수권이 펼쳐내고 있는 그늘의 미학과 놀랄 만큼 유사하다. 그것은 주술적 언어를 매개로 산 자와 죽은 자가 소통하고 현재와 과거가 서로 뒤섞이며, 인간과 자연이 유기적으로 결합되는 놀라운 서정적 체험을 빚어낸다.
누이야 지금도 살아서 보는가
가을산 그리메에 빠져 떠돌던, 그 눈썹 두어 낱을 기러기가
강물에 뿌리고 가는 것을
내 한 잔은 마시고 한 잔은 비워두고
더러는 잎새에 살아서 튀는 물방울같이
그렇게 만나는 것을
누이야 아는가
가을산 그리메에 빠져 떠돌던
눈썹 두어 낱이
지금 이 못물 속에 비쳐옴을
― 〈산문에 기대어〉 중에서
이 시에 ‘물’은 인간의 근원적인 슬픔, 혹은 정한의 표상이다. 시적 화자는 ‘정정한 눈물’(1연)에서 시작하여 그 눈물이 ‘즈믄 밤의 강’을 일으켜 세우고 다시 ‘그 강물 깊이깊이 가라앉은 고뇌의 말씀’을 끄집어내는 것을 본다. 2연과 3연에서는 죽은 누이의 슬픔을 불러 세우는 ‘물’이 다시 그 슬픔의 정화로 전환된다. 물에 비친 가을산의 그림자에 ‘빠져 떠돌던’ 누이의 ‘눈썹 두어 낱이’ 바로 ‘지금 이 못물에 비쳐옴’을 보는 것. 이때 물은 산 자와 죽은 자가 시공을 뛰어넘어 함께 만나는 회통의 공간이 된다. 이 시의 서정적 주인공은 죽은 자의 넋을 불러내는, 물에 비친 가을산의 그림자를 통해 시적 대상과의 교감을 회복하고 서정적인 합일에 도달하고 있다. 산 자와 죽은 자가 회통하는 경계의 시공간은 흔히 지평의 이미지로 드러나게 마련이다. 인간이란 본래적으로 머나먼 곳을 꿈꾸고 현재 저 너머를 바라보는 존재이다. 그 때문에 인간은 멀리 있는 사물을 가까이 할 수 있고, ‘자신 쪽으로 끌어들일’ 수 있다. 송수권 시의 시적 자아는 자신의 시선에 포착되는 경계 저 너머의 세계에서 근원적인 것들을 길어올려 실존의 감각을 되찾고 현재적 삶을 조망한다.
그렇다고 송수권이 과거 지향적이고 맹목적인 전통 의식에 사로잡혀 있는 것은 아니다. 그의 시에 드러난 역사는 상처투성이의 역사이다. 과거를 이상화·절대화하여 예찬의 대상으로 삼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 시간 속에 억눌려 있던 타자의 존재성을 드러내고 그들의 언어를 복원하여 새로운 삶을 형성시키는 놀라운 상상력이 송수권의 특징적인 시 창작 방법이라 할 수 있다. 그의 시의 어떤 부분들이 서정주의 목소리를 닮아 있으면서도, 서정주와는 다른 독특한 개성을 느끼게 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80년대 초에 창작된 〈아도〉라는 시를 보자.
아도란 무엇이냐
질그릇이다.
인사동 골짜기의 고물상 같은 데 가서 만나보면
입은 기다랗게 찢겨져 있고 두 귀는 둥글게
구멍이 패어 있는
입이 있어도 벙어리고 귀가 있어도 귀머거리인
못생긴 우리네의 질그릇이다.
유언비어를 날조하거나
겁쟁이 지식인의 입을 누르는
그것은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은밀히 건네는
유가풍의 금서禁書와 같은
질그릇이다.
