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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능의 발견
변화의 격발
세상은 변화의 집합이다. 변화로 모두 설명된다. 그러나 인류는 그동안 변화를 규명하지 않았다. 우리가 변화로 아는 것은 대부분 이미 일어난 변화의 중간 전달이다. 바람이 불고 물이 흐르는 것은 변화가 아니다. 태양이 바람을 데워서 팽창시키고 중력이 물을 잡아당기는 것이 변화다.
우리는 원인과 결과의 논리로 변화를 설명하지만 틀렸다. 인과율은 이미 일어난 변화의 전달만 해명한다. 우리는 사건의 원인 단계에서 결과가 미리 결정되어 있다고 믿는다. 틀렸다. 결정론의 오류는 변화의 중간 전달을 변화 그 자체로 착각한 것이다. 인류는 변화를 탐구한 적이 없다.
도미노가 연속적으로 쓰러지는 것은 변화가 아니다. 최초에 가만있는 도미노를 쓰러뜨린 것이 변화다. 우리가 현실에서 하는 일은 대부분 이미 일어난 변화의 중간 전달이다. 그러나 인생에 한 번은 최초 격발의 문제를 만나게 된다. 그럴 때 인간은 당황하고 주변의 도움을 구하게 된다.
첫 만남, 첫 등교, 첫 키스, 첫 소풍, 첫 시합과 같이 처음 일어난 일은 잊지 못한다. 그럴 때 인간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허둥댄다. 다행히 부모와 선배가 챙겨주므로 위기를 넘긴다. 그러나 인생에 한 번은 혼자 고독하게 변화의 최초 격발과 대면하는 곤란한 상황을 만나고 좌절하게 된다.
모든 것이 변화다. 그런데 우리는 변화를 모른다. 우리가 물질이라고 믿고 의지하는 것은 변화의 중간 전달자에 불과하다. 성질이 존재의 본래 모습이다. 성질은 궁극적으로 밸런스의 복원이다. 변화는 밸런스 갈아타기다. 모든 변화는 둘의 자리바꿈이다. 변화를 아는 것이 아는 것이다.
자발적 변화
세상은 변화의 집합이다. 변화로 모두 설명된다. 변화는 두 가지 방식으로 일어난다. 강제적 변화와 자발적 변화가 있다. 인류는 강제적 변화만 알고 자발적 변화는 모른다. 구조론은 닫힌계 안에서 내부요인에 의해 일어나는 자발적 변화를 해명한다.
강제적 변화 - 외부의 작용을 전달한다.
자발적 변화 - 내부 밸런스에 의해 변화한다.
강제적 변화는 엄밀한 의미에서 변화의 전달이지 변화 그 자체가 아니다. 인류는 변화 그 자체를 규명한 적이 없다. 도미노처럼 연속적으로 전달되는 운동은 진정한 변화가 아니다. 계를 지정하고 계 내부에서 일어나는 자발적 변화를 규명해야 한다.
외부 작용에 의해 일어나는 강제적 변화는 변화가 일어나기 전의 원인과 변화가 일어난 후의 결과만 본다. 사건의 원인 단계에서 결과가 미리 결정되어 있다는 결정론의 오류다. 외부에서 가해지는 작용은 닫힌계 내부의 밸런스에 의해 차단될 수 있다.
사건은 서로 맞물려 돌아가므로 변방에서 전달된 변화는 중앙에서 조절된다. 하부구조의 변화는 상부구조에서 조절된다. 강제적 변화는 자연의 모든 존재가 서로 맞물려 있지 않고 각자 개별적으로 존재한다고 가정한다. 그 가정은 틀렸다.
닫힌계 내부 밸런스에 의해 일어나는 자발적 변화는 질, 입자, 힘, 운동, 량의 순서로 진행되는 전체 의사결정과정을 봐야 한다. 외부에서 같은 작용이 가해져도 닫힌계 내부의 사정에 따라서 결과가 달라질 수 있다. 이는 비결정론을 따른다.
