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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기쁨
눅 15:22~32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저희가 즐거워하더라 맏아들은 밭에 있다가 돌아와 집에 가까왔을 때에 풍류와 춤추는 소리를 듣고 한 종을 불러 이 무슨 일인가 물은대 대답하되 당신의 동생이 돌아왔으매 당신의 아버지가 그의 건강한 몸을 다시 맞아들이게 됨을 인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았나이다 하니 저가 노하여 들어가기를 즐겨 아니하거늘 아버지가 나와서 권한대 아버지께 대답하여 가로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아버지의 살림을 창기와 함께 먹어 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아버지가 이르되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았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6․25전쟁이 일어나 많은 사람들은 살길을 찾아 피난을 가고 있었습니다.
이때 시골 교회를 섬기시던 충성스런 장로님이 계셨는데, 평생을 생명같이 사랑하고 섬겨오던 교회를 뒤에 두고 살기 위해 피난을 가려니 발길이 움직여지질 않았습니다. 무지하고 악한 공산당들이 구둣발로 짓밟아 거룩한 아버지의 집을 더럽히고, 아버지 하나님을 슬프시게 할 것을 생각하니 가슴이 메어지고 죄송하여 마을 사람들과 성도들은 다 피난을 가는데 이 장로님께서는 교회를 지키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일이며 장로의 사명이라 생각하고 순교의 각오로 교회를 찾아가 문을 단단히 잠근 후 강단 앞에 무릎을 꿇고 “하나님 아버지 이 거룩한 아버지의 집을 어떻게 해야 합니까? 무지한 공산당들의 더러운 발에 짓밟히지 않게 지켜 주옵소서” 라고 울면서 간절히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이때 잠근 문을 부수고 인민군이 신을 신은 채 들어와 눈물로 기도하고 계신 장로님을 향해 ‘당신은 누구요?’ 라고 소리 질렀습니다. 이때 장로라는 사실이 알려지면 무참하게 죽을 것을 뻔히 알면서 “예. 나는 이 교회의 장로입니다.” 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러자 인민군은 다시 묻기를 “남들은 살겠다고 다들 도망치는데 당신은 겁도 없이 왜 여기서 혼자 울고 있습니까?“ 라고 하였습니다. 이때 장로님께서는 ”예 이 집은 내 아버지의 집입니다. 아버지의 집을 버리고 나만 살겠다고 피난 갈 수 없어 여기 있는 것입니다.“ 라고 담대하게 대답하였습니다. 이 말을 마지막으로 이 장로님께서는 영원한 안식의 나라 예수님의 품으로 가셨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람들이 “당신은 누구요.”라고 묻는다면 어떤 대답을 하시겠습니까? “예. 나는 예수를 믿는 사람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라고 담대하고 부끄럼 없이 대답하실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는 하나님 아버지를 기쁘시게 하는 일이며 구원받는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단순히 교회에 다니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를 구주로 믿고 중심에 영접하여 예수 생명으로 사는 것입니다. 예수를 영접하면 그 순간부터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 1:12)
이 얼마나 복된 일입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 받는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자녀된 우리는 마땅히 하나님 아버지를 기쁘시게 해 드려야 합니다.
어떻게 해야 하나님 아버지를 기쁘시게 해 드릴 수 있을까요?
1. 아버지의 소중함을 깨달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하나님을 떠난 인생들을 이 아들에 비유한 유명한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둘째 아들은 아버지와 함께 있을 때에는 아버지의 소중함을 몰랐습니다. 아버지가 기뻐하시는 것과 슬퍼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몰랐으며 아버지가 먹여주시고 입혀주시고 보살펴 주시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것인가를 몰랐습니다. 오히려 아버지의 간섭을 받고 사는 것보다는 차라리 아버지의 길을 떠나 내 마음대로 사는 것을 행복으로 생각하고 아버지의 품을 떠났습니다. 그 결과 돼지를 치고 돼지와 함께 먹고 함께 자는 불쌍한 처지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불행 중 다행으로 아들은 늦게나마 아버지의 소중함을 깨달았습니다. 17절에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고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아버지 품에 있을 때가 행복하였구나’, ‘아버지가 내 인생에 가장 소중한 분이시구나’, ‘아버지를 떠나면 죽음밖에 없구나’, ‘아버지께 순종하는 것이 사는 길이구나’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의 인생들은 마치 본문에 나오는 아들처럼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고 인생의 삶에 하나님께서 얼마나 소중한 분이신가를 모르고 내 생각 내 뜻대로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가 내 인생에 얼마나 소중한 분이신가를 알아야 합니다. 다윗은 시편 23편에서 “여호와는 나의 목자 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품에는 부족한 것이 전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품을 떠나면 영혼이 주려 죽게 됩니다. 인생은 하나님 아버지의 품에 있을 때 가장 행복한 것입니다. 이제 우리에게 하나님의 손길이 하나님의 음성이 하나님의 간섭이 때로는 하나님의 책망하심이 내 삶에 얼마나 소중한가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2. 아버지의 집에 돌아와야 합니다.
이 아들이 아버지의 집과 품이 소중하다는 것을 깨달았을 지라도 아버지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면 그 깨달음은 헛것이며, 아버지는 아들을 기다리다가 슬픔 속에 생을 마쳤을 것이며, 이 아들도 불행한 삶을 살다 길거리에서 죽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아들은 아버지의 집에 돌아왔습니다. 아버지는 잔치를 베풀면서 온 마을 사람들과 함께 기뻐하였습니다. 아버지의 눈물이 마르게 되었습니다. 아버지의 얼굴에 웃음이 가득하게 되었습니다. 아버지의 소원이 이루어졌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우리는 아버지 하나님의 품을 떠나지 말아야 합니다. 혹 잠시 떠났을지라도 곧 돌아와야 합니다.
아버지의 집에 돌아왔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1. 회개를 의미합니다.
회개는 구원에 이르는 첫째 관문입니다. 회개 없이는 아무도 구원에 이를 수 없습니다, 그래서 세례 요한이 처음 외친 말씀도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였으며, 예수님도 처음 외치신 말씀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이처럼 천국에 가려면 반드시 회개를 해야 합니다. 회개는 잘못된 자리에서 돌아서는 것입니다. 죄를 가슴 아프게 뉘우치고 애통하며 회개할 때 예수님의 생명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받으며 천국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2. 자기 자리에 바로 서는 것입니다.
우리가 서야 할 자리는 어디입니까?
1. 아버지의 집입니다.
이 아들은 아버지의 집에서 아버지를 섬기며 효(孝)하는 것이 자기 위치입니다. 그러나 자기 위치를 떠난 것이 불행을 가져왔으며 다시 돌아올 때 행복을 찾았습니다. 성도는 하나님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합니다. 아버지의 집은 성도의 안식처이므로, 성도는 성전을 사랑하고 성전을 중심으로 살 때 영육이 복을 받게 됩니다.
다윗은 주의 전을 사랑하는 마음이 얼마나 컸던지 “주의 궁정에서 한날이 다른 곳에서 천 날보다 나은 즉 악인의 장막에 거함보다 하나님의 전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다”고 하였습니다. 성도는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며, 예배를 드리며, 하나님을 찬양해야 합니다.
2. 사명의 자리입니다.
이 아들은 아버지 곁에서 아버지를 섬기며 가사를 도와야 할 사명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사명을 망각하고 곁길로 행하다가 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왔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택하사 구원 영생을 주시고, 천사가 부러워 할 귀한 사명을 주시고, 사명에 죽기까지 충성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오늘의 신자 중 자기 사명의 순종함을 잊고 한 달란트 받은 자처럼 잊고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에게 주신 사명 얼마나 귀한지를 알고 충성하시기 바랍니다.
이제 하나님 아버지를 기쁘시게 해 드리는 삶을 삽시다.
하나님 아버지가 내 인생에 얼마나 소중한 분인가를 깊이 깨닫고 언제나 아버지 집을 가까이 하며 불신앙과 불충성을 회개하고 자기의 위치를 잘 지키고 죽기까지 충성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고 상급 받는 성도가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야곱이 사랑받는 이유
창 35:9~15
야곱이 밧단아람에서 돌아오매 하나님이 다시 야곱에게 나타나사 그에게 복을 주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네 이름이 야곱이다마는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르지 않겠고 이스라엘이 네 이름이 되리라 하시고 그가 그의 이름을 이스라엘이라 부르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니라 생육하며 번성하라 국민과 많은 국민이 네게서 나고 왕들이 네 허리에서 나오리라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준 땅을 네게 주고 내가 네 후손에게도 그 땅을 주리라 하시고 하나님이 그와 말씀하시던 곳에서 그를 떠나 올라가시는지라 야곱이 하나님의 자기와 말씀하시던 곳에 기둥 곧 돌 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전제물을 붓고 또 그 위에 기름을 붓고 하나님이 자기와 말씀하시던 곳의 이름을 벧엘이라 불렀더라
성경에는 많은 인물들이 등장합니다. 어떤 인물들은 죄로 인해서 하나님의 책망을 받는 인물로 등장하고, 어떤 인물들은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의인이나,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하나님의 자녀로 등장하기도 합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야곱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대표적인 인물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야곱은 어떤 사람이기에 하나님의 축복을 받았는지 말씀을 통해서 알아보고, 야곱이 받은 축복을 우리가 받기 위해서 어떻게 신앙 생활을 해야하는가를 통해 신앙의 다짐을 하는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먼저 야곱은 어떤 사람인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야곱이라는 이름은 ‘뒤축을 잡음’, ‘거짓말쟁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야곱은 이삭의 나이 60세 때에 형 에서와 쌍둥이 형제로 태어났습니다. 태어날 때 형 에서의 발뒤꿈치를 잡고 태어났습니다. 쌍둥이 형제이긴 하지만 형 에서는 성질이 포악하여 사냥을 좋아하고, 동생 야곱은 성격이 온순하여 가정에서 어머니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이런 야곱이 부모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까닭은 크게 4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1. 성도로서 가져야 할 장자권을 귀하게 여겼습니다
장자에게는 3가지의 특권이 있는데
1. 성도는 장자로 대를 이어야 하는 의무가 주어졌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장자로서 신앙의 대를 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신앙의 대를 잇기 위해서는 책임을 가지고 온전한 인가가정을 이루고, 전도를 통해서 영의 자녀들을 양육해야 합니다. 사도행전 16장 31절에 보면 “주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고 말씀하시면서, 가정이 대를 이어 신앙을 가지는 것이 순리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2. 장자는 부모의 유산을 많이 물려받을 특권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랑하는 성도들에게도 장자의 권한을 주시고 장자의 축복을 허락하셨습니다.
출애굽기 20장 5~6절의 말씀을 보면 부모의 죄로 인한 저주는 3~4대까지 미치지만 하나님을 사랑하고 계명을 지키는 자들에게는 천대에 이르기까지 축복하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자신의 장자인 성도들에게 천대에 이르는 하나님의 축복을 약속하고 있는 것입니다.
3. 장자는 부모를 모시고 살 권한이 있는 것입니다
성도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권한을 주셨는데, 요한복음 1장 12절에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나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도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긍지를 가져야 합니다. 자녀된 성도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고 또한 장자가 부모님을 모시고 살 듯, 성도는 하나님을 늘 항상 모시고 살아야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장자의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2. 가까이 해야 할 어머니(교회)를 가까이 했습니다
1. 어머니는 자녀를 위해서 온유한 성격과 인자한 사랑의 교육을 합니다
어머니는 자녀에게 주어진 진 자리를 마른 자리로 갈아 누이시는 사랑으로 자녀의 환경에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또한 자녀를 보호하고자 하는 모성애가 있어서 자신에게 상처가 온다고 하여도 자녀는 감싸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녀는 맨 처음 어머니를 보고서 말과 행동을 배우게 되는데 어머니는 자녀를 교육시키는 첫 번째 선생님이 되는 것입니다.
2. 어머니는 젖을 자녀에게 식량을 공급하므로 자녀의 식생활을 해결해 줍니다
이러한 어머니는 영적으로 교회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설교는 어머니의 젖과 같아서 성도가 받아야하는 신앙의 양식이 됩니다. 젖을 잘 먹는 어린아이가 잘 자라듯이 신령한 젖인 하나님의 말씀을 잘 받아들이는 성도가 신앙이 성장합니다. 어머니는 때를 맞추어 아이에게 젖을 주듯이 설교는 필요에 따라 주시는 것입니다. 어머니를 멀리하는 자는 젖을 먹을 수 없어 자랄 수 없듯이 설교를 듣지 못하는 자는 신앙이 자랄 수가 없고, 신앙이 자라지 못하는 성도는 불행해 지는 것입니다.
3. 이와 같이 교회는 성도의 생활을 진실하게 해 줍니다
교회에는 사탄에게서 보호하시는 성령의 능력이 있으며, 유혹에서 보호하시는 신앙의 능력 또한 범죄하지 못 하도록 하는 하나님의 사랑이 있습니다. 교회는 하나님과 대화를 할 수 있는 장소입니다. 야곱은 벧엘에서 하나님과 대화를 했습니다. 벧엘은 하나님의 집, 즉 교회를 말합니다. 신자가 교회를 떠나면 축복대신에 고통이 오는 것입니다.
3. 아버지께 원하시는 별미를 드렸습니다
1. 성도는 기도의 별미로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려야 합니다
목자를 위해서 드리는 기도는 순종하게 하며, 교회를 위해서 기도를 드리는 성도는 교회에 대해서 애착심을 갖게 하며, 충성하며, 봉사하게 됩니다. 가정을 위하여 기도를 드리는 성도는 사랑으로 양순하게 되고,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 기도를 드리는 성도는 국법을 준수하게 되는 것입니다.
2. 성도는 물질의 별미를 드려야 합니다
십일조와 감사예물, 생일감사, 회개예물과 소원예물, 특별예물로 교회에 물질을 드리는 것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인 것입니다.
또한 성도가 목자를 대접하는 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십니다. 마태복음 10장 40절에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고 말씀하시며 주의 종을 대접하는 것이 마땅한 것입니다. 또한 고린도전서 4장 15절에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비는 많지 아니하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복음으로써 내가 너희를 낳았음이라’고 말씀하시며, 목자는 영의 아버지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도는 영의 아버지인 목자의 심정을 알아야 합니다. 로마서 1장에 보면 목자는 성도의 신앙이 자람을 보고 기뻐하며, 양을 위해서 기도하며, 양을 찾아보고 싶어하는 심정을 가지고 있으며, 나눠주고 싶어하며 양과 화목하게 살고 싶어합니다. 이러한 목자의 심정을 잘 헤아리는 성도는 축복을 받는 것입니다.
4. 야곱은 환도뼈가 부러지도록 기도를 했습니다
1. 기도는 성도의 영의 호흡입니다
신현균 목사님은 “성도의 간절한 기도의 입김은 하늘나라의 향기로운 향기다.”라고 말하였습니다.
2. 기도는 하나님께 대한 성도의 호소인 것입니다
바디메오는 기도로 호소 할 때 소원이 성취되었습니다.
3. 기도는 환난의 때를 면하게 합니다
악마와 병마를 물리치는 힘이 됩니다. 야곱은 벧엘에서 돌 베개로 제단을 만들고,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으며 얍복강가에서는 천사와 환도뼈가 부러지도록 씨름하며 기도하였습니다. 여기서 야곱이 쌓은 돌단은 십자가의 모형으로 십자가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연결된 축복의 기념석인 것입니다.
결 론
야곱의 이러한 생활은 하나님 마음에 꼭 드는 것이었고, 야곱은 하나님으로부터 사랑을 받았습니다. 야곱이 받은 축복을 보면
① 계명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야곱(거짓말쟁이)이 변하여 이스라엘(하나님과 겨루어 이겼다.)이라는 이름을 받았습니다. 우리들도 하나님의 자녀로 인정을 받는 순간에 죄의 자녀에서 하나님의 아들로 이름이 변하는 축복이 주어진다는 것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② 야곱은 자손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본문 11절에 보면 “왕들이 네 허리에서 나오리라”는 축복이 있습니다. 이 말씀은 자손의 번영의 축복을 약속하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 받는 성도가 되는 것은 우리에게도 큰 축복이요 은혜이지만 자손까지 축복을 받는 큰 은혜인 것입니다.
③ 야곱은 물질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본문 12절에 “그 땅을 주리라”고 말씀하시며 야곱에게 물질의 축복을 약속하셨습니다. 우리 성도들도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 계명의 축복과 자손의 축복과 물질의 축복을 누리는 복된 성도들이 되시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주의 전의 하루
시 84:10~12
주의 궁정에서 한 날이 다른 곳에서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거함보다 내 하나님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 여호와 하나님은 해요 방패시라 여호와께서 은혜와 영화를 주시며 정직히 행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아끼지 아니하실 것임이니이다 만군의 여호와여 주께 의지하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
다윗왕은 아들 압살롬의 반역으로 인하여 궁중에서 쫓겨나 망명생황을 했습니다. 눈물의 골짜기를 돌아다니던 다윗이 느낀 것은 영혼이 쇠약해 질 때까지 아버지의 성전으로 돌아가서 성전을 지키는 문지기도 좋사오니 속히 그날이 오게 해 달라고 구하고 있는 구구절절 간절한 애원이 본문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세상에서 제일 불쌍한 사람은 고향이 없는 사람입니다. 공산당에 의해서 고향을 빼앗기고 푸른 바다 위에서 뗏목 하나에 매달려 떠도는 피난민을 볼 때 얼마나 불쌍한 사람인가 생각을 하게 됩니다.
