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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조부 휘 정 혼 선생(김화 현감)의 문집 진재유고를 초역출판해 고유제까지 지내고 나니 자손 된 입장에서 다소나마 도리를 한 것 같아 만감이 교차한다. 진재집은 이 책 발행사에서도 밝혔지만 한말 격동기를 살면서 알게 모르게 우국충정을 불태운 행적들이 행간마다 넘쳐난 사료적 가치가 높은 문집임을 새삼 확인하고 이분의 족적을 단편적이나 밝혀 두는 것이 후손된 도리라 믿어 어려운 번역사업에 착수한 것이다.
감사하게도 한국유림총연합 안명호 총재의 흔쾌한 보살핌으로 초역이 출판될수 있었던 것은 자손된 입장에서 크나큰 행운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유일본이라시며 소중하게 보관하셨다 물려주신 선친의 유지가 생각할수록 존경스러웠다.
그러고 보니 나이 들어 종친회를 돌아본다는 것도 무의미한 일은 아닐 것 같고 뿌리를 같이하는 종친간의 덕목을 생각할 때 그동안 종친회에 참석하며 느꼈던 일을 돌이켜 보는 것도 나로선 무의미한 일은 아닌것 같아 주제 넘지만 기억을 더듬어본다.
0-선친의 남다른 숭조향념
솔직히 말해 내가 동네 한문서당에서 千字文과 童蒙先習을 익힐수 있었던 것은 아버님의 성화때문이었다. 신학문도 좋지만 한문을 알아야 한다고 동네 서당에 강권하다싶이 떠미셨던 아버님이 아니고서는 한문은 정말 까막 눈이었을 것이다. 동네 한학의 대가 계산 원태씨께 통감을 읽게하신 것도 선친의 남다른 자식 사랑에 기초한 교육열이었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4남매중 나만 대학공부를 마칠 수 있어 동생들에게 늘 미안한마음으로 살아왔지만 사실 내가 대학엘 가리라고는 당시의 가정 형편으로는 언감생심 꿈조차 꾸기 어려웠다. 그러나 자식에게 재산을 물려주는 것보다는 죽을 먹더라도 가르치는 것이 첫째라고 전답을 몽땅 팔아서라도 대학엘 보내겠다는 아버님의 교육열은 다른 동네 청년들의 부러움을 사기에 족했다.
보리쌀 서 말을 가지고 처갓집 건넌방에 살림을 차리시고 알뜰하게 저축해 논 한마지기를 사신 일을 두고두고 대견해 하시던 아버님의 근면하심과 억척스럽게 농사를 지으시며 4남매를 키우시고 시집 장가를 보내는 날 비록 가난은 할망정 손님접대가 극진하셨던 아버님 생각 만 하면 눈물이 앞을 가린다.
나의 결혼 때는 빚을 내서라도 큰상을 차려야 한다 시며 시장에 가셔서 상 차릴 음식을 직접 사시다가 과일이며 떡을 한자가 넘게 고이도록 지시하고 밤새도록 지켜보셨다. "사람의 집에는 손님이 많이 들어야 한다" 며 사랑방에 손님을 자주 초대해 밤새도록 談論 하시던 모습도 눈에 선하다.
아버님의 성품은 유달리 불같아서 남의 잘못을 절대로 지나쳐 버리지 않는, 요즘 시젯말로 대쪽 같다는 평판을 들으실 정도였다. 마찬가지로 나의 잘못도 용서 하지 않으셨음은 말할 것도 없다. 종이 한 장 노끈하나 버리지 않으시고 차곡차곡 모아 두셨다가 뒤에 요긴하게 쓰시고 헌 천이나 가죽조각으로 담배쌈지나 라이타 주머니를 손수 지어 간직하시던 절약정신과 재활용의 알뜰하심도 모두가 본받을 산 교훈임에 틀림이 없다.
부모님의 좌우명으로 지금도 잊을 수 없는 것은 敬祖 사상이 투철 하셨던 점이다.
