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권魂 심어 '국민스포츠' 육성"
레소토는 사방이 남아공에 둘러싸인 산악국가다.
전국토가 해발 1000m 이상이고 3000m가 넘는 산도 여럿이다.
우리의 경상도 땅과 비슷한 약 3만㎢의 면적에 인구는 210만명. 수도 마세루에는 11만명이 산다. 국민 대다수가 농경과 목축업에 종사하지만 식량을 자급하지 못해 무척 가난하다.
요하네스버그에서 마세루까지는 자동차로 4시간 거리. 국경에서 마세루 브리지를 넘어 잠시 차를 달리면 바로 마세루의 중심가 킹스웨이로 이어진다. 이곳에 사는 한인은 10여가구 40여명이다. 주로 의류 신발 판매, 자동차 정비, 철제 건자재 판매, 사진현상업 등에 종사하고 있다.
이곳에 가장 먼저 정착한 한인은 태권도 사범 이중기(52)씨다.
15년간 여기 살면서 아프리카의 이름없던 나라 레소토의 국위를 떨치게 한 인물이다.
마치 '히딩크 감독'이 한국에서 존경을 받는 것처럼 그는 레소토에서 가장 존경받는 체육인이다.
현재 그는 국방부 체육위원이며 레소토 태권도협회 기술위원장(국가 코치)을 맡고 있다.
"여기선 태권도 경기가 벌어지면 보통 밤 늦게까지 계속합니다. 관중들이 새벽 2∼3시까지 자리를 지키며 구경해요."
마세루에서 열리는 국내대회는 교민 노은우씨 등이 적극 후원하는 헐리우드 포토 배(杯)나 밀레니엄 컴퍼니 챔피언십 등. 보통 초등부에서 중등부 여자-남자 일반부까지 이틀간 벌어지는 경기는 시종 응원과 함성, 탄성 속에 축제처럼 이어진다.
경기 벌어지면 새벽까지 열광
우리의 아시안 게임처럼 4년마다 열리는 올 아프리칸 게임 제7회 대회(1999년) 때 레소토는 금 6, 은 1, 동 2로 아프리카 53개국 가운데 7위를 차지했다. 국력도 미미한 나라가 체육강국의 면모를 과시한 것이다. 이들 메달 가운데 복싱종목의 동 둘을 빼면 나머지 모두 태권도 종목에서 얻은 것이었다.
당시 태권도 선수들의 활약상은 산악국가 레소토에 라디오와 TV로 중계됐고, 레소토 총리는 경기가 열리는 남아공 요하네스버그로 달려가 선수들의 노고를 치하했다.
짐바브웨 하라레에서 열린 6회 대회(95년) 때는 은 2, 동 3을 땄다. 오직 태권도 종목에서 건진 메달이었다. 이집트 카이로에서의 5회 대회(91년) 때는 사상 처음으로 은 3, 동 2을 따 온 국민이 열광했다. 선수들이 귀국하는 공항에는 5개부 장관까지 나와 환영했다.
이런 성과에 힘입어 레소토에서 태권도는 축구에 이어 가장 인기있는 스포츠 종목이 돼있다. 초등교 교사와 여성들도 태권도를 배우는 이가 많다.
"36개 도장에서 5000명쯤이 수련하고 있습니다. 도장의 사범들은 군, 경찰에서 사범단 과정을 거친 이들로 거의 직접 지도를 받았던 제자들입니다."
이씨는 국제대회에 나가는 선수층은 아직 엷은 편이어서 50명쯤 된다고 한다. 군인 선수들은 부대 안의 숙소에서 머물며 태권도를 연마한다.
이씨가 아프리카에 첫발을 디딘 것은 31세이던 1981년. 정부 파견 태권도 사범으로 가족과 함께 처음 케냐 나이로비에 왔다. 여기서 그는 국가코치로서 선수를 육성하고 유단자를 특별지도하며 6년반을 보냈다. 그러나 당시 가장으로서 그의 삶은 '빵점'이었다.
곁길에 눈을 팔다 가산을 탕진했다. 83년 그는 국제심판(13기)에 합격하고도 세계태권도연맹에 3년새 등록비(100달러)와 연회비(50달러)조차 내지 못해 자격을 잃었다. 4년이 지나서야 그는 재교육을 받고 국제심판으로 등록했다.
그가 케냐에서 레소토로 활동무대를 옮긴 것은 87년. 70년대에 아프리카 레소토 등지에 태권도를 보급했던 윤목씨(65.현 케냐 태권도협 기술위원장, AA태권도연맹 기술위 의장)의 소개 덕분이었다.
