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경주역사유적지구
경주역사유적지구는 신라 천년(B.C 57-A.D 935)의 역사와 문화유적이 산재해 있는 경주 일대를 지칭하는 것으로 2000년 12월 유네스코세계유산목록에 등재되었다. 이 지구는 모두 5개 권역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불교미술의 보고인 남산지구, 천년왕조의 궁궐터인 월성지구, 신라 왕을 비롯한 고분군 분포지역인 대능원지구, 신라불교의 정수인 황룡사지구, 왕경 방어시설의 핵심인 산성지구 등이다. 이미 세계유산에 등재된 일본의 교토, 나라와 비교하여 유적의 밀집도, 다양성에서 보다 뛰어난 유적지로 평가되고 있다.
南山에서 바라 본 慶州 遺跡地區(ⓇHeoKyun)
◎ 남산지구
남산은 금오산(金鰲山)이라고도 하며, 일반적으로는 북쪽의 금오산과 남쪽의 고위산(高位山)의 두 봉우리 사이를 잇는 산들과 계곡 전체를 통칭해서 남산이라고 한다. 신라 건국설화에 나타나는 나정(蘿井), 신라왕조의 종말을 맞은 장소인 포석정지(鮑石亭址)를 비롯해서 미륵곡 석불좌상, 배리 석불입상, 칠불암 마애석불, 용장사지삼층석탑 등 수많은 불교유적이 산재해 있어 가히 야외박물관을 방불케 한다. 남산에 얽힌 전설과 영험의 사례에 대한 설화도 다양하고 풍부하다. 박혁거세(朴赫居世)가 태어난 곳이 남산 기슭의 나정이며, 불교가 공인된 528년(법흥왕 15) 이후 남산은 부처님이 상주하는 신령스러운 산으로 존숭되었다.
慶州南山鮑石亭址(ⓇHeoKyun)
慶州南山神仙庵磨崖普薩半跏像(ⓇHeoKyun)
慶州南山潤乙谷磨崖三尊佛 中 二佛(ⓇHeoKyun)
慶州南山三陵谷磨崖如來坐像(ⓇHeoKyun)
慶州南山七佛庵磨崖佛像群(ⓇHeoKyun)
慶州南山茸長寺址三層石塔(ⓇHeoKyun)
慶州南山三陵(ⓇHeoKyun)
◎ 월성지구
월성지구에는 신라왕궁 자리였던 월성, 신라 김씨 왕조의 시조인 김알지가 태어난 계림, 신라 통일기에 조영한 임해전지, 그리고 동양 최고의 천문시설인 천성대(瞻星臺) 등이 포함돼 있다.
○ 계림(鷄林)
첨성대와 월성(月城) 사이에 있는 숲으로, 왕버들·느티나무·단풍나무 등의 고목 숲이 울창하다. 계림이란 이름을 얻게 된 것은 다음과 같은 설화에 의해서다. 숲 속에서 이상한 닭 울음소리가 들리기에 가 보니, 나뭇가지에 금빛의 궤가 걸려 있고 그 아래에서 흰 닭이 울고 있었는데 그 궤 속에거 김씨 왕조의 시조인 김알지(金閼智)가 나왔다는 것이다.
○ 임해전지(臨海殿址)
임해전지는 삼국통일을 전후로 조성하기 시작하여 674년(문무왕 14)에 완성된 궁궐유적지다. 《동국여지승람》 기록에, “문무왕이 궁궐 안에 못을 파고 돌을 쌓아 산을 만들었으니 무산십이봉(巫山十二峰)을 본떴으며…….” 라고 한 것을 보면 신선사상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1975년 3월부터 1986년 12월까지 연못과 주변 건물지 발굴조사가 있었는데, 이 때 석축호안(石築護岸)으로 둘러싸인 연못과 3개의 섬, 그리고 연못 서쪽의 호안에서 5개의 건물지와 서쪽·남쪽으로 연결된 건물지들이 발견되었다.
臨海殿址出土金銅板普薩坐像(國立中央博物館 사진)
○ 첨성대(瞻星臺)
경주시 인왕동에 위치하고 있는 동양 최고(最古)의 천문 관측대. 신라 선덕 여왕 때 세워진 첨성대는 위는 네모나고 아래쪽이 둥근 상방하원(上方下圓) 형태를 가지고 있으며, 높이 9.17m, 밑지름 4.93m, 윗지름 2.85m의 규모로 되어 있다.
