텃밭에 나가 호박잎 몇 장을 뜯어왔습니다. 박동규 시인은 6·25전쟁 중 피난길에 어머니께서 끓여주신 호박잎 죽으로 배고픔을 달랬는데 동네 사람들이 당신네가 너무 많이 잎을 따가 호박이 열리지 않는다고 하는 바람에 쫓겨나듯 그 마을을 떠났다는 글을 읽었습니다. 한 장의 호박잎이 참 귀하게 느껴집니다. 유난히 태풍과 폭우가 심했던 여름을 보내고, 바람과 물을 따라 변화하는 자연을 바라보면서 《표현》 제88호를 발간합니다. 글을 주신 문우님들께 감사드립니다.
‘풍행수상風行水上’이란 바람이 물 위를 가는 것입니다. 바람이 물 위를 스칠 때 일어나는 파랑은 제 나름의 규칙이 있어 흩어지나 어지럽지 않아 자연스럽고 아름답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수많은 문학가와 철학가가 이 구절에 영감을 받아 문장을 짓는 도리와 글의 미학적 의의를 찾고자 했다 합니다. 소동파의 부친 소순(蘇洵, 1009~1066)은 가우집嘉祐集 제14권에서 “천하에 지극한 문장, 천하에 꾸밈이 없어도 문장을 만들 수 있는 것은 오직 물과 바람뿐이다.”라고 했으며 명나라 이지李贄(李卓吾, 1527~1602)도 분서焚書 3권에서 ‘바람이 물 위를 가는 문文은 글자 하나, 문장 하나의 대단함에 의해 결정되지 않는다.’라고 했습니다. 고염무(顧炎武, 1613~1682)도 일지록日知錄에서 “바람이 물 위를 가듯 자연스럽게 문장을 만들어야지 만약 자연스러움에서 나오지 않고 일부러 문장의 번잡함과 간단함의 조탁에 의존한다면 문장을 짓는 본래의 뜻을 잃고 말 것이다.”라고 합니다.
‘성인과 성인의 경서經書를 스승으로 삼고’ 자연스럽게 문文을 이루는 아름다움으로 가득한 《표현》에서 올가을 한나절 쉬어가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