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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탄강(漢灘江) 문학기행
한반도의 중간 지점에서 발원하여 동서를 가로지르는 한탄강에는 사연도 많다. 한탄(漢灘)이란 ‘한 여울’ 곧 큰 여울을 뜻하는 말이다. 바닥이 얕거나 폭이 좁아서 물살이 급한 개울을 ‘여울’이라 한다. 한탄강 주변의 지명은 대개 여울(灘)이나 시내(川)와 같은, 물과 연관된 이름이 대부분이다. 강원도 평강의 추가령 곡에서 발원하여 철원과 연천을 거쳐 전곡에서 임진강과 합류하는 한탄강은 민족 분단의 상징인 휴전선을 가로질러 흐른다. 우리나라 어느 강보다 변화가 많고 풍광이 수려하다. 이 강은 발원지에서 임진강의 합류점까지 현무암으로 된 용암지대를 관류하기 때문에 곳곳에 절벽과 협곡이 형성되어 절경을 이룬다. 국가가 지정한 지질공원인데 최근에는 유네스코 세계지질공원으로 인증받아 보호를 받고 있다.
한탄강 지질공원이 유네스코 지질공원으로서 지니는 가치의 가장 중요한 부분은 "하천 시스템에 발달한 용암대지"라는 점으로 보인다. 경기북부의 용암대지는 현무암질 용암이 지표에 갈라진 틈을 통해 분출해 형성된 것인데 비슷한 유형의 용암대지는 세계 다른 곳에서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지만, 한탄강 지역은 큰 규모의 하천이 발달한 지역에 용암대지가 형성된 점에서 다른 지역과 차별성을 지니고 있다. 용암이 하천이 발달한 지역을 피복(被覆)하면서 만들어진 독특한 구조들(예를 들어, 해저화산 분출에서 흔히 관찰되는 베개 현무암이 하천으로 인해 내륙에서 형성된 점)이 있고, 또 용암대지가 형성된 이후 다시 하천에 의한 침식이 발생하면서 만들어진 절벽에 주상절리와 같이 용암에 의해 형성된 지질구조가 잘 드러나 있다(비둘기낭 폭포도 여기에 속한다).
단순히 용암대지뿐만 아니라 본래 해당 지역의 기반암을 이뤘던 화강암질 암석이 드러난 지역과 하천 발달 양상이 뚜렷한 차이를 보인다. 용암대지를 침식한 하천의 절벽과는 달리, 화강암질 암석 지역의 하천은 완만한 경사를 보이는 골짜기 구조로 선명한 대비를 보여 지질공원으로서의 가치를 더해준다.
이곳에 작년 11월에 잔도(棧道)가 완공되어 관광 명소가 되었다. 한탄강 주상절리 잔도 길은 총연장 3.6 km, 폭 1.5m로 주상절리 협곡과 다양한 바위를 구경할 수 있도록 설치되어 있다. 더구나 겨울철에는 물 위로 부교를 설치하여 가까이에서 암벽과 주상절리를 볼 수 있다. 녹음이 우거진 여름철에 보는 풍광과 아름다운 절경에 차이가 있어 적어도 두 계절에 찾을 만한 가치가 있다.
이 일대에서 가장 풍광이 좋은 곳이 바로 고석정(孤石亭)이란 작은 바위섬이 다. 몇 그루 소나무를 머리에 이고 강 가운데 우뚝 선 이 바위섬이 한탄강에서 가장 경치가 좋은 곳이다.
양주 땅에서 백정의 아들로 태어난 「임꺽정」은 맨손으로 호랑이를 때려눕힐 정도의 장사였으며 또 인정이 많고 의리가 두터운 사람이라고 했다. 의적이라 불리던 그가 재령 땅에서 관군에게 붙잡혀 죽기까지 이곳 외돌괴 바위틈에 자란 소나무 밑동에 밧줄을 걸고 오르내리며 고석정을 근거지로 삼았다고 한다.
