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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기2566 (2022)년10월 서울구치소 최고수 상담 및 교리 진행
< 라즈니쉬 오쇼의 반야심경 The Heart Sutra>
★지식의 부정(1).★
▷ 일 시 : 불기2566 (2022)년10월17일(월) 오후1:00~3:00
▷ 장 소 : 서울구치소 소법당
지도법사: 대한불교조계종 전문포교사 보광-조철주
*상구보리 하화중생 *
2022년10월17일(월) 서울구치소
최고수 정기 신앙상담 및 교리를 진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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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귀의와
한글 반야심경 봉독을 하고,
자리에 앉아, 상담을 통한 情談과
法談을 나눈 오붓한 시간을 갖었으며
사홍서원을 끝으로 오늘의 상담교리를 회향했다
참으로 많은 것을 배우고 담아가는
귀한 시간이었음에 감사합니다
나무석가모니불, 나무석가모니불, 나무시아본사 석가모니불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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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리 내용-< 라즈니쉬 오쇼의 반야심경 The Heart Sutra> 90~99p
★지식의 부정.★ (1)
오, 사리푸트라여,
여기에서는 형상(形象)은 공(空)이며,
공(空)은 형상이다.
공(空)은 형상과 다르지 않고
형상은 공(空)과 다름이 없나니,
무릇 형상을 가진 모든 것은 공(空)이며,
공(空)한 것은 모두가 형상이니라.
감각, 지각, 충동, 인식 작용도
이와 같느니라.
오, 사리푸트라여,
여기에서 보면 일체의 법(法)이
공(空)이라는 특징을 갖고 있느니라.
그것들은 생겨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으며,
더럽지도 않고 청정하지도 않으며,
부족하지도 완전하지도 않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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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은 화근이다. 지식은 재앙이며 암세포이다.
인간이 전체 (the whole)와 분리된 것은 지식 때문이다. 지식은 분리를 초래한다.
산에서 한 송이 야생화(生花)를 볼 때 그대는 그 꽃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
마음은 그 꽃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 마음은 침묵을 지킨다.
그대는 이 야생화를 눈여겨보고 관찰하지만 아무런 지식도 떠오르지 않는다.
다만 경이로움과 신비감이 있을 뿐이다. 한송이 꽃이 거기에 있고 그대 또한 거기에 있다. 이 경이감을 통하여 그대는 야생화와 분리되지 않는다. 그대와 꽃이 하나로 이어진다.
그러나 이 꽃을 장미나 금잔화 또는 다른 어떤 꽃이라고 분별하는 지식이 개입되면 ,
이 지식 자체가 그대와 꽃을 단절시킨다.
꽃은 저기에 있고 그대는 여기에 있다.
그 사이에는 아무런 다리도 없다. 그대는 이미 이 꽃을 알고 있다.
이런 지식이 간격을 만들어 낸다. 아는 것이 많을수록 간격이 벌어진다.
그리고 이는 것이 적을수록 간격은 줄어든다.
만일
그대가 아무것도 모르는 순간 속에 있다면 거기엔 단절이 없다.
그대와 꽃 사이에 다리가 놓인다.
그대는 한 남자 또는 여자와 사랑에 빠진다.
그렇게 사랑에 빠진 날에는 단절이없다.
오직 경이감과 스릴, 짜릿한 전율과 엑스터시(ecstasy)가 있을 뿐이다. 거기엔 지식이 없다. 그대는 이 여자가 누구인지 모른다. 지식이 없으면 그대를 분리시키는 것도 없다.
그래서 사랑의 첫 순간이 그토록 아름다운 것이다.
그러나 24시간 동안만 그 여성과 지내고 나면 지식이 생긴다.
이제 그대는 그 여성에 대해 어떤 관념을 갖게 된다.
그대는 그녀가 누구인지 안다. 그녀에 대한 이미지가 형성된다.
24시간 동안 하나의 과거가 창조되었다. 그 24시간이 마음속에 여러 가지 흔적을 남겼다.
이젠 그 여성을 보아도 예전 같은 신비감이 없다.
그대는 언덕에서 내려왔다. 절정의 순간이 사라진 것이다.
이것을 이해하면 많은 것을 이해할 수 있다.
지식이 분열과 단점을 초래한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것은
곧 명상의 핵심적인 비밀을 이해하는 것과 같다.