당구공이 굴러가는 방향은 당구를 치는 사람이 결정하지만, 오뚝이가 똑바로 일어서는 것은 오뚝이 내부의 밸런스가 결정한다. 오뚝이는 상부구조에서 중력이 개입하여 밸런스를 복원한다. 자발적 변화는 밸런스를 조절하는 상부구조가 있다.
당구공이 굴러가는 변화는 인간의 뇌에서 결정된다. 사람의 팔과 당구봉과 당구공은 뇌에서 결정된 변화를 중간에서 전달한다. 우리는 변화 그 자체와 변화의 전달을 구분하지 못한다. 변화의 전달은 원인과 결과만 보면 되지만 이는 거짓말이다.
시계는 태엽을 많이 감든 적게 감든 일정한 속도로 바늘이 움직인다. 내부에 조절장치가 있기 때문이다. 내부에서 조절하므로 외부의 작용만 관찰해서는 결과를 알 수 없다. 시계 태엽이 상부구조다. 윗선에서 개입해 아랫선의 결정을 뒤엎는다.
자발적 변화는 닫힌계 내부에서 밸런스 붕괴에 따른 코어의 이동으로 일어난다. 변화는 하나의 밸런스가 붕괴되고 다른 밸런스로 갈아타는 것이다. 자발적 변화는 계 내부에 조절장치가 있다. 강제적 변화는 내부가 없으므로 조절장치가 없다.
구조는 각운동량 보존의 법칙에 따라 공간의 거리를 시간의 속도로 바꾸어 밸런스를 조절한다. 조절은 기능이다. 기능이 곧 존재다. 하나의 기능이 있는 곳에 하나의 존재가 있다. 존재의 기능을 이해하는 것이 구조론을 이해하는 핵심이다.
의사결정구조
참과 거짓을 구분하는 방법이 있다. 내부에 의사결정구조가 없으면 거짓이다. 존재는 곧 기능이므로 모든 존재는 내부에 조절장치가 있다. 조절에 실패하면 형태가 무너진다. 사물의 존재뿐 아니라 사건의 전개라도 마찬가지다. 어떤 주장이든 그 주장 안에 힘의 방향을 꺾는 구조가 있어야 한다.
기능은 메커니즘에 있다. 메커니즘은 움직임 두 개를 연결하며 둘 사이에 조절장치를 두고 밸런스를 복원한다. 조절장치는 수평과 수직이 만나는 접점을 이루고 힘의 진행 방향을 꺾는다. 수평의 밸런스와 수직의 축이 만나서 의사결정구조를 이룬다. 반드시 그것이 있다. 만약 그것이 없으면 가짜다.
자연은 외부를 내부화하는 방법으로 조절한다. 생물의 진화가 원핵에서 진핵, 단세포에서 다세포, 겉씨에서 속씨, 체외수정에서 체내수정, 갑각류의 겉뼈에서 척추동물의 속뼈로 진화하는 것은 외부에서 확률적으로 일어나는 의사결정을 내부의 필연적인 의사결정으로 바꾸어 조절하는 것이다.
인간은 도구로 조절한다. 망치와 송곳은 사람이 강약을 조절한다. 의사결정이 일어나는 접점이 외부에 노출되어 조절이 불완전하다. 기계장치는 그것을 내부로 끌어들여 자동으로 조절한다. 손바느질을 한다면 사람의 솜씨가 필요하지만, 재봉틀은 조절장치가 있으므로 사람의 솜씨는 관계가 없다.
문명의 진보는 도구의 발전을 반영한다. 도구와 그 도구의 도구로 층을 쌓는다. 도구로 조절하며 다시 그 도구의 조절장치를 조절하는 식으로 조절의 층을 쌓는 것이 문명의 진보다. 바퀴 축이 바퀴를 조절하고, 변속기어가 바퀴축을 조절하고, 엔진이 변속기어를 조절하고, 핸들이 엔진을 조절한다.
자연은 다섯 가지 도구의 층을 쓴다. 질, 입자, 힘, 운동, 량이다. 량으로 객체를 조절하고, 운동으로 량을 조절하고, 힘으로 운동을 조절하고, 입자로 힘을 조절하고, 질로 입자를 조절한다. 뭐든 다섯 단계까지 조절되어야 기능이 작동한다. 자발적인 변화는 닫힌계 내부에 다섯 가지 조절장치가 있다.
