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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한흠목사:로마서강해설교 16 천국기쁨
“[1]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2]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3]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4]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5]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6]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7]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9]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받을 것이니 [10]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 [11] 그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하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롬 5:1-11)
우리가
성경을 주목해서 보면은,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이 세상에 살 동안 어떤 생활 태도를 가지고 살기를 하나님이 원하시느냐 거기에 대한 대답을 금방 얻을 수가 있습니다.
어떻게 사는 것을 바라느냐? 그것은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는 모습으로 살기를 바라고 계신다는 것을 우리는 말씀을 통해서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어떤 형편에 처하든지 간에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예수를 믿음으로 죄사함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라면 이 세상을 살면서 원망과 탄식으로 일그러진 모습을 보여주어서는 안 된다.
이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입니다.
어떻게 살면 하나님이 기뻐하실까? 날마다 기쁨이 가득해서 이 세상을 살면 하나님이 기뻐하신다는 말입니다.
그것을 증명할 수 있는 좋은 예가 하나 있습니다.
얼마나 하나님이 우리를 기뻐하시는 모습을 보기를 원하시는가 하는 데 대한 예입니다.
예수님이 지금 십자가를 지고 이제는 우리를 위해서 죽으셔야 될 시간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제자들은 슬픔에 빠져 있습니다. 이럴 때에 예수님께서 그 제자들을 보시고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하시면서 말씀을 시작해가지고 장장 몇 시간이 지나도록 그들에게 위로의 말씀을 주셨는데 그렇게 제자들에게 위로를 하신 이유가 어디 있느냐
하면 요한복음 15장 11절 주님이 그 이유를 밝히셨어요.
내가 지금까지 너희에게 이렇게 긴 말을 하는 이유가 있다.
그것은 내 마음에 있는 이 기쁨이 너의 안에도 있어서 너의 기쁨이 충만하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말씀을 합니다. 참 이것은 이해하기가 어려운 말씀이에요.
선생님이 지금 무참하게 끌려가서 십자가에 처형을 당할 지금 위기를 만났는데
제자들이 어떻게 기뻐할 수 있습니까? 그리고 그
십자가를 지고
무지막직한 고통을 당해야 되는 예수님의 마음에 어떻게 기쁨이 있다고 우리가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우리 예수님이 거짓말하실 리가 없잖아요 내 기쁨
너희 안에 있어 너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기를 원하노라.
그래서 내가 지금까지 너에게 이와 같이 말
많은 이야기를 한다
말씀을 하셨어요. 그러니까
십자가를 지는 주님의 마음에도 기쁨이 있었어요.
하나님이 원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래요.
그리고 선생님을 잃어
버리는 제자들에게도 이 기쁨이 충만하기를 바라
하는 겁니다. 왜? 하나님이 원하시기 때문에 그래요 그렇다면
십자가를 지시는 주님이 기뻐하셨고 십자가를 향해서 걸어가는 선생님을 뒤에서 바라보고 눈물을 흘리는 제자들도 기쁨이 충만하기를 하나님이
원하셨다면 그것보다 훨씬 못한 어려움을 짊어지고 이 세상을 사는 우리에게 무엇을 원하실까? 기뻐하는 것을 원하신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오늘 읽은 이 본문에 보면 성도의 모습은 이 세상에서 어떤 모습이어야 하느냐?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고 즐거워하는 모습이어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2절 끝부분에 나오죠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한번 큰 소리로 읽어보세요.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이 말을 바꾸어서 이렇게 여러분이 다시 읽어보세요.
나는
나는
이 세상을 살 동안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가 우리에게 원하는 삶의 스타일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하는 이것이 무슨 의미냐? 다른 말로 바꾸면 하나님 하나님의 영광을 소망하고 하는 뜻입니다.
거기에는 두 가지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첫째는
영광 중에 계시는 우리 하나님 하나님을 만나 뵙기를 고대한다는 말입니다.
영광 중에 계시는 우리 하나님을 만나고 싶다 하는 소망을 가지는 것을 말합니다.
그다음에 둘째는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함께 누리는 자가 되기를 소망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영광을 내가 가서
보는 관 즉
영광 중에 계시는 하나님을 만나는 소원 그다음에 또 하나는 내가 하나님처럼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화되어 하나님 앞에 서기를 바라는 소원 이 두 가지가 이 말씀 안에 들어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본다 하는 뜻입니다.
우선 먼저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보는 문제를 생각해 봅시다.
어떻게 우리는 이 세상에 살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봅니까? 천국 들어가서 보는 것은 당연한 것이니까 물을 필요가 없어요.
그러나 이것은 세상에 살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는 것을 말하는 것이니까 어떻게 우리가 주님의 영광을 이 세상에서 볼 수 있나요? 하나님은 그 자체가 영광입니다.
찬란한 빛입니다. 육신의 눈을 가진 사람은 아무도 그 영광을 직접 보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모세에게 하나님께서 자기의 영광을 보여주실 때에도 자기의 손으로 모세의 눈을 가렸어요.
하나님이 지나갈 동안 보지 못하게 눈을 가리고 하나님이 지나가시고 하나님의 뒷모습만 살짝 보도록 만들어 주셨어요.
하나님이 모세에게 그렇게 하셨어요.