6․25 전쟁으로 말미암아 고향을 잃어버리고 40년간이나 북한 고향 땅을 바라보면서 눈물로 세월을 보내는 실향민들의 아픔을 우리는 똑똑히 보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모든 사람들은 마음의 고향, 영혼의 고향이 있습니다. 다윗은 이것을 하나님의 교회 또는 성전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고향이 없이 사는 사람처럼 불쌍한 사람은 세상에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고향을 찾는 성도들은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1. 믿음으로 준비합시다
세상에서도 가장 불쌍한 사람은 믿음이 없이 사는 사람입니다. 세상에게 속고, 친구에게 속고, 부모에게 속고, 자식에게 속고, 남편에게 속고, 부인에게까지 속고서 사람들이 하는 말이 “야! 이 세상 무서운 세상이다. 만물의 찌꺼기보다 더 더러운 것이 인간의 가증한 마음이라고 하더니만 이렇게 사람이 무서울 수가 있느냐?” 하더라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 자신도 모르게 범죄하고, 자신을 저주하고, 결국 자기 자신도 못 믿으며 아무도 믿고 살 수 없다고 하며 한탄을 하며 살아갑니다. 이런 사람은 정말 불쌍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금보다 귀한 믿음을 가지고 어떤 환경에서도 무너지지 않고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예수그리스도를 바라보면서 말씀 위에 서서 신앙생활을 해야 할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중의 하나는 그 마음속에 하나님이 없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천하를 다 얻어서 부귀영화를 누리며 산다고 하더라도 죄악을 먹고 마시는 생활을 한다고 하면 그 사람은 불행한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죄 값은 지옥이기 때문입니다.
2. 하나님을 아버지로 섬기며 교회봉사를 합시다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바로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삼고 교회에 나와 하나님을 섬기고 봉사하는 것을 기쁘게 알며 사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이라고 다윗은 눈물과 시험의 골짜기에서 고백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다윗은 한 나라의 왕이었습니다. 왕이었기에 전쟁이 일어나면 전쟁터에 나가 싸워야 했고 또 많은 백성을 다스리다 보니 가정에도, 국가에도, 사회에도 시험의 풍파가 끝이지 않고 마치 의롭게 살려고 하는 자에게 더 많은 유혹이 있는 것처럼 계속 일어났던 것입니다. 그때마다 다윗은 지쳐 있을 수밖에 없었고 하나님께 범죄하면서 빼앗았던 밧세바마저 고통을 당하는 다윗 왕을 위로를 해 주지 못했습니다. 더욱이 패륜아 압살롬과 간신들의 역모로 말미암아 궁중에서 쫓겨나서(왕위에서 축출 당해서) 이산 저산을 헤매면서 눈물의 골짜기를 방황하고 다닐 때, 다윗에게 제일 먼저 생각나는 것이 하나님의 성전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성도들은 하나님의 성전에서 봉사하는 것이 가장 행복한 순간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3. 기도로 준비를 잘하여야 합니다
다윗 왕은 시험이 끝나고 어서 속히 하나님의 전에 가서 은혜를 받고 하나님을 섬기는 날이 속히 오게 하여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 참새도 제비도 장막의 처마에 보금자리를 만들어 살고 있는데 다윗은 처소가 없어 헤매며 살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괴로웠던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 왕은 “아버지 하나님! 환난의 날, 시험의 날이 어서 그치고 아버지의 존전에 가서 아버지만을 섬기는 날이 오게 해 달라”고 간구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간절히 기도했든지 아버지의 전에서 하루를 사는 것이 다른 곳에서 천 날을 사는 것보다 더 났고, 악인의 장막에서 사는 것보다는 아버지 집에서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라는 간절한 내용의 기도를 하고 있는데, 우리들도 다윗과 같이 하나님을 사랑하고자 하는 마음이 간절하시기를 바랍니다.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을 하고 있습니다. 이미 고인이 되었으나 잊지 못하고 있습니다. 울산시의 개조 아파트에 살다가 돌아가신 한상희 자매가 있습니다. 그녀가 갑자기 중풍병에 걸려 자리에 눕고 결국은 대소변까지 신세를 져야 했습니다. 아시는 바와 같이 병석에서 무슨 꿈이 있고 무슨 소망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그 자매가 전도를 받아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병상에 누워 움직일 수 없기에 가서 친히 학습과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그런데 심방을 갈 때마다 하나님의 집에 가서 예배 한 번 드리고 죽는 것이 소원이라는 것입니다. 임종 무렵에 자녀들의 등에 업혀 교회에 나와 예배를 드리고 얼마 안 있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으셨습니다. 아마 이 자매님도 다윗처럼 하나님의 전을 뜨겁게 사랑하는 마음이 열렸던 것 같습니다.
평안도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어떤 선교사님께서 시골 교회를 가는 중인데 어떤 사람이 소가 메고 다니는 멍에를 쓰고 자식은 아버지를 소로 삼고 쟁기를 갈고 있었습니다. 소가 갈아야 할 밭을 아버지와 아들이 일구는 것을 보고 이상해서 가까이 가서 보았습니다. 가보니 잘 아는 장로님이었습니다. “장로님, 지금 하는 일은 소나 짐승이 해야 하는데 어찌 장로님께서 직접 하십니까?”고 물었습니다. 장로님은 “얼마 전에 교회를 짓게 되는데 돈은 없고 해서 제가 소를 팔아서 헌금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 말 속에 오히려 기쁨과 감사가 차고 넘쳤다고 했을 때 선교사님께서 감동을 받았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교회를 사랑하되 영혼이 쇠할 때까지 사랑한 다윗의 심정이 여기 장로님 마음속에도 역사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결 론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눈이 있고, 귀가 있고, 마음이 있는 성전, 피로 값 주고 사신 제단, 그리스도의 몸이 되신 교회, 그리스도의 머리가 되시는 하나님의 성전, 이 교회를 열심히 사랑하고 그리워하고 섬기면 우리에게 어떤 복이 옵니까? 본문 4절에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집에 거하는 자는 복이 있는 자라”.
또한 11절에는, 하나님께서 해와 방패시기 때문에 은혜와 영화를 갚아 주시리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2천년 동안 나라 없는 서러움 속에 살았습니다. 나라 없이 세계에 흩어져 살았습니다. 고향이 없는 민족으로 살았습니다. 그러나 저들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잃지 않고 주일이 되면 하나님 앞에 나아가 기도하고 섬기는 일을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인지 하나님께서 1948년에 잃어버렸던 나라를 다시 찾게 해 주셨고 지금까지 이스라엘로 번영을 꽃피우고 있는 것을 우리가 목도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세우신 교회는 우리 마음의 고향입니다. 영혼의 고향입니다. 그래서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우리가 교회를 위하여 열심히 봉사하고 섬기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켜주시고 생활과 환경, 환난과 죄악과 재앙으로부터 사탄의 궤계로부터 보호해 주심을 확실히 믿고, 생활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다윗은 왕이었지만 매우 겸손한 분이었습니다. 그의 뿌리에서 솔로몬이 출생하고 또 예수 그리스도께서 탄생하셨습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다윗처럼 하나님의 교회를 열심히 사랑하고 구원받은 심령들이 끊임없이 하나님의 은혜와 진리를 사모할 때 세상 사람들이 누릴 수 없는 놀라운 축복을 누릴 수 있음을 확신하는 바입니다.
왜 무서워 합니까?
마 14:22~36
예수께서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사 자기가 무리를 보내는 동안에 배를 타고 앞서 건너편으로 가게 하시고 무리를 보내신 후에 기도하러 따로 산에 올라가시다 저물매 거기 혼자 계시더니 배가 이미 육지에서 수리나 떠나서 바람이 거슬리므로 물결을 인하여 고난을 당하더라 밤 사경에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시니 제자들이 그 바다 위로 걸어오심을 보고 놀라 유령이라 하며 무서워하여 소리지르거늘 예수께서 즉시 일러 가라사대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만일 주시어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한대 오라 하시니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가되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 소리질러 가로되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하니 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저를 붙잡으시며 가라사대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하시고 배에 함께 오르매 바람이 그치는지라 배에 있는 사람들이 예수께 절하며 가로되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 하더라 저희가 건너가 게네사렛 땅에 이르니 그 곳 사람들이 예수신 줄을 알고 그 근방에 두루 통지하여 모든 병든 자를 예수께 데리고 와서 다만 예수의 옷가에라도 손을 대게 하시기를 간구하니 손을 대는 자는 다 나음을 얻으니라
우리 나라에는 사계절이 변화무쌍한 천혜의 계절이 있습니다. 그러기에 농산물이나 동물의 성장에도 큰 영향을 준다고 보고하고 있습니다. 사계절이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입니다. 꽃을 피우는 따스한 봄이 있으면 열매를 거두는 풍성한 가을이 있습니다. 무더위에 땀을 흘려야 하는 여름이 있는가하면 모든 것을 움츠려 뜨리는 겨울도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은 광야에서 오병이어의 기적으로 모든 사람들이 다 배불리 먹고 난 다음 배를 타고 순풍에 항해하던 중 일어났던 사건입니다. 제자들은 아직도 흥분과 감격이 채 가시지 않은 때였습니다. 건너편에는 베드로의 고향이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홀로 산에 가시고 제자들만이 배를 타고 가던 중이었습니다. 사람들은 무슨 일을 하려면 나름대로 굉장히 열심히 일합니다. 그러나 일이 끝나면 다음은 그냥 주저앉고 맙니다. 지난 추석에도 고속도로를 통해 고향을 찾다가 차가 막힌다고 노변에서 음식을 먹고 난 다음 그대로 쓰레기나 찌꺼기를 내버리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묘소를 참배한다는 이유로 제물을 갖고 가서 먹기는 자기들이 열심히 먹고 마시고 난 다음 쓰레기를 구석구석에 내버리고 가서 쓰레기 썩는 냄새가 진동한다면 자기들은 좋을지 모르나 조상을 위한다는 그 열심 때문에 조상은 썩은 냄새나 찌꺼기 음식물이나 먹는 신세가 되고 말 것입니다. 자기들은 배부르다고 예수님을 버리고 떠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처럼 일을 하시기 전에도 기도하고 일을 마친 후에도 기도하는 법입니다. 예수님과 헤어져 배를 타고 가던 자들은 신바람이 나고 순풍에 돛달고 희망의 나라로 가는 듯 했으나 갑작스러운 광풍을 만나게 됩니다. 이 장면에서 주는 교훈과 I. M. F.로 당하는 환난을 극복하는 우리의 자세에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1. 인생살이는 황량한 사막 같다는 교훈이 있습니다
제자들은 광야에서 마실 물도 먹을 식량도 없어서 큰 환난에 처했습니다. 사람들은 이만 명의 대식구였습니다. 그 많은 식구들을 먹이기 위해서는 사정이 몹시 좋지 않았습니다. 또 그들이 당장 빵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경제가 도저히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여건도 아주 나빴습니다. 인간의 방법이 속수무책일 때 예수님은 오병이어의 도시락으로 이만 여명의 군중들을 배부르게 먹이고 남은 조각이 열두 광주리나 되었습니다. 여기 경제의 원칙이 있습니다. 인간의 노력이나 해결은 한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시고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능력만이 경제의 희생을 가능케 한다는 원칙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지난날 보릿고개의 극복이 사람들의 노력이나 정치적 방법인 경제정책의 성과가 아니라 하나님의 축복이었음을 믿어야 합니다.
2. 호사다마(好事多魔)라는 교훈입니다
좋은 일 뒤에 궂은일이 생긴다는 뜻입니다. 예수님도 광야에서 40주야 금식기도를 마치신 후 마귀의 시험을 당하셨습니다. 우리에게는 보릿고개라는 민족사에 대환난의 기간이 있었습니다. 다시 기억하고 싶지 않고 자손에게 절대로 물려주어서는 안될 것임에도 이제 우리는 또 그때를 당하기 직전에까지 와있습니다. 제가 이 설교를 작성하는 시간에도 초등학교 교장이 명퇴를 비관 자살했고, 한 어머니가 빚독촉에 딸을 죽이고 자살했습니다. 풍요와 번영으로 인한 사치와 허영과 낭비가 지금 이렇게 곤두박질했습니다. 축복이 하나님께로 옴을 망각한 민족에게 주시는 교훈이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어떠했습니까? 광야에서의 기적이 마치 자기들의 능력인양 자기만족에 도취되어 유람선이라도 탄 듯 항해하다가 큰 풍파를 만났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상식과 경험과 터득한 지식으로 해결코자 백방으로 노력했으나 바람과 파도는 더 강하게 불고 파도는 배를 삼키려합니다. 정말 속수무책입니다. 그런데 그들에게도 문제가 하나 있었습니다. 여기에 예수님이 계시지 않음을 잊었다는 사실입니다. 자기 도취, 자기 만족에 예수님이 계시지 않다는 사실도 잊은 채 그들은 행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실수 속에 실패 속에 숨겨진 큰 비밀임을 우리는 깨달아야 합니다. 공산주의 몰락의 큰 원인은 경제의 몰락이었고, 경제몰락의 원인은 하나님 말씀의 원리를 사람들의 원칙으로 바꾸려 하였기 때문에 공산주의는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제자들의 실패도 예수님이 안 계셔도 우리가 할 수 있다는 오만과 교만으로 큰 환난의 위기에 처하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네 경제가 바로 그렇습니다. 옛날의 배고플 제 헐벗었을 제의 쓰라린 고통을 잊었습니다. 하나님께 감사치 않습니다. 주신 분이 뉘신 줄 잊었습니다. 그러기에 오늘 슬픔과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과거를 잊은 민족은 망합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그날을 기념하여 지키며 아이들에게 가르치라”고 하셨습니다. 과거가 달콤하여 잊지말라고 함이 아니라 쓰라리고 아팠기에 기념하여 교훈을 삼으라는 말씀입니다.
3. 하나님께로 찾아 나오는 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고난 당할 때에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 오셔서 제자들에게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25~)고 하십니다. 오늘 우리의 믿음의 정도를 본문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① 예수님을 유령으로 보았습니다. ② 예수님을 시험하는 믿음이 있습니다. ③ 의심하는 믿음이었습니다. 마치 오늘 우리의 믿음과도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31) 그리고 배에 오르시니 바람과 바다가 잔잔해졌습니다. 공포도 두려움도 다 끝났습니다. 그 때에 뱃사람들의 고백이 여기 있습니다.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33)입니다. 하나님은 “여섯 가지 환난에서 너를 구원하시며 일곱 가지 환난이 와도 그 재앙이 네게 미치지 않게 하리라”(욥 5:19)고 욥에게 약속하셨습니다.
이제 우리가 당하고 있는 I. M. F.의 사슬에서 경제위기의 환난에서 풀릴 수 있는 비결이 여기에 있습니다. ① 불의를 제거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 오라 네가 불의함을 인하여 엎드려졌느니라 너는 말씀을 여호와께로 가지고 돌아와서 아뢰기를 모든 불의를 제하시고 선한 바를 받으소서”(호 14:1~)하고 호세아 선지는 외칩니다. 니느웨 백성이 다시 살게 된 것도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돌아섰을 때였습니다. ② 환난날에 사는 길은 오직 여호와만 의지하는 것입니다. “환난 때에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께 돌아가서 찾으매 저가 그들의 만난바가 되리라”(대하 15:4)고 하십니다. “의인이 외치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저희의 모든 환난에서 건지셨도다”(시 34:7)고 하셨습니다. 이 나라의 경제와 정치적 위기와 환난의 폭풍을 잔잔케 할 수 있는 방법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③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자에게 머리가 되고 꼬리가 안되게 하매 남에게 꾸어주되 꾸어먹지 않게 하신다(신 28:12)고 하셨습니다.
결 론
마가복음 4장을 읽다보면 큰 광풍을 만난 배와 제자들이 등장합니다. 건너편으로 가다가 돌풍을 만났습니다. 제자들은 야단을 치건만 예수님은 평안히 주무셨습니다. 뱃사람과 제자들만이 문제해결을 도모하여 난리였습니다. 분주하고 시끄러웠습니다. 그들은 두렵고 불안하고 무서웠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한가지 잊은 것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여기 계시다는 엄연한 사실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왜 무서워하느냐. 어찌하여 믿음이 없느냐?(막 4:40) 아 멘
소를 몰고 가는 정주영
삼상 6:7~9
그러므로 새 수레를 만들고 멍에 메어 보지 아니한 젖 나는 소 둘을 끌어다가 수레를 소에 메우고 그 송아지들은 떼어 집으로 돌려 보내고 여호와의 궤를 가져다가 수레에 싣고 속건제 드릴 금 보물은 상자에 담아 궤 곁에 두고 그것을 보내어 가게 하고 보아서 궤가 그 본 지경 길로 올라가서 벧세메스로 가면 이 큰 재앙은 그가 우리에게 내린 것이요 그렇지 아니하면 우리를 친 것이 그 손이 아니요 우연히 만난 것인 줄 알리라
오늘의 말씀은 사무엘시대의 역사적 사건을 살 오늘 이 시대에 주시는 하나님의 섭리와 경륜을 발견하면서 교훈을 삼고자 합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범죄할 때에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징계가 반드시 임하였습니다. 오늘 이스라엘은 종교적으로 병들었고 정치적으로 병이 들었습니다. 이 시대는 왕정시대가 아니라 사사시대로 하나님은 이렇게 경고하셨습니다. “내가 엘리의 집에 대하여 말한 것을 처음부터 끝까지 그날에 그에게 다 이루리라. 내가 그 집을 영영토록 심판하겠다고 그에게 이른 것은 그의 아는 죄악을 인함이니 이는 그가 자기 아들들이 저주를 자청하되 금하지 아니하였음이니라. 그러므로 내가 엘리의 집에 대하여 맹세하기를 엘리집의 죄악은 제물이나 예물로나 영영히 속함을 얻지 못하리라 하였노라”(삼상 3:12~14)고 경고하셨습니다. 엘리 사사의 집이 하나님 보시기에 부정했다면 나라가 부정이요, 엘리 제사장의 신앙이 잘못되었다면 이스라엘의 신앙이 잘못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블레셋을 세워 이스라엘을 공격했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찾기보다는 블레셋과의 전투에만 신경을 썼습니다. 그러나 속수무책이었습니다. 그 때에 이스라엘의 진영에서는 패전의 원인을 규명하다가 하나님의 법궤가 없기에 패전했다고 생각하고 법궤를 가져 왔습니다. 백성들의 마음에서조차 잊어버린지 오랜 법궤였습니다. 그러나 법궤를 메고 싸윘으나 이제는 법궤마저 빼앗기고 엘리의 두 아들과 모든 병사가 떼죽음을 당하고 말았고 이 비보를 들은 엘리는 의자에서 자빠져 목이 부러져 죽고 말았습니다.
