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2장 고려시대
제1절 고려 전기의 사회와 장성
1. 고려의 건국과 장성
고려를 건국한 왕건은 궁예의 뒤를 이어 북방의 왕자로 추대된 인물이었다. 궁예는 신라의 왕자로서 아마도 정권 다툼에 희생이 되어 지방으로 몰려난 자였던 것같다. 일찍이 중이 되었다가 세상이 소란하여지자 기훤에게 투신하였는데(진성여왕 5, 891), 뒤에 양길의 부하가 되었다. 그는 양길의 일부 군사를 거느리고 오늘날의 영월․강릉․철원 및 황해도 일대를 공략하여 많은 군사를 모으는 데 성공하였다. 이에 양길을 타도하고서는, 송악을 근거로 삼아 자립하여 고구려의 부흥을 구호로 내세우면서 ‘후고구려’를 건국하였다(효공왕 5, 901). 그러나 뒤에 ‘고려’라는 국호를 버리고 ‘마진’을 칭하면서 도읍을 철원으로 옮기더니, 다시 국호를 ‘태봉’으로 개칭하였다. 궁예는 나라의 정치를 총리하는 광평성(廣評省)을 비롯하여 병부(兵部)․대룡부(大龍部. 즉 倉部)․수춘부(壽春部. 즉 禮部) 등의 여러 관부를 정비하였고, 또 정광(正匡)을 비롯한 9관등을 설정하여 당당한 국가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왕자의 지위에서 몰려난 궁예에게는 애초부터 신라에 대한 적개심이 강하였다. 그는 나라 사람들로 하여금 신라를 멸도(滅都)라 부르게 하고, 신라로부터 항복해 오는 자는 모조리 죽였다고 한다. 한편 이 즈음 궁예는 궁궐을 화려하게 꾸미고 사치하는 등, 점차 전제군주 행세를 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는 자신의 전제군주로서의 지위를 합리화하기 위하여, 스스로 미륵불(彌勒佛)이라 칭하면서 큰 아들을 청광보살(靑光菩薩) 작은 아들을 신광보살(神光菩薩)이라 하였다. 그는 머리에 금책(金幘)을 쓰고 몸에는 방포(方袍. 즉 僧服)를 입었으며, 외출할 때에는 백마를 타고 화려한 무늬가 있는 비단으로써 그 갈기와 꼬리를 장식한 가운데, 동남(童男)과 동녀(童女)로 하여금 범패(梵唄)를 부르며 뒤따르게 하였다고 한다. 고구려의 부흥과 같은 국가적 이상이나 호족연합정치와 같은 시대적인 추세를 외면한 채, 한껏 전제군주로서의 위엄을 드러내는 일에만 몰두하는 것으로 비칠 만한 행동이었다.
이러한 군주들이 의레 그러하였듯이 궁예는 의심증이 심하였다. 문무관료에서 평민에 이르기까지 반역죄를 씌워 수많은 인명을 무고하게 살상하였다. 심지어는 자신의 부인 강씨가 다른 사람과 정을 통하였다고 하여 두 아들과 함께 무참히 살해하기까지 하였다. 궁예의 그러한 의심증과 포학성은, 왕건과 같은 비판적인 정치세력이 급속히 부상하면서 자신을 위협해온 데 따른 대응의 측면이 없지 않았다. 궁예는 처음 고구려의 부흥을 표방하면서 주변에 세력을 모아 새로운 왕조를 건설하였다. 그러나 뒤에 권력 기반이 튼튼해지면서, 국호를 변경하는 등 원래의 건국 명분과는 거리를 두는 것처럼 보이는 정책을 취하였다. 더욱이 호족연합정치를 지향하던 호족들의 기대를 저버린 채, 미륵불을 자칭하면서 정교일치적인 전제주의를 추구하였다. 그러자 이에 불만을 품은 왕건 등 패서지역(浿西地域)의 고구려계 호족세력이, 비판적인 여론을 등에 업고 차츰 궁예정권을 위협하기에 이르렀다. 패서계 호족을 대표하는 왕건이 궁예로부터 반역을 모의하였다는 의심을 받아 죽을 고비를 넘긴 적이 있었다는 사실로부터 미루어 짐작이 가는 일이다. 그리하여 궁예는 반대세력의 위협에 대응하기 위해서라도 더한층 독재권력을 휘두르지 않을 수가 없었으며, 이로써 그에게 덧씌워진 폭군이라는 악명을 피할 수가 없었던 셈이다.