왜
육신의 눈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의 영광 보지 못해요 그런데 어떻게 여기에서는 하나님의 영광
바라보고
즐거워하라고 합니까? 또 그것이 성도의 삶이라고 합니까? 하나님께서 두 가지 방법을 주셨어요.
첫째는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 손에 들려주셔서 그 말씀을 한 장 한 장 읽어내려가면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게 되어 있습니다.
영광스러운 하나님이 말씀합니다. 영광스러운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세상에 오셔서 걸어다니는 모습을 우리는 봅니다.
그의 입을 통해서 진리의 말씀이 선포되는 음성을 듣습니다.
우리는 그의 손을 통해서 이적과 기사가 나타나는 것을 봅니다.
영광경에 계시는 주님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손에 성경을 들고 있다고 할지라도 우리의 육신의 눈 가지고는 성경 안에서 주의 영광 보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지혜와 계시의 영이신 성령을 주셨습니다.
성령이 는 깨닫게 하시는 자, 성령이 그의 눈을 열어주시는 자, 성령이
마음의 눈을 밝혀주시는 자는 성경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볼 수 있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영광을 소망으로 두고 그 하나님 만나 뵙기를 간절히 사모하는 사람으로 만들어 주십시
주십니다.
물론
어떤 경우에는 스테반이 하나님의 영광을 본 것처럼 독특한 방법을 허락하실 때도 있습니다.
스테반은 순교 직전에 돌멩이를 맞아 이제는 숨이 끊어지기 직전에 그는 갑자기 하늘 문이 열리고 하나님과 그 곁에 서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올려다보는 기막힌 축복을 그는 그래서 그는 소리를 질렀어요. 너무너무 좋아가지고
보라 하늘이 열렸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내가 본다.
고 소리쳤습니다.
가끔 우리에게 그와 같은 특별한 은혜를 주실 때가 있어요.
어떤 성도들의 간증들을 들으면 꿈을 꾸다가도 특별히 하나님의 그 영광을 잠깐 보고 온 사람들 이야기를 들을 수 있습니다.
또 사도바울도 3층선에 올라가서 하나님의 영광을 본 이야기를 나중에 하는 것 우리는 듣습니다.
그러나 꼭 우리가 그렇게 신비스러운 어떤 체험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즐거워하는 것을 말하는 것 아닙니다.
성경을 통해서 성령이 깨우쳐 주시는 대로 그 성령의 인도함을 받아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바라보고 사모하는 것이 성도라 그 말입니다.
여러분에게 이것이 있는지 한번 자신을 돌이켜 보십시오.
나에게 이것이 있는가 있습니까?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눈이 있어요 하나님의 영광이 눈에 보입니까? 성경을 읽을 때마다 보여요 안 보여요.
이 시간 주님께서 우리 모두의 마음을 여시고 이 영광 말씀을 통해 믿음의 눈으로 보게 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또 하나님의 영광을 바란다는 말은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입고 그 나라에 들어가서 주님을 만나는 것을 의미한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언젠가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우리가 입게 됩니다.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하나님과 사람이 만나려면은 두 가지 방법이 있어요.
하나님께서 두 가지 방법을 사용하세요.
첫째 방법은 하나님이 사람이 되는 거예요.
하나님이 우리처럼 돼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약 시대에 보면은 아브라함을 찾아왔던 이삭을 찾아왔던 야곱을 찾아왔던 사람을 찾아온 하나님은
인간의 모습을 하고 찾아오셨습니다. 그래서 얼굴을 맞대고 눈과 눈을 마주하고 쳐다보면서 이야기를 할 수 있었어요.
그래야만이 만날 수 있으니까. 그리고 예수님 역시 우리를 찾아오실 때도 초라한 우리의 모습을 그대로 가지고 찾아오셨어요.
그런데
앞으로도 하나님이 그런 식으로 우리를 만날 것이냐? 그렇지 않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이 낮아지셔서 사람이 되시고 사람 모습으로 오시는 그런 일은 끝났습니다.
이제 다른 방법이 남아 있어 그것은 우리가 누구처럼 되는 거예요? 우리가 하나님처럼 변해서 하나님처럼 되어가지고 하나님과 만나는 것입니다.
이게 우리 앞에 남아 있어요.
우리는 흙으로 빚어진 육체를 입고 있습니다.
그리고 범죄로 인해서 이 육체는 영혼과 더불어서 부패해 버렸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몸이 아무리 건강하고 젊고 아름답고 싱싱하다고 할지라도 이것은 원래 우리 몸이 아닙니다.
원래 우리 상태가 아니에요. 부패한 상태예요 약해진 상태예요 초악해진 상태입니다.
감기만 걸려도 형편없는 모습으로 바뀌는 것이 우리의 몸입니다.
그런데 일생 동안 노동의 수고, 해산의 고통, 그리고 여러 가지 험한 풍상을 겪으면서 나이를 먹어가면 청춘 남녀의 영광도 금방 낙엽처럼 시들어버리는 것이 우리의 육체입니다.
육체에는 진정한 아름다움이 없습니다.
모든 아름다움은 상대적인 것입니다. 어떤 육체도 그 안에는 부패의 씨앗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부패의 씨앗이 점점 우리의 육체를 먹어들어가면 늙고 병들고 썩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 때문에
로마서 8장 22절, 23절에 보면
모든 피조물이 탄식 고통한다고 했고
하나님의 자녀들까지도 이 썩어가는 육체 때문
고통한다고 했습니다. 이게 우리의 현실입니다.