블레셋은 벱궤를 빼앗아 아스돗으로 옮겨 다곤 신전에 놓았는데, 다음날 다곤 신상이 쓰러져 목이 부러졌습니다. 부근 마을에 독종이 퍼졌습니다. 법궤를 가드로 옮겼으나 독종이 퍼지므로 에그론으로 보냅니다. 여기에도 사망의 재앙과 독종이 퍼집니다. 그래서 복술가들의 말을 따라 하는 수 없이 법궤를 이스라엘로 돌려보내기로 했습니다.
새 수레에다 법궤를 싣고 멍에 메어보지 아니한 송아지가 달린 어미소 두 마리로 끌게 했습니다. 어린 새끼 송아지를 집에 둔 채 어미소는 이스라엘로 법궤를 메고 갑니다. 새끼의 엄마를 찾는 울음소리에도 뒤돌아보지 않고 갔습니다. 여기에 교훈이 있습니다.
지난 번, 현대 그룹 명예회장 정주영씨는 오 백 마리의 소를 몰고, 저 철의 장막을 유유히 분단 반 백 년만에 넘어갔습니다. 마치 시골 목동이 소를 몰고 도랑을 넘듯이 시골 할아버지처럼 거침없이 당연하듯이 자유의 다리를 건너갔습니다. 세계 모든 언론들은 이 광경을 엄청난 사건으로 보도했습니다. 여기 우리에게 주시는 묵시가 있습니다. 누가 삼팔선을 그었으며 휴전선을 또 누가 설정했느냐 입니다. 강대국의 흥정이나 유엔의 결정보다 하나님의 섭리였습니다.
1. 이스라엘의 환난, 전쟁, 죽음이 주는 교훈이 있습니다
왜 이 지경이 되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한 까닭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배신한 까닭입니다. 하나님을 경외치 않은 까닭이었습니다. 그 결과로 블레셋의 침략을 받았으며 백성들은 물론 엘리 사사까지 죽고 말았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진노요 심판이었습니다.
2. 법궤를 빼앗겼습니다
법궤는 하나님의 상징적 의미보다 더 강렬한 실존적 하나님의 권위와 임재하심의 실증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이스라엘이 강할 때에는 항상 법궤가 중심이었고, 전쟁 시나 행군 시에는 항상 법궤가 맨 앞에 행하였습니다. 이것은 신앙 중심적 삶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이미 법궤를 잊었습니다. 버렸습니다. 귀찮은 존재로 여겼습니다. 그들의 하나님 중심이 믿음이 아닌 인간 중심의 자기들의 실력을 과시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앞에는 하나님을 대신하여 인간 장군이 앞장을 섰습니다. 이것은 실패의 원인이었습니다. 하나님께 회개하며 부르짖기는커녕 나무로 만든 법궤만을 앞세우는 방법까지 동원했지만 인간의 그러한 방법에 하나님이 속으실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법궤를 빼앗겼습니다. 하나님이 안 계신 이스라엘은 필경 망하고 말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술수와 계교에 놀아나지 아니하십니다. 필요할 때에만 찾는 그런 사람들의 하나님이 되시지는 않습니다.
3. 하나님의 법궤는 블레셋에서 크게 역사하였습니다
아스돗, 가사, 아스드론, 가드, 에그론에서 우상들을 부러뜨리셨으며 독종을 전역에 퍼뜨렸습니다. 블레셋은 이 재앙이 하나님의 법궤의 능력임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돌려보내기로 했습니다. 하나님은 안 믿으나 하나님의 능력은 두려워하여 벌벌 떨었습니다.
4. 이스라엘에 돌아오신 하나님은 제사를 받으셨습니다
법궤를 싣고 온 수레를 다 패고 두 암소를 잡아 번제와 제를 드림으로 용서를 받았습니다. 죄는 사람이 지었는데 그 속죄의 제물은 법궤를 블레셋에서 이스라엘로 옮긴 소가 희생의 제물이 되어 하나님과 이스라엘과의 담을 헐어버렸습니다. 여기 소의 희생이 있습니다. 여기 소의 충성이 있습니다. 인간에게는 희생이요, 하나님께는 생명의 제물이 된 두 소들이야말로 인간보다 훨씬 하나님께 성실하며 거룩한 제물이었습니다. 화해의 제물이 되었습니다. 십자가의 도가 여기에도 있었습니다.
5. 정주영씨가 소를 몰고 북쪽으로 갔습니다
고향으로 갔습니다. 왜 갔나요? 굳게 닫힌 문을 열기 위해서 입니다. 원수와 손잡고 화목하기 위해 갔습니다. 사랑을 주기 위해서 갔습니다. 후에 오 백마리 더 추가한 천 마리의 소 뱃속의 새끼 송아지까지 그리고 60대의 트럭을 가져다주려고 갔습니다. 왜 갔습니까? 17세 때 가난이 싫어, 아버지가 팔아다 둔 소 값 70원을 훔쳐 남쪽으로 도망친 그 돈을 갚으려고 갔습니다. 66년이 흘러간 지금 한국 제일의 큰 부자가 되어 고향에 소 천 마리를 끌고 갔습니다. 아버지 무덤에 사죄하기 위해 갔습니다. 왜 하필 소입니까? 쌀을 달라는데 비료를 달라는데 고집스럽게 소를 어렵게 몰고 갔을까요. 소 판돈 훔쳤으니 소 값을 치루기 위해서라고요? 아닙니다. 그것은 너무 쉬운 대답입니다. 속죄하기 위해서입니다. 작게는 아버지께, 크게는 고향에. 더 크게는 하늘에 속죄하기 위해 소를 몰고 갔습니다. 그 소들은 멍에를 메어보지 못한 소들이었습니다. 하나님께 드려진 벳세메스의 소들은 멍에를 메어보지 못한 소들이었다고 했습니다. 정주영 회장은 하나님을 믿는 성도는 아닙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하나님께 제사 드리기 위한 제물을 암소로 멍에를 메지 않은 것으로 예비하였듯이, 정주영 회장도 멍에를 한번도 메지 못한 수소와 암소를 몰고 갔던 것입니다. 그 소들은 멍에를 멜 줄 모르기에 농사에 쓰임보다는 식용으로 잡아먹힐지도 모릅니다. 이 소들이 고향을 떠날 때 자기들이 어디로 가는지 왜 가야하는지 아무도 말해 주지 않았습니다.
군사분계선을 넘으면서 ‘음매’하고 울던 그 울음소리를 여러분은 들으셨습니까? 다시 돌아오지 못하는 다리를 건너가는 그 소들 그들은 다시 고향으로 못 옵니다. 서산 고향에는 부모 형제가 이산의 아픔을 안고 슬퍼할 것이고 북으로 간 소들은 이산가족의 한을 품고 살다 죽고 말 것입니다. 여기 또 하나의 이산의 가족이 있습니다. 여기 하나님의 거룩한 섭리가 있습니다. 거룩한 산 제물이 된 천 마리의 소들이 제물이 되므로 이 분단 조국에 통일의 숙원도 풀리기를 바랍니다.
결 론
다시 법궤가 돌아 온 후 20년간 태평성대를 이스라엘은 누리게 됩니다. 바알신과 아스다롯신을 버리고 전심으로 여호와께 돌아오므로 하나님이 베푸신 축복이었습니다. 7장을 보면 사무엘은 이스라엘 백성을 미스바로 모이게 합니다. 금식하며 기도하기 위해서 모이자고 선포했습니다. 쉬지 말고 부르짖어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오늘 우리 나라는 경제 대환난 위기를 맞고 있습니다. 성전을 있는데 법궤가 없습니다. 신자는 있는데 믿음이 없습니다. 소원은 있건만 기도가 없습니다. 분단 조국 강산을 소들이 넘어갔듯이 이산가족들이 이제는 넘어가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인자가 가까이
마 24:32~36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 그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을 아나니 이와 같이 너희도 이 모든 일을 보거든 인자가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 줄 알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 일이 다 이루리라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내가 이제 너희들을 떠나가리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시몬 베드로가 말하기를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라고 물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길 “네가 지금은 따라 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오리라”고 하셨습니다. 이때 베드로가 말하기를 “주여 내가 지금은 어찌하여 따를 수 없습니까? 주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겠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요한복음 14장에 보면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을 떠나셔서 하늘나라를 예비하시고 제자들을 데리러 오시겠다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1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40일 동안 많은 사람들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감람산에서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하늘로 올려 가셨습니다. 이때 예수님의 제자들이 자세히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데, 흰 옷 입은 두 사람이 말하기를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리우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하늘 나라로 가셨는데 다시 오시리라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9장 27절에서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 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없이 자기를 바라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고 했습니다.
요한 계시록 22장 10절에서는 “또 내가 말하되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인봉하지 말라 때가 가까우니라 불의를 하는 자는 그대로 불의를 하고 더러운 자는 그대로 더럽고 의로운 자는 그대로 의를 행하고 거룩한 자는 그대로 거룩 되게 하라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라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을 떠나가시지만 이 세상에 다시 오시리라는 것입니다. 오시는데 분명히 오시리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말씀 중에 보면 인자가 올 때가 가까워 왔다는 것입니다. 인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말합니다. ‘인자가 가까이’라는 말은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다시 오실 날이 가까워 왔다고 하는 것입니다. 본문 33절에 보면 ‘곧 문 앞에 이른 줄 알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아주 가까이를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늘 나라로 가시며 다시 오시리라 말씀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실 날이 곧 가까워 왔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보면 예수님 오실 날이 가까이 온 때에는 어떤 징조가 있는지 예수님 오실 날이 가까워 왔을 때 성도들의 삶은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1. 인자가 오실 때의 현상은 예수께서 오실 때의 시기를 말합니다.
이 때는 언제입니까? 본문 36절에 보면 예수님 오실 때는 아무도 모른다고 했습니다. 하늘의 천사들도 모르고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신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37절에 보면 사람들의 사는 형편을 보면 알리라고 했습니다. 37절에 보면 인자가 오실 때 노아의 때와 같으리라고 했습니다.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리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인생의 타락상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실 때 인간의 모든 세상이 노아 때와 같이 타락한 세상이 되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얼마 전에 어떤 영화작가가 하는 말은 들었습니다. 영화를 한편 만들려면 그 영화의 내용에 작가의 의도와 목적이 분명해야 하는데 지금은 그렇게 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영화를 보고 그 자신들이 스스로 느끼고 생각하게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까 영화가 별 의미를 주지 못하고 보는 사람들이 볼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고 합니다. 요사이 춤을 추는 것을 보시기 바랍니다. 별 의미가 없습니다. 손과 발과 몸과 머리와 어깨는 자유자재로 움직이면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인간의 향락을 찾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마음대로 살아가고 자기 좋은 대로 살아갑니다. 자기 뜻대로 살아갑니다. 삶의 방향이 없습니다. 의미도 없습니다. 목적도 없습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바로 방탕한 세상, 타락한 세상을 의미합니다. 이와 같은 상태가 되는 날 인자가 오실 날이 가까워 온 줄을 알라는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이 오실 날이 아주 가까워 왔습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일은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노아 홍수 때 아무리 노아가 소리쳐도 깨닫지 못했습니다. 아무리 소리쳐도 모르는 것입니다. 여기서 문제는 지금도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 나라에 암으로 인해 사망하는 일이 많이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조기에 발견하면 90%이상은 다 고친다고 합니다. 그런데 대개의 경우 초기 때는 모른다는 것입니다. 2기가 되면 그때서야 알게되고 그 때는 이미 늦었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다시 오실 날이 노아 때와 같지만 사람들은 이를 깨닫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멸망의 날이 와도 깨닫지 못하고 결국은 멸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이 어느 때 입니까? 지금 인자가 올 때가 가까워 왔습니다. 이것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믿으시기 바랍니다.
2. 인자가 가까이 오셨을 때의 생활
1. 인자가 가까이 왔을 때의 삶은 깨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복된 삶이 될 줄 믿습니다. ‘깨어있다’라는 이 말은 정신을 차리고 있음을 말합니다. 좀더 표현하면 졸지 아니해야 합니다.
요사이 우리 나라에 자동차가 많아지면서 사고도 많이 나고 있습니다. 왜 사고가 많이 납니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이중에 졸다가 나는 사고가 많습니다. 졸다가 다른 길로 가거나 아니면 길을 벗어나 남의 차를 받는 이런 일로 사고를 내는 경우를 종종 봅니다. 자거나 졸면 예기치 않은 큰 사고를 당할 수도 있습니다. 본문의 말씀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만일 집주인이 도적이 어느 지점에 온 줄 알았으면 깨어 있어 그 집을 뚫지 못하게 하였으리라”
그럴 것입니다. 도적이 언제쯤 올 줄 알면 도적을 잡으려고 모든 것을 예비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도적이 언제 올 줄 아십니까? 모릅니다. 모르고 자다가 도적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다시 오시는데 언제인지 알지 못하게 오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깨어 있으라, 예비하고 있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성도들은 깨어 있어야 합니다. 예비하고 있어야 합니다.
바울 사도는 “형제들아 때와 시기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쓸 것이 없음은 주의 날이 밤에 도적 같이 이를 줄을 너희 자신이 자세히 앎이라. 저희가 평안하다 안전하다 할 그 때에 잉태된 여자에게 해산 고통이 이름과 같이 멸망이 홀연히 저희에게 이르리니 결단코 피하지 못하리라. 형제들아 너희는 어두움에 있지 아니하매 그날이 도적같이 너희에게 임하지 못하리라”(살전 5:1)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근신하여 깨어 있으면 도적이 못 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행여나 신앙이 잠들었습니까? 깨어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믿음으로 사시기 바랍니다. 기도에 잠들었습니까? 깨어 일어나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찬송에 잠들었습니까? 깨어 일어나 찬송하는 삶이 되시기 바랍니다. 사탄이 물러갈 줄로 믿습니다. 악한 자가 침범하지 못할 줄 믿습니다. 날마다 승리할 줄 믿습니다. 예수님 오시는 날에 기쁨으로 예수님 앞에 나아가 영광 중에 예수님을 맞이하게 될 줄 믿습니다. 주와 더불어 영광 중에 영원히 살 줄로 믿습니다.
2. 충성된 종이 되어야 합니다.
인자가 오실 때가 가까운 때에 충성된 종이 되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충성은 내 할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온 힘을 다하여 하는 것은 정성을 다하는 것입니다. 열심히 행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5장에 보면 어떤 사람이 타국(他國)엘 갑니다. 그 종들을 불러서 각기 그들의 재능(才能)대로 하나에게는 금 다섯 달란트, 또 하나에게는 두 달란트를 남은 하나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고 떠났습니다. 다섯 달란트 받은 사람은 바로 가서 그것으로 장사하여 다섯 달란트를 남겼습니다. 두 달란트를 받은 사람은 그 두 달란트로 장사하여 두 달란트를 남겼습니다.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은 가서 땅을 파고 그 돈을 감추어 두었습니다.
오랜 후에 그 종들의 주인이 돌아 왔습니다. 주인이 돌아와서 계산을 했습니다. 다섯 달란트 받았던 자는 다섯 달란트를 더 가지고 와서 말하기를 “주여 내게 다섯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다섯 달란트를 남겼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주인이 말하기를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니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 할 지어다”라고 했습니다. 두 달란트 받았던 사람도 다섯 달란트 받은 종과 같은 말을 했고 주인도 같은 말로 답변하셨습니다. 이제 한 달란트 받았던 사람이 왔습니다. 한 달란트를 받았던 사람이 말을 합니다. “주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 두려워하여 나가서 당신의 돈을 땅에 감춰 두었나이다. 보소서 당신의 것입니다”라고 했습니다. 이때 주인이 말했습니다. “이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나는 심지 않은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데서 모으는 줄로 네가 알았느냐 그러면 제가 마땅히 내 돈을 이자를 주는 자들에게 주어 이자를 받게 하지 아니 하겠느냐”고 했습니다. 그리고는 “그에게서 그 한 달란트를 빼앗아 열 달란트를 가진 자 에게 주어라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어 쫓으라 거기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라고 했습니다.
충성된 자는 복되고 악하고 게으른 종은 화와 재앙을 당하리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귀한 사명 주셨습니다. 또 주십니다. 우리가 받은 사명 어떻게 해야 합니까? 죽도록 충성하는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복을 주실 줄 믿습니다. 더 많은 것으로 맡기시며, 더 좋은 것을 주실 줄 믿습니다. 우리 예수님께서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 칭찬하실 줄 믿습니다.
3. 지혜로운 종이 되어야 합니다.
인자가 가까이 온 것을 보면 지혜로운 종이 되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지혜로운 종은 모든 일을 조리있게 잘 처리하고 이 세상을 현명하게 살아갑니다.