궁예의 철권통치하에서 신료와 백성들은 늘 두려워 전전긍긍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전제군주로서의 위엄을 지키기 위한 사치와 낭비로 말미암아, 조세와 부역은 더욱 과중해짐으로써 온 나라가 도탄에 빠지게 되었다. 마침내 학정을 견디다 못하여 일어선 그 부하들에 의하여, 폭군으로 전락한 궁예는 축출되고 말았다. 궁예 휘하의 기장(騎將)이었던 홍유(洪儒)․배현경(裵玄慶)․신숭겸(申崇謙)․복지겸(卜智謙) 등이 모의하고 백성들도 이에 호응함으로써, 역성혁명이 일어나 왕건이 왕위에 오르게 되었던 것이다. 신라 경명왕 2년(918) 6월의 일이었다.
왕건은 송악(개성) 지방의 호족 출신이었다. 그의 선대는 고구려 계통으로 연결되며, 신라 하대에 해상 무역활동을 통하여 성장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고려사의 첫머리에 실려 있는 「고려세계」에 의하여 알 수가 있다. 이에 따르면, 왕건의 가계는 스스로 성골장군(聖骨將軍)이라 칭하던 호경(虎景)이 백두산으로부터 부소산 왼쪽 계곡에 이르러 혼인하고 가정을 마련하는 데서 시작되고 있다. 이 호경의 아들이 강충(康忠)이며, 그는 서강(西江) 영안촌(永安村) 부잣집의 딸인 구치의(具置義)를 부인으로 맞았다. 이때 그는, “부소군(扶蘇郡)을 산의 남쪽으로 옮기고 소나무를 심어서 암석이 드러나지 않게 하면 삼한을 통합할 이가 태어나리라”는 풍수설에 따라 그대로 하고서는, 이어서 송악군이라 이름을 바꾸고 군의 상사찬(上沙粲)이 되었다고 한다. 강충은 슬하에 이제건(伊帝建)과 손호술(損乎述. 후에 寶育으로 개명)의 두 아들을 두었다. 보육에게는 다시 두 딸이 있었는데, 때마침 왕위에 오르기 전 산천을 유람 중이던 당나라 숙종(肅宗. 혹은 宣宗)이 바다를 건너 송악에 왔다가, 언니의 꿈을 산 둘째 딸 진의(辰義)와 인연을 맺어 작제건(作帝建)을 낳았다. 그 후 작제건이 성장하여 아버지를 만나고자 상선을 타고 중국으로 향하던 중, 서해 용왕을 괴롭히는 늙은 여우를 처치한 끝에 그의 딸 용녀(龍女)를 아내로 맞이하여 귀국하게 되었다. 이에 백주(白州)의 정조(正朝)인 유상희(劉相曦) 등이 소식을 듣고 큰 경사라 반기면서, 개주(開州)․정주(貞州)․염주(鹽州)․백주와 강화(江華)․교동(喬桐)․하음(河陰) 등 4주 3현의 사람들을 거느리고 이들을 위해 영안성(永安城)을 쌓고 궁실을 지어 주었다. 이들 사이의 장남이 용건(龍建. 隆으로 개명)인데, 도량이 넓어서 삼한을 아울러 삼키려는 뜻을 품었다. 그리고 그가 뒤에 꿈에서 본 여인(夢夫人)을 만나 혼인하여 얻은 아들이 곧 태조 왕건이었다는 것이다.
위의 왕건 세계설화에는 비합리적인 설화가 많이 포함되어 있어 여러 모로 주의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그러는 속에서도 눈길을 끄는 것은, 그의 집안이 바다와 깊은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강충이 서강 즉 예성강 입구의 영안촌 부자의 딸과 결혼하였다든지, 혹은 당나라 숙종이 바다를 건너왔으며, 그 아들 작제건이 서해용왕의 딸인 용녀를 아내로 맞이하였다는 등, 한결같이 바다와 연관되는 이야기들 뿐이다. 왕건의 선대는 신라 하대에 크게 일어났던 해상세력가 가운데 하나였음이 분명해 보이는 것이다.
그런데 이 집안은 강충 때 이미 마음대로 군의 위치를 옮기고 그곳의 상사찬이 될 수 있을 만큼 성장해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작제건에 이르러서는 주변 7개 군현의 인원을 동원하여 성을 쌓고 집을 지을 수 있을 정도로, 개성을 중심으로 하여 황해도 일부와 강화도 및 한강 하류 유역 일대로 세력을 넓혀 가지 않았을까 여겨진다. 그리하여 용건의 대에 이르러서는 마침내 삼한을 병탄하려는 야심을 품기에까지 이르렀던 것이 아닌가 헤아려지는 것이다.