이씨는 이곳에서 93년말까지 무료로 군 교관단을 지도했다. 따로 수입이 없어 국제학교 건물을 빌려 몇년 동안 개인체육관을 운영하기도 했다. 2년 남짓 그와 함께 지내던 윤씨는 이씨의 궁핍을 덜어주려고 월급에서 1000란드(약 250달러)씩을 떼주었다. 몇년째 생활고를 겪어온 그에게 뜻밖에 희소식이 전해졌다.
대표팀-국방부 체육위원 맡아
"이 나라 태권도를 이끌어온 지도자 미스터 리에게 경제적 지원이 한푼도 없다는 것은 지나치다. 그가 다른 나라로 떠나면 어쩔 것인가"고 레포사 대령이 군 지도부에 문제를 제기하고 나섰다는 것이다.
이후 군사령관의 주선으로 그는 94년 국방부 체육위원으로 임명돼 지금까지 일하고 있다.
아프리카 오지에서도 태권도를 배우고 태권도의 나라 한국을 기억하는 레소토인이 많아진 것에 그는 뿌듯함을 느낀다. 레소토에서 그는 가정과 교회 신앙에 열심인 크리스찬으로 거듭났다.
그가 주로 하는 일은 군 선수 등을 육성하고 태권도협회를 운영하며 국가코치로서 대회 출전 선수를 훈련시키는 것. 매주 수요일 열리는 태권도협회 임원회의에서는 선수 지도 관리 등 갖가지 과제를 논의한다. 임원끼리 토론은 격렬해도 한번 결정되면 절대 승복한다. 스승에 대한 예의는 한국 이상으로 깍듯하다. "일어섯. 차렷. 관장님께 경례." 회의를 마칠 때마다 그는 한국말 구령을 들으며 임원들의 인사를 받는다.
2003년 임기를 마친 뒤에도 그는 이곳 태권도 발전을 위해 계속 땀흘릴 작정이다.
<태권도의 남북대결>
한국 정부는 1970년대초부터 태권도 사범을 아프리카 여러 곳에 파견했다. 이들은 현지 정부 지도자의 경호원이나 군-경찰에게도 무술을 가르쳤다. 유엔 등 국제무대에서 남북 대결이 극심하던 시절 이들 정부 파견 사범은 민간외교의 최일선에서 한국을 알린 주역이었다.
한동안 아프리카 곳곳에서는 남한의 태권도와 북한의 격술이 경합을 벌였다.
레소토의 경우 80년 북한과 수교를 맺으면서 태권도를 밀어냈다. 당시 여기서 애써 기반을 닦던 박연한 사범이 레소토-북한 수교 직후 48시간내 떠나라는 요구를 받고 눈물을 머금고 빠져 나와야 했다. 그뒤 5년간 이곳 군 교관단의 무술지도는 북한인이 도맡았다.
85년말 등장한 주스티누스 레카니아 군사령관은 군부내 친북세력을 밀어냈다. 대령 시절 윤목씨에게서 태권도를 배웠던 그는 87년 스승 윤씨를 레소토에 초청했다. 이는 당시 케냐에 있던 이중기씨가 그와 동행했다가 여기에 뿌리내리는 계기가 됐다.
더러는 정변 때문에 태권도 사범이 시련을 겪는 수도 있었다. 이씨로서도 가슴을 쓸어내린 일이 있다.
"94년 엔추 모헬레 총리가 군사령관을 새로 임명한 직후 대령이던 태권도협회장이 반기를 들었어요. 두 세력이 총격전을 벌인 끝에 대령이 가슴에 총을 맞고 숨졌고, 그의 아들도 다리에 총상을 입었습니다."
소요사태가 진정된 뒤 사령관이 그를 호출했다. 그는 각오를 단단히 했다. 필시 태권도 교관들이 모두 대령 편에 가담했을테니 그에게 무슨 화가 닥칠지 모른다. 그는 부인에게 당분간 못나올 지 모른다고 말한 뒤 집을 나섰다고 한다.
그런데 뜻밖에도 사정은 정반대였다. 대령을 중심으로 반기를 든 줄 알았던 그의 제자들이 군 사령관의 신변을 교대 근무하며 지켰다는 것이다. 제자들은 "태권도인은 국가와 사회를 위해 바른 길을 가야 한다는 게 이 사범의 가르침이었다"며 "욕심 때문에 반기를 든 그를 따르지 않았다"고 했다.
늘 그래야 할 것이다. 태권도인이란 도장 안에서건 밖에서건 정도를 가야 하는 것이다. 무도인의 길을 바로 걷는 것. 제2의 고향 레소토에 태권도의 정신을 심는 것. 이야말로 이씨의 소박한 꿈이다. 그는 매일 그런 다짐을 하면서 하루를 시작하고 잠자리에 든다.
<게재일 2002/09/04>
Posted by 길따라 구름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