그런데 이와 같이 부패의 씨앗을 갖고 있는
내 육체가
하나님을 만나 뵙기 위하여 한순간에 하나님과 같은 영광스러운 몸을 입게 된다는 말을
이것을 우리가 믿음으로 내다봐요. 내 몸이
우리 부활하신 예수님
몸처럼 변할 것이다 이것을 바라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영광을 바란다는 말입니다.
얼마나 기가 막힌 미래입니까? 로마서 3장 23절에 우리는 범죄로 인해 하나님의 영광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영광을 다시 회복시켜 그러나 우리는 아직 육신을 입고 세상에 삽니다.
비록 우리는 육신을 입고 세상에 살지만
우리의 믿음의 눈은 장차 예수님의 모습처럼 변화된 우리 자신을 내다보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
영광을 누린 우리 모습
내다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요한일서 3장 2절에도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지만은 하나님의 자녀이면서도 육신을 잊고 살지만 장래에 우리가 어떻게 될 것도 아직 분명하게 나타나지 않고 있지만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가 나타나시게 되면 우리가 주님과 같을 줄을 안다
그때가 되면 우리가 예수님을 직접 그대로 보고 만나야 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빌립보 3장 2절에는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병케 하시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남아 있는 기막힌 영광의 소망입니다.
그래서 우리 몸이 하나님 앞에 변화 받는 이 모습을 놓고 성경에서는 양자가 된다는 말로도 표현하고 구속을 받는다는 말로도 표현하고, 영화롭게 된다는 말로 표현하고 하늘의 초소를 더잇는다는 말로도 표현을 합니다.
믿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한다. 할 때 하나님의 영광을 바란다는 말은 이렇게 두 가지 의미가 들어 있어요.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우리가
직접 뵙게 된다는 것 또 하나는 우리의 몸이 하나님 자녀로서 영광스러운 몸을 입고 하나님 앞에 서게 된다는 거 이 두 가지가 들어있습니다.
그러니 이것을 우리가 성경을 통해서 확인하고 믿음으로 날마다 믿고 또 소망의 눈으로 보고 사니까 자연히 기쁨이 찾아오게 되어 있어요.
이게 우리 성도의 입장입니다. 기쁨이 오게 돼 있어요.
왜 기쁨이 없느냐?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는 눈이 어두워 있기 때문에 기쁨이 없는 것입니다.
그럼 왜 기뻐할 수 있느냐?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는 눈이
있기 때문에 기뻐하는 것입니다.
여행을 가는 학생에게 내가 만약에 카나다의 로키 산맥의
그 아름다운
성경을 좀 보기 위해 여행을 가겠다 계획을 하고 있는데 카나다에 사는 어떤 사람이 와서 로키 산맥의 아름다운 풍경을 잔뜩 담은 사진첩 큰 것을 하나 갖다 줬습니다.
내가 여행 가기 전에 이것을 가지고 거기에 있는 풍경이 얼마나 아름다운가를 한번 보라 하면은 그 학생이 그 아름다운 설경이든 또 아름다운 초원이 깔려 있는 그 로키 산맥의 전경이 찍힌 사진첩을 하나하나 들치면서
웁니까 좋아합니까? 대답하세요. 좋아합니까 웁니까?
얼마나 좋아
왜? 가서 이제 얼마 안 있으면 볼 테니까 직접 가보게 될 테니까
사진첩을 보면서 더 좋아하는 거예요.
못 견디는 걸 좋아하셔.
오늘 우리가 성경을 하나하나 읽으면서 꼭 사진첩 보는 것과 같아요.
천국의 영광을 찍어놓은
사진첩을 보는 것과 똑같은 것이 성경을 읽는 것입니다.
그거 읽으면서 야
내가 이렇게 되겠구나 응 내가 이렇게 되겠구나 야 정말 멋있겠다 하는 이런 기쁨이 우리 가슴에서 치밀어 오르게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진짜 예수 믿습니까?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았습니까? 그렇다면 이 기쁨이 있으면 진짜 크리스찬이고 이 기쁨이 여러분 마음에
없다든지 희미하면 문제가 있다는 것을 여러분 스스로가 인정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여기에 즐거워한다는 말은 굉장히 강도 높은 말입니다.
그래서 너무 기뻐서 날뛴다는 의미가 됩니다.
또 아니면 으시대며 자랑한다는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너무 좋아가지고 못 견디는 거예요. 이것을 여기서 즐거워한다 하는 말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제자 중에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가 하루는 예수님을 따라서 헐몬산으로 올라간 일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모습은 굉장히 초췌합니다. 비록 30대 초반입니다마는 너무 영양가 있는 음식을 제대로 못 잡수시고 매일 그저 다니면서 여행하시면서 전도하시고 사람들에게 시달리고
또 인생의 그 더러운 꼴들을 날마다 보고 살아야 되는 것에서 오는 고통이 심하기 때문에 그 얼굴은 초치하고 그다음에 예수님은 부자가 아닙니다.
단벌 신사요 날마다 입는 옷 늘 입고 다니니까 그 옷이 초라하기 끝이 없죠.