어른 말씀을 거역하지 않으시고 막내이신 아버님이 큰댁 봉제사를 불평 한마디 없이 떠맡으시고 1년에 아홉 번의 제사를 정성껏 경건하게 모셨던 것은 요즘의 우리들에게 많은 것을 일깨워주고 계신다. 재산 한 푼 없는 종갓집, 돌아가신 당숙께 양자를 가셔서 열일을 제치시고 정성들여 제사를 모시면서 항상 근본을 잊지 말라고 당부하셨던 아버님, 설날만 되면 어떤 일이 있어도 당일 집안 사당 참배를 마치셔야 잠자리에 드셨던 것은 동네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소문나 있다.
때로는 밤늦게 까지 사당 참배를 하시는 경우도 있었고 꼭 나를 앞세우고 다니시기를 좋아 하신 것은 그만큼 경조 사상을 깨우쳐 주시려는 의도가 강하셨던 때문이라 생각한다.
멀리 도비골 선대 묘소를 월림으로 이장해 모시는 일이 평생 소원이셨든 아버님께서 사촌 형님과 생전에 이일을 매듭지으신 것도 경조사상이 남다르셨던 진면목으로 보아 틀림이 없을 것이다. 어머님 회갑 때는 정씨집안에 시집와 고생이 많았다고 큰상을 손수 차리시며 자식의 얼굴을 빛내주려 하셨고 정작 당신의 회갑 날은 간소하게 넘어 가자고 제천 어느 음식점에서 조촐하게 손님을 접대하실 때 더욱 나를 감읍케 하셨으니 어찌 그 깊은 뜻을 잊고 살겠는가.
어른들을 보면 깍듯이 인사를 하는 것이 도리라고 여러 차례 강조하신 가르치심, 자고 나서 다시 뵈어도 어른들께는 절이 인사라고 언제나 절을 하게 하셨던 위계질서랄까 동양적 예절 문화에 대한 신념도 대단하셨다.
이런 가풍 탓으로 나는 평생동안 아버님께 누가 되는 일은 하지 말아야한다는 마음가짐을 한시도 잊어본적이 없었던 같다. 선현 말씀에 我身能賢譽及父母 我身不賢辱及父母(내가 능하고 현명하면 그 명예가 부모에게 돌아가고 내가 무능하고 어질지 못하면 그욕이 부모에게 미친다)는 경구는 지금도 변함없는 나의 좌우명이다.
* 송강종보를 복간하며
이런 생각으로 살아 온 탓인지 집안일이나 종중일에 참여할 기회도 많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종중사에 처음 보람을 느꼈던 것은 송강 종보를 복간 하는 일이었다.
이 일이 나에게 맡겨진 배경은 아마도 내가 종사에 관심이 많은 것으로 생각하신 종중 어른들의 권유때문이었다. 그래서 영일정씨 제천출신 문청공파 서울친목회 총무를 맡은 일이 나로선 첫 번째 종중 일이었다. 1960년대 당시 종중일에 열성적이었던 운화 형님을 비롯하여 진사댁 성락님과 운광 종형님이 서울 종친회를 창립하면서 나를 총무로 임명한 것이다. 두어달에 한번씩 친목 모임을 안내하는 일은 고정 업무이고 때로는 제천 문절공 시제와 진천 송강 선조 시향에 버스를 대절해 참사하기도 했고 이런 종중사에 동원(?)되면서 뿌리에 대한 자긍심도 높아졌다.
그래서 맡겨진 종사 중 지금도 자랑스럽게 보람을 느끼는 것은 송강 종보를 복간 하는 일이었다. 송강종보 編輯委員長을 맡으며' 91년 12월 30일자 종보에 실린 발간사에서 나는 다음과 같이 소회를 밝혔다.
(중략) 종보란 다른 어떤 친목단체회보 보다 특수한 기능을 갖고 있으며 종원간의 친목과 유대뿐만 아니라 조상의 유덕을 널리 선양한다는 숭고한 목적이 있다고 믿습니다.
그런 점에서 학식도 부족하고 조상에 대한 숭모사상 또한 부족한 제가 송강종보 편집위원장이 된 것은 여러모로 조상께 누가 되지 않을까 두려움이 앞섭니다. 우리 종보는 특히 종원 모두가 공인하고 있듯이 종원의 눈이며 귀와 입인 동시에 송강선조의 정신과 얼이 살아 숨 쉬는 종원의 광장이라 하겠습니다. 종보를 통해 종원들의 동정을 알고 정보를 교환하며 조상의 유덕을 기리고 널리 알릴 수 있다는 것은 우리의 자랑이며 보람이 아닐 수 없습니다.