“지혜 없는 자 같이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 같이 하여”(엡 5:15)라고 했습니다. 이는 지혜 있는 자가 되어 지혜 있는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 오실 날이 가까워 온 이때에 성도는 무엇보다 지혜로운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럼 본문의 말씀에 어떤 사람을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하였습니까? 종이 그 집주인의 사람들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주면 지혜로운 사람이라 했습니다. 때를 따라 양식을 주는 사람이 지혜있는 사람입니다. 어느 때에 무엇을 할 줄 아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잠언 10장에 보면 “지혜로운 아들은 아비로 기쁘게 하거니와 미련한 아들은 어미의 근심이니라”고 했습니다. 잠언 14장 1절에 “무릇 지혜로운 여인은 그 집을 세우되 미련한 여인은 자기 손으로 그것을 허느니라”고 했습니다. 본문 말씀에도, “주인이 그 모든 소유를 저에게 맡기리니 만일 악한종이 마음에 생각하기를 주인이 더디 오리라하여 동무들을 때리며 술친구들로 더불어 먹고 마시게 되면 생각지 않은 날 알지 못하는 시간에 그 종의 주인이 이르러 엄히 때리고 외식하는 자의 받는 법에 처하리니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고 했습니다. 아직도 예수님께서 오시지 않을 줄 알고 불의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 오실 날이 가까운 것을 알고 지혜로운 삶을 사십시다. 내가 할 일이 무엇인지 내 사명이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이런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 착하고 충성된 종이 되어 칭찬받고 더 좋은 것을 받고 주인의 즐거움에 함께 참여하십시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 오실 날이 가까이 왔습니다. 그런데 베드로후서 3장에 보면 “말세에 기롱하는 자들이 와서 자기의 정욕을 좇아 행하며 기롱하여 가로되 주의 오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뇨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할 때와 같이 그냥 있다 하니 이는 하늘이 옛적부터 있는 것과 땅이 물에서 나와 물로 성립한 것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 것을 저희가 부러 잊으려 함이로다”라고 했습니다. 또 “이로 말미암아 그때 세상은 물의 넘침으로 멸망하였으되 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간수하신 바 되어 경건치 않은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둔 것이라”고 했습니다. 진정 예수님 오실 날이 멀지 않았습니다. 우리 모두 깨어 있는 삶이 되십시다. 충성된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지혜로운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여호와 하나님께로부터 큰 은혜와 복이 있을 줄 믿습니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라고 칭찬하실 줄 믿습니다. 더 많은 것을 주시고, 더 좋은 것을 주시고,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 때 큰 은혜 주실 줄 믿습니다. 이 은혜 충만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성령을 선물로
행 2:37~47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가로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 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하고 또 여러 말로 확증하며 권하여 가로되 너희가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 하니 그 말을 받는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제자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인하여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고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사도행전 1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40일 동안 세상에 계시다가 하늘로 올라가십니다. 이때 제자들에게 분부하시기를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 바 아버지의 약속한 것을 기다리라”고 했습니다. “세례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셨습니다. 이 말을 들은 제자들은 사람들의 눈을 두려워하면서도 매일 모이기를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모이기를 10일 동안 했습니다. 10일째 되는 날입니다. 이 날이 오순절입니다. 이는 유월절 후에 50일만에 되는 절기로 오순절이라고 불렀습니다. 이날 마가의 다락방에 120명의 성도들이 모였습니다. 베드로가 설교를 했습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의 약속하신 성령이 임하기를 간절히 열망하고 열망했습니다. 이 때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했습니다. 성령이 가득히 임한 것입니다. 그리고 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었습니다. 불의 혀는 아주 뜨거운 제일 뜨거운 상태를 말합니다. 불은 성령이 충만하게 임할 때 아주 뜨거운 불이 임한 것입니다.
부흥사이며 신학교를 세우고 많은 전도자를 길러낸 무디가 있습니다. 어려서 공부를 제대로 못했고 구두방에서 구두를 수선하며 구두 짓는 방법을 익히고 있었습니다. 무디가 교회를 나오게 되었습니다. 얼마 후 목사님을 찾아가서 주일학교 교사를 시켜 달라고 했습니다. 목사님이 이 무디를 시험해 보았습니다. ‘학교는 어디 나왔느냐?‘고 물으니 ‘학교를 못나왔습니다’, ‘그러면 말을 좀 해 보라’고 하니까 말을 더듬는 것입니다. 그래서 안되겠다고 했습니다. 무디 소년은 기어이 교사를 하게 해 달라고 했습니다. 목사님은 하는 수 없이 교사직분을 허락하면서 한 명도 없는 반을 하나 만들어 주었습니다. 이가 주일학교를 크게 부흥시켰으며, 세계적인 부흥사가 되었으며, 수십만의 사람들을 예수님께로 인도했습니다. 이 원인이 어디 있습니까? 하루는 무디가 야산에서 나무를 붙들고 기도를 했습니다. 얼마나 온힘을 다해 기도했는지 그가 붙들었던 나무가 뽑혀졌습니다. 나무를 붙들고 강가에 떨어졌습니다. 이때 무디에게 성령이 충만하게 임했습니다. 무디에게 뜨거운 불이 임했던 것입니다. 뜨거워서 얼마나 뒹굴었는지 모른다고 합니다. 이때부터 무디가 복음을 전하고 기도하면 놀라운 이적과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말씀을 듣는 사람들이 가슴을 찢고 애통하며 하나님께로 돌아왔습니다.
오순절 날 마가의 다락방에 있던 성도들에게 성령이 충만하게 임했습니다. 뜨거운 불이 임했습니다. 이때 이들은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의 말하게 하심을 따라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했습니다. 이에 어떤 사람들은 이 사실을 보고 의심이 생겨서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 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조롱하여 말하기를 저희가 새 술에 취했다고 했습니다. 이에 베드로가 일어서서 소리를 높여 말했습니다. 유대인들과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들아 이 일은 너희로 알게 하리라고 했습니다. 지금은 때가 제 3시(오전9시)니 너희들의 생각과 같이 이 삶들이 술에 취한 것이 아니라 이는 선지자 요엘이 예언한대로 성령을 받은 것이라 했습니다. 요엘이 증거하기를 하나님이 말세에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 부어 주리니 했는데 이 약속이 이루어졌다고 했습니다.
사도행전 2장 21절에 보면 베드로는 이렇게 설교했습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고 했습니다. 그리고는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말을 들으라 너희도 아는바와 같이 하나님께서 나사렛 예수로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너희 가운데서 베푸사 너희 앞에서 그를 증거 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어 주었는데 너희가 법 없는 자들(로마)의 손을 빌어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사망의 고통을 풀어 다시 살리셨다고 했습니다. 어떻게 하나님께서 살리십니까? 이는 예수께서 사망에 매여 있을 수 없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그리스도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으나 예수 그리스도 사망에 매여 있을 수 없는 생명이시기에 다시 살아났습니다.
곡식의 씨를 땅에 심으면 이것은 땅속에서 죽습니다. 그러나 생명이 있는 씨앗은 죽는 것이 아니라 다시 살아나 싹으로 올라옵니다. 베드로는 사도행전 2장 32절에서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이 예수 그리스도를 높이시매 이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가 보고 듣는 이것을 다시 말씀드리면 성령을 부어 주셨다고 했습니다. 성령을 부어주셨다고 하는 것은 소낙비가 장마 비로 넘치게 부어주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베드로가 설교를 마쳤을 때 여기 모였던 모든 사람들이 마음에 찔림을 받고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와서 묻기를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했습니다. 베드로가 말합니다.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했습니다.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라는 것입니다.
성령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성령은 히브리어로 ‘루하’ 영어로는 Holy spirit으로 호흡, 바람, 숨결, 생기를 말합니다. 헬라어로는 ‘프뉴마’로 숨을 쉰다, 불타다 라는 뜻으로 인간의 육체에 생명을 주는 생명력 신앙은 내 뿜는 신앙을 의미한다. 이는 하나님의 영이시니 이 성령을 마지막 때에 성도들에게 물 붓듯이 충만하게 부어 주시리라는 것입니다.
성령이 임하므로 죽었던 심령이 다시 살고 하나님의 권능으로 능력 되게 살아가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참 복되고 영광된 일은 이 성령을 선물로 주시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성령을 충만하게 주시는데 값없이 주시리라는 것입니다 이사야 55장 1절 이하를 보면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 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고 했습니다. 또 요한 계시록 22장 17절에서는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 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하시더라”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호와께서 이 마지막 때에 성령을 물 붓듯이 부어 주십니다. 성령을 선물로 충만하게 주십니다. 성령 주실 약속을 믿고 사모하며 기도하십시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시고 허락한 성령충만하게 주실 줄 믿습니다. 뜨겁게 하실 줄 믿습니다. 이때 베드로의 이 말을 들은 사람들은 다 회개하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세례를 받을 때 성령이 충만하게 임하셨습니다. 이때 이로 말미암아 어떤 역사가 일어났습니까?
1. 뜨거운 사랑의 교제가 일어났습니다.
성령이 충만하게 임하고 뜨거운 불이 임할 때 모두는 사랑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여기 모였던 사람들은 의심하고 조롱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성령을 받고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었다고 했습니다. 이는 사랑의 교제가 일어나 것입니다. 모두가 서로 주고 위해 주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전에는 내 것, 네 것 그리고 나, 너였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벽이 무너진 것입니다.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었습니다. 때로 교회에 무엇이 문제가 됩니까? 의심하고, 비평하고, 미워하고, 시기하고, 질투하고, 교만하고, 미련하여 하늘나라(천국)가 될 교회가 싸움터가 되고 지옥이 될 때가 있습니다. 부흥해야 할 교회가 점점 쇠약해 가는 일들을 볼 수 있습니다. 교회는 성령이 충만하여 뜨거운 불이 임하고 여기에 사랑의 마음이 솟아나야 합니다. 서로 사랑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바울사도는 골로새서 3장 12절 이하에서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의 택하신 거룩하고 사랑하신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 누가 뉘게 혐의가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과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고 했습니다. 베드로 전서 1장 22절에는 “너희가 진리를 순종하므로 너희 영혼을 깨끗이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는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마음으로 뜨겁게 피차 사랑하라”고 했습니다. 로마서 13장 8절에서는 “피차 사랑의 빛 외에는 지지 말라”고 했습니다.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아니하나니”라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모두 성령충만으로 뜨거운 불이 임하여 사랑의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사랑의 삶이 되시기 바랍니다.
2. 기도하기를 전혀 힘썼습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을 3년 동안이나 데리고 다니시며 기도하는 일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내 집은 만인이 기도하는 집이라고 가르치셨습니다. 밤이면 산에서 기도하시며 기도의 본을 보이셨습니다. 어려울 때, 힘들 때, 무슨 일이 있을 때 예수님은 기도로서의 본을 보이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들은 어떠했습니까? 예수님께서 잡히시던 날을 보시기 바랍니다. 수제자라고 불리우는 베드로, 요한, 야고보를 데리고 산으로 올라 가셨습니다.
예수님 십자가의 고난 당하실 일을 보시고 그 마음이 심히 고통스러워 밤을 새며 땀방울이 핏방울처럼 흘러 내렸습니다.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다가 제자들에게 와서 보시니 자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들을 깨우며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되었습니까? 다시 잠이 들어 또 잠을 자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기도하시다가 와서 보니 또 잠을 잡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깨우시며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했지만 이들은 또 잠만 자고 있었습니다. 이런 제자들에게 성령이 충만하게 임했습니다. 뜨거운 불이 임했습니다. 이후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이들은 스스로 모여서 기도했습니다. 계속 모여서 기도했습니다. 전혀 기도에 힘썼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 모두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전혀 기도에 힘쓰는 삶이 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역사가 있을 줄 믿습니다. 날마다 하남의 손길에 의한 기적을 볼 줄 믿습니다. 이적을 볼 줄 믿습니다. 우리의 기도가 응답될 줄 믿습니다.
3. 성전에 모이기를 힘썼습니다.
예수님께서 로마 병정에게 잡히실 때 제자들 모두는 도망을 갔었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너희들이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 이들은 두려웠습니다. 그러므로 성전에 나오지를 못했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성령을 충만히 받았습니다. 뜨거워졌습니다. 누가 성전으로 나오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온 성도가 성전에 모이기를 힘썼습니다. 그렇습니다. 성령이 충만히 임하고 뜨거운 불이 임하면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게 됩니다. 시편 84장 1~2절에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장막이 어찌 그리 사랑스러운 지요 내 영혼이 여호와 궁전을 사모하여 쇠약함이여” 했습니다. 우리 모두 성령충만함을 받고 뜨거워 져서 항상 예수님의 전을 사모하고 모이는 삶이 되시기 바랍니다. 히브리서 10장 25절에는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마지막 때가 되면 점점 보이지 않는 일들이 일어납니다. 이러한 때에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더욱 하나님의 성전에 모이는 삶이 되시기 바랍니다. 마태복음 18장 20절에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고 했습니다. 모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십니다.
4. 가정이 복된 가정이 됩니다.
사도행전 2장 46절 하반절 말씀에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했습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뜨거운 불이 임할 때 가정에 사랑의 교제가 이루어졌습니다. 기쁜 마음이 임했습니다. 하나님을 항상 찬송하는 가정이 되었습니다.
요사이 점점 가정의 문제가 심각하여 지고 있습니다. 문제가 무엇입니까? 가정에 사랑이 없고, 기쁨이 없고, 소망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성령이 충만하게 임하면 가정에 사랑이 넘칩니다. 기쁨이 있습니다. 순전한 다시 말하면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노래가 있습니다. 오늘 우리 모두 성령충만함을 받고 뜨거운 불이 임하여 이런 삶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런 가정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들이 서로 사랑하고, 뜨겁게 기도하고, 열심히 모이는 이러한 신앙의 삶이 어디에서 옵니까? 성령을 충만히 받고 뜨거운 불이 임할 때입니다. 참 행복하고 복된 가정, 노래가 떠나가지 않는 가정, 이 비결이 무엇입니까? 성령이 충만하고 뜨거운 불이 임할 때입니다. 여러분 모두에게 성령이 충만하고 뜨거운 불이 임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새 사람을 입으라
엡 4:17~24
그러므로 내가 이것을 말하며 주 안에서 증거하노니 이제부터는 이방인이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같이 너희는 행하지 말라 저희 총명이 어두워지고 저희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저희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 저희가 감각 없는 자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되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를 이같이 배우지 아니하였느니라 진리가 예수 안에 있는 것같이 너희가 과연 그에게서 듣고 또한 그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을진대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대망의 21세기를 여는 역사적인 카운트다운이 시작되었습니다. 새로운 21세기에는 무슨 일이 벌어질 것인가? 모든 사람들이 궁금하게 생각합니다. 생명공학의 발달로 인해 벌써 수 년 전인 영국 스코틀랜드의 로슬리 연구소에서 복제 양 ‘돌리’를 만들어 냄으로써 전 세계 사람들을 놀라게 했습니다. 경희대 연구소에서 복제인간도 가능하게 할 기술을 축적했습니다. 이에 대하여 찬성하는 쪽에서는 장기를 만들어서 갈아 끼우며 살 수 있다는 쪽으로 설득하고 있으나, 반대하는 쪽에서는 괴상한 인간이 출연할 것이고, 이것이 인류의 마지막 재앙이 될 수도 있을 것이라고 우려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급변하는 21세기를 맞이하는 시점에 여러분은 졸업하고 사회로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이 사회에 적응하기 위해서 여러분은 많은 준비를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준비해야 할까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21세기를 준비하며 맞이하는 여러분에게 “새사람을 입으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새사람을 입기 위해 옛사람을 벗어버리라고 합니다. 옛사람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1. 옛사람은 유혹의 욕심에 끌려 삽니다
명예 욕심에 유혹을 받기도 하고 물질 욕심에 미혹을 받기도 하고 정욕에 유혹되어 삽니다.
2. 옛사람은 썩어 인생을 망쳐 놓습니다
“썩어져가는”이란 헬라말로 “프테이로메논”이란 말인데 이 말의 뜻은 “파괴하다”, “썩히다”, “망쳐놓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인간을 망쳐놓는 것들을 보면 담배나 술이나 마약 등이 있습니다. 이것들이 사람의 몸을 망쳐놓습니다. 이것들이 사람의 몸 속에 쌓이게 되면 각종 암 병을 일으키게 됩니다. 또 사람의 정신을 망쳐놓습니다. 처음에는 호기심으로 접근하게 되지만 나중에는 자기의 이성으로 다스리지 못하고 마약의 노예가 됩니다. 결국엔 세상을 포기하고 사는 폐인이 됩니다. 새 사람을 입기 위해 이와 같은 좋지 못한 것들을 깨끗이 끊어버려야 합니다.
3. 옛사람은 구습을 쫓습니다
구습을 쫓는 생활이란 옛 생활 방식대로 하나님 없이 자기 중심으로 사는 것을 말합니다. 자기 중심 생활은 하나님 없이 마귀의 지배 아래 사는 생활의 증거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위에 열거한 옛사람의 욕심, 썩음, 구습을 벗어버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졸업생 여러분! 옛사람을 온전히 벗어버려 새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성경은 옛사람을 벗어버린 여러분들이 새사람을 입고 “심령으로 새롭게” 되라고 말씀합니다. “새롭게 되다”는 말은 “아나네오”란 말로 성령에 의해서 날마다 계속적으로 새롭게 되는 상태를 말합니다. 이러한 상태에 대하여 예수님은 요한 복음 3장 3절에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했는데, ‘거듭나다’라는 말씀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거듭난다’라는 말은 하나님께로부터 새로 다시 태어난다는 뜻으로 새사람이 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즉, 성경은 새사람을 만드는 일이 법이나 규칙, 제도만을 가지고는 안된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령의 능력이 원동력이 되어야 가능하다고 봅니다. 그래서 에베소서 4장 24절에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고 말씀합니다. ‘의와 진리’되신 예수님을 믿고 그 분의 발자취를 따라 사는 사람, 이것이 하나님께로 다시 태어난 새사람(a new being)을 말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5장 17절에서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 선언합니다.