첨성대의 기능에 관해서는 민족항일기까지 천문 관측을 위한 시설물로 해석되고 있었으나 광복 이후에 제단(祭壇), 또는 기념물이라는 등 여러 가지 설이 속출하기 시작했다. 내세운 이유 중 하나는 첨성대가 평지에 세워져 있다는 점, 첨성대 구조상 그 위로 오르내리는 통로가 좁아 별을 관측하는 데 불편하다는 점 등이다.
고대인들이 별을 관측하는 첫째 목적은 역법을 만들기 위해 태양·달·행성의 운행을 관측하기 위한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점성(占星)이라는 말이 뜻하는 바와 같이 별자리를 지방 또는 국가에 배당하여 그 천상 분야에서 일어나는 제반 천문현상을 관찰하여 국가의 길흉과 지방의 상태를 점치기 위한 것이었다. 이런 관점에서 첨성대가 이 두 가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만들어진 시설물일 것이라는 학설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瞻星臺(ⓇHeoKyun)
◎ 대능원지구
대능원지구에는 신라 왕, 왕비, 귀족 등 높은 신분계층의 무덤들이 있다. 구획에 따라 노동동 고분군, 노서동 고분군, 황남동 고분군 등으로 불린다. 무덤의 발굴조사에서 금관, 천마도, 유리잔, 각종 토기 등 신라문화의 정수를 보여주는 귀중한 유물들이 출토되었다.
○ 노서동 고분군
월성의 북편 일대에 분포하는 경주 중심지구 고분군들 가운데 북서 말단부에 분포하는 고분을 지칭한다. 중요 고분으로 금관총, 서봉총, 호우총, 은령총 등이 있다.
금관총(金冠塚)은 1921년 일제에 의해 발굴되었으며, 발굴당시에 금제허리띠 등의 각종 금제 장신구, 금동말안장, 옥충(玉蟲)을 장식한 발걸이 등 마구류, 금제완, 청동초두 등의 귀금속 용기와 유리용기, 토기류, 각종 철제무기류 등이 대거 출토되어 세계를 놀라게 했다.
金冠塚金冠및金製冠飾(國立中央博物館 사진)
서봉총(瑞鳳塚)은 1926년 발굴 조사에서 봉황장식 금관이 출되었다. 당시 발굴에 참여한 스웨덴[瑞西] 황태자 구스타프 아돌프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고분 이름을 스웨덴의 ‘瑞’자와 봉황의 ‘鳳’자를 조합해 서봉총으로 명명했다. 유물로는 봉황모양장식을 얹은 금관을 비롯한 유리제팔찌, 금제굵은고리드리개 등의 각종 장신구, 청동초두, 유리그릇을 비롯한 각종 용기류, 각종 마구류가 출토되었다. “연수원년(延壽元年) 신묘년(辛卯年) 3월에 이 은합을 만들었다”라는 명문이 있는 은합(銀盒)은 이 무덤의 조성 연대 추정에 결정적 단서를 제공했다.
호우총(壺杆塚)과 은령총(銀鈴塚)은 1946년 국립박물관에 의해 발굴되었다. 원래의 봉분은 남쪽에 호우총, 북쪽에 은령총이 배치되어 표주박 모양을 취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각각의 무덤에서 금동관을 비롯한 장신구, 금속용기류, 마구류, 무기류 등이 출토되었다. 호우총에서 출초된 “乙卯年國崗上廣開土地好太王壺杆十”이라는 명문이 새겨진 청동합(靑銅盒)은 415년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어 신라고분 연구에 귀중한 단서를 제공해 주었다.
壺杅塚出土 '壺杅'字 靑銅器(國立中央博物館 사진)
○ 노동동 고분군
경주의 중심부인 월성의 북편에 분포하는 대고분군 가운데 서북편의 말단부에 위치한 고분군이다. 고신라 시대 왕족과 귀족들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이 고분군은 서쪽에 나 있는 도로를 경계로 하여 노서동 고분군과 구분되고, 남측의 도로에 의해 황남동 고분군, 황오동 고분군과 구분된다. 노동동 고분군은 이 일대에 분포하는 고분들로 봉황대, 식리총, 금령총 등이 포함돼 있다.