왕건은 선대 이래의 그같은 토착적인 근거를 바탕삼아 마침내 왕위에까지 오른 인물이었다. 그는 패강진(浿江鎭. 黃海 平山)과 혈구진(穴口鎭. 江華) 등 신라의 변경에 설치된 군진(軍鎭)의 무력을 배경으로 사회적인 진출을 꾀하였다. 더욱이 선대의 활약에서 드러나듯이 혈구진을 중심으로 한 해상세력과는 특히 밀접한 관계를 가졌던 것 같다. 왕건은 처음 궁예의 휘하 장군으로서 여러 전선에서 활약하였으나, 특히 서남해 방면―현재 전남의 서남해안 일대―의 공략에 공을 세웠다. 그는 금성(錦城. 羅州)․진도 등을 점령하여 후백제의 중국․일본과의 통로를 막고, 또 북방에 대한 정면 공격을 견제하였다. 이러한 작전은 왕건이 일찍부터 해상활동에 익숙하였던 때문에 가능하였을 것이다. 그는 공에 의하여 수상격인 시중(侍中)에 임명되더니, 궁예를 축출한 여러 장군의 추대를 받아 왕위에 오른 것이다(景明王 2년, 918).
왕건은 국호를 고려(高麗), 연호를 천수(天授)라 하고, 도읍을 송악으로 옮기었다. 고구려의 후계자로 자처하는 데 있어서 왕건은 궁예와 다름이 없었다. 그러나 왕건은 새로운 국가로서의 면목을 일신하기를 원하였으며, 그러한 목적에서 수도를 자기의 본거지로 옮겼던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스스로의 정치적․군사적 기반을 확고히 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의 호족으로서의 성격을 뚜렷이 나타내 주었다. 궁예와는 달리 그가 호족이었다는 것은, 그를 뒷받침해 주는 토착세력이 있었으며, 또 한번의 정변으로써는 흔들리지 않는 확고한 기반을 갖고 있었음을 말하여 준다. 또 여러 호족들과도 굳게 연결할 수 있는 성격을 그가 지니고 있었음을 뜻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러한 조건이 그가 후삼국을 통일할 수 있는 바탕이 되었다.
왕건은 또 대외정책에 있어서 궁예와는 달리 친신라정책을 썼다. 견훤을 타도하기 위하여 신라와 우호관계를 맺은 것이다. 이는 또 한편 신라의 전통과 권위의 계승자로서의 지위를 얻으려고 한 것이기도 하였다. 견훤이 신라의 국도에 침입하여 경애왕을 죽일 때에도, 왕건은 스스로 군대를 거느리고 견훤과 싸웠었다. 그가 신라의 서울 금성(金城. 慶州)을 방문하였을 적에는 신라인으로부터 부모를 대함과 같다는 칭송을 받았다 한다. 그러나 왕건이 신라에 대하여 군사적인 작전을 소홀히 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금성 북쪽 50리의 곳에 닐어진(昵於鎭. 神光鎭)을 설치하여 고려의 군사를 주둔시켜 신라를 감시하였던 것이다.
고려와 후백제는 한때 인질을 교환하는 등 휴전을 모색한 일이 있었다. 그러나 두 나라는 대체로 쉴 사이 없는 교전상태에 놓여 있었다. 그들의 전선은 고창(古昌. 安東)으로부터 강주(康州. 晉州)에 이르는 낙동강의 서부 일대였다. 신라를 서로 차지하기 위하여 싸우는 과정에서, 자연히 그 외곽 일대에 전선이 형성되었던 것이다. 이미 지방에 대한 통제력을 완전히 상실한 신라는, 이러한 양국의 전투에 전혀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었다. 지방호족의 여러 성은 그 독자적인 입장에서 혹은 왕건의 고려에 손을 내밀거나, 혹은 견훤의 후백제와 통하고 있었다.