졸업생 여러분!
21세기 급변하는 현대 후기 사회에서 무엇을 먼저 준비하려고 합니까? 현대 후기 사회는 정보 통신 사회이기에 무엇보다도 먼저 컴퓨터나 영어 공부를 준비하려 합니까? 물론 중요합니다. 그러나 먼저 여러분의 심령, 마음을 바로 잡기를 바랍니다. 타자(他者)를 위한 헌신으로 의와 진리의 표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새사람이 되는 일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옛사람의 욕심, 썩어져감, 구습 등을 벗어버리고 하나님의 의와 진리로 거룩함을 입어 그리스도 안에서 변화된 모습으로 새사람이 되는 것이 가장 중요함을 인식하기를 바랍니다.
세상의 빛이 되라
마 5:15~16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현대 산업사회 후반기 혹은 현대 후기 정보화 사회의 전반기인 지금은 캄캄한 밤중임에도 불구하고 전깃불이 있으므로 우리는 대낮같이 밝은 세상에서 마음대로 활동하며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당시의 형편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겨우 기름으로 태우는 등잔불 밖에 없었습니다. 지금 전깃불이 다 꺼졌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며칠 동안만이라도 전깃불이 다 꺼져 온 세상이 캄캄해 졌다면 온 세상이 아수라장이 되고 말 것입니다. 생각만 해도 끔찍합니다. 이렇게 캄캄할 때 환한 빛이 나타나 비추인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이런 의미에서 “너희는 이 세상에 빛이라”고 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은 우리들의 가슴에 어두운 세상을 향한 사명감으로 불붙게 합니다. 이제 졸업을 하고 사회로 향하는 여러분들에게 예수님의 말씀이 이정표(里程標)가 되기를 바랍니다.
우선, 예수님께서는 여러분들에게 등경 위에 있는 빛이 되라고 부탁하셨습니다.
팔레스틴의 집들은 작은 창 하나만으로 몹시 어둡게 지어졌습니다. 그 어두운 집안을 비추는 빛이란 등잔에 감람유를 넣고 그곳에 심지를 꽂아 태우는 정도였습니다. 성냥이 없는 때였기 때문에 불을 한번 켠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어디 밖에 외출을 나갈 때는 등불을 끄지 않고 등경 위에 있는 등잔을 방바닥에 내려놓고 그 대신 화재의 위험을 막기 위해 질그릇으로 덮어놓고 나가곤 했습니다.
졸업생 여러분!
예수님께서는 이것을 연상하시면서 우리들에게 교훈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방 안 질그릇 속에 갇혀 있는 등불이 아니라 등경 위에 있는 등불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두운 온 방을 두루 환하게 비치는 사명이 있다는 것입니다. 창문이 하나밖에 없는 캄캄한 방에 많은 빛이 필요한 것처럼, 죄악으로 캄캄한 어두운 이 세상에 빛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이제 여러분은 모두 예수님께 받은 이 빛으로 죄악으로 어두워진 이 세상을 환하게 비추는 등불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등경 위에 빛이 되어 비출 수가 있겠습니까?
1. 가정에서 생활할 때 모범된 생활을 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자기 가정에서부터 모범이 되어 가정의 빛이 되어야 합니다. 아름다운 가정, 복된 가정, 하나님께서 태초에 만들어 주신 가정입니다.
2. 직장 생활할 때도 모범된 생활을 해야 합니다.
출근시간에서부터 퇴근하는 시간까지 모든 직장에서의 말과 행동이 다른 사람에 모범이 되어 직장의 빛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맡은 일에도 최선을 다하여 합니다. 남이 보든지 보지 않든지 말입니다. 진실은 언젠가는 들어나서 큰 영광이 될 것입니다.
3. 교회 생활도 마치 한가지입니다.
교회 안에서도 모든 사람의 본이 되도록 살아야 하겠습니다. 특별히 예수님이 피흘려 주고 사신 교회인만큼 거짓 없는 믿음과 뜨거운 열심히 남보다 먼저 봉사하고, 사랑하고, 헌신하여야 할 것입니다.
4. 사회 생활할 때도 마치 한가지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에서 모범이 되도록 살아야 하겠습니다. 가령, 사업을 한다해도 보람있는 좋은 사업을 해야 영원히 빛이 되는 것입니다. 세상의 빛이 되기까지 희생을 아끼지 마십시다. 결코 빛은 빛으로 들어나게 될 것입니다.
미국 J. F. Kennedy 대통령의 아버지는 수십 년간 양조장을 해서 백만 장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들 하나는 중풍에 걸렸고, 또 한 아들은 비행기 추락 사고로 죽었으며, 케네디 대통령은 암살되었고, Robert Kennedy 도 암살 당하고 말았습니다. 이와 같이 온 식구가 거의 멸절 당했습니다. 그 후 노인 Kennedy는 고백하기를 “내가 수십 년간 술을 만들어 많은 가정을 파괴했으니 이제 와서 그 보응을 받았노라”고 후회를 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하는 사업은 인류에게 유익이 되는 사업이 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여러분이 가정, 직장, 교회, 사회에서 모범 되게 살아갈 때 세상의 빛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 세상에서 빛되게 살아가면 하나님께 영광이 돌아가게 될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전서 10장 31절 말씀에서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권면했습니다.
그런데, 빛 되게 살려면 어두움의 도전을 받게 됩니다.
창조 이래로 빛과 어두움은 늘 싸워 왔습니다. 그래서 어두움은 빛을 미워하는 것입니다. 빛이 없는 어두운 곳에서는 악마와 죄악이 활동을 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도 떳떳하지 못하거나 공개할 수 없는 일들은 어두운 곳에서 행동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참 빛으로 오신 예수님은 어두움의 도전을 받았습니다. 결국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십자가를 지셨을 때 마귀는 승리한 줄 알았는데 결국은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고 말았습니다. 우리도 빛된 삶을 살 때 어두움의 도전이 오게 되는데 묵묵히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 뒤를 따라 가면 승리하게 되고 영광의 면류관을 얻게 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마태복음 16장 24절에서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분부하신 것처럼, 여러분들은 자기 자신의 욕망을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희생의 생활을 함으로 참된 빛의 생활을 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 말씀의 3가지 시간성
벧후 1:20~21
먼저 알 것은 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처음 기록한 사람은 모세입니다(출17:14). 그 후 성경 말씀을 기록한 사람들은 신․구약 성경을 합하여 약 40명 정도이며, 약 1600년 동안에 걸쳐 되어졌습니다. 이런 하나님의 말씀이 인간에게 주어진 것으로, 하나님께서 말씀을 하셨으며 지금도 계속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1. 말씀의 예언성이 있습니다(벧후 1:21)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이 알지 못하고, 알 수 없는 일을 하나님께서 미리 말씀하여 주신 것이 대부분입니다. 하나님 대신 기록하고 말한 사람들을 ‘예언자’라고 하였습니다.
1. 미리 알려주고 준비하라고 하신 말씀입니다(막 1:15)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앞으로 되어질 일을 말씀을 통하여 알려 주십니다. 은혜와 복을 받을 일을 미리 말씀하여서 그대로 행하여 응답을 받으라고 하십니다. 그 반면에 앞에 닥칠 재앙이나 심판도 미리 알려주시면서 피하든지 재앙을 받지 않도록 회개하라고 하십니다. 인간은 눈앞의 일을 모릅니다. 그 대신 하나님께서는 말씀으로 인간에게 가르쳐 주십니다.
김익두 목사님이 거리에서 고함을 치면서 전도하실 때, 일본 순사가 시끄럽다고 못하게 하였습니다. 그 때 목사님을 “자동차가 지나가다가 사람이 있으면 빵빵하는 것은 왜 시끄럽다고 하지 않습니까?”고 하자, 순사는 “그거야 그 사람이 다치지 않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니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김익두 목사님은 “바로 그거요! 내가 고함치고 다니는 것도 모든 사람들이 지옥에 가지 말고 바른 길을 가라고, 피하라고 외치는 것이오!”라고 하였답니다.
2. 미리 약속하시고 응답을 받게 하십니다(계 1:3)
이제는 피하는 것이 아니고 은혜와 복을 받으라고 초청하시는 것입니다.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천국을 잔칫집으로 비유하여 우리를 초청하고 계십니다. 잔칫집은 즐거운 집입니다. 복된 장소입니다. 잔치에 참석하여 잘 먹으라고 초대하십니다. 이것이 말씀입니다. 예언은 약속입니다. 앞으로 받을 복을 미리 약속하시고 지키면 응답 받게 인도하십니다. 복 받을 일을 약속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독일의 서정시인 하이네는 하나님을 믿지 않고 성경도 믿지 않았지만 어느 날 성경을 하루 종일 읽고 난 후 ‘굉장한 책이다. 이 세상처럼 넓고 광대한 책이다. 여기에는 창조의 심오함이 있고, 하늘의 푸른 비밀이 쌓여 있습니다. 일출과 일몰, 태어남과 죽음, 약속과 성취, 인류의 모든 드라마가 이 책에 다 들어 있다’고 외쳤습니다.
성경을 읽으면서 이 비밀을 발견하여야 합니다. 이 약속을 가져야 합니다.
3. 미리 믿고 성취하게 하였습니다(대하 6:4)
하나님의 말씀은 일점 일획이라도 다 성취됩니다. 한 마디의 말씀도 땅에 떨어져 헛되게 되지 않습니다. 복의 약속도 응답되지만 심판의 예언도 성취됩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실 때 말씀으로 창조하셨다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곧 하나님께서는 말씀의 하나님으로 말씀대로 이루신다는 증거를 창조에서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님도 이 말씀을 이루시며 사셨습니다. 성경에 3,000여 예언이 있고 다 성취되었습니다만 한가지만 남아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다시 이 세상에 오신다는 재림의 약속입니다. 그것이 성취될 날이 임박하였습니다.
이렇게 말씀은 우리에게 성취되게 하실 것이며 또 성취하실 것입니다. 성도들도 성취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성취되는 성도들에게 복된 말씀입니다.
2. 말씀의 현재성이 있습니다(단10:12)
1. 읽고 듣고 배우는 사람에게 지금 주시는 말씀입니다(단 10:14)
다니엘은 나라와 민족의 장래와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하여 하나님께 기도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일을 다니엘에게 은혜를 크게 입게 하시면서 알게 하셨습니다. 지금 우리가 읽는 말씀은 옛날 다니엘에게 하신 것으로 나와 상관없는 것이 아니라 지금 우리에게도 주시는 말씀으로 읽고 들어야 합니다. 말씀의 모든 은혜와 복은 듣거나, 읽거나, 믿거나, 배우거나, 깨달은 사람의 것입니다. 말씀을 들으면서 다른 사람의 것으로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나의 것이며, 나를 위한 것입니다.
2. 믿는 자에게 지금 사죄와 구원을 주시는 말씀입니다(요 5:24)
말씀의 현재성은 그 효력의 현재성입니다. 말씀의 역사는 먼 후일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당장 일어납니다. 믿고 신앙을 고백하는 순간 말씀의 생명력이 역사하며, 사죄함과 구원을 즉시 받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에는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지금 벌써 위치가 달라졌고, 자격이나 상태가 달라졌습니다. 믿는 순간 말씀의 약속이나 효력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풍랑에 좌초된 모선에서 작은 보트로 옮겨 탄 선원들이 점점 침몰되어 가는 모선을 보고 있을 때, 한 선원이 보트에서 모선으로 급히 뛰어 옮겨 타고 선장실로 들어갔습니다. 모선이 거의 다 침몰하기 직전에 그 선원은 모선에서 빠져 나와 손살같이 보트에 다시 탔습니다. 마음을 조리던 선장이 왜 그리 위험한 짓을 하였는가? 라고 고함을 쳤을 때, 그 선원은 손에 작은 나침반을 펴 보이면서 “이것을 가져왔습니다. 우리가 작은 보트에 탔지만 이것이 없으면 방향을 잃고 표류하다가 다시 죽게 될 것입니다.”고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성경은 신앙인의 나침반입니다. 나침반이 없는 신자들은 마음과 생활에 표류를 거듭하다가 그냥 죽고 말 것입니다. 인생의 길을 인도해 주는 나침반 성경이 있어야 합니다. 구원의 말씀입니다.
3. 말씀은 영원성이 있습니다(마 5:18)
1. 불변합니다(시 105:8)
“그는 그 언약 곧 천대에 명하신 말씀을 영원히 기억하셨으니 … ”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불변으로 성취됩니다. 거짓이 없고 신실하지 못한 것이 없다는 말입니다. 말씀은 하나님 자신의 속성과 능력을 나타내시기도 합니다. 알파와 오메가 되시는 하나님은 영원히 불변하십니다. 하나님의 속성은 영원한 능력이시며 영원한 사랑이십니다. 하나님의 모습은 이 모습으로 영원불변이십니다. 악으로나 타락으로 변질되실 수 없습니다. 그런 하나님의 인격 속에서 나오는 말씀과 약속이나 선포된 모든 일까지 그대로 이루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내 뜻보다 항상 하나님의 뜻에 맞춰야 합니다.
2. 불멸성이 있습니다(마 5:35)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고 선포하신 말씀대로 거짓과 마귀나 핍박하는 자들이 말씀을 없이하지 못하였습니다. 로마의 네로나 독일의 히틀러를 비롯하여 말씀을 핍박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들은 이미 다 세상을 떠난 지 오랬지만 그러나 성경 말씀은 지금도 세계에서 제일 많이 팔리며 읽히는 책입니다. 그것뿐 아니라 이 세상에서의 역사 하는 것도 영원하여 말씀을 제거한 세상은 오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말씀이 성취되는 세상이 올 것입니다.
말씀은 곧 하나님이십니다. 아람역에는 여호와란 말 대신에 말씀이라고 번역하였습니다. 말씀과 여호와는 같다는 생각을 옛날부터 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곧 말씀이라고 요한복음 1장 1절부터 기록하고 있습니다.
대영 성서공회는 메리 존스라는 소녀 때문에 생기기 시작하였습니다. 메리가 8세부터 8년 동안 돈을 저축하였다가, 그 돈으로 사기 어려운 귀한 성경을 구입하기 위하여 28마일을 걸어서 토마스 찰스 목사님께 가서 한 권 밖에 없는 성경을 샀습니다. 성경을 사려고 노력하였던 이 소녀의 감동적인 이야기를 당시 조셉 휴즈라는 사람이 그의 종교 잡지에 실렸습니다. 휴즈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단연 성경을 많이 인쇄하여 많은 사람이 읽도록 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웨일즈에서 필요한 성경이라면 세계에서도 필요한 것이기 때문이다고 하여 성서공회를 조직하여 많은 성경을 보급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들이 말씀을 사모하는 한 하나님께서도 우리에게 계속 말씀을 주실 것이며, 하나님의 말씀은 계속 공급될 것입니다.
3. 영원한 동질성이 있습니다(히 13:8)
천지를 창조하실 때 나타나시던 말씀이 지금도 똑 같은 능력이나 하나님의 뜻으로 역사합니다. 변하거나 쇠퇴하지 않습니다. 영원토록 동일하십니다. 세상은 점점 낡아집니다. 세상의 모든 만물도 역시 낡아집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낡아지지 않습니다. 창조의 말씀은 지금도 그대로 효력을 발생하여 만물이 그때처럼 생성합니다. 단지 인간은 만물의 파괴자로 죄와 죄성 때문에 세상을 변질시키고 있을 뿐입니다.
결 론
말씀은 나를 위하여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나의 말씀이 되어야 합니다. 지금도 나에게 필요한 말씀입니다. 말씀을 매일 곁에 두고 읽고 묵상하며 그대로 실천하여 하나님의 축복을 받고 큰 일까지 감당하는 성도로 장성합시다.
교회를 성장시킵시다
행 9:31
그리하여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지니라
교회는 생명이 있는 나무와 같아서 자라나고 꽃이 피고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이것이 성장하는 것이요 부흥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이런 모습이 있어야 살아서 움직이는 교회이며 은혜 있고 생동하는 교회입니다.
1. 말씀 중심하는 교회가 성장합니다(행 19:20)
교회는 말씀으로 살아가는 곳입니다. 말씀이 없는 곳은 교회가 아닙니다. 에베소 교회의 부흥조건으로 “주의 말씀이 힘이 있어 흥왕하여 세력을 얻으니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주 만물을 말씀으로 창조하시고 지금도 말씀으로 우리 심령을 먹여 살리시고 계십니다. 말씀이 없는 신자는 영적으로 성장하지 않습니다.
말씀은 ① 읽고 묵상하는 말씀 ② 듣는 말씀 ③ 배우는 말씀 ④ 전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듣고 배우는 말씀이 전해지려면 이와 같은 네 단계의 말씀이 실천이 됩니다. 금년에 부흥하는 교회가 되기 위하여 우리 성도들은 모두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일에 힘써야 하겠습니다. 성도들은 말씀으로 흥왕해져야 합니다. 모든 성도들은 말씀으로 성장하여야 합니다. 말씀을 중심하는 교회가 성장합니다.
2. 말씀을 전하는 교회가 성장합니다(행 2:32)
예수님께서는 말씀을 전하시려고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막 1:38). 성경은 말씀을 전하는 것을 비유하여 몇 가지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1. 농부가 밭에 씨를 뿌리는 것으로 비유하심(마 13:8)
농사짓는 것입니다. 밀 한 알이 30배, 60배, 100배가 되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십니다. 전도는 농사를 짓는 것과 같습니다. 전도자는 농부입니다. 사람은 단지 뿌리는 일을 하는 것인데, 씨를 못뿌리면 성장하지도 못하며 또 수확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전도하지 못하는 곳에 변화나 부흥은 없습니다.
