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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광복절, ...... 안중근 의사의 또다른 생활면을 볼 수 있는 글을 소개합니다. 특히 그가 사형 전에 죽음을 준비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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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영성가>
안중근의 삶과 믿음
3월 26일은 안중근 의사의 순국일이다. 안중근의 집안은 전통적인 기반을 누리던 문중이 어떻게 복음화 되며, 동시에 교회에 어떤 역할을 기대하는지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그들은 변모하는 세상에서 새로운 길을 모색하고 있었다. 갑신정변 때부터 새 기운을 찾으려던 이들은 천주교에 입교하면서 틀을 갖추었다.
안중근은 19세 때 고향 사람 32명과 함께 영세하여 교우촌을 이루고 살았고, 신부의 복사로 전교하러 다녔으며 어떤 상황에서도 기도를 놓지 않았다. 하느님을 모시고, ‘천진하고 명랑한 신앙’을 갖게 된 안중근은 시대가 필요로 하는 일을 해냈다.
그는 진남포에서 삼흥학교, 돈의학교를 운영했다. 후에는 만주를 거쳐 연해주로 망명하여 의병활동을 하면서 함북 경흥에서 일본군과 싸웠다. 그리고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역 한복판, 러시아군이 대열해 있는 가운데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고 주변에 있던 고관 3명에게 중상을 입혔다.
의거 후 안중근은 만세를 부르고 총을 든 채 순순히 체포되었다. 긍지에 가득 찬 그의 태도는 수많은 애국심을 부추겼다. 박은식을 비롯하여 중국의 양계초 등 국내외 지성들이 그를 세계적 안광眼光을 지닌 평화 사상가로 기렸다. 심지어 일본인 간수나 지성인들도 그의 사상에 공감했다. 그러나 안중근의 용기와 삶의 기반을 이룬 신실한 신앙에 대해서는 모르는 경우가 허다하다.
청계동성당과 황해도 전교
황해도 천주교회사는 황해도의 첫 선교사인 빌렘 신부와 안중근 일가의 신천 청계동이 중심이었다. 안중근 토마스는 1879년 황해도 지역의 유력가문이던 안태훈 진사와 백천 조씨 사이에 맏이로 태어났다. 그는 1897년 1월 10일 부친을 비롯한 청계동 주민들과 빌렘(Wilhelm, 洪錫九) 신부에게 세례를 받았고, 이때 공소가 시작되었다.
영세 입교 후 안씨 집안은 천주교 선교에 앞장섰다. 안태훈의 6형제 중 장남만 제외하고 전부 입교했는데, 셋째 즉 안중근의 부친은 빌렘 신부의 외무장관, 넷째 안태건은 전교회장, 안중근은 복사를 맡았다.
안중근 가족은 청계동 본당을 설립하기 위해서 헌신했는데, 1898년 4월 빌렘 신부가 청계동으로 옮겨오면서 황해도의 두번째 성당이 되었다. 청계동의 교세는 급격히 늘어났고, 황해도 자체의 교세도 급증하여, 한때는 황해도의 교세확장이 전국에서 선두였다. 우도 신부 등 여러 신부가 황해도로 투입되었다. 청계동은 황해도 선교의 지휘부 역할을 했다. 안중근은 여기서 제대로 맺어진 신앙의 열매였다.
안중근의 전교활동
안중근은 영세한 후 빌렘 신부의 복사가 되어 해주, 옹진 등 황해도 여러 고을을 다니면서 전교활동에 종사했다. 안중근은 ‘충실’했고, ‘모범적’이었다.
그는 혼자서만 맛있는 음식을 먹거나 재주를 누리고 있다면 그것은 동포의 정리라고 할 수 없다며, 한번 먹기만 하면 장생불사하는 음식과 한번 통하기만 하면 하늘로 날아 올라가는 재주를 함께 나누자고 군중을 초대했다. 그리고 주요교리, 교회조직과 체계 등을 설명하며, 세계 문명국 지성들은 모두 천주를 믿는다고 설파했다. 그는 모두 천주의 의자義子가 되어, 현세를 도덕시대로 살다가, 죽은 뒤에 천당에서 영복을 누리자고 외쳤다.