― 〈아도〉 중에서
이 시의 시적 자아가 대면하고 있는 것은 ‘아도’라는 조선시대의 질그릇이다. 이 질그릇의 용도는 물건이나 음식을 담아 두는 것에 있지 않다. 입과 귀의 형상을 기형적으로 비틀어 놓은 이 질그릇은 사실 입바른 소리를 하는 사람의 입에 ‘재갈을 물리기’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다. 양심적인 선비나 민중의 올곧은 소리가 퍼져나가는 것을 막기 위해 사용된 이 아도는 그래서 조선시대 지배 계급의 폭력성을 폭로한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아도는 완롱玩弄을 목적으로 잘 빚어낸 도자기와는 구별된다. 완벽한 형태미와 색채미를 구현하고 있는 도자기는 왠지 삶의 흔적이 거세된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송수권은 그런 도자기를 보면서 숭배하는 귀족 취향적인 전통의식 대신에 민중적 삶의 고통을 환기하는 일그러진 도자기, 즉 아도를 통해 야만의 역사를 고발하는 민중적 전통의식을 드러내고 있다. 아도가 지니고 있는 기다랗게 찢겨진 입, 둥글게 파여 있는 구멍의 형상은 피지배 계급의 육체에 가해진 상흔을 환기한다. 문제는 이 시의 시적 자아가 ‘아도’를 통해 자신의 시대를 되비추고 있다는 점이다. 그는 최루탄 가스가 자욱한 거리의 ‘오 월의 가로수 밑에 비틀거리면서’, 자신이 ‘그 시대(아도가 만들어진 시대―인용자 주)에서 한 발짝도 더 깨어나지 못한’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또 하나의 아도가 되어가는’ 시인의 자의식을 드러낸다. 무릇 시인은 자신의 입에 물리는 재갈을 거부하고, 말해야 할 것을 말하고 드러내야 할 것을 드러내야 한다는 것. 이 ‘아도’로서의 삶을 거부하는 엄중한 역사의식, 억눌린 타자의 존재성을 드러내야 한다는 소명의식은 시 쓰기에 대한 송수권의 독특한 자의식을 보여주는 것이다. 송수권이 80년대의 시 창작을 통해 국토애를 노래하고, 분단의 상처를 고발하며, 통일된 조국을 상상하는 노래를 한 것도 이러한 전통의식이 발현된 결과라고 말할 수 있다. 물론 송수권은 섣부르게 생경한 이념을 노출하거나 과도한 목적의식에 사로잡혀 언어를 질식시키지 않는다. 그는 전통 의식과 역사 의식을 통해 시적인 것, 혹은 참다운 시 정신을 억압하는 경험 세계의 비진정성을 고발하고 있지만, 언제나 시적인 형상성과 청아한 시 정신을 옹호하고 있다.
그러나 내 서툰 가락 이제는 아무도 귀기울여주지 않습니다.
가금 한 마리도 깃들지 않습니다. 향피리는 봄이
제격인데 나는 봄날에도 뻐꾸기가 우는 줄 알았습니다
산속은 뻐꾸기지만 버들 숲은 꾀꼬리니라……
왜 진작 이 말씀을 못 깨달았을까요. 이제 나의
향피리에도 봄기운이 들면 나는 향피리 다시 고쳐 불겠습니다.
―〈향피리〉 중에서
나의 노숙露宿이 비록 험한 길 위에 있을지라도 밤마다
옷깃을 적시는 시詩의 이슬이 영롱하고 내가 엉망이 되어
쓰러진 자리, 비록 혼돈의 시대에도 별은 저렇게 빛났으므로
어떤 고통에 찬 신음이 내게 와서 나를 좀 슬게 할지라도
이 우주 안의 한 작은 파도 소리에 씻기고 씻겨, 햇빛이 오는 한낮은
저 개펄 위의 젖은 물잎새들처럼 젖어 피련다.
―〈노숙〉 중에서
〈향피리〉는 시 쓰기에 대한 송수권 시인의 자의식을 노래하고 있는 작품이다. 이 시의 시적 화자는 어린 시절 할아버지의 사랑방에서 흘러나온 부드러운 향피리 소리에 대한 기억을 가지고 향피리를 불어왔다. 여기서 향피리를 분다는 것은 ‘서정시’를 쓰는 것에 대한 은유이다. 서정시를 쓴다는 것은 옛날에 대한 기억을 재현하는 일이다. 하지만 시적 화자의 향피리에서 흘러나오는 것은 봄날의 ‘버들 숲’에 어울리는 꾀꼬리 소리가 아니라 산속에서 우는 뻐꾸기 소리에 지나지 않는다. 이렇게 ‘서툰 가락’으로 부르는 노래이기에 이젠 어느 누구도 시적 화자가 부르는 노래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문제는 봄기운에 맞게 향피리를 고쳐 불어야 한다는 것. 송수권은 향피리의 부드럽고 청아한 소리로 표상되는 전통적 미의식에 대한 재발견을 통해 자신의 시 쓰기의 방향을 암시하고 있는 셈이다.