만유는 조절된 존재다. 조절에 실패하면 사라진다. 우리가 눈으로 보는 정보는 조절된 것이다. 그 정보를 조절하는 변화와, 변화를 조절하는 스트럭쳐와, 스트럭쳐를 조절하는 메커니즘과, 메커니즘을 조절하는 시스템이 있다. 시스템은 내부에 동력과 코어와 밸런스를 갖추고 코어를 움직여 조절한다.
조절장치
원자론은 더 이상 쪼갤 수 없다는 가정을 쓴다. 왜 그런 생각을 했을까? 왜 쪼개려고 하지? 닫힌계 내부에서 일어나는 자발적인 변화를 외부에서 관측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내부 조절장치의 존재를 모르기 때문이다. 쪼갤 수 없다는 원자론의 가정은 틀렸다. 쪼갤 수 없는 게 아니라 쪼개면 안 된다.
우리가 찾으려고 하는 것은 물질의 성질이다. 성질은 궁극적으로 밸런스의 복원력이다. 쪼개면 내부 밸런스가 사라진다. 찾으려고 하는 성질을 잃어버린다. 쪼개면 안 되는 것이지 쪼갤 수 없는 것이 아니다. 모든 존재는 쪼개진다. 쪼개면 조절장치가 깨진다. 쪼개기 위주로 가는 서구문명의 한계다.
인류가 내부에 조절장치가 있는 자발적인 변화를 보지 못하는데도 문명이 그럭저럭 굴러가는 것은 계를 쪼개서 내부를 외부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내부를 외부화하면 왜곡된다. 정지한 것은 쪼갤 수 있지만 움직이는 것은 쪼갤 수 없다. 죽은 것은 쪼갤 수 있지만 살아서 움직이는 것은 쪼갤 수 없다.
자동차 엔진을 끄지 않고 수리할 수 없다. 그런데 언젠가 한 번은 달리는 자동차를 달리고 있는 상태 그대로 수리해야 하는 상황을 만나게 된다. 사물은 쪼개면 되지만 사건은 쪼갤 수 없다. 사건은 톱니가 맞물려 돌아가기 때문이다. 존재는 궁극적으로 사건이다. 내부에 조절장치가 작동하고 있다.
인류문명은 쪼개기 문명이다. 존재 내부의 조절장치를 파괴한 상태에서 관측하고 있다. 환자를 죽여놓고 수술하는 격이다. 강제적인 변화를 보되 자발적인 변화를 보지 못하는 반쪽짜리 문명이다. 쪼개기 방법으로 99를 파악할 수는 있어도 백을 정복하지는 못한다. 문명 차원의 갈아타기가 필요하다.
뉴턴역학은 외부를 본다. 뉴턴역학으로 수성의 근일점 이동을 99퍼센트 설명하지만, 마지막 1퍼센트가 남아 있다. 100년마다 각 크기 43초의 오차를 설명하지 못한다. 그것은 공간 내부에서 일어나는 자체적인 변화이기 때문이다. 아인슈타인의 일반상대성이론은 사건 내부의 밸런스를 의심한 것이다.
쪼개기 방법으로 존재의 99퍼센트를 설명할 수 있지만 마지막 화룡점정은 안 된다. 정치인이 항상 삽질하는 이유다. 국민 내부의 조절장치를 무시하기 때문이다. 국민의 균형감각을 모르기 때문이다. 국민이 화를 내야 뒤늦게 알아채곤 한다. 정치인은 국민이 화를 낼 때까지 삽질을 멈추지 못한다.
기능과 권력
자연을 조절할 뿐만 아니라 사회도 조절해야 한다. 언어와 지식과 문화는 사회를 조절하는 도구다. 최종적으로 그 도구를 조절하는 것은 사람의 생각이다. 문제는 그 생각이 조절되는가다. 사람이 손으로 하는 일은 도구를 사용하지만, 머리로 하는 생각은 도구를 사용하지 않는다. 인류는 생각할 줄 모른다. 생각을 조절하지 못한다. 생각의 진행 방향을 바꾸지 못한다.
