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유일의 생존한 화폐 영정 작가 이종상 화백-
2022년정초인 1월 6일, 『광이문예』 기순 회장, 영 균 총무, 갑수 홍보임원은 일랑(이종상 화백)을 만 나기 위해 종로구 평창동(平倉洞)으로 향하였다. 이곳은 미술관들이 연이어 있는 능선까지 올라가 면 그 다음부터는 편안한 발걸음으로 수많은 미술 작품을 만날 수 있게 된다. 미술관은 그 미술관을 만든 사람의 영혼이 담겨 있는 곳이다. 미술관들이 운집한 곳에 평창동 가 나아트센터는 언덕 중턱에 서울옥션센터와 나란 히 있다. 전형적인 모더니즘 건축물로 외장이 너 무 밋밋하다는 느낌마저 든다.
그러나 막상 미술관으로 들어가면 적잖이 길고 복잡한 동선으로 조 금은 신비로운 느낌마저 주기도 한다. 평창동의 경치가 내다보이는 가나아트센터 3층 커피숍에 서 ‘국내 유일의 생존한 화폐 영정 작가 이종상 화 백’을 직접 만나는 시간이다. 서울 종로구 평창동 가나아트센터에서 이종상 (李鍾祥·85) 서울대 명예교수를 만났다. 팔순을 훌쩍 넘겼지만, 무술(유도)로 다져진 다부진 어깨 가 도드라져 보이는, 180cm가 넘는 키의 풍채 좋 은 노신사였다.
일랑 화백은 “서울의 번잡함에서 벗어난 자하문밖 동네 특유의 매력에 시나브로 모여든 화가, 조 각가, 소설가, 음악가 등이 이곳에 정착했다”고 했 다. 초창기에 화백은 이어령(李御寧) 전 문화부 장 관과 함께 자문밖 문화포럼을 이끌었다. 화백은 “ 자문밖문화포럼 구성원들은 평창동 일대의 자문 밖이 지닌 예술적 가치에 주목했다”며 “화가의 화 실을 미술관으로 바꿔 이 일대를 파리의 몽마르 트르와 같은 문화적 유산으로 탈바꿈시키려는 ‘자 문 밖 미술관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있다”고 했다.
서울대 회화과에 진학한 일랑은 장욱진(張旭 鎭)과 권옥연(權玉淵), 손동진(孫東鎭) 교수의 강의를 들으며 맹목적인 서구 추종보다 우리의 것을 배워야겠다고 결심한다. 이때부터 그는 월전(장 우성), 산정(서세옥), 남정(박노수)에게 배우기 시 작했고, 학교 밖에서는 청전(이상범), 이당(김은 호) 선생을 찾아 동양화를 배우기 시작했다.
일랑 화백은 고구려·발해·고려의 미술에 천 착하면서, 1977년 광개토대왕의 ‘국가표준영정’ 을 맡아 그렸다. 그가 그린 광개토대왕은 면류관을 쓰고 용포( 龍袍)를 입은 모습이 아니라 비늘갑옷에 투구를 쓰고 칼을 찬 장수의 모습이었다. 물론 이 그림에 서 이 화백은 고구려 고분에서 찾아 연구한 벽화 와 북방 유목민의 생김새, 그들의 생활상을 반영 해 사실적으로 그렸다.
일랑 화백은 준비된 표준영정 제작자였다. 서 울대 미대에서 동양화를 배우면서 국가표준영정 을 그리는 기초를 닦았다. 원래 서양화를 배우려 고 서울대 미대에 들어갔다가 대학 2학년 때 동양 화로 돌아섰다. 그가 동서양화를 자유자재로 넘 나들 수 있는 힘이 이때 생겼다. 그렇게 그는 월전 장우성(月田 張遇聖) 화백의 서울대 마지막 제자가 되었다. 동양화로 전공을 옮겼지만 화백은 남들처럼 사 군자(四君子)나 치는 데서 머물지 않고, 우리 문화 의 원류를 찾는 시도를 했다. 그
것은 역사적 인물 을 그리는 영정 작업이었다. 일랑 화백은 2021년 현재 문화체육관광부가 관장하는 정부표준영정 98점 가운데 신사임당모자상을 비롯해 광개토대왕, 우륵, 원효, 김홍 도, 장보고 등 7점을 그렸다. 오원 장승업(吾園 張 承業) 전시회를 본 임권택(林權澤) 감독이 영화 〈 취화선〉을 제작할 때 자문을 했고, 임 감독은 이 작품으로 ‘칸 영화제’에서 감독상을 받았다. 임 감 독은 일본인 미학자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가 ‘크다’는 의미의 ‘한’을 식민사관적으로 ‘한(恨)’이 라고 해석한 것에 기초해 〈서편제〉를 제작했다 낭 패를 겪었으나, 〈취화선〉으로 명예를 회복할 수 있었다. -
1997년 프랑스 문화부 초청으로 루브르박물 관에서 개인전을 가졌습니다. “루브르박물관 카루젤 샤를르 5세 홀에서 5개 월간 설치벽화 개인전을 열었습니다. 세로 6m에 가로 71m짜리 〈마리산〉이란 대형 벽화예요. 프 랑스 함대가 쳐들어왔던 병인양요(丙寅洋擾)를 주제로 한국과 프랑스 간의 용서와 화해를 표현 한 작품입니다.
사상 유례없는 세 차례 앙코르 요청에 관람객이 무려 127만 명이었어요. 루브르 측에서 작품을 거액으로 구입해 영구전시하겠다 는 제안을 해왔어요. 나는 ‘외규장각 도서 반환’을 조건으로 내걸었고, 프랑스가 정치적 이유로 난 색을 표해 거래가 성사되진 못했어요. 하지만 나 는 우리 민족의 자존심을 지켰다고 생각합니다.” 아무도 독도에 관심을 두지 않았던 1977년, 이 종상 화백은 처음으로 독도 땅을 밟고 최초로 〈독 도진경전〉을 열었다. 전 세계인에게 ‘독도(Dokdo)’를 각인시켰다.
가수 정광태의 ‘독도는 우리 땅’이라는 노래가 나오기 5년 전부터 그림을 통해 독도의 존재를 세계에 알린 것이다. 지금까지 30 여 차례 독도를 드나들며 남긴 작품만 600점이 넘는다. 서울 서대문구 미근동의 동북아역사재단 독도체험관과 울릉도 독도박물관 등에 그의 작품 들이 전시돼 있다. -
광주이씨 광이문예 홍보이사 甲洙 記
사진 설명:
가나아트센타 커피숍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