고려나 후백제는 모두 중국과의 관계를 소홀히 하지 않았다. 후백제가 주로 남중국과 외교관계를 맺었던 데 대해서, 고려는 산동반도를 거쳐 북중국과 주로 교통하였다. 우리나라가 후삼국의 내란기일 뿐 아니라, 중국 또한 오대의 혼란기였음에도 불구하고 상호간의 왕래는 퍽 빈번한 편이었다. 이러한 교통은 무역을 목적으로 하는 면도 있었지만, 동시에 일종의 외교전의 양상을 띠기도 하였다. 그러나 문제의 해결책이 국내에 있었음은 물론이다. 오대와 같이 혼란한 시기의 중국이 후삼국의 정세에 무슨 영향을 끼쳐 줄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균형을 잡고 있던 전선은 고려 태조 13년(930)의 고창(古昌. 安東) 전투를 계기로 고려측의 승리로 기울게 되었다. 이로 인하여 후백제는 신라의 외곽에서 후퇴를 강요당하였던 것이다. 고려는 이에 후백제의 정면에 위협을 가하여 태조 17년(934)에는 운주(運州. 洪城)에서 후백제군을 격파하였다. 전세는 완전히 고려에 유리하게 전개되었다.
전투에서만이 아니라 국내의 정세도 후백제에 불리하였다. 견훤이 그의 아들 신검(神劍) 등에 의해 금산사에 유폐되는 사건이 발생한 때문이었다. 견훤은 고려에 망명하여 그의 적수이던 왕건에 의탁하여 아들에 대한 복수를 꾀하였다(935). 이러한 정세 속에서 좁은 경주 지역을 중심으로 명목만을 유지하던 신라는, 그 마지막 임금인 경순왕이 고려에 항복함으로써 스스로의 운명을 결정짓고 말았다(경순왕 9년, 태조 18년, 935). 왕건은 이리하여 신라의 전통과 권위의 계승자로서의 지위를 확보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 다음해에 견훤을 앞장세운 고려의 군대는 후백제까지도 멸망시켰다(태조 19년, 936). 드디어 태조 왕건은 후삼국의 통일에 성공한 것이다. 아울러 그는 앞서 926년에 거란족의 침입을 받아 멸망한 발해의 유민을 따뜻하게 맞아들여 우대하는 정책을 펼침으로써, 후삼국뿐만이 아니라 발해의 고구려계까지를 포함하는 명실공히 민족을 통일한 왕조로서 고려가 우뚝 설 수 있도록 하였다.
태조 왕건은 후삼국의 혼란을 수습하고 새로운 통일 왕조를 건설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제까지 각 지역을 분할 점거하던 세력들이 소멸됨으로써, 한반도는 하나의 정부에 의해 통치를 받는 하나의 영토가 되었다. 후삼국시기 후백제의 영역에 들어 있던 이 지역 장성도,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한 이후 고려의 영토로 편입되었다. 당시 현재의 장성군 지역 안에는 3개의 군현이 설치되어 있었다. 장성군(長城郡)을 비롯하여 진원현(珍原縣)과 삼계현(森溪縣)이 그것이었다.
장성이 오늘날의 이름을 갖게 된 것은 고려시기에 들어와서의 일이었다. 잘 알려져 있듯이,백제시기 장성군의 명칭은 고시이현이었다. 그것이 신라 경덕왕대의 한화정책에 따라 갑성군으로 고쳐졌고, 고려왕조에 들어서 다시 장성군으로 개칭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고려시기의 장성군에는, 그같은 명칭의 변개를 훨씬 능가하는 보다 심각한 변화의 소용돌이가 휘몰아쳤다. 독립된 지방행정 단위로써의 지위가 격하된다고 하는, 보다 본질적인 측면에서의 지역 구조 개편이 중앙으로부터 강제되었던 것이다. 통일신라시기의 갑성군, 즉 장성군은 진원현과 삼계현을 영현(領縣)으로 거느리는 큰 고을이었다. 아마 오래 전부터 장성군이 주변을 아우르는, 말하자면 지역의 중심지로써 역할을 해 오고 있던 상황을 반영하는 지방행정조직이 아니었던가 싶다. 그런데 그러한 장성군이 이제 고려시기가 되면서 이웃의 영광군(靈光郡)에 소속된 일개 속군(屬郡)으로 격하되고 말았던 것이다. 국왕에 의하여 임명된 수령도 배치받지 못하는 초라한 군으로써, 영광군 수령(知靈光郡事)의 관할 아래에 들어가 그 통제를 감수해야만 하는 딱한 형편이 되었다. 그 동안 영현으로 거느리던 삼계현과 진원현마저 각각 영광군과 나주목(羅州牧)의 속현(屬縣)으로 빼앗긴 채, 주군(主郡)인 영광군의 수령과 향리를 상전으로 모셔야만 하는 최말단의 자그마한 행정단위로 전락하고 말았던 것이다.
