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성이 낳은 청백리, 삼마태수로 불린 지지당 송흠
송흠의 또 다른 이름, 삼마태수
청백리는 우리나라를 비롯한 동아시아 유교문화권에서 깨끗한 공직자를 지칭할 때 사용하는 말이다. 청백(淸白)은 ‘청렴결백’하다는 말의 약칭인데, 가장 이상적인 관료의 미덕으로 여겨진다. 그런데 청백리는 부정부패하지 않고 그냥 깨끗한 것에 그치지 않는다. 어짐과 의로움(仁義)이 넘치어야 청백리다. 백성을 내 처자같이 사랑하고, 나랏일을 정의롭게 하여 백성들의 신뢰를 얻도록 하는 관료가 진짜 청백리다.
청백리가 되기 위해서는 동료들의 평가, 사간원, 사헌부, 홍문관과 의정부의 검증 절차 외에도 2품 이상의 당상관과 사헌부, 사간원의 최고 수장들이 추천, 심사하여 통과되어야만 했다. 어려운 심사를 거쳐 청백리로 선정되는 것 자체가 큰 영광이었는데, 송흠은 그 청백리에 다섯 번이나 뽑힌다.
송흠(宋欽, 1459~1547)은 보성군수를 시작으로 옥천·여산군수 등 여덟고을의 수령을 지낸다. 그는 부임지에 갈 때마다 다른 사람과는 달리 체면이나 위풍을 도외시한 채 언제나 말 세필만 받았다. 당시 한 고을의 수령이 부임지로 나갈 때나 임기가 끝날 때 감사의 표시로 보통 그 고을에서 가장 좋은 말 여덟 마리를 바치는 것이 관례로 되어 있었다. 그런데 송흠은 새로 부임해 갈 때 본인과 어머니, 아내가 탈 말 3필만 받았다. 그런 송흠을 고을 사람들은 삼마태수(三馬太守)라 불렀다.” 삼마태수, 이는 청백리 송흠의 또 다른 이름이다. 송흠이 고을 수령으로 부임하거나 퇴임할 때 말 세필만 받았다는 이야기는 다산 정약용이 쓴 『목민심서』에도 소개되어 있다. 목민관들이 모범으로 삼아야 한다는 이유 때문이었을 것이다.
송흠이 삼마태수로 거듭나게 된 계기가 『지지당유고』에 나온다.
초당 허엽이 말하기를 응교 최부는 나주 사람이요. 정자 송흠은 영광사람이다. 같은 시대(성종)에 옥당에서 다 같이 휴가를 얻어 고향에 내려갔는데, 서로의 거리가 15리였다. 하루는 송흠이 최부의 집에 찾아가 이야기를 하는 사이에, 최부가 말하기를 “자네는 어떤 말을 타고 왔는가.”라고 물었다. 송흠은 역마라고 대답하였다. 최부가 말하기를 “나라에서 역마를 준 것은 그대의 집까지였는데 어찌 역마를 타고 왔단 말인가?” 하고 조정에 돌아온 즉시 그 뜻을 아뢰어 파직시켰다. 송흠이 최부에게 와서 사직 인사를 하니 “자네는 아직 젊네. 앞으로도 마땅히 조심하여야 할 것이네.” 하였다.
성종 말년 송흠은 최부와 홍문관에서 함께 근무했다. 최부는 송흠의 5년 선배였지만, 과거는 10년 빨리 합격했다. 최부는 정4품 응교(應敎)였고, 송흠은 정9품 정자(正子)였다. 말단 정9품이던 송흠은 초임발령지에서 동향 선배를 만났으니 의지하는 바가 컸을 것이다. 둘이 휴가를 받았고, 송흠은 나주에 사는 최부에게 인사차 들렀다가 큰 교훈을 얻게 된 것이다. 이후 송흠은 다섯번이나 청백리에 선발된다. 송흠이 최부의 멘토였던 셈이다.
삼마태수라 불린 송흠에 대해 조선왕조실록에 사관(史官)은 다음과 같이 평했다. “송흠은 청결한 지조를 스스로 지키면서 영달을 좋아하지 않았다. 어머니를 봉양하기 위해 걸군(乞郡, 군수를 간청함)하여 10여 고을의 원을 지냈고 벼슬이 또한 높았지만, 일찍이 살림살이를 경영하지 않아 가족들이 먹을 식량이 자주 떨어졌었다. 육경(六卿, 6조판서)에서 은퇴하여 늙어간 사람으로는 근고(近古)에 오직 이 한 사람 뿐이었는데…… 도내에서 재상이 된 사람 중에 소탈하고 담박한 사람으로는 송흠을 제일로 쳤고, 박수량을 그 다음으로 친다고 하였다.”
그가 호로 삼은 지지당(知止堂)의 뜻이 멋지다. ‘지지(知止)’는 ‘멈추는 것을 안다’는 뜻이다. 『노자』에 “족함을 알면 욕되지 않고, 멈춤을 알면 위태롭지 않다(知足不辱 知止不殆)”라 하였고, 『대학』에도 “멈춤을 알아야 뜻을 정할 수 있다(知止而后 有定)”이라 하였다. 지지당 송흠은 멈출 줄 아는 것을 신조로 삼고 살았다. 오늘 그가 존경받는 이유다.
삼마태수로 불린 지지당 송흠이 온몸으로 실천했던 가치는 오늘도 여전히 유효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