그와 같이 초라한 모습을 하신 예수님이 산으로 올라가셨는데 갑자기 제자들 앞에서 모습이 변했습니다.
그 얼굴이
해같이 빛났습니다. 그 옷이 빛과 같이 휘어졌습니다.
그리고 비슷한 모습을 한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님과 함께 앉아서 담소하고 계십니다.
그 모습을 베드로
요한과 야고보가 본 것입니다. 천국의 영광이 하나님의 영광이 헐몬산 꼭대기에 내려온 것입니다.
장차 그 나라에서 누리게 될 그 아름다운 영광이 눈앞에 실현이 된 것입니다.
너무 정신이 없었어요. 좋아가지고 그래가지고 너무 좋아가지고
주여
내려가지 맙시다.
여기가 좋아요.
무슨 집을 짓고 살아도 좋으니까 여기서 삽시다.
너무 좋아가지고 제정신이 없어.
그런데 이때
베드로와 요한 야고보의 모습도 예수님 모습처럼 변화가 되었습니까 아닙니까? 아니면 그들의 모습은 그대로 남아 있었습니까? 어느 쪽입니까? 그들의 모습은 그대로 남아 있었어요.
자기 모습 변한 거 하나도 없어
주님이 변한 모습 주님의 영광만 보는데도 그들이 그렇게 기뻐서 못 견뎠습니다.
그렇다면 장차 우리가 들어갈 하나님 나라에서는 내 모습도 예수님 모습처럼 변할 테니 얼마나 좋을까
예
얼마나 좋을까 얼마나 좋을까 그래서 그 기쁨이 하도 커서 우리가 오늘 읽은 본문의 3절에 보면 이뿐 아니라 하는 말씀이 나옵니다.
다만 이뿐 아니라 이게 무슨 뜻입니까? 이 정도가 아니다 그 말입니다.
그저 우리가 그저 좋아하고 즐거워할 정도가 아니다.
어느 정도냐
뭐 중에도 즐거워한다고 그랬어요 환란 중
에서도 즐거워할 수 있을 정도다.
여기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여러분 이 환란이라는 말은 단순히 예수 믿기 때문에 핍박받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에 환란은 인생의 세상을 살면서 당하는 모든 곤고와 고통을 전부 포함하는 말입니다.
가난일 수도 있습니다. 질병일 수도 있습니다.
실패일 수도 있습니다. 또 자신이 극복할 수 없는 어려운 역경일 수도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을
다 포함합니다.
그런데 뭐라고 합니까? 어떤 어려운 고통 속에서도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는 그 고통 속에서도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할 수 있다.
이렇게 말씀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라고 해서 병이 안 납니까? 병이 납니다.
예수 잘 믿는 사람이라고 해서 날마다 돈만 법니까? 아니요.
돈을 잃어버릴 수도 있고 실패해서 재산을 날릴 수도 있습니다.
예수 잘 믿는
사람이라고 해서 사랑하는 식구들이 먼저 죽지 않습니까? 아니에요.
사랑하는 자식도 죽을 수 있고
아내도 죽을 수 있고 남편도
죽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잘 믿는 사람에게는 어떤 고통도 찾아오지
않도록 해 주시겠다고 하는 보장한 일이 없습니다.
예수 믿어도 이런 고통을 당해요.
그러므로
우리는 본능적으로 이 고통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환란이 어떤 형태로 오든 간에 우리는 그 환란을 두려워합니다.
피하려고 합니다. 히브리서 12장 11절에 솔직하게 말씀하셨어요.
므로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인다고 했습니다.
맞습니다. 어떤 형태든지
어려움이 오면
우리는 슬퍼지고 또 즐거워지지 않습니다.
싫어집니다. 이게 사실이오. 우리의 솔직한 심정입니다.
우리 중에 누가 늙는 거 좋아하는 사람이 있나요? 늙고 허약해지는 거 누가 기다리는 사람이 있나요? 아무도 없어요.
훨씬 넘으신 선배 목사님들 가끔 만나뵙고 찾아가서 인사를 드릴 때가 있습니다.
참 그렇게 훌륭한 목사님으로서 한 평생을 사셨지만은 80이 넘어가면 허약해지시고 말씀하시는 모습을 보아도 힘이 없고 기억력도 오락가락하고 그래 참 처량한 생각이 들어요.
얼마 전에 한경직 목사님을 만나 뵀을 때도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그분은 아주 쟁쟁쟁하신데도 참 처량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런데 가끔 그런 노 목사님들을 만나서 목사님 더 건강하세요 그리고 더 오래 사세요 하면은 좋아가지고 웃음꽃이 활짝 핍니다.
인사를 그렇게 드려서 좋아하
괜찮은데 그만 내 마음에 시험이 와요.
천당이 있나 없나
응
진짜 천국이 있다면은 목사님 정도 되었으면 내가 오래 살아 뭐 해 나 빨리 천국 가고 싶어 죽겠어 이런 말이라도 한마디 했으면 좋겠는데 그렇게 안 하시고는 좋아가지고 오래 사시라니까
와서 활짝
웃는단 말이에요. 천당이 있나 없나 그렇게 내가 시험을 받아.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생각하면 그 활짝 웃는 목사님의 모습이 솔직하고 더 티 없는 우리 인간의 반응이에요.