사물은 분해하고 다시 조립하면 된다. 사건을 분해하면 사건이 죽는다. 생각은 사건이다. 인류는 많은 도구를 사용하지만, 생각하는 도구가 없다. 생각을 조절하는 도구가 없다.
존재의 바탕은 기능이고 기능을 사용하는 것은 도구이고, 도구의 기능은 조절이고, 조절은 힘의 진행 방향을 바꾼다. 사회에서 그것은 권력이다. 권력은 조절장치를 이용하여 사건의 앞 단계가 다음 단계를 지배하게 한다. 자연은 기능으로 조절되고 사회는 권력으로 조절된다. 자동차는 파워트레인의 기능에 의해 작동하고 사회는 집단의 권력에 의해 작동한다.
구조론은 기능주의다. 기능은 강력한 언어다. 도구와 기능과 조절과 권력과 구조가 세상을 이해하는 핵심이다. 인간은 권력을 탐하지만, 사실은 권력에 숨은 기능을 탐하는 것이다. 왜? 이겨야 하기 때문이다. 이긴다는 것은 자신을 조절하는 상부구조의 개입을 차단하고 반대로 자신이 상부구조가 되어 객체를 조절하는 것이다.
우주는 조절에 의해 작동하며 인간은 조절하는 자가 되려고 한다. 지면 조절 당하고 이기면 조절한다. 조절 당하지 말고 조절해야 한다. 기능을 장악해야 한다. 도구를 손에 쥐어야 한다. 그 도구의 도구로 나아가야 한다. 자연과학은 인간의 손에 도구를 쥐여주고 인문과학은 그 도구를 조절하는 도구로 나아가게 한다.
자극과 반응
인류에게 생각은 의식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저절로 생각나는 것이다. 그것은 능동이 아니라 수동이다. 인간은 외부 환경의 자극에 반응하는 형태로 우연히 아이디어가 떠오를 뿐 의식적으로 아이디어를 복제하지는 못한다. 인간은 자극과 반응의 상호작용을 이용하여 생각한다. 환경의 자극이 먼저고 인간의 반응은 후수다.
지능이 낮은 사람은 타인을 괴롭혀서 외부 자극을 조달한다. 나쁜 사람이 나쁜 짓을 하는 이유는 타인의 손을 빌려 자신의 뇌를 자극하는 방법으로 생각하기를 성공시키려는 것이다. 그들은 타인에게 생각을 구걸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뇌가 작동하지 않아 답답하기 때문이다. 어린이의 꾸러기 행동을 어른이 되어서도 계속한다.
머리가 좋은 사람은 독서와 사색으로 자신의 뇌를 자극한다. 억지로 뇌를 쥐어짜서 생각을 구걸하는 것이다. 어느 쪽이든 자극과 반응의 단순한 패턴을 벗어나지 못한다. 생각의 조절장치가 없다. 관종의 어그로 행동이나 지식인의 독서나 민폐의 정도가 다를 뿐 구조는 같다.
많은 전쟁을 한 서양은 발전하고 많은 평화를 누린 동양은 낙후했다. 많은 경우 악이 선을 이긴다. 인간은 외부 자극이 없으면 생각을 못 하기 때문이다. 상호작용 총량이 증대하면 발전한다. 전쟁보다 나은 방법이 없을 때 인간은 전쟁한다. 러시아가 전쟁하는 이유는 더 나은 다른 방법을 찾아내는 데 실패했기 때문이다.
히어로는 빌런의 공격을 방어하는 형태로만 창의한다. 그것은 능동이 아니라 수동이다. 삼류 작가는 복수극 형태로만 이야기를 지어낸다. 지고 들어가는 게임이다. 인간은 외부에 경쟁자가 있고 비판해주는 평론가가 있어야 조금이나마 생각한다. 실패다.
자동차가 발전하면 운전 기술도 함께 발전해야 한다. 도구가 발전하면 그 도구를 사용하는 사람의 생각도 진보해야 한다. 도구의 발전은 외부에서 일어나는 의사결정을 시스템 내부로 깊숙이 끌어들이는 것이다. 구조론은 자극과 반응 형태로 외부에서 엉성하게 일어나는 생각을 시스템과 메커니즘과 스트럭쳐에 가두어 내부에서 안정되게 일어나게 하는 것이다.