그런데 『임꺽정』은 일제(日帝) 시 「벽초 홍명희(碧初 洪命憙)」가 쓴 소설로 더욱 유명해졌다. 벽초는 충북 괴산 출신으로 경술국치 때 순국한 「홍범식」 의사의 아들로 그는 「이광수」, 「최남선」과 함께 조선 3대 천재라 불린 문인이자 사상가이자 실천적 독립 운동가였고, 『임꺽정』으로 한국 역사소설의 새 장을 열었다. 그는 「임꺽정」이라는 실존 인물을 400년 후 일제강점기 피지배 현실에서 재현시켰다. 『임꺽정』이 식민지 당시의 현실 문제에 중요한 의미를 부여한 것은 단순히 국권 상실의 차원이 아니라, 식민주의 지배 정책이 낳은 핍박받는 민중의 실체에 초점이 맞춰져 있기 때문이었다. 『임꺽정』에서 제기된 반봉건 의식 문제는 식민주의 지배하에 놓여 있던 민중의 실체를 겨냥한 것이었다. 『임꺽정』은 식민지 지배국의 피지배국 민족사 왜곡과, 그에 따른 피지배국 민중의 근거가 파괴된 삶의 실체를 충분히 문제화한 작품이다.
이와 유사한 인물을 주인공으로 한 소설이 있다. 「홍길동」은 조선 연산군(燕山君) 때 충청도 일대를 중심으로 활약한 도적 떼의 우두머리다. 「허균(許筠)」이 지은 『홍길동전(洪吉童傳)』의 모델이 되었으며, 명종(明宗) 때 임꺽정(林巨叱正 또는 林巨正), 숙종(肅宗) 때 장길산(張吉山)과 더불어 ‘조선 시대 3대 도적’으로 꼽히기도 한다.
『홍길동전』은 문제의식이 아주 강한 작품이다. 사회문제를 다루면서 지배 이념과 지배 질서를 공격하고 비판하는 방향에서 다루었으므로 문제의식이 뚜렷할 수밖에 없다.
당대 현실에 실재했던 사회적인 문제점을 왜곡함이 없이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사실주의적이고 현실주의적인 경향을 지닌다. 특히 적서차별 등의 신분적 불평등을 내포한 중세사회는 마땅히 개혁되어야 한다는 주제의식을 지닌다는 점에서 진보적인 역사의식을 드러내고 있다.
조선 광해군 때의 학자이자 정치가, 작가였던 「허균」은 정치하는 자들이 백성을 두려워하지 않고 핍박을 하면 언젠가는 아래로부터 혁명이 일어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인재를 소중히 여기지 않고 버리는 것은 하늘을 거역하는 일이라고도 했다. 그래서 당시 조선에서 서얼이라는 이유로 인재를 버리는 풍습을 못마땅히 여기며 한탄했다. 『홍길동전』은 새로운 세상을 꿈꾸었던 작가 「허균」의 꿈과 이상이 반영된 작품이다. 「허균」은 『홍길동전』을 한글로 지어 백성들에게까지 널리 읽혔는데 그런 점에서 『홍길동전』은 진정한 한글 소설의 출발점으로 평가되고 있다.
소설 『장길산』은 소설가 「황석영」을 대가의 반열에 오르게 한 소설이다. 그는 1943년 만주 장춘(長春)에서 태어났고 동국대 철학과를 졸업했다. 1962년 『사상계』 신인문학상에 「입석부근」으로 입선하여 등단한 후 1970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탑」이 당선되면서 본격적인 작품 활동을 하였으며, 1974년 첫 창작집 『객지』를 펴내면서 단숨에 1970년대 리얼리즘의 대표작가로 떠올랐다. 1974년에는 신진작가로서는 파격적으로 「한국일보」에 『장길산』 연재를 시작했다. 이는 장장 10년간 연재가 이어지면서 해방 이후 최고의 역사소설로 평가받았다. 이 작품은 조선 숙종 조에 실재했던 인물인 「장길산」을 주인공으로 한 것인데, 그 앞에는 「홍명희」의 『임꺽정』이 전범이며 큰 영향을 주었다.
이 작품을 이끄는 것은 「장길산」을 중심으로 한 광대들의 길이다. 팔천(八賤)의 하나로 엄혹한 신분질서의 맨 아래쪽에 놓여 철저히 소외된 처지이니 비록 가족을 거느리고 마을을 이루어 모여 산다지만 그들 존재의 본질은 그들이 자신들의 재주를 팔기 위해 걷는 그 길 위를 떠도는 뿌리 뽑힌 유민이다. “길이란 광대들이 태어나는 곳이자 살아가는 동안 대부분을 보내는 곳이며, 죽는 곳이며 묻히는 곳”이라는 말의 밑에 숨은 의미는 이것이다. 그 같은 철저한 소외에서 원한이 생겨 쌓이는 것은 당연한데, 원한의 더미 내부에 본래적으로 내재해 있는 해소(解消)의 지향성과 현실 체험에서 자연스레 이루어지는 모순에 대한 인식, 그리고 계몽자의 계몽에 의한 충격과 각성 등이 합하여져 마침내 그 길은 그 같은 모순을 타파하고자 하는 실천적인 투쟁의 길로 변모한다.