하나님 나라 가고 싶죠
하나님 나라의 그 영광을 바라보고 즐거워함도 있죠.
그러나
늙는 거 싫어하는 것이 우리 본능이에요.
빨리 죽는 거 싫어하는 거 우리 본능이에요.
만약에 여러분이 옥 목사에게 와서 목사님 몸도 그렇게 안 좋으신데 빨리 죽으셔서 천국으로 가시기를 바랍니다.
만약에 내보고 인사를 그런 식으로 한다면은 글쎄 내가 아마 위선을 한다면 감사합니다.
이럴지 모르지만 솔직하게 표현한다면 버르장머리 없이 인사를 해도 왜 그런 식으로 하느냐고 아마 내가 이렇게 언짢게 표정을 지을 거예요.
왜 그게 우리 심정이에요 그러나 그러나 여러분 병들고 가난하고
인생의 험한 꼴을 가끔 보고 사는 이 환란이 우리에게서 떠나지 않지만은 이 가운데서도 우리가 즐거워할 수 있다.
하나님이 그렇게 말씀합니다. 이유가 어디 있을까? 이 환란에는 하나님이 특별히 붙여주신 프리미엄이 있습니다.
프리미엄 알아요 아파트만 이야기해야 프리미엄 생각나나요? 환란에도 프리미엄이 있어요.
그 프리미엄이 뭐냐 봅시다.
4절 3절 끝에 이는 왜냐하면 환란은 어떤 프리미엄을 우리에게 주느냐 인내하게 하고 그다음에 인내를 하다 보면 무엇이 다 따라옵니까? 연단을 받게 하고
에
그다음에 연단을 받다가 보면 소망을 이룬다는 말은 그 하나님 영광을 바라는 소망이 더
더 커지고 더 분명하게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이게 프리미엄이요.
그러니까 자연이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는 그 믿음의 눈이 더 밝아지고 더 커지니까 기쁨도 환란 당하지 않는 사람들이 맛보지 못하는 독특한 기쁨이 나에게
찾아온다는 이야기입니다. 이게 프리미엄이요.
우리가 가난해가지고
고통을 하지 않습니까? 돈이 없어서 어떤 때는 어려움을 당합니다.
그러면 자연이 세상에 그 어떤 돈의 애착이 점점 약해집니다.
이놈의 세상 돈 가지고 행복한 거 아니야 아무리 내가 많이 가져도 그것이 나에게 기쁨을 줄 수는 없어.
적당하게 하나님이 주시는 대로 살자.
이러면서 돈에 대한 애착이 조금씩 조금씩 사라져요.
이게 뭔지 압니까? 가난이 나를 연단시킴으로써 나타나는 결과입니다.
연단은
나에게 있는 불순물을 제거하는 것을 말합니다.
부자로 있을 때에는 내 눈이 세상에 돈으로 꽉 덮여 있어 가지고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려고 해도 침침해서 잘 안 보였어요.
그러니까 돈 많이 벌면 즐거워하고 자식들이 잘 되면 즐거워하고 건강하면 즐거워할 수는 있었지만은 하나님의 나라의 영광을 바라보고 즐거워하는 마음은 조금
밖에 없었어요.
그러나
갑자기 재산이 가정이 기울고 가난 때문에 고통을 당하게 되면 돈이 없어서 괴롭기는 하지만 그러나 그 대신 하나님이 프리미엄 주셔서 내 눈을 가리고 있던 모든 욕심을 하나하나 걷어내어 주시고 점점 하나님의 그 영광스러운 모습을 밝히 볼 수 있게 만듭니다.
그리고 내 마음을 깨끗이 청소해 주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는 그 눈이 활짝 열려서 옛날보다도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모습이 더 가까이 보입니다.
더 크게 보입니다.
그러니까 나도 모르게 내 마음에 기쁨이 생긴단 말이에요.
여러분 병 들어 보셨어요?
병들어 가지고 저처럼 좀 긴 세월 동안 알아보셨어요? 과거에 학생 때는 저는 병을 가지고 한 5년을 앓아본 경험이 있습니다마는 최근에 여러분이 아시는 바와 같이 한 일년을 저는 앓고 지금도 신통치 않습니다마는 그 병이 참 괴롭습니다.
네 가지 다섯 가지 증세가 막 한 번에 나타나가지고 밤낮없이 사람을 들볶을 때는 정말 살고 싶은 생각이 안 납니다.
참 괴롭습니다. 기도도 안 나옵니다.
엎드리면 주님
데리고 가세요
아니면 고쳐주세요 이런 식입니다. 그 외에 기도가 잘 안 나와요.
그런데
제가 병을 통해서 분명히 하나 아는 것은 나의 영혼이 연단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잡된 것이 없어져요. 세상적인 욕심 사라지고 아웅다웅하는 그런 어떤 마음속에 싸움도 사라지고 점점 내 영의 눈이 밝아져요.
점점 밝아져요.
하나님이 멀리 보이던 하나님이 가까이 보여요.
이게 환란 중에서 우리가 연단 받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때는 나도 모르게 큰 기쁨이 내 마음속에 찾아와요.
내가 병들어 고생하지만
그러나 어느 날인가 하나
하나님을 뵙게 되는 날 이 병으로 고통하는
육신을 벗어버릴 것이고
주님이 주시는 소망 믿고 주님 만나게 될 것이니 할렐루야 그날이 나를 기다리고 있구나.