간단하다. 생각은 자연을 복제하면 된다. 복제하려면 도구가 필요하다. 구조론이 그 도구다. 자연은 객체를 조절하고 다시 그 조절 도구를 조절하는 형태로 자신의 존재를 건축한다. 인간의 사유 역시 조절장치를 조절하는 방법으로 가능하다.
생각의 기술
생각을 어떻게 하는가? 수학문제 풀듯이 공식에 대입해서 풀면 된다. 그 공식은 자연에서 복제한다. 자연이 만들어지는 의사결정의 원리가 인간이 사용하는 언의 의사소통 원리가 된다. 생각은 자연의 의사결정 원리를 따른다.
단서를 잡고 공식을 찾아가는 과정은 귀납이다. 공식에 적용하여 실제로 문제를 푸는 것은 연역이다. 생각은 연역을 사용해야 한다. 연역은 한번 성공하면 무한 복제가 되기 때문이다. 한 번 생각하기가 어려울 뿐 다음은 쉽다. 반복하면 된다.
단서를 잡고 풀어가는 것이다. 실마리를 잡고 메커니즘에 적용하여 풀어가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메커니즘의 존재를 알아야 한다. 메커니즘은 시스템 속에 있다. 구조는 메커니즘 속에 있다.
어떤 변화의 갈림길이 있으면 구조다. 그곳에서 의사결정이 일어난다. 구조가 둘 연결되면 메커니즘이다. 메커니즘에 동력이 연결되면 시스템이다.
망치는 갈림길이 없다. 그런데 가위는 갈림길이 있다. 망치는 그냥 때리지만 가위는 각을 조절할 수 있다. 가위는 바퀴와 구조가 같다. 날이 축에 꿰어있다. 바퀴에 바퀴를 연결하면 메커니즘이다. 물레방아는 물레와 방아가 있다. 가위가 둘이므로 메커니즘이다. 거기에 물이 더해지면 시스템이다.
덩어리가 있다. 그것은 집단이기도 하고 집합이기도 하다. 생각은 덩어리를 해체하는 것이다. 의사결정은 하나의 덩어리다. 생각은 덩어리의 조립이 아니라 분해다. 그런데 분해하려면 일단 조립된 덩어리를 찾아야 한다. 그 과정은 조립처럼 보인다. 그것이 귀납이다. 조립된 것은 소설이지 사실이 아니다. 다시 분해해서 검증해야 한다. 연역이다.
생각을 조립하여 덩어리를 만드는 것은 귀납이고 덩어리를 분해하여 원위치시키는 것은 연역이다. 생각은 최종적으로 연역이다. 귀납은 연역에 필요한 단서를 찾는 것이다.
자연의 덩어리는 계, 체, 각, 선, 점의 순서로 분해된다. 닫힌계-중심체-조절각-이동선-단절점이 있다.
[연역] - [귀납]
닫힌계 - 덩어리(장) - 시스템
중심체 - 집합체 - 메커니즘
조절각 - 경계면 - 구조(스트럭쳐)
이동선 - 연결선 - 변화(운동)
단절점 - 접촉점 - 단서(정보)
맨 꼭대기에는 닫힌계가 있다. 그다음에는 중심체가 있다. 그다음에는 조절각이 있다. 그다음에는 연결선이 있다. 그다음에는 단절점이 있다. 질, 입자, 힘, 운동, 량이다.
세상은 연결과 단절이다. 닫힌계의 계系는 연결된 것이다. 시스템system은 쌍sys- 선다stem는 뜻이 있다. 두 체가 쌍으로 되어 있어서 이것을 세우면 저것도 서는 것이 시스템이다. 독재자가 일어나면 국민도 일어나는 것이 시스템이다. 한국팀이 공격하면 일본팀도 맞대응한다.
우리는 단절을 단서로 삼아 연결을 찾는다. 연결이 끊어지는 지점에서 경계를 찾는다. 그곳에는 레이어가 있다. 대부분 조직은 층으로 되어 있다. 그곳에서 조절장치를 찾아야 한다. 그런데 찾지 못한다. 힘은 그 각의 조절에 있다. 어떤 것이든 반드시 조절장치가 있다. 그것이 구조다. 면을 보되 각을 보지 못하므로 조절하지 못한다.