그런데, 대한제국이 급박하게 몰락해가자 안중근은 애국계몽운동에 한계를 느끼고 무장투쟁에 나섰다. 그는 간도와 연해주를 배경으로 망명생활을 하며, 의병부대를 조직하여 일본군과의 전투에 나섰다.
의병전쟁 중에도 그는 아침, 저녁 기도와 묵주신공을 빠뜨리지 않았다. 의병의 짐 속에는 항상 ‘공과’와 첨례표가 있었다. 물론, 전투에서도 복음정신을 실천했다.
1907년 안중근 부대는 경흥에서 무장전투를 하던 중 일본군들을 체포했다. 이때 포로들을 끌고 이동할 수 없었던 안중근은 동지들의 처형 주장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석방했다. 안중근은 ‘만국공법’과 ‘그리스도의 사명’을 실천했던 것이다.
그러나 풀려난 포로들이 정보를 제공하여 안중근 부대는 초토화되었다. 안중근과 동료 두 사람은 산속을 헤매면서 12일 동안 단 두 끼의 밥을 얻어먹는 극도의 위기상황을 맞았다. 안중근은 죽을지 모른다고 판단되자, 두 동료에게 주요교리를 설명하고 그들의 동의를 얻어 대세를 베푸는 것부터 했다.
1909년 의거를 결행하기 전날 밤에는 머물던 집의 객실에서 문을 잠그고 커튼을 친 다음 줄칼로 권총 탄알 끝을 뾰쪽하게 갈고 십자표시를 새겨 7발을 장탄해 놓았다. 그리고 하느님의 축복을 빌며 십자성호를 그었다. 다음 날도 거사 성공을 위해 특별히 기도했다.
하늘로 가는 준비
안중근은 거사 후 뤼순 형무소에 투옥되었다. 신앙의 사람 안중근은 처형되기 전에 하늘로 가는 준비를 마쳐야 했다.
1910년 2월 14일에 사형선고를 받은 안중근은 형제들을 통해, 편지와 전보를 이용하여 뮈텔(Mutel, 閔德孝) 주교와 빌렘 신부께 성사를 볼 수 있도록 요청했다. 또한 그는 일본 당국의 허가도 얻어내어, 재판 담당판사가 주교와 신부에게 옥에서의 성사를 허락한다는 전보를 보냈다. 안중근의 사촌도 뮈텔 주교를 찾아갔다. 주교께 여러 번 여행을 청했던 빌렘 신부는 결국 허락 없이 뤼순에 갔다.
3월8일 신부는 안중근의 두 동생과 함께 안중근을 면회했다. 면회가 끝나자 안중근은 고해성사의 기회를 요청했다. 일본인들은 다음날 오전 10시로 정해주었다.
그러나 다음날, 검찰관은 형무소 규칙상 수감자와 개인적 면회는 허용되지 않는다며 제동을 걸었다. 신부는 몇 시간에 걸쳐 고해성사에 대해 설명했으나, 결국 통역과 간수들이 배석한 가운데 성사를 집행해야 했다.
그 상황에서도 신부와 안중근은 마치 어느 오래된 대성당의 한구석에 있는 것처럼 성사에 몰입했다. 성사가 끝나자 안중근은 신부에게 영성체를 하게 해달라고 청했다. 안중근이 형무소장에게 허가를 청했고, 형무소에서는 이를 허락했다.
다음날인 3월 10일 10시 신부는 안중근의 동생들과 함께 옥으로 갔다. 난관은 안중근의 영성체였다. 형무소에서는 수감자의 독살을 염려하여 규칙상 외부 음식반입이 금지되어 있었다. 오랜 시간의 실랑이 끝에, 신부는 가져온 제병들을 그들이 보는 앞에서 두 형제에게 직접 제병을 골라 맛보게 했다. 이런 소동을 거친 뒤, 겨우 신부만 들어갈 수 있었다.