따라서 당시 장성지역 주민들의 처지는 매우 비참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수령이 없는 가운데 지역의 유력자인 호장을 위시한 향리들의 통치에 내맡겨짐으로써, 그들의 거의 불법적이다시피 하는 자의적인 수탈을 피할 도리가 없게 되었다. 더욱이 거기에 주군(主郡)인 영광군의 수령과 향리들의 가렴주구까지 더해졌을 것이 틀림없는 상황이고 보면, 지역민들의 고통은 가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는 것이다. 장성 주민들이 그같은 속군현(屬郡縣)의 서러운 처지에서 조금이나마 벗어나게 된 것은, 200년에 가까운 세월이 흐른 뒤의 일이었다. 명종 2년(1172)에 생활고를 이기지 못하고 동요하던 민중들을 어루만지고자, 가장 가혹한 수탈에 시달리던 속군현지역에 감무(監務)를 파견함으로써, 자의적인 수탈을 다소나마 완화시키는 조치가 취해진 때문이었다.
장성군이 속군현으로 격하되는 사태가 빚어진 것은 후삼국시기의 상황 때문이었다. 신라말 견훤이 광주를 거점으로 삼아 나라를 세운 이후, 장성지역은 내내 후백제의 영역에 속해 있었다. 태봉 궁예의 예하 장수였던 왕건이, 나주지역을 점령하였을 때에도 그것은 매한가지였다. 당시 전남의 서남해안 일대는 거의가 왕건의 세력권 아래 들어가 있었다. 영산강․황룡강을 통하여 장성과 연결되어 있던 나주를 비롯하여, 아마도 이웃 서쪽의 영광군까지도 그의 영향권에 들어 있지 않았을까 짐작되고 있다. 하지만 그러는 중에도 장성만은 이웃 남동쪽의 광주․담양과 더불어 의연히 후백제의 영토로 남아 있었다. 나주를 전초기지로 삼은 왕건이 끊임없는 위협에도, 장성 지역은 변함없이 후백제에 통치 아래 놓여 있었던 것이다.
왕건이 나주를 근거지로 하여 후백제의 후방을 노리자, 견훤은 사위인 지훤(池萱)을 광주성주(光州城主)로 삼아 주둔시켰다. 자신이 처음 나라를 세운 거점이었던 광주가, 이제는 최대의 적인 왕건의 침략을 방어하는 전략상의 요충지가 된 셈이었다. 신뢰할 수 있는 심복이라 할 사위를 견훤이 그 책임자로 파견한 것은, 왕건의 북상을 저지하는 후백제 요충지 광주의 중요성을 말하여 준다. 뒤에 견훤의 셋째 아들 용검(龍劍)이 광주도독(光州都督)으로 임명되었던 것도 또한 그와 마찬가지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함은 더 이를 나위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장성은 그처럼 중요한 광주와 서북 방향으로 이어져 있는 인접 군이었다. 또한 광주에서 후백제의 수도인 전주로 가는 주요 통로에 위치하고 있기도 하였다. 핵심 요충지인 광주를 뒷받침해 주는 동시에 수도 전주와의 연결을 담보해 주는, 말하자면 배후의 인후에 해당하는 지역이 곧 장성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견훤 내지 후백제의 입장에서 보자면, 그러한 장성은 반드시 확보해 두지 않으면 안되는 지역이었다고 할 수가 있을 것이다. 후백제가 멸망할 때까지 장성은, 그 지배 아래 놓여 있지 않을 수가 없는 운명이었다고 하여 지나친 말이 아니었던 셈이다.
후삼국을 통일한 고려왕조의 치하에서, 장성군이 읍격(邑格)의 하강을 겪어야만 하였던 것은 위와 같은 사정에 따른 일이었다. 끝까지 후백제의 편에 서 있던 장성에 대한 고려왕조의 제재 조치였던 셈이다. 한편 이와 관련하여, 장성을 비롯한 옛 후백제지역의 주민이 고려시기 내내 차별을 받았을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어 눈길을 끈다. 이른바 ‘십훈요’에 근거한 주장이다. 하지만 실제로 그러하였던가에 관하여는 많은 의문이 있다.