우리는 점, 선, 면, 체를 알뿐 그 이상은 모른다. 귀납의 한계다. 조절장치를 찾지 못하므로 그 조절의 동력이 조달되는 계를 모르는 것이다. 그냥 레이어가 층으로 쌓여있는 것은 보는데 수직과 수평이 만나는 지점을 모른다. 자전거 핸들은 수평이다. 사람의 손은 수직으로 그 핸들을 진다. 조절각이다. 그냥 핸들이라는 층 위에 손바닥이라는 층이 올려져 있다고 믿으면 답을 찾지 못한다. 조절을 못 한다. 그냥 화를 낼 뿐이다.
자전거 핸들과 그 핸들을 잡는 손의 조절각은 외부에 노출되어 있다. 그것을 내부로 숨기면 중심체다. 이것은 연역이고 귀납으로 보면 내부의 중심을 보지 못한다. 외부만 보면 집합체다. 내부에 한 점이 존재한다. 모든 의사결정은 거기서 일어난다.
자전거와 사람은 연결되어 있다. 시스템은 연결을 의미한다. 귀납적 사유로 가면 집합체에서 끝난다. 집합체는 밖을 보고 밖은 끝이기 때문이다. 중심체는 내부를 본다. 그러므로 한 번 더 사유를 진행해야 한다. 닫힌계를 보는 것이다.
차원은 외부를 내부화하는 것이다. 점을 내부에 가두면 선이다. 선을 가두면 각이다. 각을 가두면 체다. 체를 가두면 계다. 가두기 때문에 닫힌계가 된다.
다이몬의 소리
피타고라스는 대장간 앞을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크고 작은 망치 소리에서 화음을 발견한 것이다. 그런데 피타고라스만 그 소리를 들었을까? 들을 귀 있는 다른 많은 사람은 왜 대장간 앞을 그냥 지나쳤을까?
피타고라스는 만물의 근원은 '수'라고 했다. 탈레스는 만물의 근원이 '물'이라고 했고, 헤라클레이토스는 '불'이라고 했고, 아낙사고라스는 '정신'이라고 했고, 아낙시메네스는 '공기'라고 했고, 플라톤은 '이데아'라고 했다. 다들 하나씩 밀고 있었다. 뭐라도 하나 해야 하는 분위기다.
소크라테스는 다이몬의 소리를 들었다. 왜 소리가 들렸을까? 듣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델피의 신전에서 신탁받고 오더니 그때부터 사람이 이상해졌다. 아테네 시민들은 광장에 소크라테스가 나타나면 고개를 돌리고 모르는 척했다. 소크라테스에게 붙잡히면 곤란한 질문을 당한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내가 아테네에서 가장 현명하다고? 그런데 현명하다는 게 뭐지? 그는 지와 무지 사이에 금을 그었다. 대단한 건 아니다. 그는 '지'를 엄격하게 정의했을 뿐이다.
'자네는 정의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강자의 이익이 정의다.' '강자도 사람이고 그러므로 실수할 때가 있겠군. 정의도 실수를 한다면 그것을 정의라고 할 수 있겠는가?' 이 말을 들은 사람은 분격하여 곧바로 반격 들어간다. '그럼 소크라테스 자네가 내 질문에 대답해보게?' '나는 무지한 사람이야. 나는 아는 게 없다네.' 그는 남들에게 곤란한 질문을 던져놓고 자신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리스 형님들은 다들 만물의 근원에 대해 한마디씩 했다. 혹자는 물을, 혹자는 불을, 혹자는 수를, 혹자는 정신을, 혹자는 공기를, 혹자는 이데아를 내세웠다. 소크라테스는 '지'를 밀었다. 아테네 시민 중에 소크라테스가 가장 똑똑하다는 말을 들었을 때 그는 아테네 시민 전체와 각을 세운 것이다. '남들은 만물의 근원을 찾는가 본데 나는 만 지혜의 근원을 찾아볼 테야.'