『장길산』은 1970년대 민중운동의 전사로서 조선 후기 민중들의 삶과 투쟁을 형상화하고자 한 작품이다. 조선시대 민중들의 언어와 풍속을 풍부하게 재현함으로써 우리 시대 역사소설이 거둘 수 있는 최대치의 성과를 거두었고, 종래의 왕조 중심의 역사소설과는 달리 하층민 중심의 민중사로 당대 역사를 재구성하였으며, 봉건 지배층의 관점에서 써진 사료들을 철저히 민중적인 시각에서 재해석하여 활용하였다는 점 등에서 탁월한 성과를 거두었다고 평가된다.
『사람의 아들』, 『금시조』,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의 작가 「이문열」과는 다양한 에피소드가 있다. 과거 무단방북의 여파로 귀국하지 못하고 뉴욕에 체류 시 둘은 만났다. 문학을 하는 선후배로서 술도 마시고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특히 월북한 아버지의 생사를 부탁하여 그 소식을 전하기도 하였다. 이후 「황석영」이 구속되자 석방 탄원서에 서명하고 면회 시에는 자신의 책들을 차입해 주었다. 속칭 이들은 세간에서 보수와 진보를 대변하는 아이콘으로 통한다. 하지만 정작 자신들은 관심이 없고 단지 인간적인 교류를 통해 서로가 좋은 작품을 쓰길 성원하고 지낸다. 둘 다 우리 문단은 물론이고 세계에 내세울 작가이니 서로 힘이 되어 우리 문학을 세계로 이끄는 역할에 충실하길 바란다. 언젠가는 둘이 손을 맞잡고 편향된 이념과 대립의 낡은 질곡에서 벗어나 진정한 국가발전의 새로운 이정표를 제시할 그 날을 기대한다. 마침 새 정부의 출범으로 이런 계기가 조성되길 바란다.
보통 작가는 인생의 진실을 이야기하고 어디까지나 내용 자체의 전달로 독자에게 감명을 준다. 따라서 작가가 걸어온 인생의 체험에서 비롯되는 현실의 묘사나 서술에 그 예술성이 보존된다. 특히 산문정신(散文情神)을 작가정신(作家情神)의 요체(要諦)로서 시정신(詩精神)과 대립시켜 제창하는 까닭은 소설의 「리얼리티」가 시나 운문과는 별도로 그 문예성을 보유하고 있음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따라서 그 바탕에는 시대정신(時代精神)이 반영된다. 이처럼 작가정신이 투철한 작가들은 봉건제 하의 일방적인 억압에 저항하고, 일제 식민지 지배하에서도 불굴의 희망을 노래하며, 군사독재에 반대하는 처절한 희생과 몸부림이 배어있는 것이다. 한마디로 과연 무엇이 정의로운지를 제시하며,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의 상처를 보듬는 역할을 자처한다.
일반적으로 글을 쓰는 문인(文人)은 두 유형(類型)의 사람이 있다고 한다. 「박경리」는 『토지』를 탈고(脫稿)할 때까지 「하동」의 「평사리」를 가 본 적이 없다는 이야기가 있다. 아니, 어떻게 작품의 배경이었던 장소에 가 보지도 않고 그런 장편 대하소설을 썼다는 것인지 믿기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영국인이었던 「셰익스피어」는 그의 대표적인 희곡들의 배경이 영국이 아닌 작품들이 많다. 대표적으로 『햄릿』의 배경이 「덴마크」였고, 『로미오와 쥴리엣』은 이탈리아의 「베로나」였으며, 『베니스의 상인』은 「베네치아」였다. 「베네치아」 사람들에게 『베니스의 상인』이 쓰인 당시 「베네치아」 상인들의 주요 활동 장소가 「리알토」 다리였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셰익스피어」가 이 「리알토」 다리를 걸어보고 『베니스의 상인』을 썼을까? 「셰익스피어」에 대한 사적(私的)인 기록이 이상할 정도로 남지 않아 확인해 볼 수는 없지만, "그는 이탈리아에 가 본 적이 없다"라는 것이 거의 역사학자들의 의견이다. 어쨌든, 전문이나 소문과 독서 위에 상상만으로 그런 명작을 남겼다는 것은 경이롭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전혀 다른 성향의 위대한 작가도 있다. 요한 「볼프강 폰 괴테」다. 진즉에 「괴테」의 『이탈리아 기행』을 읽으며 자연과 인간 그리고 예술에 대한 그의 끝없는 탐구 욕망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는 「나폴리」를 여행하며 「베수비오산」을 올랐다. 18세기 변변한 등산로도 없는, 화산재로 질퍽거리는 산길을 유황 냄새를 맡아가며 「괴테」는 용암이 부글거리는 「베수비오산」 정상 분화구까지 세 번이나 올랐다. 「괴테」가 그렇게 힘든 산행을 했던 이유는 그의 작품 『파우스트』 등에서 등장하는 지옥에 대해 생생하고 사실적인 표현을 하고 싶은 욕심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그렇게 「괴테」는 자신의 작품 속의 배경을 묘사하기 위해 온 힘을 다해 대상(對象)들을 탐구했다.