십훈요는 고려 태조 왕건이 자신의 뒤를 이을 후대 왕들에게 남긴 열 조목의 유훈(遺訓)이었다. 세상을 뜨기 한 달 전(943년 4월), 대광(大匡) 박술희(朴述希)를 불러 신서(信書)와 더불어 전하였다고 한다. 고려의 역대 왕들로 하여금 준수하도록 당부한 일종의 ‘왕실가훈’이었던 셈인데, 그 중에서 우리 지역과 관련하여 주목을 받아온 것이 제8조의 일부 내용이다. 해당 부분을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차령(車嶺) 이남 및 금강(錦江)의 바깥은 그 지리적인 형세가 모두 배역의 방향으로 달리 므로 그 지역의 인심도 또한 그러할 것이다. 따라서 만약 그 아래 쪽 지역민들이 조정에 참여하여 왕후 국척과 혼인하고 국가권력을 장악하게 되면, 나라를 어지럽히거나 혹은 (앞서 후백제가 우리 고려에) 통합당한 원한을 품고 국왕이 거둥하는 길을 범하여 난을 일으키려 할 것이니비록 그 양민이라 할지라도 벼슬자리에 두어 일을 보도록 하지 아니함이 마땅하다.
고려시기에 차령산맥과 금강의 이남 즉 현재의 호남지역 주민들이 정치적으로 굉장한 차별을 받았을 것임을 암시하고 있다. 과연 그러하였을까?
잘 알려져 있듯이, 위 조항을 비롯한 십훈요의 내용 및 그것이 세상에 드러나게 된 경위를 둘러싸고 지금까지 수많은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처음 십훈요는 그 존재 여부마저 불분명한 상황이었다. 그러다가 전란(아마도 거란의 제2차 침입)의 소용돌이 속에서 그만 분실되고 말았는데, 뒤에 최제안(崔齊顔)이 최항(崔沆)의 집에서 발견하여 국왕(아마도 顯宗)에게 바침으로써 비로소 그 존재가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여기에서 왕실의 가훈이 최항의 집에 전해지게 된 내역이나 또 그것이 발견된 경위가 명확하지 않음으로 인하여, 일찍부터 십훈요 ‘위작설’ 내지 ‘변조설’이 나타나게 되었다. 최제안과 최항은 각각 최승로(崔承老)와 최언위(崔彦撝)의 손자로서, 경주최씨 다시 말하여 신라인의 후예였다. 따라서 후백제에 대하여 좋지 않은 감정을 지니고 있었을 이들에 의해, 제8조에서와 같이 후백제지역 주민(즉 호남지역민)을 차별하는 내용의 십훈요가 날조되기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그밖에도 위작의 근거로써 여러 가지 의문점들이 제시되고 있는데, 예컨대 신라말에 명성이 그다지 높지 않아 널리 알려지지도 않았을 도선(道詵)을 십훈요에서 높이 추앙하고 있다든지, 혹은 당시 고려인들 사이에 거란을 모방하는 풍조가 일지 않던 시기였음에도 십훈요에서 그것을 금지하고 있는 모순점이 지적되고 있으며, 나아가 위에서 제시한 제8조와 달리 태조의 곁에 최지몽(崔知夢 ; 靈巖)․박영규(朴英規 ; 昇州)․장화왕후 오씨(莊和王后 吳氏 ; 羅州) 등 전라도 출신의 인물들이 포진해 있었고, 또한 십훈요 발견자인 최제안의 조부 최승로가 성종에게 기나긴 상서문을 올리면서도 십훈요를 전혀 언급하지 않고 있는 문제 등이 거론되고 있다.
그렇지만 요즈음 위와 같은 십훈요 날조설에 수긍하는 연구자는 전혀 없다. 오히려 십훈요야말로 태조 왕건의 정신세계를 보여 주는 중요한 자료라는 의견에 더욱 동조하는 분위기이다. 그리하여 십훈요를 면밀히 분석함으로써, 태조의 사상을 이해해 보려는 연구 또한 적지 않다. 그러나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십훈요의 등장 경위나 그 내용에 미심쩍은 부분이 많은 것도 사실이다. 위조설이 제시하고 있는 의문점 가운데 상당 부분이 아직 해결되지 않고 있기도 하다. 안이하게 위조설을 부정하는 데 열중하기보다는, 다시 한번 여러 의문점들을 재검토해 볼 시점이 되지 않았는가 여겨진다. 특히 십훈요가 처음 세상에 알려졌다고 하는 현종대의 정치상황에 대한 깊은 검토가 필요할 것으로 판단된다. 그렇게 하는 것이 고려초기의 역사를 이해하는 데 더욱 기여할 수가 있지 않을까 헤아려지는 것이다.