내 마음에 나도 모르게 기쁨이 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이 본문을 놓고 설교 준비하면서 이 본문을 끌어안고 울었어요.
왜 그런가 하면은 환란 중에서는 더 기쁨이 충만해야 정상인데 하나님이 기쁨을 충만하도록 주셨는데
나는 일년을 소비하면서 이 기쁨을 많이 체험하지 못했다는 데 대한 가책을 받은 것입니다.
얼마나 좋은 기회입니까? 병이 들고 싶다고 드나요? 어쩌다 병 들었는데
이것이야말로 나의
지금 찾아오는 환란이다. 그러면
환란에는 분명히 하나님이 주신 큰 축복이 따라오는데 그게 뭐냐 내가 연단 받고 내 영혼의 눈이 밝아지면 내가 건강할 때 보지 못하던 하나님의 영광 보게 되고 내가 건강할 때 가까이 놓고 즐거워하지 못했던
하나님의 영광을 내가 즐거워할 수 있게 되었으니
이거 얼마나 큰 기회냐 말입니다. 좋은 기회냐 말입니다.
그러므로 앓으면서 고통하면서도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고 즐거워하고 좋아하는 모습을 내가 좀 보여주었어야 하는데 가족에게도 교인들에게도 이웃 사람에게도 보여주었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를 못했다는 가책이 내 마음을 짓눌렀습니다.
이미 2년이라는 세월은 흘러가 버렸어요.
하나님 너무나 좋은 기회 내가 놓쳤네요.
좀 더 연단받을 수 있었고 하나님의 영광을
더 가까이 보고 좋아할 수 있는 기회였는데 놓쳤네요.
주님
이렇게 생각하니까 그냥
눈물이 나요.
여러분이 가난하면 가난에 따라오는 프리미엄 병들었습니까? 거기에 따라오는 프리미엄 있는 거 아시기 바랍니다.
대학 입시에 실패해서 고통스러워요. 거기에서 따라오는 프리미엄이 있어요 남편을 잃었나요? 아내를 잃었나요? 자식을 잃었나요? 가정의 어떤 남모르는 우한이 있나요? 괴로운 것이고 싫은 것이지만 하나님이 나에게 그것을 허락하셨을 때에는 야
인내하게 하시고 연단하게 하시고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는 소망의 눈을 활짝 열어주시려고 이거 주셨구나 아멘.
그러므로 나는 더
누구보다도 기뻐할 수 있어.
이거 우리가 알아야 돼요. 루마니아가 공산치아에서 한참 어려움을 당할 때에 덤브란트 리차드 범브란트 목사님은 14년 동안 옥고를 치렀습니다.
감옥에서 주로 홀로 독방에서 14년 가까이를 보내는 것은 그것은 죽는 것
보다 몇 배로
고통스러운 일이라는 걸 우리는 많이 들어서 압니다.
그런데 그분이 감옥을 나오면서 쓴 글을 제가 보니까 참 기막힌 말을 했어요.
제게는 너무 긴 것으로 여겨지지 않았던 것은 뭐가 감옥에서 보낸 14년의 횟수가 너무 길다고 여겨지지 않았습니다.
홀로 독방에 갇혀 있으면서도 믿음이나 사랑을 넘어선 어떤 기쁨을 하나님 안에서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그 기쁨이란 이 세상 어느 것에도 견딜 수 없는 아주 깊고도 특이한 황홀경 같은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겠죠?
저도 몰라요.
감옥에 들어가서 주님을 위해서 그렇게
혼란을 당하는 자에게 하나님이 특별히 주시는 은혜니까 그 사람만이 알아요.
어떤 황후연 같은 기쁨이 그럴 가
사로잡고 있었기 때문에 14년도 긴 것처럼 느껴지지
독방에서 그렇게 고생하고 못 먹고 살아도 떨고
살아도 그게 큰 문제가 안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감옥에서 나올 때
어떤 기분을 느꼈느냐
마치 높은 아름다운 산속에서
수십리에 뻗혀있는 시골의 아름다움과 평화를
바라보면서 즐거워하다가
갑자기 평지로 그냥 왜요?
와버린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고 그랬습니다.
이거는 극단적인 예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환란 중에 있을 때에는 하나님이 주시는 특별한 은혜가 따라온다는 사실을 가장 잘 증명하는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예수 믿는 사람이 세상에서 살 동안 병들어서 고통을 합니다.
어떤 때는 가난합니다. 어떤 때는 실패합니다.
어떤 때는 사랑하는 자를 잃어버립니다.
그래서 어떤 때는 눈물을 흘립니다. 그러다가도
이 말씀대로 하면 할렐루야 찬송해야 됩니다.
아멘
기뻐해야 합니다.
즐거워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고 즐거워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세상 사람들이 볼 때는 야 오죽이 답답하면 저렇게 위선을 할까 자기 궁색함을 숨겨보내고 오죽이 답답하면 저런 몸부림을 칠까 그렇게 말을 할지는 모르지만 천만해요.
우리는 아무리 고통스러운 환경에서도 기뻐해야 합니다.