명상은 지식이 부재(不在)하는 상태다.
명상은 지식에 물들지 않은 순수한 공간을 말한다.
그렇다, 인간이 지식 때문에,
지식의 열매를 따 먹었기 때문에 타락했다는 성경의 이야기는 진실이다.
이 점에서는 세상의 어떤 경전도 성경을 능가하지 못한다.
성경의 이 우화는 모든 우화의 결정판이다.
이만큼 심오한 경지와 통찰을 보여주는 우화는 없다.
인간이 지식 때문에 타락했다는 이 우화는 비논리적으로 보인다.
논리란 곧 지식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지식을 구성하는 기반 전체가 논리로 이루어진다.
논리가 인간을 타락시킨 근본 원인이다.
따라서 이 우화는 비논리적으로 보인다.
절대적으로 논리적이고 정상적인 사람, 언제나 정상적인 사람,
자신의 삶에서 어떠한 비논리도 허용하지 않는 사람은 미치광이다.
정상(正常)은 비정상(非正常)에 의해 균형을 이룰 필요가 있다.
논리는 비논리에 의한 균형을 필요로 한다. 서로 반대되는 것들이 만나 균형을 이룬다.
철저하게 합리적인 것밖에 모르는 사람은 비합리적이다. 그는 많은 것을 놓칠 것이다.
실제로 그는 아름다운 모든 것. 진실된 모든 것을 계속 놓쳐 버릴 것이다.
그는 하찮은 것들을 긁어 모을 것이며 그의 인생은 세속적인 삶이 될 것이다.
그는 세속적인 인간이 될 것이다.
이 성경의 경우에는 엄청난 통찰력이 담겨 있다.
인간이 지식 때문에 타락한 이유는 무엇인가?
왜냐하면 지식은 단절을 초래하기 때문이다.
지식은 나와 나를 만들어 낸다. 지식은 주제와 객체, 아는 자와 알려지는 것,
관찰자 관찰되는 것이라는 분리를 만들어 낸다.
기본적으로 지식은 정신분열증적이다. 지식은 분열을 낳는다.
이렇게 되면 거기에 다리를 놓을 방법이 없다.
유식한 사람일수록 비종교적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교육을 많이 받은 사람일수록 산을 향해 나아갈 가능성이 적어진다.
예수의 말은 옳다.
오직 어린아이들만이 나의 왕국에 들어갈지어다.
어린아이에게는 있는데 그대는 잃어버린 그 특성이란 무엇인가?
어린아이는 지식이 개입되지 않은 순진무구함을 갖고 있다.
그는 경이감으로 충만하다. 그의 눈은 투명하기 이를 데 없다. 그는 깊이 들여다본다.
그에게는 편견이나 선입견이 없다. 그는 판단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관념을 투영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는 '여여(如如, that which is)한 진리'를 알게 된다.
앞에서 우리는 실체 (reality : 이 강의에서 오는 reality' 라는 단어를 두 가지 의미로 쓰고 있다. 하나는 인간의 인식 속에 들어와 있는 실체이며, 다른 하나는 우리의 인식과 무관하게 존재의 궁극적 실상을 이루는 실체이다. 문맥에 따라 이 "reality'라는 단어의 뜻을 달리 파악해야 한다)와 진리(truth)의 차이점에 대해 말했다.
▶아이는 진리를 알지만 그대는 오직 실체만을 안다.
실체는 그대가 투영과 욕망, 생각에 의해 자신의 주변에 창조해낸 것이다.
실체는 진리에 대한 그대의 해석이다. 진리는 단순히 여여(如如)한 것이다.
그러나실체는 그대가 이해한 내용이다. 그것은 진리에 대한 그대의 관념이다.
실제는 사물로 구성되며, 그 모든 사물이 분리되어 있다.
반면, 진리는 오직 하나의 우주적 에너지로 이루어진다.
진리는 '하나 (oneness)로 구성되지만 실제는 다수(many ness) 로 구성된다.
실체는 군중이지만 진리는 통합이다.
경전으로 들어가기 전에 지식은 화근이다' 라는 이 말을 토대로 삼아야 한다.
크리슈나무르티 (J. Krishnamurti)는 '부정하는 것은 침묵이다' 라고 말했다.
무엇을 부정한단 말인가? 지식에 대한 부정, 마음에 대한 부정,
그대의 내면을 점유하고 있는 사념에 대한 부정을 말한다.