이런 유형의 작가를 고려해 살펴보면 「황석영」 작가는 직접 현장을 찾아 발로 뛰는 작가임에 틀림이 없다. 「광주 민주화 운동」의 진상을 온 세계에 알리는 험난한 역할도 마다하지 않았다. 이미 작품 출간 후일지라도 그가 여러 번 방북하며 장길산의 활동 근거지 삼았던 「구월산」 일대를 찾아갔을 것 이란 추론이 가능하다. 수배 중에 각국을 전전한 끝에 “동아시아의 근대화를 문학적인 장치를 통해 상징화한 것”이라며 쓴 소설 『심청, 연꽃의 길』도 발로 쓴 작품이다. 역설적으로 투철한 작가의식으로 주변의 반대에도 방북한 결과 여러 해 실형을 받기도 한 행동하는 작가였다.
한탄강이 임진강과 합류하고 결국에는 한강과 한 몸이 되어 서해로 흐른다. 주변에는 역사적인 기념물과 자연 유산이 산재하여 있다. 철원의 「삼부연 폭포」와 연천의 「재인폭포」, 「고랑포」의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릉」, 「선조」가 피난길 빗속에서 불을 밝혀 길을 안내해 준 「화석정(花石亭)」, 「율곡 이이」의 사당과 묘소가 있는 「자운서원(紫雲書院)」, 파평 윤씨의 선조와 인연이 있는 잉어가 산다는 연못, 「황희」 정승이 유유자적하던 「반구정(伴鷗亭)」과 망향의 동산이 있는 「임진각」, 임진강과 한강이 동시에 조망되는 요충지인 「오두산」 등등이 산재하여 있다.
아마도 이 장단반도 일대는 오랜 세월 동안 명문 사대부가 주거하던 유서 깊은 곳인지라 많은 문화유적이 발굴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더구나 철원 일대는 역사적으로 「궁예」가 활동하던 지역이다. 이곳에 굳건한 성을 구축하고 상당한 세력을 떨치다가 「왕건」에 의해 멸망하였다. 패자의 역사는 사라지나 그 흔적은 남는다. 경기도 포천군과 강원도 철원군에 걸쳐 있는 「명성산(鳴聲山)」은 울음산이라는 뜻이 있다. 궁예가 부하였던 「왕건」에게 쫓겨난 후 이곳에서 크게 울었다는 전설 때문에 생긴 이름이다. 지금은 비무장지대에 있는 태봉국의 철원성(鐵原城)은 언젠가는 유적의 발굴을 기다리고 있다. 남은 소수의 유적이나마 더는 훼손되지 않고 보존되기를 바란다.
사족(蛇足)으로 장단반도를 관통해 흐르다가 하류 부근에서 합류하는 「사미천」의 민물 참게는 너무도 유명한데 과거에는 임금님께 올리는 진상품이었다고 한다. 더구나 이맘때 임진강을 거슬러 올라오는 실뱀장어와 황복은 어민에게 부(富)를 선사하는 효자 상품으로 이름이 높다. 한겨울 추위의 얼음을 뚫고 임진나루 바위 아래서 장어를 잡아 진상하던 이야기(?)는 이제는 까마득한 옛이야기가 되고 말았다! (2022. 5. 15. 작성/ 5. 18. 발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