그리고
기뻐하는 것을
부끄러워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그래서 뭐라고 합니까? 5절 소망이 뭐 하지 아니하다 부끄럽지 아니함은 이 말은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환란 중에서 기뻐해도
그것이 절대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이 말을 바꾸면
우리를 절대 실망시키지 않는다 하는 말입니다. 왜 그런지 압니까? 우리를 너무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되었기 때문이다.
여러분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 된 자에게는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해서 우리 마음에 하나님
하나님의 사랑을 부어주셨습니다. 내가 너를 사랑하노라 내가 너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아느냐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합니다.
나는 너를 너무너무 죽도록 사랑한다.
무엇을 가지고 그렇게 증명합니까? 6절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죽이셨습니다. 우리를 살리기 위하여
여러분 우리 잘 알지 않습니까? 7절 보세요.
의인을 위해서 죽는 자가 가끔 있을 수 있고 선인을 위해서 용감히 죽는 자도 가끔 있을 수 있지만은 경건하지 못한 자와 죄인 된 사람을 위해서 죽을 자는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는 나 같은 것을 구원하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스스로 못 박혀 죽었습니다.
하나님은 자기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놓고 죽이셨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를 죽도록 사랑하시는 그의 사랑 때문입니다.
이 사랑을 성령께서 우리에게 깨우쳐 주셨다는 말입니다.
성령이 우리 마음에 하나님의 사랑을 부어주셨다는 말은 십자가를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하셨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예수 믿고 나서 이 사랑을 압니다.
하나님이 나를 얼마나 사랑하시는가를 압니다.
그것이 내 마음에 힘이 오는 것을 느낍니다.
그 사랑이 내 마음이 어떤 때는 폭포와 같이 넘치는 것을 체험합니다.
할렐루야 이 사랑이 있어요. 그러니까 이렇게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
이시니까
내가 가난해도 병들어도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고 즐거워하며 절대로 나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하실 것이다.
왜냐하면 나를 실망시키지 아니하실 것이다.
왜냐하면 나를 너무 사랑하시니까 반드시 하나님의 영광 나의
해 주실 것을 나는
확신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언제는 주겠다 하고 언제는 안 주겠다 하고 변하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갑자기 나의 죄를 생각하시거나 얼굴빛을 바꾸시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고 기뻐하면서 교회 앞에 나가면
내 아들아 세상에 2주 동안 고생했다.
내 영광에 참여해라 내가 너에게 모든 것 주마 우리 하나님 그렇게 하실 거란 말이에요.
왜? 우리를 너무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끝으로 여러분 한 가지 알아두고 성경을 덮어야 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우리가 세상에서 환란을 당하는 중에도 특별히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고 즐거워할 수 있는 은혜를 주시는 이유가 뭔지 압니까? 평생 병 가지고 씨름하라고 주는 것입니까? 아니요
이거 알아야 돼.
병을 앓는 중에도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
즐거워하는 눈이
밝게 크게
열리면요 기쁨이 찾아오기 때문에 그 기쁨이 결국은 우리의 병을 치료하는 역사를 일으킵니다.
믿습니까? 가난한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그 눈을 밝게 하셔서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고 즐겁게 만듭니다.
그래서 기뻐합니다. 그러면
가난 속에서도 기뻐하는 그 사람이라고 한다면
어떤 환경도 극복
할 수 있는 힘이 생깁니다.
나중에는 부지런히 적극적으로 일하다가 보면 가난이 물러갑니다.
믿습니까? 여러분
대학에 낙방해가지고 쓰라린 고통을 안고 밤을 지새는 학생이 내가 비록 세상에서는 단 번에 이렇게 실패할 수 있지만 내가 좀 게을러서 공부를 제대로 못했을 수도 있지만
그러나 내 앞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
기다리고 있어 세상이
아니야 그러므로 이것도 기뻐해야 돼 부모 앞에서
하나님 기뻐하는 모습을 보여야 돼
친구들에게 보여야 돼
이렇게 하고는
기뻐하면서 감사하면
그 기뻐하고 감사하
하는 그것이 그 학생으로 하여금 다시 재개
할 수 있고 다시 한 번 도전할 수 있는 힘을 얻게 하는
원동력이라는 걸 여러분 믿습니까?
가정이 불행한 사람이 그 불행 중에서도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고 즐거워하게 되면은 그 즐거워하는 그 힘이 그 가정의 불행을 행복으로 바꾸어 놓
만드는 거 여러분이 아셔야 됩니다.
하나님이 그것을 아시기 때문에 환란 중에서는 더 기뻐할 수 있도록 우리의 눈
열어주시고 우리를 연달아서 소망을 가지고 하나님께 즐거워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금년 새해에 우리가 어떤 모습을 가지고 세상을 살아야 할까요?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고 즐거워하는 모습을 세상 사람 앞에 보여주어야 합니다.
환란 중에서도 고통을 당하는 중에서도 이 기쁨을 우리는 잃어버려서는 안 됩니다.
이런 의미에서 시스루리스의 말은 옳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에게 있어서 기쁨은
대문자로 표현할 수 있는 삶이다 그랬습니다.
또한 진정으로 신뢰할 만한 기독교,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세상을 흔들어놓는 기독교는 그 중심에 기쁨을 갖고 있다 이랬습니다.