2. 바다에서 고기를 잡는 것이라고 하십니다(마 13:48~49)
베드로를 사도로 부르실 때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고 하셨습니다(마 4:19). 여러 가지 방법으로 고기를 낚습니다만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방법대로 하면 153마리가 아니면(요 21:11), 배가 잠길 정도로 잡힌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셨습니다(눅 5:7). 이 때 배는 우리 교회입니다. 교회가 차고 넘치게 성장과 부흥을 약속하시는 것입니다.
3. 주는 것입니다(마 10:8)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전도하라고 보내면서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고 하셨습니다. 주는 것은 복음이요, 말씀입니다. 성도들이 받은 것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의 생명과 구속과 사랑과 은혜를 거저 받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없는 사람에게는 능력이 없습니다. 예수님께로부터 거저 받아 구원을 얻었으면 다른 사람들에게 또 전해주는 것이 마땅합니다.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거저 줌으로 앉은뱅이를 일으키는 구원을 일으켰습니다(행 3:6). 많이 주어야 합니다. 전도는 이렇게 해야 합니다.
4. 외치는 것입니다(막 1:15)
예수님께서 하신 첫 마디 말씀이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외치면서 복음을 만인이 듣고 믿도록, 교회에 찾아오도록 외쳤습니다. 우리도 외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것처럼 우리도 끊임없이 전하는 일을 해야 합니다. 외치고 전하고 알리는 일을 교회가 맡았으니 교회의 모든 성도들이 해야 할 사명입니다. 그런 교회만이 부흥하고 성장합니다.
3. 기도하는 교회가 성장합니다(행 1:14, 2:42)
교회는 기도하는 장소입니다. 아니 하나님께서 기도하는 성도들을 만나시고 또 그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해 주시는 곳입니다(마 21:13). 그러므로 전도하여 만인을 기도하는 집인 교회로 인도해야 합니다. 그들이 기도하며 하나님께 경배하도록 해야 합니다. 이것이 교회입니다. 기도를 많이 할 때 교회는 성장합니다. 기도를 하지 않는 교회는 변화가 없거니와 오히려 더욱 변질되고 맙니다. 교회에서 기도 소리가 없으면 대신에 고함소리나 비명소리가 납니다. 이런 교회는 성장하지 못합니다. 기도하는 만큼 교회는 부흥합니다. 그만큼 하나님의 응답이 있습니다.
4. 단합이 잘되는 교회가 성장합니다(막 2:5)
한 중풍병자를 고치기 위하여 네 사람이 들것을 들고 예수님이 계시는 집에 와서 집의 지붕을 뜯고 병상을 달아 내렸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병자를 고치셨습니다. 이것이 성장하는 교회의 모습입니다. 합심하면 못할 일이 없고 하나님의 응답을 받습니다.
마음을 합하고, 기도를 합하고, 믿음을 합하여 부흥을 일으키는 교회가 성장하고 부흥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만인을 그의 이름 안에 다 품었습니다. 구원자가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5. 시설이 좋아야 성장합니다(사 54:2)
1. 솔로몬 성전은 가장 아름답게 지어졌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가장 좋은 성전을 짓도록 솔로몬의 마음을 충동시키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고 백성들이 경건하게 제사를 드리기 때문입니다. 20년 전 시설로는 전도가 되지를 않습니다. 우리의 수고가 필요합니다.
2. 교육 시설도 좋아야 합니다.
근래 사회적으로 생활 수준이 좋아지고 교육 시설이나 환경이 좋아지고 있는데 교회 교육만은 시설, 장소, 방법 등이 낙후되어 있습니다. 이런 상황을 개선해야 합니다. 신앙교육이 더욱 잘 어울려지도록 할 때 사회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입니다.
3. 장소가 요지에 있어야 합니다.
모리아 산은 후일 예루살렘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모든 백성이 쉽게 찾아오는 곳입니다. 교회당을 좋은 자리에 잡아야 합니다. 성도들뿐 아니라 만인이 쉽게 찾을 수 있는 곳에 있어야 합니다.
4. 교회가 지역 사회의 인도자 역할을 하여야 합니다.
교회를 사회 복지 선도와 개선차원에 개방하여야 합니다. 예배를 위하여 구별된 곳을 제외하고, 모든 곳은 사회를 위하여 활용이 잘 되어지면 사회를 구원할 것입니다. 교회가 무료 결혼식장으로 개방되고, 경로대학, 주부대학, 독서실과 어린이 집 등을 시설하여 운영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외에 목사도 좋아야 하고 신자들도 좋아야 합니다. 금년은 변화하는 교회로 성장합시다. 우리 교회는 이런 목표를 세우고 기도하고 성취하는 교회입니다.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성장을 우리의 충성과 성령님의 도우심을 통하여 크게 이루는 교회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할렐루야!
교사 자질의 3대 요소
마 28:19~20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기독교 교육으로 유명한 학자 밀러(Randolph. C. Miller)는 교회다운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교회가 되기 위한 교육이 있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이 말은 교회 안에 일반적 프로그램의 존재를 말하기보다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어떤 내용의 교육 프로그램이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스마트(James. D. Smart)라는 학자도 말하기를 “교회가 선교하는 것처럼 교육에 주력하지 않으면 교회일 수가 없다”라고 말했습니다. 교회의 사명은 마태복음 28장 19~20절 사이에 있는 대로 즉, 예수님께서 지상에서 사역을 마치시고 승천 직전에 사도들에게 분부하시기를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는 말씀 안에 있습니다. 이 말씀을 근거해서 연구해 보면 예수님의 두 가지 분부를 찾아낼 수가 있는데, 그 하나는 선교와 전도인 ‘케리그마’요 또 하나는 ‘디다케’라고 하는 교육인 것입니다. 이 둘을 하나로 묶어 예수님이 교회에 주신 지상명령이라고 합니다. 이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오늘날 교회의 교육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그리고 매우 중요하게 다루어지고 또한 이루어져야 할 줄 압니다. 저희 교회를 포함한 일반적으로 교회교육은 어린이를 위한 유년부 교육과 청소년을 위한 중고등부 교육 그리고 장년들을 위한 교육으로 나눌 수가 있는데, 그 중 청소년기인 중고등부의 교육은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나 이 민족을 위해서나 우리 교회를 위해서나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고 봅니다. 오늘날은 이러한 교육이 무엇보다도 교사에게 막중한 책임이 있다고 보고, 자녀들을 기르는 부모의 입장에서 가르치는 교사에게 이르기까지 교사라는 심정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교사의 자질, 교사가 갖추어야 할 자격 요건 3가지를 말씀 가운데 찾아보고자 합니다.
1. 교사가 먼저 그 나라를 보고 소개해야 합니다.
신명기 27장 28절의 말씀대로 “소경으로 길을 잃게 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또 마태복음 15장 14절을 통해서는 “만일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 둘 다 구렁텅이에 빠지리라”고 되어 있는데, 여기서의 소경은 바리새인들을 염두에 두고 하신 말씀입니다. 이 바리새인이라는 말은 분리주의자라는 뜻으로, 예수님 시대의 유대주의 종파로 모세의 율법에 철저한 열심 단체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이 모세의 율법을 바르게 행한다는 교만으로 영적인 소경이 되어 진리의 예수님을 보지 못하고 결국 대제사장들과 합세하여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아 돌아가시게 했던 것입니다.
오늘 교사된 우리들도 말씀의 공과를 충분히 준비하고 연구하여 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교사 자신이 영생에 대해, 천국에 대해 확신이 없으며 예수님과의 바른 관계를 맺지 못하고 있다면 소경 선생 밖에 될 수가 없습니다. 교회학교 교사의 최고 교육의 목적은 그리스도를 가르치며, 학생들에게 하늘 나라에 소망을 둔 구원의 확신을 심어 주는 것입니다.
밀러는 교육에 대한 정의를 내리기를 ‘배우는 자에게 자기가 누구인지, 타인은 누구인지, 세계는 무엇인지와 우리가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 가를 알게 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쉐릴(Sherill)은 교사의 사명을 ‘배우는 자들이 위기를 만났을 때 성령의 영감으로 그 위기를 해결할 수 있도록 지도하는 데 있다.’고 했습니다. 이런 교육 효과는 구원의 확신과 천국을 소망한 믿음 안에서만 가능합니다. 가르치는 자들이 먼저 하나님 나라에 대한 구원의 소망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2. 예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요한복음 21장 15절에서 예수님께서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이 사람들보다도 나를 더 사랑하느냐?”라며 시몬에게 물으시자 시몬이 대답했습니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예수님께서 이 대답을 들으신 뒤에야 말씀하십니다. “내 어린 양을 먹이라.”
교사된 자들은 그 누구보다도 그 무엇보다도 예수님을 더 사랑해야만 어린 양된 하나님의 사람들을 가르칠 수가 있습니다. 내가 예수님을 더 사랑하는 증거가 무엇입니까?
신명기 11장 1절과 요한일서 5장 3절에서는 예수님의 법도와 규례를 항상 지키는 것이 예수님을 사랑하는 증거라고 합니다. 열왕기상 3장 3절에서는 참으로 예수님을 사랑하면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린다고 합니다. 솔로몬은 여호와를 사랑한 까닭에 늘 산당에서 제사를 드렸는데, 오늘 우리들도 참 예수님을 사랑하는 뜨거운 마음으로 적어도 주일 낮, 밤, 삼일밤의 공예배만큼은 모범적으로 참석해야 할 줄 압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사랑할 수 있을 때, 악을 미워하게 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형제들을 사랑하게 되고, 가르치는 학생들을 사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교육은 예수님을 사랑하는 증거이어야 합니다.
3. 최선을 다하여 가르쳐야 합니다
디도서 2장 14절에 보게 되면 “우리를 구속하시고 깨끗케 하사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심은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하여 귀중한 사명을 주셔서 각각 위치에서 선한 일에 열심하게 하십니다.
우리의 교사라는 직분이나 가르치는 자의 사명은 하나님의 귀중하고도 막중한 선한 일입니다. 이 선한 일을 맡은 이상 우리는 구원받은 성도로서, 깨끗함을 입은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이 일에 열심을 다 해야 합니다.
열심이란, 남들을 따라가거나 남들만큼 하는 것이 아니라 남들의 앞에서 보다 더 최선을 다해 일하는 것입니다. 뜨거운 열정으로 일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리고 가르치는 자리에 있는 여러분!
지금 이 사회에 미래의 등불이 되어야 할 청소년들이 밀려오는 외래 문화에 흔들리고 있으며 가치관을 잃은 이들을 통해 청소년 범죄율이 날로 높아 가고 있습니다. 대학 입시에 온 영혼과 육체를 다 빼앗기고 참 인간의 아름다움과 진실함을 잃은 채 나약한 학문의 도구로 비틀거리고 있습니다. 누가 이들에게 바른 가치관을 심어 줄 수 있으며 따뜻한 품으로 안아 줄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의 마음을 품은 교사들이 있는 오늘의 교회가 이 문제를 맡아야 합니다. 단순히 공과를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부탁을 받은 교사로서, 그 나라를 체험한 교사로서 예수님을 사랑하는 신앙고백 위에서 열심으로 이 사명을 감당하는 충성된 종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지혜 있는 자가 되라
엡 5:14~17
그러므로 이르시기를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네게 비취시리라 하셨느니라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 것을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같이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같이 하여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생활 가운데는 물질적인 것을 보물이라고 합니다. 특히 보석을 일컬어 보물이라 표현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보석은 가격으로 따지거나 그 귀중성, 희소 가치성으로 보아 보물인 것은 틀림없습니다. 어린이의 동화집 속에 이 보석을 캐려다 목숨을 잃는 이야기도가 많이 나올 만큼 보석은 보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욥기 28장 18절에 보석보다 더 귀한 것이 곧 지혜라고 했습니다. 잠언 8장에서도 같은 이야기가 있으며, 시편 16편에서도 지혜가 금보다 낫다고 했습니다. 성경을 통해서 우리가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지혜야말로 보물 중의 보물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사실 어떤 분은 이 지혜가 없어서 실패하기도 하고, 좌절과 낙심에 이르기도 하며, 심지어는 죽는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반면에 지혜를 통해 성공과 승리를 얻고 때로는 한 민족 전체를 구출하는 일도 많은 것입니다.
옛날 스코틀랜드의 Robert Bruoe 왕은 참으로 야심이 많았습니다. 영토 확장의 욕심으로 잉글랜드를 여섯 번이나 공격했지만 계속 실패를 했습니다. 마지막 공격에서는 자기 부하를 다 잃고 혼자만 피신하는 신세가 되어 숲속 동굴에 숨어 지친 몸으로 전쟁의 패배를 삼키고 있을 때, 동굴 벽에서 집이 허물어졌는데 낙심치 않고 계속 짓고 있는 거미를 유심히 지켜보다 지혜를 얻어 다시 조국에서 군사를 모아 전쟁에서 승리했다고 합니다.
일반적으로도 지혜는 높이 평가됩니다. 고대 헬라인의 최고 존경의 대상은 미메씨스(Mimesis)라고 하는 자유요 지혜였습니다. 이 지혜를 사랑하는 것이 바로 철학입니다. 철학을 Philosophy라고 하는데, Philo는 사랑이요 sophy는 지혜인 것입니다.
공자가 이야기한 3덕(三德)이 있는데, 곧 지(智), 인(仁) , 용(勇)인 것입니다. 맹자의 4덕(四德)에서도 지(智), 인(仁), 의(義), 예(禮)로 지혜를 모두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일반적인 과학도 지혜의 산물이요, 철학이나 종교에서 지혜는 매우 귀중한 것입니다. 성경에서의 지혜는 모든 지혜를 훨씬 초월하는 차원 높은 지혜입니다. 이 지혜를 얻으면 저주에서 축복을 받고, 지옥에서 천국을 얻고, 자손 후대에 그 복이 미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 말씀을 중심해서 ‘지혜 있는 자가 되라’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 지혜의 의미
지혜의 의미를 고대 히브리어에서 살펴보면 생각할 줄 아는 자가 지혜로운 자라는 것입니다. 미국의 교육학자 카네기는 내가 배운 교육 중에 무엇보다도 귀중한 것은 ‘생각한다’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없다고 생각하면 무신론자요 하나님이 있다고 생각한다면 유신론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잠언은 “무릇 지킬 만한 것보다 더욱 더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난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지혜있는 생각을 가져야 하며 이 생각으로 옳고 그름을 구분할 때 참 지혜가 되는 것입니다.
2. 무엇을 생각하여야 지혜로운 생각인가?
지나온 역사가 있는 성경을 읽으며 우리는 롯의 처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누가복음 17장에서 롯의 처를 생각하라고 하는 이야기가 있는데, 롯의 처에 대한 기사는 창세기 19장에 나옵니다.
그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소돔지역에 죄악이 관영하여 하나님께서 불로 심판하실 때 아브라함의 기도와 롯의 신앙으로 하나님께서 그 가족을 구원시키고자 사자들을 보내셔서 롯의 가족들에게 소돔에서 떠나가되 어떤 일이 있어도 뒤를 돌아보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막상 나오던 중 롯의 처가 소돔의 불타는 모습에 자신의 재산, 가정, 보물이 타는 것을 가슴아프게 생각하다 그만 뒤를 돌아보게 되었고, 돌아보는 순간 소금 기둥이 되어 버렸습니다. 구원이 영원히 상실되어 버리는 순간입니다.
우리의 삶에 물질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귀한 것은 환난 때에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언제나 세상의 삶에 목적을 둔 것이 아니라 영원한 하늘에 목적을 두고 살 때 롯의 처와 같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롯의 처를 생가하며 지혜를 얻습니다. 또 히브리서 10장에서 이야기하는 대로 하나님과 은혜를 배척하고 죄를 짓는 자에게 돌아올 심판을 생각해야 합니다.
이 땅에 사는 인간이 꼭 겪어야 할 두 가지가 있으니 하나는 죽음이요, 또 하나는 죽음 뒤에 오는 심판이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역사가 토인비는 자기 자신을 바라보면서 생각할 것이 세 가지 있다고 합니다. 첫째는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요, 둘째는 나와 이웃간의 관계이며, 세 번째는 나와 물질과의 관계라고 합니다.
우리는 히브리 기자의 이야기대로 결국 죽음을 당해야 하는데 어느 한 순간이라도 토인비와 같이 자신을 생각하는 일에 소홀함이 없어서 세상 마지막 날 나와 심판은 상관이 없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생각을 통해 지혜를 얻어야 합니다.
3. 지혜의 필요성
지혜가 있는 까닭에 열왕기상 2장 61절에 있는 대로 그 백발로 평안히 음부에 내려가지 않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구원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음부는 지옥을 가리키는 것인데 어리석고 지혜 없는 자가 이곳으로 가게 됩니다.
지혜로운 자가 되어 구원의 반열에 서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이 땅위에 사는 동안에도 지혜 있음으로 해서 채찍을 맞지 않게 됩니다(잠 10:13).
