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지국 생활을 오래 했던 필자에게는 나도 모르는 사이 어느 순간 하나의 버릇이 생겨났다. 그것은 아무리 큰 사건 사고가 발생하고 방송에서 관련 보도가 쉴새 없이 쏟아져 나와도 다음 날 아침 조간신문에 톱뉴스로 실린 현장 사진을 확인하고 나서야만 필자에게 그 사건이 확증된다는 것이다. 1994년 10월 21일 성수대교 붕괴의 아비규환 현장이 뉴스와 속보로 쏟아져 나올 때 눈으로 보고 믿어져야 하는데 그 상황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트라우마가 숨어있는 까닭일까. 필자는 다음 날 새벽에 도착한 신문 다발에서 신문을 펼쳐보고서야 개인적으로 그 사건을 확증할 수 있었다.
2001년 발생한 9.11테러 사건은 당시 TV 화면을 통해 어마어마한 충격을 받으며 시청했는바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느껴져 정말 실제 일어난 일이라고 받아들이기까지는 적지 않은 시간이 걸렸다. 사람들이 발 딛고 사는 이 땅에는 이런 사건 사고는 끊이지 않고 반복해서 일어난다. 여기에 또 하나의 사건 기록이 더해지니 안타깝기 그지없다. 그저께 10월 29일 밤 이태원에서 핼러윈(Halloween) 축제에 참가한 사람들은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코로나19 방역의 엄격한 규제 속에서 3년 만의 야외 마스크 전면 해제와 맞물려 축제 마지막 날엔 10만 명의 사람들이 이태원을 에워쌌다. 2017년 같은 축제가 열렸고, 20만 명이 모였는데도 아무 사고 없이 무사히 넘어갔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 절반의 숫자임에도 불구하고 참사가 크게 일어난 것은 3년 넘는 동안 삶의 규제가 심했고, 활동에 제약을 많이 받았던 사람들의 자유로운 활동에 대한 반발심리도 한몫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필자가 사는 울산에도 봇물 터지듯 현장의 축제가 한꺼번에 열렸고, 전국적으로 현장을 마음껏 활보하며 즐기는 축제는 넘쳐났다. 계절적 요인으로 가을의 정취와 어울려 10월의 마지막 밤을 아름답게 수놓고 싶은 사람들은 핼러윈 특유의 분장으로 마음껏 자신들의 젊음의 한때를 표출해보고자 하는 욕망도 컸으리라 짐작된다. 시간이 흐르며 참사 현장의 사건이 하나씩 퍼즐 짝이 맞추어지듯 드러나는데 사건이 발생하기 불과 몇 시간 전 동영상에서도 사건과 비슷한 엄청난 인파가 좁은 골목길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뒤쪽에 꽉 막혀 못 올라온다. 앞으로 전해달라”고 한 여성이 큰 소리로 외쳤고, 이 여성의 음성 지시에 따라 사람들이 한마음 한뜻으로 한쪽으로 일방통행을 해서 무사히 지나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이때 어느 한 사람이라도 차분한 마음으로 경찰에 연락해 안전조치를 강화하라고 했다면 어땠을까. 그런데 불과 몇 시간 후 같은 장소에서 발생한 사고는 평온한 세상에 전쟁터의 참화처럼 끔찍한 결과를 불러왔다.
필자도 여러 채널과 뉴스 속보를 쭉 살펴보았는데 가장 정확한 묘사는 60만 구독자를 가진 여성 유튜버의 증언이었다. 우연히 사건 현장에 있었고, 촬영하면서 현장을 담았고, 나중에 그 상황을 묘사했는데 사건 현장에 있었기 때문에 방송국에서 보도하는 것보다 더 정확했다. “이태원에서 인명사고가 나서 너무 혼란하다. 현장에 오지 마라” “내가 현장에서 살짝 우측 통행을 하며 순환이 될 때였고, 심각한 순간 바로 전인데 한 걸음 떼기가 쉽지 않았다” “그러고는 바로 밀려서 떠내려가는 느낌이었는데 어느 순간 엉키며 줄다리기하듯 앞뒤 양쪽에서 압박이 와서 눈앞이 하얘졌다” “마침 같이 간 친구가 힘이 센 편이라 날 잡아주지 않았다면 나도...”하면서 당시 긴박했던 상황을 전했다.
이에서 보듯 삶과 죽음은 종이 한 장 차이처럼 아슬아슬하게 비켜 가기도 하고 맞딱뜨리는 게 우리의 운명이다. 생각지도 않은 참사로 유명을 달리한 사람들과 유가족들의 심정을 어느 누가 다 헤아릴 수 있을까. 비통한 심정은 어떤 위로의 말로도 다 아물지 않을 것이다. 아무쪼록 돌아가신 분들의 장례 절차와 다친 사람들의 치료가 잘 이루어지길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