한편 송수권 시인에게 삶이란 풍찬노숙과 같은 것으로 인식된다. 비바람과 찬이슬을 맞으며 노숙을 하듯 시 쓰는 삶을 살아왔지만, 시적 자아에겐 그 삶이 전혀 고통스럽거나 부끄럽지 않다. 왜냐하면 ‘옷깃을 적시는 시의 이슬이 영롱’하고, 내가 살아온 ‘혼돈의 시대’에도 ‘별(시)’은 창공에서 ‘저렇게 빛났기’ 때문이다. 혼돈의 시대를 밝혀 온 그의 순수한 시혼이 역경에 찬 삶을 풍요로운 것으로 인식하는 밑바탕이 된다. 혼돈의 시대를 비추어주는 별빛 같은 시 정신, 이슬 같은 시어에 대한 집착은 그의 장인정신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지만, 그 밑바탕에는 근원적 세계에 대한 지향이 자리 잡고 있다. 타락한 현실 세계에 대해 비판적 거리를 유지하면서, 별빛으로 상징되는 근원적 세계를 드러내는 것. 그것은 〈향피리〉에서 언급되었던, ‘노상 할아버지 사랑방에서 들려오던 부드러운 피리소리’에 대한 기억을 되살리는 일이기도 하다.
근원적 세계를 불러내는 소리들
근원적 세계의 형상화 과정에서 송수권이 가장 즐겨 사용하는 이미지는 ‘소리’ 이미지이다. 사물에 대한 시각적·후각적 묘사, 민족어의 음악적 가능성을 최대치로 끌어올리는 운율의식 등과 함께 그는 자연 사물이 빚어내는 청각적 이미지를 섬세하게 포착하여 민족적 삶의 원형을 끄집어낸다. 한 비평가가 지적하였듯이 송수권은 ‘자연 사물과 일체를 이룬 민족 공동체의 생활 속에서 울려오던 내적 생명의 숨소리를 듣는 밝은 귀를(전정구, 〈화음을 동반한 생명의 숨결〉)’ 갖고 있다. 가령 〈지리산 뻐꾹새〉에 나오는 뻐꾹새의 울음소리, 〈한국의 강〉에 나오는 ‘이끼 슬은 관촉사의 저녁 종소리’,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어〉에 나오는 새 떼의 울음소리와 같이 송수권은 한국적인 정서를 환기하고 민족적 삶의 원초적인 형식을 보여주는 소리를 찾아 국토 여기저기를 찾아 헤매거나 일상적 삶의 주변을 관조한다. 송수권이 펼쳐 보이는 ‘소리’는 김수영이 ‘더러운 진창’으로 표상되는 한국적 현실과 전통에 대한 자기긍정으로 되돌아가면서 발견한 ‘쨍쨍 울리는’ 놋주발(〈거대한 뿌리〉) 소리와 얼마나 흡사한가? 송수권의 시에는 이와 같이 ‘쨍쨍 울리는’ 전통적 소리 이미지가 거의 전편에 등장한다. 그는 이 소리를 통해 과거적 시간에 묻혀있는 공동체의 기억을 되살리고, 억압된 것들 속에서 미래에의 희망을 발견하려 한다.
대들이 휘인다
휘이면서 소리한다
연 사흘 밤낮 내리는 흰 눈발 속에서
우듬지들은 흰 눈을 털면서 소리하지만
아무도 알아듣는 이가 없다
어떤 대들은 맑은 가락을 지상地上에 그려내지만
아무도 알아듣는 이가 없다
눈 뭉치들이 힘겹게 우듬지를 흘러내리는
대숲 속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삼베 옷 검은 두건을 둘친 백제 젊은 수사修士들이 지나고
풋풋한 망아지 떼 울음들이 찍혀 있다
연 사흘 밤낮 내리는 흰 눈발 속에서
대숲 속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한밤중 암수 무당들이 댓가지를 흔드는 붉은 쾌자 자락들이 보이고
활활 타오르는 모닥불을 넘는
미친 불개들의 울음소리가 들린다.