이것은 그대 내면에 아무것에도 점유되지 않은 순수한 공간을 창조하기 위함이다.
어떠한 것에도 점유되어 있지 않을 때 그대는 전체(the whole)와 조화를 이룬다.
그러나 무엇인가에 점유되어 있을 때 그대는 전제와의 조화를 잃어버린다.
그대가 침묵의 순간에 이를 때마다 거기에는 지극한 기쁨이 있다.
그 순간에 삶이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그 순간에 형언할 수 없는 숭고함이 삶을 찾아온다. 그 순간에 삶은 하나의 춤이 된다.
그 순간에는 설령 죽음이 온다 해도 그 죽음은 하나의 춤이요 축제가 될 것이다.
그 순간은 오로지 기쁨만을 안다. 그 순간은 넘치는 즐거움이며 지복으로 충만하다.
지식은 부정되어야 한다.
그러나 내가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크리슈나무르티나 붓다가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지식을 부정해서는 안 된다.
만일 내 말을 듣고 지식을 부정한다면 그대는 자신의 지식은 부정하겠지만,
내 말을 그 자리에 대신 채워 넣는다. 내 말이 다시 그대의 지식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이 부정이 마음으로부터 나와서는 안 된다. 마음은 아주 교활하고 속임수에 능하다.
마음의 속임수에 넘어가면 내가 말한 모든 것이 그대의 지식이 되어버리고,
그대는 그것에 매달리기 시작한다. 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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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는 낡은 우상(偶像)을 버리고 그 자리에 새로운 우상을 세워놓는다.
그러나 이것은 새로운 언어와 관념, 새로운 사념을 가지고 벌이는 똑같은 게임일 뿐이다.
게임은 여전히 똑같이 진행된다. 그렇다면 어떻게 지식을 부정할 것인가?
하나의 지식을 부정하기 위해 다른 지식을 끌어들여서는 안된다.
다만 지식이 단절을 초래한다는 사실을 깊이 들여다보라.
이 사실을 강렬하고 총체적으로 주시하라. 이것만으로 충분하다.
다른 지식으로 대체해서는 안 된다.
이 강렬한 주시는 불이다.
이 강렬함이 그대의 지식을 태워 재로 만들것이다. 이 강렬함만으로 충분하다.
이 강렬함이 바로 통찰(insight)이라고 알려진 것이다.
이 통찰은 그대의 지식을 태워 버릴 것이며,
그 지식은 다른 지식으로 대체되지 않을 것이다. 이때 거기에 공(空)이 있다.
수냐타(shunyata)가 있다. 거기에 무(無)가 있다.
왜냐하면 아무 내용물도 없기 때문이다.
여기에 오염되지 않고 왜곡되지 않은 진리가 있다.
그대는 내가 말하는 것을 직접 알아야 한다. 내 말을 통해 지식을 습득하지 말라.
날마다 이 자리에 앉아서 내 말을 들을 때에는 지식을 긁어모으지 말라.
지식을 쌓아 두려 하지 말라. 내 말을 듣는 것은 통찰에 관한 실험이 되어야 한다.
강렬함과 전체성을 가지고 내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가능한 한 깨어 있는 의식으로 내 말을 들어라.
그 `깨어 있음 (awareness) 안에서 그대는 핵심을 볼 것이다.
그 봄 (seeing) 자체가 이미 변형이다.
보고 나서 무엇인가 다른 것을 해야 하는 것이 아니다. 봄 자체가 변형을 불러온다.
만일 어떤 노력을 필요로 한다면
그것은 그대가 핵심을 놓치고 있다는 사실을 증명할 뿐이다.
그대가 내일 나를 찾아와서 저는 지식이 화근이며 단점을 초래한다는 것을 이해했습니다. 이제 어떻게 하면 지식을 버릴 수 있겠습니까?" 하고 묻는다면 그대는 요점을 놓친 것이다.
'어떻게'라는 문제가 떠오르는 한 그대는 핵심을 놓친 것이다
내말을 올바로 이해했다면 '어떻게' 라는 문체는 떠오르지 않는다. ‘
어떻게 라고 보는 것은 더 많은 지식을 요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어떻게 는 방법과 테크닉에 대한 요구이며, '무엇을 해야 합니까 하는 물음이다.