응접실에서통역인과 직원들이 신부를 도와 제대를 준비했다. 준비가 끝나자 안중근이 들어왔다. 신부는 그의 수갑을 풀어주게 했다. 신부는 안중근에게 말했다. “ … 주님의 은총에감사하고,자네가 바치게 될 마지막 미사인 이 미사에 성실히 참례하도록 노력하게. 자네가 청년 신자였을 적에 청계동에서 내가 미사 드리는 것을 도왔듯이 나를 돕도록 하게.”
형무소장 등 11명이 제대에서 3m떨어진 곳에 각자자기의 검에기대어 반원 형태로 둘러서 있었다.
신부와 안중근은 성호경을 그으며 미사를 시작했다. 안중근은 5년 동안 미사참례를 하지 못했어도 응답문을 한 구절도 잊지 않았다. 그는 확신에 찬 목소리로 응답했다. 미사는 천천히 거행되었다.
둘은 벅찬 감격 속에 몰입했다. 복음서 봉독 후, 신부는 한국어로 된 성경 말씀을 읽고 안중근에게 설명했다. 산상수훈이었다.
“자네 역시 주님의 음성을 듣고, 그분의 설교를 들으러 몰려온 그 군중 속으로 들어왔네. … 우리 주님은 착한 강도가 지은 죄를 꾸짖지 않으시고 그에게 ‘오늘 낙원에 있게 될 것’이라고 약속하셨네.”
미사는 안중근의 영성체로 끝맺었다. 성체성사와 노자성체를 한꺼번에 베풀었다.
안중근은 특별히 1910년 성금요일인 3월 25일을 처형일로 요청하고 허락받았었다. 그러나 일본인들은 이토가 죽은 26일 같은 시간에 형을 집행하여 이토를 위로하고자 했다.
1910년 3월 26일 오전 10시 안중근은 전날 밤 받은 어머니가 지어 보낸 명주 두루마기를 입고 간수 네 명의 경호를 받으며 형장으로 불려나갔다. 교도소장이 마지막으로 남길 말이 있느냐고 묻자, 안중근은 자신이 이토를 사살함은 동양평화를 위한 것이므로 한일 양국이 서로 협력해서 동양평화를 도모하기를 바란다고 했다.
그는 3분 남짓 기도를 하고 말없이 사형대로 올라가 “동양 평화 만세”를 외치고 의젓하게 그의 길을 갔다. 그가 몸에 지녔던 성화聖畵는 관에 부착되었다. 그의 시신은 공동묘지에 묻혔다.
청계동에는 부활대축일 미사를 마치고 기뻐할 때 안중근의 순국 소식이 도착했다. 부활종이 천천히 조종을 올렸고, 신자들은 경당에 모여 연도를 바쳤다. 영세 신부에게서 노자성사를 받은 안중근은 영세받은 곳에서 연도를 들으며 그가 바라던 하느님께로 갔다.
안중근은 옥에서 유서를 남겼다. 그가 순국 전 이틀간에 걸쳐 쓴 어머니, 부인, 뮈텔 주교와 빌렘 신부에게 보낸 편지가 전해진다.
무엇보다도, 여기서 각각 다른 사람에게 보낸 유서의 첫 인사말이 “찬미예수”였음이 눈에 띈다. 찬미예수란 1862년부터 천주교 신자 사이에 친소나 신분의 구별 없이 쓰이던 인사였다. 그의 신앙은 생활 속에 철저히 배어있었다.
그리고 안중근은 모든 이에게 천국에서 다시 만날 것을 약속했다. 생전에 그는, “천당의 복은 영원한 즐거움입니다.”라고 외쳤다. 그가 매사에 당당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 힘이었다. 또한 그가 지녔던 범 인류애적 정의와 평화는 이 믿음에서 퍼 올린 가르침이었다. 성실하신 하느님께서 그에게 답으로 내려주신 열매였다.
안중근의 명랑한 신앙과 교회적 갈등
안중근은 철저한 신앙인이었지만, 그의 인생의 중추였던 교회는 그의 신념에 찬 행위를 부정할 때가 종종 있었다. 안중근의 그리스도교적 행동에는 의거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안중근의 의거에 대해 당시 교회는 다른 의견을 가졌다.