신앙인 중에 있어서도 지혜없는 자는 하나님으로부터 때로는 채찍을 맞을 수도 있습니다. 채찍에 맞고 구원을 상실치 않는다면 채찍에 맞는 것도 축복이지만 지혜로운 자가 된다면 채찍에 맞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잠언 12장 8절에 있는 대로 칭찬을 받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 사는 동안에도 부모나 자식으로부터 칭찬을 받아야 하며 모든 사람에게 칭찬을 받아야 합니다. 더 나아가 예수님 앞에서 칭찬을 받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 모두가 지혜로운 자가 되어 칭찬을 들으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시는 복된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예수님을 만난 삭개오
눅 19:1~10
예수께서 여리고로 들어 지나가시더라 삭개오라 이름하는 자가 있으니 세리장이요 또한 부자라 저가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하되 키가 작고 사람이 많아 할 수 없어 앞으로 달려가 보기 위하여 뽕나무에 올라가니 이는 예수께서 그리로 지나가시게 됨이러라 예수께서 그 곳에 이르사 우러러 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시니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하거늘 뭇 사람이 보고 수군거려 가로되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도다 하더라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뉘 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사 배나 갚겠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님을 만나는데 있습니다. I.M.F로 인하여 직장을 잃은 실직자와 그 가정의 모습도 우리 모두의 마음을 편치 못지만, 그것보다 더 안타까운 모습이 있다면 집을 잃어버린 어린아이가 울며 거리를 헤맬 때일 것입니다. 그러나 부모를 만나게 될 때 그 순간에 눈물을 그치며 어머니의 품에 안길 때 그 동안 쌓였던 외로움과 고통은 어느 순간에 사라지고 다시 기쁨을 회복하게 되는 것처럼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면 첫 사람 아담이 잃어버렸던 축복들을 다시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나 같은 사람이 어떻게 예수님을 만날 수 있을까? 다른 사람은 다 만나주어도 나는 아닐 거야’하며 스스로 구원받을 수 있는 것을 자포자기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퍽 양심적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그것은 분명히 잘못된 생각입니다. 예수님은 탄생하실 때, 헤롯의 궁전에서 석가모니처럼 왕족이 아니면 귀족의 신분으로라도 나셨어야 할 터인데 오히려 나사렛 목수의 아들로 그것도 베들레헴 마구간에서 비천한 신분으로 나셨습니다.
또한 아기 예수님을 처음 만난 사람도 어떤 특권층의 귀족이 아니라 일반 평민인 목동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 땅에 의인을 부르러 오신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오셨다고 많은 사람들 앞에서 가르치셨습니다. 본문 말씀에서도 예수님은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눅 19:10)고 말씀하셨습니다.
삭개오는 모든 면으로 보나 작은 사람이었습니다.
외모적인 조건으로 보면, 키가 작은 사람이었기에 많은 군중 속에서 예수님을 만난다는 것보다 뵈옵는다는 것조차 힘든 상태였습니다. 또한 그는 직업적 조건으로 보아도 작은 사람이었는데, 당시의 세리는 국민들에게 무리하게 매긴 세금을 거두어 일정액은 로마 정부에 상납하고 나머지는 착복하였음으로 동족에게 지탄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삭개오는 ‘세리장’이라는 악명 높은 직업으로 인하여 죄인 취급을 당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삭개오는 신앙적으로도 보잘 것 없는 사람입니다. 돈이 많은 부자였기 때문에 예수님을 만나고 구원받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닙니다.
바로 전장 18장에 나오는 부자 청년을 보십시오. 자신뿐만 아니라 남들에게도 인정받고 칭찬 받는 그였지만, 재물이 많음으로 예수님을 따르지 못할 뿐 아니라 영생의 문턱에서 뒤돌아 서야 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으로부터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마 19:24)는 안타까운 말씀을 듣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어느 면으로 보나 삭개오는 예수님을 만나기에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문 말씀을 보면 삭개오는 분명히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남들이 불가능하다고 손가락질까지 하던 삭개오가 예수님을 만나 집에 모시게 되었으며, 예수님의 영생의 축복과 더불어 칭찬까지 듣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삭개오는 어떻게 해서 예수님을 만날 수 있었을까요?
1. 예수님을 만나고 싶은 간절한 마음이 있었습니다
삭개오는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들었습니다. 그 소문은 예수님을 만나면 문둥병자가 치료받고, 앉은뱅이가 일어나며,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된다는 놀라운 소문도 듣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삭개오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많은 병자들을 고쳐주시는 예수님께서 자기와 같은 세리의 직업을 가진 마태를 불러 제자로 삼으셨다는 것이었습니다. 모든 사람이 세리를 죄인 취급하고 손가락질하는 데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세리 마태를 만나주시고, 용서해 주시고, 제자로까지 삼으셨다는 소문은 삭개오를 크게 감동시켰고, ‘나도 예수님을 만나야겠다’라는 불같은 소원을 갖게 해주었던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의 처지를 이해하며 사랑해 주는 사람에게 마음이 쏠리는데, 삭개오라고 하는 세리의 경우는 그 정도가 아니었습니다. 자기의 생각에도 도저히 자기와 같은 세리 마태를 어떻게 제자로 삼으셨겠느냐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처럼 경건한 하나님의 자녀로서 기도도 잘하고, 구제도 잘하며, 금식까지 하는 사람들이 줄줄이 있는데, 그들은 오히려 멀리하고 죄인과도 같은 세리 마태를 제자로 삼으셨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이해조차 어려운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잠 8:17)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는 어느 특정한 인물을 지칭하지 않고 단지 나를 사랑하는 자,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하나님의 사랑을 입으며 하나님을 만날 것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말씀이 있기에 우리들은 오늘날 이렇게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입고 축복도 받게 된 것입니다.
마태복음 8장 1절 이하에 보면 산 위에서 말씀을 가르치시고 내려오는 예수님을 허다한 무리가 좇았으나 그 가운데서 문둥병자 한 사람이 예수님께 고침을 받았습니다. ‘죽음을 무릅쓰고라도 예수님을 만나 병 고침을 받아야겠다’는 각오가 그로 하여금 군중을 뚫고 예수님 앞에 나아가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라는 소원을 아뢸 수 있게 만든 것입니다. 그렇게까지 사모한 결과 예수님께서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마 8:3)고 말씀하셨고 그 즉시로 문둥병이 깨끗하게 치료받았던 것입니다.
2. 환경이 불리하다고 해서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죄인이었으며 또한 키가 작은 사람이었기에, 의롭다고 여기며 또한 키가 큰 군중 속에 묻혀서는 결코 예수님을 만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환경 또는 현실이 불가능하다고 하여 예수님 앞에 나가기를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최선을 다해서 해결의 길을 찾던 삭개오는 어느 누구 한 사람 올라가지 않은 옆에 있던 뽕나무를 발견하게 되었고, 결국 그 나무 위에 올라가 예수님의 얼굴만이라도 보고 싶어하던 소원을 성취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만일 중도에서 포기했다면 그는 예수님을 뵈옵지도 못하였거니와 축복도 받지 못했을 것입니다.
창세기 22장에 나오는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 독자 이삭을 번제물로 드리라고 명령하셨을 때 만약 눈에 보이는 현실만을 생각했다면, 마련되어 있던 축복을 위한 시험‘에 순종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믿는 사람으로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했고, 그의 순종하는 모습이 어찌나 보시기에 좋았던지 하나님께서는 이삭 대신에 뿔이 수풀에 걸린 수양을 예비하셔서 그로 하여금 이삭을 대신하여 번제로 드릴 수 있게 만들어 주셨던 것입니다.
마가복음 2장에 나오는 중풍병자를 멘 네 명의 친구가 있었습니다. 좋은 일을 할 때에는 매였던 일도 풀리고 어려운 일이 없어야 하는데, 중풍 병에 걸린 친구를 예수님이 계신 곳까지 어렵게 데려 왔지만 문 앞까지 가득히 찬 사람들이 비껴줄 생각도 하지 않고 자기네들이 먼저 고침을 받으려고 하였습니다. 도저히 그들을 뚫고 들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친구를 위한 선한 일을 결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네 사람은 중풍병자를 메고 지붕 위로 올라갔고, 지붕을 뚫고 중풍병자를 달아 내림으로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이런 모습(환경과 처지를 돌파한 모습)을 보신 예수님은 저희들의 믿음을 보시고 “소자야 네 죄 사람을 받았느니라”(막2:5)고 말씀하셨을 뿐만 아니라 중풍병자로 하여금 일어나 걸어갈 수 있게 해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환경만 보고 포기하거나 낙심하지 말고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자세로 하나님께 구하며 앞으로 나가야 합니다. 예수님은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마 7:7~8)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자신 앞에 놓인 어떠한 일이라도 적극적인 소망을 가지고 나아가십시다.
3. 예수님을 만나자 변화된 삶을 살 것을 서원했습니다
본문은 “삭개오가 서서 예수님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뉘 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사배나 갚겠나이다”(눅19:8)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을 만날 때 우리의 신분이 마귀의 종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변화되는 것처럼, 우리의 생활도 죄인의 생활에서 의인의 생활로 바꾸어져야 합니다. 만일 예수님을 만났는데도 우리의 생활, 마음씨도 변화되지 않았다면 참으로 문제가 큽니다. 우리가 받아야 할 복 중에 가장 큰 축복은 마음씨의 변화와 생활의 변화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아직 때가 아닌데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처음 표적으로 갈릴리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되게 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기적을 처음 베푸셨던 것은 사람들에게 포도주를 마시게 하는데 목적이 있었던 것이 아니며 잔칫집을 흥겹게 하고자 함이 아닙니다.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되듯이 예수님을 만나고 영접한 사람이 그렇게 변화된다는 것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만난 사람에게 처음으로 오는 변화는 마음의 변화이며, 자기 것을 꼭 끌어안고 남의 것을 가지고자 했던 욕심이 변하여 가슴을 열게 되었고 남에게 베푸는 삶을 살게 된 것입니다.
지금까지 욕심만 채우기에 급급했던 세리장 삭개오가 예수님을 집으로 영접하게 되자 어렵게 사는 이웃을 생각하는 사람이 되어 흩어 주게 되는 사람으로 변화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베푸는 사람을 기뻐하십니다. 이웃을 사랑하고 이웃을 위해 희생하는 사람을 기뻐하십니다. 십자가는 자기에게 있는 것을 나누어주는 것입니다. 자기의 살과 피까지도 예수님처럼 나누어주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10장에 나오는 로마의 백부장 고넬료도 많은 지위와 권력이 있었지만, 그것으로 남의 등을 쳐 폭리를 취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의 것을 남에게 베푸는 구제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총이 베드로를 통하여 나타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삭개오는 예수님 만나기를 간절히 소원하는 마음이 있었기에 예수님이 지나가신다는 소문을 듣고 예수님 앞에 나아오게 되었고, 불가능이란 장벽이 앞을 가로막자 그것을 오히려 역으로 극복하여 예수님의 얼굴을 가장 잘 볼 수 있는 한 나무 위에 올라가게 만들었으며, 예수님께서 오늘 제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는 축복의 말씀까지 듣게 되었고, 예수님을 만나 즐거움으로 영접하다 보니 마음에 큰 변화가 일어나 남에게 베푸는 축복된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우리도 예수님을 만나고자 사모하는 열심을 가집시다. 어제나 오늘이나 그날이 그날과 같은 입장으로 머물지 말고 본격적으로 뜨거운 신앙생활을 하십시다. 예정하신 축복을 받으십시다. 혹시 우리 앞에 커다란 홍해바다와 같은 장벽이 놓여있을지라도 그것으로 인하여 가던 길을 멈추지 말고 믿음으로 전진하십시다. 큰 장애물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여리고 성처럼 보기 좋게 무너져 버릴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의 수고로움과 믿음을 보시고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는 축복을 받으십시다. 그리고 “이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다”라는 말씀을 들으십시다. 예수님이 하시는 일을 우리도 이어받아 영육간에 남에게 베풀고 살아감으로 하늘나라에서 영생을 얻고 이 땅에서도 여러 배 잘 되는 축복을 받으십시다.
흉년이 들었을 때
창 26:1~5
아브라함 때에 첫 흉년이 들었더니 그 땅에 또 흉년이 들매 이삭이 그랄로 가서 블레셋 왕 아비멜렉에게 이르렀더니 여호와께서 이삭에게 나타나 가라사대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고 내가 네게 지시하는 땅에 거하라 이 땅에 유하면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게 복을 주고 내가 이 모든 땅을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라 내가 네 아비 아브라함에게 맹세한 것을 이루어 네 자손을 하늘의 별과 같이 번성케 하며 이 모든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을 인하여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라 이는 아브라함이 내 말을 순종하고 내 명령과 내 계명과 내 율례와 내 법도를 지켰음이니라 하시니라
가나안 땅은 지리적으로 지중해성 기후와 아열대성 기후 및 사막 기후가 교차하는 곳으로서 1년 강우량이 기껏해야 200mm 안팎에 머뭅니다. 특별히 겨울철의 우기(10월~4월)와 농작물의 풍․흉을 가늠할 수 있는 이슬기(8, 9월)가 따로 있어서 이때에 비나 이슬이 적절히 내리지 않게 되면 가나안 전역은 치명적인 피해를 보게 됩니다(삼하 1:21, 왕상 17:1, 슥 8:12).
우리는 가끔 이상기온현상이나 가뭄으로 막대한 피해를 입기도 합니다. 특히 비의 양이 충분하지 않아 국민 모두가 걱정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당시에 식수 보내기 운동이 전개되는가하면 양수기 보내기, 우물 파기 등의 지원과 나중에는 인공비까지 검토하는 등의 계획도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하늘에서 비가 오지 않으면 인간의 노력도 한계에 달할 뿐입니다. 때때로 하나님께서 도우셔서 비가 내려 주시니 감사할 뿐입니다. 설령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이스라엘에 비하면 그리 크지 않은 재해일 뿐입니다.
기근은 척박한 팔레스틴 지방에서는 자주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본문에 나오는 흉년이란 말은 우리로서는 상상을 넘어선 것입니다. 첫 흉년은 100년 전 아브라함 때의 일이었고, 이번에는 이삭의 때였습니다. 여기서 주목해 볼 것은 아브라함이라든가 이삭과 같은 대표적인 믿음의 사람도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가나안을 떠날 정도의 흉년이라면 엄청난 흉년이 아닐 수 없으며 사람까지 굶어 죽었다고 합니다. 후일 요셉이 애굽에 내려가 있을 때에 애굽을 비롯하여 주변 나라까지 7년 흉년이란 무서운 큰 흉년이 든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비가 오지 않는 흉년만을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아닙니다. 때때로 우리들의 삶에 불어닥치는 흉년이란 두 글자를 잃어버려서는 안되며, 여기에 대처하여 신앙인인 우리로서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함께 생각하며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1절 / 아브라함 때에 첫 흉년(창 12:10)이 들었었는데, 그 땅에 또 흉년이 들매 이삭이 그랄(거주지란 뜻으로 가사에서 남동쪽으로 약 17km 떨어진 곳으로 가나안의 남쪽 경계선 서남쪽에 위치한 풍요한 곡창지로서 약 70년 전에 아브라함이 머물렀던 곳)로 가서 아비멜렉에 이르렀습니다. 이 말씀을 보면 많은 것을 느낍니다.
1. 약속의 땅, 축복의 땅, 하나님께서 거하라고 하신 땅, 너와 네 자손에 주리라고 하신 땅에도 흉년이 들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보통의 흉년은 자연의 조화에 의하여 주어지지만 특별한 흉년은 하나님의 비상한 섭리에 의하여 발생됩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가나안을 약속하셨지만 그곳은 생각하는 대로 지상낙원은 아니지만 지상낙원을 만들 수 있는 곳이기는 하였습니다.
2. 하나님의 자녀에게도 말할 수 없는 정도의 어려움이 임할 때가 있습니다. 잘못이 없는데도 말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어려움과 환난을 당하는 것이 이상한 일은 아닙니다. 오히려 더 많은 고통과 환난을 당할 수 있습니다. (다니엘을 모함하여 사자굴 속에 던지기도 하였고, 소년 다윗을 장인인 사울 왕이 얼마나 죽이려고 애를 썼습니까. 의로운 요셉 동생을 애굽에 팔아버리지 않았습니까!) 환난이 없다고 하여 좋아하고만 있어도 안되며 환난이 있다고 하여 낙심할 필요는 없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사람은 환난이 불신자들의 풍요나 번영과 비교할 수 없는 놀라운 영적 축복의 열매를 맺게 되기 때문입니다.
3. 흉년이라는 어려움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모든 사람에게 임합니다. 목사에게는 목사급의 환난이 있고, 집사나 장로에게는 그들 나름대로의 넘어서야 할 어려움이 있습니다.
4. 사람은 누구나 환난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것이 인간의 본능이기도 합니다. 극복한다고 하기보다는 모면하려는데 주력을 두고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신앙을 연약하게 만드는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기에 아브라함의 믿음을 이어받은 이삭도 가나안의 무서운 흉년을 피해 곡식이 많은 애굽으로 내려가기 위하여 블레셋 땅인 그랄에 머물게 되었던 것입니다. 바라건대 흉년을 피하려고만 하지 말고 정면으로 돌파하려고 힘씁시다. 예수님이 시험에 들지 않도록 깨어 기도하라고 명하신 말씀은 흉년을 대비하는 좋은 방법 중에 하나가 될 것입니다. 앞으로 우리에게는 더 큰 어려움이 뒤따를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요셉과 같이 부지런히 흉년을 대비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여야만 합니다. 중지했던 기도도 열심히 합시다. 보지 않았던 성경도 열심히 읽고 더 읽읍시다. 하지 않던 봉사도 힘써서 하십시다. 잘 참석하지 않던 공예배를 아예 빠지지 마십시다. 아니 새벽예배까지 참석하십시다. 이 모두는 환난을 면케 해 주기도 하지만 환난 때에 우리에게 커다란 힘이 될 것입니다.
2절 / 여호와께서 이삭에게 나타나 가라사대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고 내가 네게 지시하는 땅에 거하라
이 말씀을 조금만 더 자세히 들여다 봅시다.