종친회를 보다 생산적이며 능동적인 합의체로 발전시키고 종원 모두에게 따뜻한 화음을 전달하는 매개체로서 종보가 항상 자리하도록 지도 편달해 주시리라 믿고 종보는 늘 종원 여러분의 옆에 있어야한다는 신념을 잃지 않으려 합니다. 우리 종친회는 무엇보다도 온 국민이 추앙해 마지않는 명현 송강선조의 위업으로 하여 어디에서나 자부와 긍지를 느끼고 있습니다. 종원들 모두가 혈육지친과 같은 사랑과 우애로 규합돼있다는 것도 자랑스럽고 종원들중에는 남달리 국가 사회에 공헌하거나 종친회의 명예를 드높인 분들도 많습니다. 종보는 바로 이런 분들을 많이 소개하고 본받는 일에도 앞장서야 할 입장에 있습니다. 자라는 우리의 2세들에게 우리의 기쁨을 전하고 영광을 알리며 그래서 崇祖思想을 일깨울 수 있다면 얼마나 마음 흐뭇한 일이겠습니까.
오랫동안 발간이 중단되었던 종보가 다시는 우리 곁에서 멀어지지 않도록 계속 종원들의 사랑과 성원을 받기를 기대합니다. 이를 위해 서울은 물론 전국 각지의 종친회 지부장님의 적극적인 협조와 종원 모두의 자발적인 참여를 부탁드립니다.
* 보람느꼈던 송강선조 4백주기 추모제
또 한가지는 내 생전에 송강선조 4백周忌 추모행사를 봉행하는 영광을 얻은 사실이다. 이 행사에 깊이 관여한 것은 내가 문청공종친회 부회장 겸 홍보위원장을 맡은데 연유한다. 송강선조 4백주기 추모행사를 봉행함에 즈음해서 나는 여러모로 신경을 썼다. 그 가운데 4백주기추모사와 판프렛 작성, 그리고 각 언론사홍보를 내가 맡았으니 즐거운 마음으로 행사에 참여한 보람은 두고두고 자랑스럽다.
참고로 내가 집필하고 선택 종친회 회장이 읽은 추모사를 여기 옮겨 싣는다.(송강종보 12호. 94년 2월 5일자에서)
"먼저 오늘 우리 종문의 현조이신 송강선조 4백주기 추모행사와 송강 선조 춘향제에 참석해주신 종원 여러분과 이 엄숙한 대제전을 빛내주시기 위해 공사 간 바쁘신 중에도 멀리 경향각지에서 이렇듯 왕림해주신 내빈여러분께 충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아울러 오늘이 있기까지 우리 종친회의 내실발전과 종원 상호간의 친목과 인화 단결을 위해 적극 헌신해 오신 종친회 전 현직 임원진 여러분과 저희 종친회의 각종행사에 물심양면으로 협조를 아끼지 않으신 국어국문학계를 비롯한 사회각계의 성원에 대해 이 자리를 빌어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여러분께서도 잘 아시는 바와 같이 송강 선조께서는 서기 1536년 12월 초 6일 서울 장의동에서 탄생하시어 1593년 12월 18일 강화에서 향년 58세를 일기로 서거하시기까지 당시의 어려운 정치상황에서 여러 가지 역경을 겪으시면 서도 청렴, 강직, 결백하신 정치인으로 추앙을 받으신 忠淸節義의 명현이셨을 뿐만 아니라 우리의 가사문학에 있어 불후의 명작을 남기신 만세의 성현이십니다.