―〈눈 내리는 대숲 가에서〉
이 작품은 그의 초기작 〈대숲 바람소리〉와 상호 텍스트적 관계에 있다. 〈대숲 바람소리〉에서 시적 자아는 대숲에서 흘러나오는 바람소리에 묻어 있는 ‘대패랭이 끝에 까부는 오백 년 한숨’과 ‘황토 현을 넘어가던 / 징소리 꽹과리 소리’와 ‘문둥이 장타령’과 ‘새벽별의 푸른 숨소리’를 듣는다. 민중의 억눌린 한과 해한解恨의 지난한 몸짓을 담은 그 무수한 ‘소리’들은 새벽별로 표상되는 우주의 근원적인 소리와 결합하여 현실 세계에 대한 도저한 부정의식과 민중적 유토피아를 향한 리드미컬한 비약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위에 인용한 〈눈 내리는 대숲 가에서〉의 시적 자아 역시 놀라운 상상력을 동원하여 다양한 소리 이미지를 그려내고 있다. 내리는 흰 눈발 속에서 대나무들이 눈을 털어내는 소리, 대나무들이 빚어내는 맑은 가락은 ‘아무도 알아듣는 이가 없다’고 한다. 그것을 들을 수 있는 자, 자연에서 빚어지는 저 소리 없는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귀를 가진 시적 자아는 일종의 영매와 같은 존재가 아닐까? 대나무에서 떨어지는 눈의 소리에 이끌린 시적 자아가 대숲 속을 들여다보면서 ‘삼베 옷 검은 두건을 둘친 백제 젊은 수사修士들’과 그들을 태우고 가는 ‘풋풋한 망아지떼 울음들’을 떠올리는 것, 또 ‘한밤중 암수 무당들이 댓가지를 흔드는 붉은 쾌자 자락들’을 보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일 것이다. 시적 자아는 억눌린 것이 지니고 있을 법한 정한과 그것의 극복을 향한 제의적 몸짓을 본다. 경계의 시간을 뛰어넘어 현재적 시간 속으로 현현하는 근원적 세계는 온통 상처로 아로새겨져 있으며, 시적 자아가 현재 처하고 있는 실존의 고통을 환기한다. 하지만 시적 자아는 근원적 세계의 고통이 정화되는 것도 함께 보고 있다. ‘활활 타오르는 모닥불을 넘는 / 미친 불개들의 울음소리’로 형상화된 소리. 대나무에서 나오는 소리를 통해 민중의 원한과 그 극복 양상을 발견하는 놀라운 상상력은 송수권의 전통주의가 얼마나 동시대의 역사적 삶과 유기적으로 연결된 것인지를 역설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물론 송수권이 탐색하는 소리들이 역사주의적 상상력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송수권의 시적 상상력은 유한한 인간의 현실, 역사적 시간의 구속을 훌쩍 뛰어넘어 보다 근원적인 세계를 지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송수권의 시에서 빈번하게 마주치게 되는 자연의 유기적 생명력과 리듬감, 즉 《수저통에 비치는 저녁노을》이란 시집의 여러 시편에 수차례 등장하는 저 ‘우주율’에 대한 감각이 그것이다. 가령 〈징〉이란 작품을 보자. 이 작품에서 시인은 징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상세하게 추적한다. 여기서 특히 주목되는 구절은 ‘구리 서른 근에 주석 쉰닷 냥이라 / 우주 일원상一圓相으로 펄펄 끓는 쇳물 부어 징 하나 떠내니’라는 표현이다. 서로 다른 재료들이 ‘우주 일원상一圓相’으로 용해되어 방짜 쇠로 재탄생하는 것. 우주란 본질적으로 질서가 없는 세계이지만, 서로 관련이 없는 사물들이 융합하여 새로운 존재로 거듭나고 새로운 질서로 편입되는 것이 바로 우주율의 비밀이 아닌가. 물론 이 방짜 쇠는 수없는 망치질을 거쳐야 ‘징으로 제 울음’을 울게 된다. 인간의 노동과 사물이 지닌 본성이 서로 결합하여, 우주적 신비 속에서 탄생하는 징의 소리는 그래서 저 우주의 신비한 소리를 내게 된다. 그것은 우는 소리이지만, 인간의 울음을 넘어서는 신명神命을 담고 있는 소리이기도 하다.