1. 세상에는 흉년이지만, 흉년 중에도 하나님은 함께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성봉 목사님이 예수 없는 천당은 싫다고 하신 적이 있습니다. 아무리 배부른 곳이라도 하나님 없는 곳은 흉년이나 다를 바 없습니다. 애굽으로 팔려간 요셉과 가나안에 남아 있던 형들을 비교하여 볼 때, 애굽에서도 요셉과 함께 하신 하나님(요셉이 찾음으로)은 끝내는 요셉으로 하여금 애굽의 총리대신이 되게 만드셨습니다. 그러나 가나안에서 고생을 모르던 형들(하나님을 잘 찾지도 않은 형들)은 끝내는 흉년 때에 동생의 얼굴과 목소리도 알아보지 못한 체 그 앞에 엎드려 절을 하며 먹을 양식을 구하고 말았습니다. 풍랑이 이는 갈릴리 바다 배속에도 아무 말씀도 없이 주무시고 계신 예수님이 오늘도 환난을 당하는 사람과 함께 하시되 평안히 주무시고 계신다는 말입니다.
2. 왜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라고 하셨는가를 곰곰이 생각해 보면 우리의 짧은 지식으로도 금방 알 수가 있습니다. 애굽은 하나님을 모르는 우상을 섬기는 사람들이 사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그곳에서는 하나님을 찾는 사람이 살수는 없는 것입니다. 좋은 例로 비옥한 땅을 바라보고 요단으로 내려간 롯이 결국은 향락의 도시 소돔과 고모라로 내려가 살게 되고, 그의 신앙은 많은 타격을 받게 되었으며, 가진 재물 다 빼앗기더니 나중에는 한줌의 재로 변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빈털터리로 아내와 자식만을 데리고 소돔과 고모라를 떠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것도 사랑하는 아내는 뒤를 돌아다 본 고로 소금기둥이 되고 말았으니 얼마나 비참합니까! 아버지의 품을 떠난 탕자에게 남은 것은 무엇입니까? 이러한 이야기를 하면 ‘나는 그렇지 않을 것이다’라고 장담을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분도 나중에는 그들과 다른 바 없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시험에 들지 않도록 깨어 기도하십시다.
3. 승천을 앞두신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납니다.
사도와 같이 모이사 저희에게 분부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 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 (행 1:4~5)
엠마오로 내려가던 제자들과 성령을 받은 제자들을 비교하여 보십시오. 어떤 모습이 더 좋은가를 말입니다.
4. 우리는 마태복음 8장에 나오는 백부장의 믿음을 배워야 합니다. 말씀만 하시면 따르겠다는 백부장의 믿음은 모든 사람이 가져야 할 귀중한 믿음입니다. 가지 말라면 가지 말고 가라하면 갈 수 있는 백부장적 믿음이 오늘 우리에게 당장 필요하지 않습니까?
3~4절 / 이 땅에 유하면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게 복을 주고 내가 이 모든 땅을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라 내가 네 아비 아브라함(이삭은 늘 아브라함을 존경하고 신뢰하였다)에게 맹세한 것을 이루어 네 자손을 하늘의 별과 같이 번성케 하며 이 모든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을 인하여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라
1.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겠다는 조건은 그리 어려운 것만은 아닙니다.
이 땅 곧 가나안에 유(留)하라는 것입니다. 흉년을 피하여 애굽에 내려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에는 흉년을 극복하며 견딜 수 있게 해 주시겠다는 말씀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엘리야에게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주신 하나님, 광야에서 40년 동안을 훈련받던 이스라엘을 먹이시고, 입히시고, 보호해 주시던 하나님을 기억하십시다.
2. 복을 내려줄 터이니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3. 이미 그들이 거하고 있는 땅은, 아브라함에게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땅으로 장차 이스라엘 나라를 건설할 곳입니다. 그러므로 지금부터라도 내 나라 내 땅이라는 강한 민족의식 나라의식을 가져야 한다는 말입니다. 살기가 힘들다고 자기 나라를 저버릴 수는 없습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나라가 형성이 되지를 못할 것입니다. 사실 애굽에 내려가서 200여 년 살던 히브리 사람들은 하나님의 기적과 모세의 인도로 애굽을 나왔지만 조그만 어려움만 있으면 자기 땅도 아닌 애굽으로 내려가서 종살이라도 하며 구차한 목숨을 이어가겠다고 합니다. 이런 연약하고 비신앙적인 조상들은 한 사람도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였고, 나라를 형성하는데 참여하지 못하였습니다. 광야에서 새로 태어난 사람만이 가나안에 들어가서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를 이룩할 수가 있었습니다.
결 론 /
1. 애굽이 아닌 그랄에 거하였는데도 이삭은 자기 아내로 인하여 목숨을 잃을까 거짓말까지 하였고
2. 하나님의 축복 속에 많은 결실을 얻게 되고 왕성케 되자 블레셋 사람들로부터 시기를 샀고 나중에는 애써 파놓은 우물까지 잃게 되어 다른 곳으로 이사를 하는 비운을 겪게 됩니다. 만일 애굽으로 내려갔다면 얼마나 많은 어려움을 겪게 될 것인지요?
3. 이삭은 블레셋의 압력과 시기와 시비가 있는 그랄보다는 차라리 어려움을 당한다 하더라도 평화롭게 살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그랄을 떠나 브엘세바로 올라왔습니다. 그 밤에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큰 위로를 하셨고 축복의 약속까지 하셨던 것입니다.
짧은 인간의 생각은 항상 위태로울 뿐입니다. 그러므로 차라리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따르는 것이 우리 자신들에게 있어서 가장 안전한 방법이 될 것입니다.
마게도냐행을 결정한 사도 바울
행 16:6~10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땅으로 다녀가 무시아 앞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쓰되 예수의 영이 허락지 아니하시는지라 무시아를 지나 드로아로 내려갔는데 밤에 환상이 바울에게 보이니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그에게 청하여 가로되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하거늘 바울이 이 환상을 본 후에 우리가 곧 마게도냐로 떠나기를 힘쓰니 이는 하나님이 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줄로 인정함이러라
바울의 처음 전도활동은 예루살렘과 사마리아와 소아시아에 국한되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제1차 전도 여행 때 주로 소아시아지방을 돌아다니면서 전도하였습니다. 그리고 제2차 전도 여행 때에는, 제1차 전도한 지역을 방문하면서 기회가 있을 때마다 새로운 개척교회를 세우기로 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느 날 드로아라고 하는 항구로 내려가 철야하며 기도하는 중에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나타나 마게도냐에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고 하는 환상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구라파에 복음을 먼저 전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 줄 알아 드로아에서 배를 타고 마게도냐 지방의 첫 성인 빌립보로 가게 되었습니다.
6~7절에서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 브루기아와 갈리디아 땅으로 다녀가 무시아 앞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쓰되 예수의 영이 허락지 아니하시는지라”라고 했습니다.
성령이 저로 하여금 아시아에서 복음 전하는 것을 허락지 아니하였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먼저 구라파를 복음화시키고 종말의 시기에 아시아를 복음화시켜 영광을 받으시려는 원대한 섭리와 뜻이 계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성경에 보면 마지막 때에 복음선교의 근원지를 분명히 극동에 넘겨줄 것을 말씀했습니다.
이사야 24장 15절에 “동방에서 여호와를 영화롭게 할 것이라”고 했으며, 이사야 41장 25절에는 “하나님의 이름을 부른 자를 해 돋는 곳에서 오게 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사야 41장 16절에는 “동방에서 독수리를 부르리라”고 했고, 이사야 59장 19절에는 “해 돋는 그의 영광을 두려워할 것은 여호와께서 그 가운데 몰려 급히 흐르는 하수 같이 오실 것임이로다”고 했습니다. 에스겔 43장 2절에는 “하나님의 영광이 동편에서부터 올 것이라”, 다니엘 11장 44절에 “그러나 동북에서부터 소문이 이르러 그로 번민케 하므로”, 요한계시록 7장 2절에 “또 보매 다른 천사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인을 가지고 해 돋는 데로부터 올라와서 땅과 바다를 해롭게 할 권세를 얻은 네 천사를 향하여 큰 소리로 외쳐라”고 하였습니다.
이 모든 예언의 말씀대로 복음이 이스라엘서 곧바로 로마로, 로마에서 독일로, 독일에서 영국으로, 영국에서 미국으로, 미국에서 한국으로, 선교지 근원이 옮겨오고 한국에서 세계로 복음화가 되어지는 사명을 주심을 그 누구도 부인 못하는 사실입니다. 오늘 이 같은 내용으로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1. 전도의 행위를 절제케 하시고
6절에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고 했습니다. 성령께서 바울 일행을 제재하셨습니다. 모든 인간은 일을 행함에 있어서 항시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됩니다. 그 때 인간은 육체를 가진 존재이기에 육체의 소욕이 있을 수 있으며 또한 영혼을 소유한 존재이기에 그 속에서 거룩하게 역사하시는 성령의 소육이 있을 수 있습니다(갈 5:17). 이러한 영적인 투쟁은 불신자나 율법주의자들만이 고생이 아니라 믿음으로 거듭난 성도도 가지는 고통입니다(롬 7:22~25). 그러나 성도는 두 가지 소욕이 마음속에서 갈등할 때 육체의 소욕을 정복하고 전적으로 성령의 소욕을 따라야 합니다. 그런데 그것은 절제를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절제하는 성도가 되십시다. 바울은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를 말하면서 절제의 열매를 맨 마지막에 소개합니다.
그것은 절제의 열매는 열등해서가 아니라 절제의 열매야말로 모든 성령의 열매들을 보전할 수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갈5:23). 절제는 그처럼 보배로운 성령의 열매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전도 여행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육체의 소욕을 따르기보다 성령에 소욕을 따랐으니 이는 바로 절제할 줄 아는 자세였기 때문입니다.
2. 인간의 계획과 하나님의 뜻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7절에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쓰되 예수의 영이 허락지 아니하는지라” 했습니다. 바울은 본래 소아시아 지방에서 복음을 전하기를 원하였습니다. 그러나 바울의 이러한 계획은 성령께서는 허락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무시아로 갔습니다. 당초의 계획을 바꾸어 성령의 뜻을 좇았던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은 복음이 소아시아에서 머물기보다는 좀더 넓은 지역으로 확장되기 원하셨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자신의 계획이 내 뜻보다는 언제나 하나님의 뜻에 복종해야 함을 깨닫게 됩니다. 만일 하나님의 섭리가 우리의 시도하려는 것을 저지한다 해도 우리는 그것을 따라야 하며 또한 그것이 최선의 길임을 믿어야 합니다. 사람들이 곧 잘 인생에서 실패하는 것은 이러한 성령의 명령보다는 육신의 생각을 좇아 살기 때문인 것입니다(벧전 4:2).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은 오직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아야 합니다(롬 8:14).
3. 전도를 환영하는 환상을 보았고
9절에 “밤에 환상이 바울에게 보이니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그에게 청하여 가로되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하거늘” 라고 했습니다. 아시아에서 복음전도를 막은 성령은 드로아로 발길을 돌리게 했고 거기에서 밤에 환상을 보게 했습니다. 드로아는 항구로서 아세아와 구라파를 연결하는 교통상 요충지대입니다. 여기에서 본 환상은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바울에게 청하기를 마게도냐로 와서 우리를 도와주시오 하는 환상이었습니다.
여기서 바울 일행은 하나님의 뜻이 마게도냐로 건너가서 복음을 전하라고 하는 것을 깨닫고 마게도냐로 건너가게 되었습니다. 마게도냐는 헬라 북부의 한 지방으로서 산이 많은 지역입니다. 도와 달라는 것은 영적으로 구원을 요청하는 것입니다. 사실상 사람들은 영적 생명의 구원을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어떤 물욕, 세상적 향락, 혹은 지식, 육신의 욕망, 본능의 작용 때문에 심령이 둔화되어 영적 생명 구원의 필요를 망각하고 살뿐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영적 생명의 구원을 필요로 하고 영의 눈을 뜬 사람은 심령이 메마르고 목마름을 자각하는 사람은 “나를 도와주십시오“ 하는 청을 아니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또한 들을 귀를 가지고 이 호소를 들어야 합니다. 아프리카 미개인의 목소리를 들어야 하고, 공산권 아래서 신앙의 자유를 잃고 살아가는 인생들의 외치는 소리를 들어야 하며, 우리 주위의 헐벗고 굶주린 자들의 소리도 들어야 합니다. 소외당하고 병든 자의 절규를 들어야 합니다. 또한 세게 선교의 주역이 될 한국 교회의 모든 성도들은 바울과 같이 선교의 환상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각자에게 보여진 환상을 성취하기 위해 열심히 선교 사역에 동참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4. 하나님에 뜻에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바울의 일행은 자기들이 가고자 하는 지역에 가지 못하여 자기들의 뜻과 소원은 이루지 못했지만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으로 행선지를 바꾸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 순리요 귀한 일이라고 여겼던 것입니다. 우리는 신앙 생활하면서도 너무나 내 뜻, 내 소원, 내 고집을 이루어 보려고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려고 하지 않고 자기 뜻을 이루어 보려고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려고 하지 않고 자기 뜻을 관철하려고 아집을 쓸 때가 많습니다. 그런데 자기 소원, 자기 고집은 사실 하나님이 그 길을 막으십니다. 혹 억지로 나가면 나중에 실패의 결과를 가져옵니다.
요나와 같이 크게 어려움을 당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면 복을 받습니다. 우리는 내 소원, 내 뜻보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생활을 제일로 하고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이따금 하나님의 뜻을 분간하기 어려울 때가 있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인간의 뜻대로 행하는 것은 결국에 있어서는 불행을 가져옵니다. 사도들은 이 같은 사실을 잘 알기 때문에 하나님에 뜻에만 순종하여 아시아에서 복음 전파를 포기하고 구라파로 가게된 것입니다.
5. 사도들의 전도의 사명의 열심을 말하고 있습니다.
10절에 “바울이 이 환상을 본 후에 우리가 곧 마게도냐로 떠나기를 힘쓰니” 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이 보여 주신 환상을 거절하지 아니하였을 뿐만 아니라 즉시 실천으로 옮겼습니다. 바울의 선교사역이 아름다운 결실을 맺을 수 있었던 것은 이처럼 성령의 명령에 절대 순종하였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참으로 교회를 부흥시키고 나아가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를 확장시키기 원한다면 무엇보다도 성령에 절대적으로 순종해야 합니다.
우리의 순종은 성령을 활동케 하는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성령이 활동하는 곳에만 신에 능력이 있어서 인간들에 원하는 이상의 많은 결실을 맺게 되는 것입니다.
6. 복음에 사도로 부르심에 확신
10절에 “이는 하나님이 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줄로 인정함이러라”고 했습니다. 바울 일행은 하나님이 그곳에서 복음을 전파하도록 그들을 부르신 줄을 확신하였습니다. 때때로 사람이 요청하는 것이 곧 하나님의 요청이 될 수도 있습니다. 비록 마게도냐 사람이 와서 우리를 도와 달라고 했다 하더라도 바울은 이것을 가서 그들을 도우라는 하나님의 명령으로 받아들였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버려진 자들, 잃어버린 자들에게 복음을 전할 주의 종들을 부르고 게십니다(사 6:8). 이 부르심이 우리를 부르시는 소리임을 확신하며 부르심에 순종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7. 예수의 영은 사도들의 마음을 주장하셨습니다
7절에 “무시아 앞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쓰되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아니하는지라.”고 했습니다. 사도들은 예수의 영에 온전히 붙잡혀 그의 지시에 행동할 수밖에 없었고 또한 그 영의 지시에 움직였던 것입니다.
1. 사도는 성령에 주장을 당했습니다
6절에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라고 했습니다. 사도는 그의 전도 계획을 아시아로 삼았습니다. 그러나 성령은 예수의 영은 그의 마음과 걸음을 판단을 사로잡고 말았습니다. 성령에 붙잡힌 그는 마침내 마게도냐 쪽에서 나타난 환상을 보고 빌립보 지역으로 전도하게 하심으로 믿었습니다.
2. 사도는 기도하고픈 마음에 붙잡혔고
사도는 드로아에서 밤에 기도했습니다. 8~9절에 그는 그날 밤에 거기에서 마게도냐로 오라고 손짓하고 있는 환상을 보았습니다. 그는 실라와 함께 기도처를 찾아가다가 빌립보 강변에서 예배하던 여자들을 만나서 복음을 전했습니다(행 16:13). 그는 기도하는 곳에 가다가 점하는 귀신들린 불쌍한 여자를 만나서 고쳐주었습니다(행 16:16). 그는 감옥에 갇혔던 곳에서 기도하고 찬송했습니다. 그러다가 손과 발에 묶인 쇠사슬이 풀리고 옥문이 열리는 기적을 체험하기도 했습니다(행 16:25~26).
3. 사도는 말씀에 사로 잡혔고
그는 빌립보 성 강변에 모인 여자들에게 복음의 입을 열었습니다(행 16:14). 실로 이것은 전 구라파 역사의 새장을 여는 첫 노크였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외쳤습니다(행 18:5).
4. 사도는 예수의 이름에 붙잡혔습니다.
바울은 다메섹 핍박의 도상에서 예수를 만났습니다(행 9:5). 그후로 언제 어디서 누구에게나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요 그리스도라고 증거 했습니다. 그는 기도하려 가다가 귀신에게 잡히고 주인에게 팔려 사는 불쌍한 노예된 여자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해방을 주었습니다(행 16:18).
5. 사도는 사명에 붙잡힌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자기의 생명을 바치기로 작정된 사람이었습니다(행 20:24). 사도는 지금 사명을 따라 드로아에서 빌립보로 왔습니다. 사명에 따라 감옥에서도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찬송하며 기도했습니다.
결 론
이상과 같이 사도 바울은 예수의 영에 붙잡혀 완전히 주장을 당했고 또한 그는 그 주자 앞에 항복하여 온전히 예수님의 일만 한 것입니다. 신앙이 잘못되었다는 것은 예수의 영에 바로 붙잡혀 주장을 당하지 못한 것을 말함이며 또한 성령의 주장에 끌려가지 아니하고 반항한 점을 의미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