아시는 대로 송강선조께서는 형조판서, 예조판서, 대사헌, 우의정 좌의정의 현직을 두루 거치시면서 이율곡선생과도 극진한 교분을 가지셨고 불철주야 위국충절로 지으신 사미인곡, 속미인곡은 바로 송강선조의 고결하신 인품과 충직충절의 산 징표로 길이길이 그 빛을 더해가고 있습니다. 또한 송강선조께서 백성들과 젊은이 들을 교화하시고자 지으신 훈민가들은 주옥처럼 빛나는 충효와 애민정신의 진수로 우리 국민의 정신문명에 값진 얼을 심어주신 그야말로 중국의 이백과 두보를 능가한 시가작품들로서 추앙받고 계십니다.
오늘 우리들이 송강선조 4백주기 추모행사를 봉행함에 있어 새삼 송강선조께서 남기신 이모든 위대한 행적들을 되새기는 뜻은 결코 우리 종원들만이 갖는 숭모의 염일 수는 없다고 보겠습니다.
송강선조의 작품세계에 함축된 인의예지와 효제충신의 정신은 지금도 송강마을 송강고개로 불리는 고양군 신원의 전설과 함께 효의 극치를 일깨워 주신 징표로 또한 우리의 옷깃을 여미게 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많은 국문학도들을 비롯하여 충효대절에 남달리 관심이 많으신 분들이 이곳 송강묘소 참배를 위해 전국각지에서 모여드는 것도 모두가 송강선조의 거룩하신 유훈을 귀감 삼고자 함에 있다고 확신합니다. 저희 종친회가 정부의 후원을 얻어 松江祠를 중건하게된 것은 이점에서 더욱 의의가 크고 국가적으로도 값진 경사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여기에는 송강사 중건을 위해 물심양면으로 협조해주신 정부관계부처와 전국 유림 그리고 국어국문학계를 비롯한 사회각계의 지대한 성원과 종원 여러분의 지성어린 성금이 답지했기에 가능했다는 것을 또한 감사드리며 그간의 노고에 대해 전종원과 함께 이를 치하 드립니다.
또 한 가지 우리가 오늘 경하해 마지않는 바는 송강선조 4백주기 행사를 계기로 송강선조의 생애와 문학세계를 체계적으로 종합 집대성한 '松江文學硏究論叢'이 발간되고 송강기념관을 새롭게 단장하여 선보이게 된 사실입니다.
후손된 입장에서는 물론이고 송강선조의 유훈을 기리는데 더없는 보람과 긍지를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송강선조의 충절과 가사문학의 진수를 현양한다는 것은 곧 국민윤리의 함양과 忠孝思想의 전승과 맥락을 같이하는 것이며 이곳 송강사는 그 산 도장으로서 추호도 손색이 없는 2세교육의 요람으로 영구히 보존돼야할 성역이라 하겠습니다. 이를 위해 우리 종친회는 물론이고 사회각계의 아낌없는 협조와 배전의 성원이 있어야 할 것이고 많은 2세들이 이곳 송강사에서 참사람의 도리를 각명하고 터득할 수 있기를 기대해 마지않습니다.
아무쪼록 오늘 이 경건하고 엄숙한 추모행사의 취지를 깊이 이해하시고 끝까지 유종의 미를 거두고 송강께서 남기신 만세불후의 유훈들을 생활 속에 실천궁행함으로써 오늘의 시대정신을 구현하는데도 다른 누구보다도 모범이 되어주시기를 바라마지않습니다.
* 숭조향념의 표상 통덕랑공 종친회
통덕랑공 종친회 창립도 나와 무관하지 않다. 모든 것은 제천에서 주관했지만 창립행사 판프렛을 만드는 일에서 부터 이런 일에
기쁘게 참여해 온것은 크나큰 보람이며 기쁨이었다. 매년 시향을 모시는 일을 비롯 하여 종중의 대소사를 열성적으로 돌봐온 운규회장과 병택 총무의 숭조향념의 높은 뜻을 존경하며 종사에 참여해 오면서 우리 집안의 끈끈한 숭조향념의 DNA를 재확인하고 옷깃을 여민다.
종친회에 동참 하면서 예전에 몰랐던 새로운 사실도 몇 가지 발견했다. 제천이 영일정씨 집성촌이 된 유래를 비롯, 고양에 송강촌이 생긴 유래가 밝혀진 점이다.