저 징 소리를 보아라, 벅구는 탁탁, 상쇠는 끙끙
이것들 한 품에 싸안아 앞뒷산은 얼레발친다
휘휘 벌판을 따라오던 긴 강물도 머리 풀어 운다
이 산하 잠든 도깨비불, 보리 숭년 왼 씨름에도
떼로 몰려 중중모리 잦은모리 가락으로 뜨고
혼절한 세월 차마 안 잊혀 봉숫불도 눈감는가
오늘 밤은 관솔불 아래 또 어느 강 마을 풍물 잡히는가.
―〈징〉 중에서
풍물패의 징소리를 듣고 ‘긴 강물도 머리 풀어’ 울고, 풍물의 빠른 가락이 산하에 잠들어 있던 ‘도깨비불’을 불러 일으켜 세우고, 차마 안 잊히는 ‘혼절한 세월’의 기억마저 풍물 소리에 녹아 들어가는 것. 징 소리의 신명은 이렇게 자연에 내재하고 있는 생명의 리듬을 환기하고, 인간적 삶의 억눌린 부분들을 해방시켜 우주적 생명으로 이끌어낸다. 이와 같이 송수권의 ‘소리’는 주술적·제의적 성격을 지닌다. 마치 샤먼의 넋두리와 같이, 주술사의 마법과 같이 그는 소리를 통해 근원적 세계의 감각적 현현을 이루어낸다. 아니 그의 시어 전체가 어떤 의미에서 소리의 마법성을 간직하고 있는지 모른다. 이 마법성은 때로는 원통하게 죽은 것들에 대한 진혼의 기능을 떠맡기도 하고, 때로는 더 무너질 것도 없는 ‘헛것들만 남은 세상’을 향해 저항의 넋두리를 던지는 미학적 부정의 기능을 떠맡기도 한다.
전통주의적 목소리의 현대적 의미
토속어의 질감을 최대한 살려내어 민족적 정서와 자연관, 생명의식을 표출하고 있는 송수권의 시는 가장 한국적이되 보편적 인간 정신이 구현되어 있으며, 가장 고전적이되 현대적 감각이 살아 숨쉬는 독특한 세계를 펼쳐 보인다. 뿐만 아니라 과거적 시간의 회감을 통해 역사의 야만성을 고발하고, 억눌린 타자의 세계를 시적으로 복원하여 미래에 대한 희망으로 투사하는 독특한 상상력은 기존의 전통주의 시에 나타나는 퇴영적, 복고적인 상상력과는 근본적으로 구별된다고 하겠다. 서정시의 미적 자율성을 견지하면서도, 독특한 방식으로 역사주의적 상상력과 결합되는 송수권의 서정시는 그래서 현대적인 삶의 형식이 은폐하고 있는 민족적 전통에 대한 보고報告인 동시에, 현대의 억압적인 삶이 간직하고 있는 고통의 기원이 무엇인지 밝혀주는 등불과도 같다.
송수권은 순결한 민족어를 지키는 파수꾼의 역할을 자임하기도 한다. 가령 〈개불알꽃〉에서 시인은 산업화의 거센 물결 앞에서 들꽃 한 송이를 둘러싼 원형 심상이 어떻게 물질화의 과정을 겪게 되는지, 어떻게 언어의 타락으로 연결되는지를 역설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그는 언어의 타락을 ‘언어의 폭력’과 같은 범주로 받아들이며, 이는 다시 산업주의의 시대적 폭력이나 표준어로 대표되는 중앙집권적 국가주의적 사유체계에 연결되는 것으로 간주한다. 그러니까 전통주의자로서 민족어의 파수꾼을 자처하고, 자신이 사는 ‘향토적 공간을 누비며 토속어의 숨결을 다듬는’ 작업은 억압된 것의 복귀를 꿈꾸는 시 정신에 연결된다고 하겠다. 은폐되거나 억압된 근대의 타자들이야말로 현재적 억압을 극복하고 미래에 대한 희망을 모색할 수 있는 유일하고, 절대적인 정신적 준거가 되기 때문이다. 이것이 송수권의 전통주의가 갖는 현대적 의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