통찰만으로 충분하다. 동찰은 어떠한 노력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통찰의 불은 그대 안의 모든 지식을 태우고도 남는다.
핵심을 보라. 이것만으로 충분하다.
내 말을 들을 때에는 나와 함께 존재하라.
나는 그대가 순수한 공간속으로 들어가는데 도움을 주려고 애쓰고 있다.
내 말을 들을 때에는 내 손을 잡고 그 공간 속으로 들어가라 내가 말하는 바를 직접 보라.
그대의 주장을 일으키지 말라 '예'라고 말하지 말고 아니오' 라고도 말하지 말라.
찬성하지도 말고 반대하지도 말라. 다만 이 순간에 나와 함께 존재하라.
그러면 돌연 통찰이 거기에 있다.
내 말을 주의 깊게 들으면... 이 '주의 깊게' 라는 말은 집중을 뜻하지 않는다.
내가 말하는 주의 깊음(attention)' 이란 둔한 마음이 아니라
각성된 의식으로 귀를 기울이라는 뜻이다.
주의 깊게 들을 때 그대는 지성과 생기(aliveness)를 찾고 듣는다.
이때 그대는 활짝 열려 있다. 지금 여기에 나와 함께 존재한다.
이것이 내가 말하는 주의 깊은 (attention) 의 뜻이다.
주의 깊게 들을 때 그대는 다른 곳으로 가치 않는다. 오직 지금 여기에 있다.
내가 말하는 내용과 그대가 이미 지니고 있는 생각들을 비교하지 않는다.
그대는 결코 비교하거나 판단하지 않는다. 내면에 어떤 판단도 일어나지 않는다.
내 말이 옳은지 그른지, 얼마나 옳은지 판단하지 않는다.
이제 나는 한 구도자와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는 구도적인 자세를 갖고 있었으나 지식이라는 한 짐을 짊어지고 있었다.
내가 말하는 동안 그의 눈은 눈물로 가득 찼다.
그의 가슴이 막 열리려 하고 있었다. 97
그런데 그때 마음이 개입되면서 그 순간의 아름다움이 산산히 부서지고 말았다.
그는 가슴을 향해 이동하고 있었으며 막 열리려 하고 있었다.
그런데 즉각 마음이 파고 들어왔다.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 같았던 눈물이 사라졌다.
글썽거리던 눈물이 말라 버렸다.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나는 그가 동의할 수 없는 말을 했던 것이다.
그때까지 그는 내 말에 동의하고 있었다.
그런데 내가 그의 유대적인 배경,
카발라 (Kabbala : 유태교의 신비주의 전통)에 어긋나는 말을 하자 에너지 전체가 바뀌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모두 다 옳은 말씀입니다.
그러나 신에게 아무런 목적도 없다는 말씀,
존재가 아무런 목적없이 존재한다는 말씀에는 동의할 수 없습니다.
카발라에서는 '삶에는 분명한 목적이 있다. 신은 목적을 지향한다.
신은 우리를 어떤 목적지로 인도하고 있다.
분명한 목적지가 있다. 이렇게 정반대로 말합니다."
그 순간에 그는 핵심에서 빗나갔다. 비교(比較)가 들어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이런 상황을 자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카발라가 나와 무슨 상관인가? 나와 함께 있을 때에는
카발라, 요가, 탄트라 등에 관한 모든 지식을 제쳐 두어야 한다.
나와 함께 있을 때에는 그저 나와 함께 존재하라.
만일 전체적으로 나와 함께 존재한다면 지금 나는 내 말에 동의하는 상태를 말하지 않는다. 이것을 명심하라. 나는 그대가 내 말에 동의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여기에 동의나 반대의 문제는 없다.
한 송이 장미꽃을 볼 때 그대는 그 꽃에 동의하거나 반대하는가?
아름다운 석양을 바라볼 때 그대는 석양에 동의하거나 반대하는가?
밤하늘에 떠오른 달을 볼 때 그대는 그냥 달을 볼 뿐이다.
그대는 달을 보거나 보지 않거나 둘 중 하나다. 거기에 동의나 반대의 문제는 없다
그런 식으로 나와 함께 있어라. 이것이 스승의 곁에 존재하는 방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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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출처: 오쇼라즈니쉬 강의(손민규 옮김 ) 『반야심경 』 초판 2쇄; 서울:태일출판사,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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