뮈텔 주교는 의거 소식을 듣고 천주교인이 연루되었음을 부인했고, 나중에는 대중매체에서 저격범이 천주교 신자라는 표현이 나오지 않음을 다행으로 여겼다. 주교는 이토의 죽음에 조의를 표했고, 안중근의 의거를 단순한 살인행위로 보았다.
안중근도 감옥에서 이런 평가들을 전해 들었다. 그는 고립무원에 빠졌지만, 자신은 독립전쟁을 수행하다 체포된 포로일 뿐이며 자신의 행위는 한국의 독립과 동양평화라는 대의를 위한 정당한 것임을 굽히지 않았다.
재판장이 안중근에게 저격 후 자살하거나 달아날 생각은 하지 않았느냐고 묻자, 그는 한국 독립의군 참모중장으로서 … 그때 비록 호신용 칼을 가지고 있었지만, 자살이나 도주와 같이 비열한 행동은 하지 않았다고 답했다.
실제로 형장까지 찾아와 성사를 준 빌렘 신부도 일찍부터 안중근의 민족운동에 반대했었다. 안중근은 뮈텔 주교께 대학설립을 건의했다가 거절당한 일도 있었다. 또 그는 무장투쟁에 투신하러 러시아로 가던 중 원산본당의 브레(Bret, 백) 신부로부터 반침략 민족운동에 투신한다는 이유로 성사를 제한 당했다. 그는 한때 빌렘 신부의 전횡을 참지 못해 갈등하기도 했다.
그래도 안중근은 교회에서 상처받지 않았다. 그의 신앙은 걸림이 없는 ‘천진성’이 있었다. 마치 우리 초대교회처럼 평신도로서 긍지가 살아있었다.
결국, 1993년에 이르러, 김수환 추기경의 입으로 일제강점기 교회가 바른 판단을 내리지 못했다며, 안중근 의사의 거사를 의거로 선언했다. 안 의사가 혼자 투쟁할 때 위로하지 못한 교회는 뒤늦게 그를 인정했다.
그러나 안 의사의 신앙은 언제나 동일했다. 그에게는 교회의 가르침과 세속의 정의가 나뉘지 않았다. 또한 ‘동양평화론’처럼 안중근에게 있어서 이웃이라는 범위는 범 인류였다. 그래서 안중근의 이상적 공정, 이상적 평화의 입장이 적敵조차 감동시키고, 시대가 바뀌어도 감동을 자아내는 것이다. 세계적 보편질서를 지향하면서도 각 나라 현장에서 운행되는 교회가 사회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안중근은 이미 100년도 더 전에 실천했다.(출처: 『영성생활』 63호, 2022년 5월, 김정숙 - 영남대학교 명예교수(역사학))
첫댓글 비운의 시대에 태어나서, 불멸의 믿음을 보여주셨네요. 🙏
좋은 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교수님의 의견을 반영하여 글 편집을 변경했는데, 보기가 낫네요.
지금 다시 읽어보니, 이 글을 이해하는 데는 천주교적인 정보가 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안중근 의사가 사형에 처하게 되었을 때, 천주교 신자는 신부를 모시고 인생 마지막 정리를 하는데- 종부성사- , 안중근 의사가 교회에 이것을 청했습니다. 그러나 주교는 거절했고, 결국 주교 허락없이 안중근의 옛날 본당신부가 감옥으로 간 것입니다. 산넘어 산이라고.....고해성사는 절대적 비밀입니다. 그렇지만 일본인들이 허락치 않아 결국 안중근 의사는 고해를 간수들 앞에서 했습니다. 그리고 간수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어린 시절 자신이 제대 옆에서 하던 복사 역할을 하며 신부와 둘이서만 마지막 미사를 드리고 영성체를 했다는 거지요. 그 본당신부는 이 이유를 비롯하여 몇가지 문제로 한국을 떠나게 됩니다. 교회에서는 20년 전쯤, 김수환 추기경이 결국 이것이 잘못되었다고 사과, 공포했습니다.
안중근의사의 신앙과 애국, 그리고 동양평화 사상을 알 수 있는 귀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