금령총(金鈴塚)은 1924년 일제에 의해 발굴 조사되었는데, 당시에 금관, 금방울(金鈴), 금제허리띠를 비롯한 각종 금제장신구와 기마인물형토기 등의 토기류, 각종 마구, 유리용기와 귀금속제의 용기 등이 출토되었다. 고분 이름을 금령총이라 한 것은 금방울 출토되었기 때문이다.
식리총(飾履塚)에서는 금제귀고리, 금동제신발을 비롯한 각종 장신구와 함께 무기류, 각종 마구, 금속용기, 칠기, 토기 등의 용기류가 출토되었다. 출토된 금동제신발을 근거로 고분 이름을 식리총이라 지었다.
봉황대(鳳凰臺) 고분은 아직 발굴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 고분은 어느 왕의 능인지 아직 명확히 밝혀져 있지 않으나 그 앞에 위치한 금령총, 식리총, 그리고 옆에 나란히 있는 금관총의 조사결과와 관련해서 기원 500년 무렵의 왕릉으로 보고 있다.
○ 황남동 고분군
고분군은 노동동 고분군과 노서동 고분군에서 남동쪽인 월성(月城)으로 이어지는 선상에 분포하는 고분군이다. 30 여기의 고분이 있으며, 고분군 일부는 대릉원(大陵苑)으로 조성되어 보호되고 있다. 이들 중 유명한 것으로 황남대총과 천마총(天馬塚), 그리고 미추왕릉(傳 味鄒王陵)으로 전해는 고분이 있다.
황남대총(皇南大塚)은 2개의 원형봉토분이 결합되어 있는 표형분(瓢形墳)이다. 남분과 북분이 합쳐진 이 표형분은 의도적인 부부합장을 위한 것으로 판명되었다. 출토품은 은관, 금제조익형관식, 금제, 은제의 용기류와 칠기, 유리용기, 금장식고리자루큰칼을 비롯하여 3만 점이 넘는 막대한 양의 유물이 발굴과정에서 수습되었다.
천마총(天馬塚)은 1973년도에 발굴 조사되었다. 출토유물은 목걸이, 허리띠, 금모(金帽) 등 금제 장신구가 많았고, 이밖에 쇠도끼, 각종 용기류, 마구류도 출토되었다. 특히 천마가 그려진 장니 이외에 기마인물도(騎馬人物圖), 서조도(瑞鳥圖), 칠기그림 등 각종 회화자료의 출토는 고신라 회화연구에 획기적인 증거 자료를 마련해 주었다.
天馬塚(ⓇHeoKyun)
天馬塚金製冠飾(國立中央博物館 사진)
天馬塚金製腰帶(國立中央博物館 사진)
◎ 황룡사지구
황룡사지구에는 황룡사지와 분황사가 있다. 황룡사는 몽고의 침입으로 소실되어 지금 터만 남아 있으나 발굴을 통해 웅장한 규모의 대사찰이었음이 밝혀졌다. 출토된 40,000여 점의 유물은 신라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皇龍寺址 全景(ⓇHeoKyun)
皇龍寺址塔址(ⓇHeoKyun)
皇龍寺址柱礎石(ⓇHeoKyun)
◎ 산성지구
가야, 백제, 고구려 등과 국경을 마주했던 신라는 주변 나라들로부터 영토와 백성을 보호하기 위해 여러 곳에 성을 쌓았다. 산성지구에는 궁궐을 보호하기 위한 월성과 경주로 진입하는 적군을 막기 위해 만든 산성이 있다. 월성은 현재 일부만 남으며, 산성 유적지로는 동쪽의 명활산성, 서쪽의 선도산성, 남쪽의 남산성, 북쪽의 북형산성, 북서쪽의 부산성 등이 있다. 이 가운데 비교적 보존 상태가 좋은 곳은 명활산성이다. 오늘날 볼 수 있는 것은 수백 미터에 불과하지만 신라의 토목 수준을 알아보는 데는 모자람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