월림리가 영일정씨 집성촌이 된 배경은 정우택 박사가 자세히 고증을 들어 밝힌 내용이 통덕랑공 종친회 카페에 실려있어 이를 참고하기 바라며 송강종보 13호(95.2.20)에 실린 송강촌 유래를 소개한다.
"송강마을의 이름은 이조 선조 때 명상 松江 鄭澈선생이 부모상을 당해 이곳 고양군 원당면 신원리 (현재 고양시 신원동)에서 여러 해 시묘살이를 한데서 유래한다.
송강 정철선생은 서기 1536년 서울 장의동에서 탄생하시어 고봉 기대승, 하서 김인후의 문하에서 학문을 연마했고 율곡 이이, 우계 성혼등과 교분을 맺었다. 27세 때 문과별시에 장원급제하여 좌의정에 까지 올랐고 58세에 타계하셨다. 송강이 35세 때(서기 1570년) 부친인 유침 돈령부판관이 타계하시니 이곳 신원에 장사하고 3년 동안 시묘살이를 했으며 이어 서기1573년 모친 공인 죽산안씨 상을 당해서도 이곳에서 3년 동안 시묘살이를 했다. 또 1577년 셋째누님 (계림군 배위)상과 1589년 장자 기명 상때도 역시 복을 입고 신원에서 우거하며 전후거상을 정례에 극진하였기에 후일 세인이 이곳을 정철선생의 호를 따라 송강촌이라 이름하게 되었다.
송강께서 선산에 참배하러 매일 조석으로 넘었던 고개가 송강고개로 불리어 진 것도 같은 연유에서다.
송강선생은 부모를 섬기되 항상 효행이 지극했고 형제를 대함에 성색이 부드러웠으며 날마다 새벽에 일어나 종묘에 배례하고 출입에 반드시 고하며 묘소에 가서는 반드시 곡배하였다. 시묘살이를 하는 중 매양 조석으로 하는 호곡에 이웃사람들이 감동하였다고 전하여 진다.
일찍이 사계 김장생선생은 말하기를 송강공은 상사제례에 반드시 예를 다하였는데 이것은 내가 친히 보고 탄복한 바라 했고 또 우계 성혼선생은 송강공의 부모거상에 예를 다한 사람이라는 시를 올렸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다른 한 가지는 송강 선조의 遷葬에 관한 유래다. 문절공 종손 원태씨가 종보 복간호(91년 12월 30일자)에 기고함으로써 밝혀진 송강선조의 천장유래는 다음과 같다.
"송강선조의 산소를 우암 송시열공이 택지 천장한 것으로 잘못 전해진 것은 송강자손과 우암선생사이의 세교가 두터웠다하여 와전된 것이다. 송강선조의 천장은 송강의 손자 포옹 휘 瀁께서 일찍이 조부와 선고 두 분의 묘소에 침수되였을 것을 의심하여 밤낮으로 걱정하고 여러해 동안 구상하던 차 마침 진천군수로 있을 때 진천 지장산에 묘소를 택지하였다가 이해 을사년 2월(1665년 포옹 66세) 에 비로서 이장하셨다는 기록이 있다.(포옹집 권7 16항) 포옹께서는 송강선조 천장을 마친 뒤 탄식해서 말씀하시기를 나의 일은 끝났으니 백수로 역사 관리하는 일은 어렵다 하시고 군수를 내놓고 태백산 본가로 우거하셨다고 전한다."
종친과의 만남은 뿌리를 확인하고 집안간의 화목을 다진다는 점에서 보람을 안겨준다. 재경 文淸公派친목회와 제천 통덕랑공 종친회는 그런 점에서 여느 친목 모임과 비교 할 수 없는 돈독함이 있고 崇祖思想이 이 모임을 이끄는 정신적 지주가 되고 있음에 경건함이 넘쳐난다.
버스를 대절해 제천 文節公 시제와 진천 송강사를 참배했던 그 옛날 조상에 대한 향념이 날이 갈수록 희미해지는 것 같아 안타까운 심경으로 이 글을 마친다.
* 참고문헌 :
졸저 건강한사회를 위하여, 논설위원 30년, 석양에 노을진 여정, 청풍명월 충절의 표상, 송강종보
(2023년 3월 26일 정운종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