옳은 말이에요. 왜 성도에게 기쁨은 대문자입니까? 여러분 대문자를 언제 씁니까? 글을 쓰다가 대문자를 특별히 만드는 이유가 뭡니까? 컴퓨터를 치다가 어떤 글자는 대문자로 찍는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중요하다
이것을 똑똑히 보라 요것만 보라 강조한다.
여기에 중요한 의미가 담겼다 하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대문자 쓰는 거 아니에요 큰 글자로 쓰는 거 아니에요 마찬가지로 오늘날 예수 믿는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은 사람이 세상 앞에 내어줄 수 있는 대문자가 뭐냐? 대문자의 삶
그것은 자 보라 나는 가난해도 즐거워한다.
나는 병들어도 하나님 앞에 기뻐하고 감사한다.
나는 세상에서 성공 못한 사람이야. 그래도 나는 기뻐하고 즐거워한다.
너보다도 즐거워한다. 기뻐한다. 왜? 하나님의 영광이 내 앞에 있기 때문에 그래요.
이것은 세상 사람
앞에 주목하게 주목하도록 보여줄 수 있는 대문자요.
믿습니까? 여러분 우리가 이 기쁨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는 이 기쁨과
금년 새해 삶으로써
우리 주변에 있는 어두움을 밝게 만들 수 있고 이 더러운 세상을 한번 흔들어서 깨끗하게 만들 수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돈을 가졌기 때문에 기뻐하는 그 기쁨 우리 갖지 맙시다.
건강하고 전다고 하는 그것 때문에 자기 정욕 때문에 기뻐하는 것 우리는 갖지 맙시다.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고 즐거워하는 그 기쁨을 보유합시다.
이럴 때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다 하실 것입니다.
금년 한 해 동안
우리가 이와 같은
기쁨을 가진 주인공이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또한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활
난 중에서도
기뻐하느니라. 이것이 우리의 삶입니다.
이 기쁨 하나님 주시기를 바랍니다. 찬송가를 여러분이
어떤 찬송가를
오늘 부를까 하고 아마 생각하실지 모릅니다.
부르고 싶은 찬송가가 여러 개 있는데 오늘 3부에는 우리 젊은 친구들이 많이 모이는 시간이니까 기쁨으로 찬양을 택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아요.
기쁨으로 찬양 새로 나온 기쁨으로 찬양은 138장
전에 가지고 있던 것은 62장 저 하늘에는 눈물이 없네.
하나님의 영광을 내다보고 부를 수 있는 아주 멋있는 짧은 찬송가입니다.
옛날 기쁨으로 찬양 62장 빨리 바꾸세요.
그리고 새로 나온 데는 138장 우리
참 뜨거운 마음으로
그리고
마음을 활짝 열고 하나
하나님 나라의 영광을 바라보고 우리와 함께 부르는 시간 되기를 바랍니다.
아멘.
사랑
아직도 찬송 못 부르시는 분들이 좀 계세요
손해 봅니다.
왜 손해 보는지 알아요?
하나님이 은혜로 주시는 기쁨을
거부하면
손해가 와요. 몸 아픈 사람은 더 아픕니다.
가난한 사람은 그 가난이 더 고통스러워집니다.
아시겠어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주시는 이 아름다운 은혜를 우리가 체험할 때는 그것을 마음껏 표현할 수가 있어야 돼요.
제가 시간만 있으면 찬송 하나 꼭 더 부르고 싶은 것이 있는데도 시간이 좀 쫓겨서 안 되겠어요.
그러나 한 번은 부를 수 있을지 몰라요.
주가 맡긴 모든 역사 힘을 다해 마치며 주님의 나라 가서 주의 얼굴 대하리 주의 얼굴 대하리 무슨 찬송인지 아시죠? 오기 한번 쳐봐요.
231장 주가 맡긴 모든 역사 여러분
몸 아픈 분들
이 시간 성령의 능력으로 건강하기를 원합니까? 찬송하세요.
가난한 분들
고통스럽습니까? 그 고통 이기고 정말 부자 되기를 원하면 기뻐하.
찬송하세요. 금년 한 해 동안 하나님께서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고 성공하기를 기원합니까? 그렇다면 찬송하고 기뻐하세요.
환란 중에 있을 때 찬송할 줄 알아야 돼.
환란 중에 있을 때 기뻐할 수 있어요.
하나님
축복합니다. 231장 1절 2절 4절
이 찬송 누가 썼는지 알아요? 눈먼 봉사가 썼어요.
눈먼 봉사 크로스비가 썼어요. 눈을 감고도 눈을 감고도 이런 찬송을 부르면서 기뻐하고 춤을 섰는데 눈을 뜨고도 못 부르면 어떻게 하
몇 장이라고 그랬어요
빠르게
나의
기도하십시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금년 새해 첫 주에 우리가 한 해를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가르쳐 주신 거 감사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고 즐거워하며 환란 중에서도 즐거워하면서 사는 것 주님이 원하시는 삶이오니 이 시간 우리가 주의 성령으로 은총을 입고 교회 문을 나서면서부터
우리의 모습은 하늘의 영광을 바라보는 자의 모습이 되게 하옵소서.
우리의 말, 우리의 표정,
우리의 웃음 우리의 심지어 눈물까지도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고
사는 자의 모습이 될 수 있도록
우리를 인도해 주옵소서. 그리하여 우리의 삶을 보고
수많은 사람들이 세상에서 절망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찾을 수 있도록 축복해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