십훈요 가운데 우리 지역과 관련하여 제8조가 눈길을 끌어 왔다 함은, 앞서 언급한 대로이다. 이 조항은 그 내용의 특이성으로 인하여 위작설 내지 변조설의 유력한 근거로 제시되곤 하여 왔다. 그런데 만약 조작된 것이 아니고 태조의 유훈이 맞다고 하였을 경우에는, 이를 어떻게 이해하여야 할까? 풍수지리상으로 볼 때 금강(錦江)은 개경(開京)을 겨누는 활(弓) 모양으로 배역(背逆)의 형세이며, 호남의 섬진강․영산강․만경강․동진강 등도 동남․서남 혹은 서쪽으로 각기 흩어져 흘러가 불길한 지세라고 한다. 그런데 이는 호남에만 해당하는 것은 아니며, 영남의 경우에도 그것은 매한가지라는 지적이 있다. 영남의 강과 산들도 개경을 등지고, 서남 혹은 정남․동남으로 달아나는 배역의 형세임에는 다름이 없다는 것이다. 고려시기에 남방의 ‘삼대배류수(三大背流水)’로서, 영산강․섬진강과 함께 낙동강을 꼽았던 것도 그러한 증거라고 할 수가 있을 것이다. 왕건이 풍수지리를 내세워 호남지역 주민에 대한 차별을 정당화하려 하였던 것은, 이론을 편파적으로 적용하였다는 혐의를 벗을 수가 없다고 하여도 지나치지 않을 것으로 믿는다.
그렇다면 왕건이 그처럼 무리한 주장을 펴면서까지 호남지역민들을 견제하려 한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말할 것도 없이 그것은 후삼국시기의 치열한 쟁패전에서 유래한 것이었음이 분명하다. 당시 왕건은 후백제로부터 수많은 시달림을 받았다. 대구 팔공산전투에서는 후백제군의 포위망에 갇혀 목숨을 잃을 뻔한 위기도 있었다. 그가 후백제로부터 받았을 중압감을 떠올리면, 후백제인들에 대해 그와 같이 경계심 내지 증오심을 품는 것이 당연한 일인 듯 보이기까지 한다. 후백제지역 주민들이 통합당한 원한을 품고서 변란을 꾀할지도 모른다는 그의 훈계가, 그리 잘못된 판단으로만 여겨지지를 않는 것이다. 훗날 거란의 제2차 침입을 피하여 남으로 피난 중이던 현종 일행이, 옛 백제땅이라 하여 전주(全州)를 들르지 않고 그냥 지나쳐야만 하였던 것도, 태조 왕건 이래 고려왕실의 후백제지역에 대한 경계심이 어떠하였는지를 잘 보여 주고 있다.
그런데 여기에서 한 가지 떠오르는 의문은, 그렇다면 과연 고려왕조에서 실제로 호남 출신들을 정치적으로 차별하였던가 하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우선 십훈요 제8조의 ‘차령 이남 및 금강 바깥’이 구체적으로 어느 지역을 지칭하는 것인지 살펴 볼 필요가 있을 듯싶다. 언뜻 생각하기에 이 구절이 호남지역 전체를 가리키는 것이 아닌가 오해하기 쉬운데,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장화왕후 오씨 가문을 비롯하여 최지몽․박영규 및 선승(禪僧) 형미(逈微 ; 武州, 康津)와 윤다(允多 ; 羅州)․경보(慶甫 ; 靈巖) 등, 왕건의 측근 인물들 중에서 쉽게 호남 출신이 찾아지는 것을 보면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한편 그와 반대로 금강과 차령산맥의 사이에 있는 좁은 지역, 말하자면 현 충남의 일부 지역만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려는 견해도 없지 않다. 하지만 이것은 문맥을 왜곡하여 번역한 데서 유래한, 수긍하기 어려운 주장이다. 가장 널리 받아들여지는 해석으로서, 문제의 구절이 옛 후백제지역을 지칭한 것이라는 설이 있다. 나주 등 일찍부터 왕건 자신에게 협조적이던 지역 출신의 인물들까지 견제하고 소외시켜야 할 까닭이 없었으리라는 점에서, 일리있는 의견이 아닐 수 없다. 실제로 왕건의 곁에서 활동하였던 장화왕후 오씨 가문을 비롯하여 최지몽․형미․윤다․경보 등이 모두 나주지역 출신 내지 그와 연고를 맺고 활동한 인물들이었던 점도, 그같은 해석을 뒷받침하는 유력한 근거라 할 것이다. 나주가 아닌 승주 출신의 박영규 정도가 그 예외에 해당하는 셈인데, 견훤의 사위로서 후백제가 망하기 직전 견훤의 뒤를 이어서 고려로 귀부해 온 그를 최지몽 등과 동일하게 취급할 수는 없을 것이다. 요컨대 십훈요 제8조에 나오는 ‘차령의 이남 및 금강의 바깥’ 지역이란, 광주를 비롯한 전남의 북동부 내륙지방과 전북 일대 등 끝까지 후백제 영토로 남아 있던 지역을 가리킨 것으로서, 나주를 중심으로 한 전남의 서남해안 지역 일대는 거기에서 제외된다고 봄이 온당하지 않을까 헤아려지는 것이다.
이제 마지막으로 고려시기에 실제로 호남 출신, 구체적으로 나주 등 전남의 서남해안 일대를 제외한 옛 후백제지역민들이, 정치적으로 차별받은 적이 있었던가에 관하여 살펴보도록 하겠다. 광주와 전주를 위시한 전남의 북동부 내륙 및 전북 지역 출신이, 관직에 진출하기 시작한 것은 대략 4대 임금인 광종대로부터였다. 광종은 왕권을 강화하고자 강력한 개혁을 추진하였던 것으로 유명한 국왕이다. 그는 개국공신을 비롯하여 개혁에 저촉되는 구세력을 과감히 숙청하는 한편 시위군을 강화하고 과거제를 시행하면서 신진세력을 발탁하였는데, 그러는 과정에서 중국으로부터의 귀화인(歸化人)과 함께 후백제계와 발해계의 인물들이 다수 중앙에 진출하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말하자면 광종의 개혁정치를 계기로 옛 후백제지역 출신이 관직에 나아가게 되었다고 할 수가 있겠는데, 유방헌(柳邦憲 ; 全州)․김심언(金審言 ; 靈光)․장연우(張延祐 ; 高敞)․전공지(田拱之 ; 靈光) 등이 그 대표적인 인물들이었다. 이들은 광종~성종의 대에 과거급제 등의 경로를 거쳐 중앙에 진출하여, 큰 활약을 벌이면서 재상에까지 오르기도 하였다.
태조 왕건이 후삼국을 통합한(太祖 19, 936) 이래 광종 초기까지 대략 30년 가까운 기간 동안, 신라계와 나주지역 출신의 활발한 진출에 비해 후백제계는 상대적으로 차별과 냉대에 시달렸을런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한 세대가 흘러 적어도 광종의 개혁정치가 시작된(光宗 7, 956) 이후에는, 이들이 중앙에 진출하는 데 별다른 제약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앞서 제시한 인물들이 그 증거라고 할 수가 있겠거니와, 고려시기의 지역별 과거급제자 숫자에 대한 조사에서도 그것을 확인할 수가 있다. 고려전기 즉 무신난(1170) 이전만 놓고 보더라도, 광종(949~975)~정종(1034~1046)의 시기에는 경기도(27%)의 다소 우세 속에 경상도(24.3%)와 전라도(24.3%)가 똑같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또한 문벌귀족이 번성하였던 문종(1046~1083)~의종(1146 ~1170)의 시기에는 개경을 포함한 경기도가 일방적인 우위(30.8%)를 보이는 가운데에서도, 경상도(16.6%)와 전라도(14.8%)는 비슷한 비율로 과거급제자를 배출하고 있었다. 차별이 있었다면 상대적으로 더욱 심했을 법한 고려전기에도, 옛 후백제지역을 포함하는 호남지역 출신이 유별나게 정치적으로 소외되었음을 암시하는 증거는 찾아 볼 수가 없는 것이다.
십훈요는 그것이 세상에 알려지게 된 경위나 내용에서 신빙성을 의심받고 있는 자료이다. 그렇지만 설령 그것이 태조 왕건이 남긴 유훈이 맞는다고 할지라도, 그것을 근거로 고려시기에 호남지역민들이 정치적으로 차별받았다고 한다면, 그것은 역사적 진실을 무시한 거짓 주장이라고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현대에 들어 정통성이 결여된 정권에 의해 조작되고 부풀려진 지역간의 갈등이, 마치 과거에서부터 그러하였던 것처럼 그 역사적 근거로서 십훈요를 들먹이는 양태는 이제 사라져 마땅한 것이다.
고려의 후삼국 통일 이후 장성을 비롯하여 광주와 담양 등 옛 후백제에 속해 있던 전남의 북동부지역은 한동안 침체기를 맞이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장성군이 영광군의 속군으로 격하되고 삼계현과 진원현이 각각 영광군과 나주목의 속현으로 이속된 것도, 그같은 후백제지역민에 대한 견제의 산물이었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지역에 대한 냉대는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곧이어 광종의 개혁정치가 시작되었고, 그와 함께 특정 지역에 대한 소외정책도 차츰 사라져 가게 되었던 것이다.
(장성군청 홈페이지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