보려고 하면 보인다. 신탁을 듣고 흥분해서 그랬겠지만, 소크라테스는 적극적으로 보려고 했기 때문에 본 것이다. 들으려고 하면 들린다. 피타고라스 역시 들으려고 했기 때문에 들은 것이다.
인류의 위대한 성취 중의 하나는 소실점의 발견이다. 플라톤 이래 서구인들은 우주가 완벽한 질서 아래 움직인다고 믿었다. 신의 완전성의 증거가 되는 단서를 찾으려고 노력했다. 천동설은 행성이 왔다 갔다하는 게 신이 실수를 저지른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한 피나는 노력의 산물이었다. 눈이 어지러운 복잡한 공식을 만들었다. 절박했다.
공자는 그러지 않았다. 석가도 그러지 않았다. 노자도 그러지 않았다. 그들은 현실의 문제에 관심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치나 돔은 돌 하나만 빠져도 전부 무너진다. 모두 맞물려 있기 때문이다. 중국의 목조건물은 잘못 지어도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 옆으로 틀어져서 돌아가다가 서서히 주저앉을 뿐.
르네상스인들이 소실점을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아리스토텔레스 이래의 전통으로 우주의 완벽한 질서를 믿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화려한 건축은 신의 무오류성을 상징한다. 그림 속에 신의 이데아를 드러내고자 한 것이다. 그들은 소실점을 보려고 했기 때문에 본 것이다.
구조론은 우연히 발견된 것이 아니다. 나는 아홉 살 때부터 작심하고 증거를 수집했다. 결어긋남 때문이었다. 그것은 세상과의 불화였다. 인류 모두가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충격을 받았다. 그것이 내게는 다이몬의 소리였다.
소크라테스가 본 것은 지와 무지의 경계다. 그 경계가 흐릿하다. 소크라테스가 묻는다. '자네는 정의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이 질문을 받은 사람은 정의에 포함되는 여러 가지 요소 중에 하나만 말하면 된다고 생각한다. 소크라테스는 거기에 더 엄격한 조건을 부여한다. 하나라도 빠져나가는 구멍이 있으면 안 되지. 상대성과 절대성의 차이다.
사실이지 이것은 언어의 문제다. 사람들은 지혜가 없는 게 아니고 그것을 표현할 언어가 없다. 숫자가 없으면 수학을 할 수 없는 것과 같다. 소피스트들에게는 법정에서 상대를 이겨 먹는 상대성의 언어가 있을 뿐 서로 다른 관점을 통일하여 서로 간에 대화가 되게 하는 절대성의 언어가 없었다.
나는 참을 수 없었다. 인간들이 이 문제를 대강 뭉개고 있었기 때문이다. 빛은 있지만 어둠은 없다. 빛은 입자가 있고 어둠은 암자가 없다. 선은 있지만 악은 없다. 선은 사회성이 있고 악은 사회성과 대칭되는 그 무엇이 없다. 악은 선을 설명하는 말이다. 진보는 있고 보수는 없다. 진보는 도달해야 할 문명이 있고 보수는 거기에 반대되는 무엇이 없다. 야만은 문명을 설명하는 말이다. 야만인은 있는데 왜 야만 돼지, 야만 소, 야만 말은 없는가?
이런 식으로 낱낱이 따지고 들면 인간들이 아는 게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왜냐하면 인간의 언어가 희미하기 때문이다. 인간들은 대칭을 고리로 사유를 이끌어가지만 틀렸다. 기슭에는 대칭이 있는데 정상에는 대칭이 없다. 골문 앞까지 도달하면 패스를 받아줄 동료가 없다. 그 지점에서는 자력으로 해결해야 한다. 그 세계는 절대성의 세계, 비대칭성의 세계다.
기슭에서는 대충 얼버무려도 된다. 정상에 도달하면 상대를 이겨 먹으려는 상대성의 언어, 대칭성의 언어를 버리고 서로 대화가 통하게 하는 절대성의 언어, 비대칭성의 언어로 갈아타야 한다. 골대 앞에서는 자력으로 한계를 넘어야 한다.
양질전환은 없다. 그런데 우리는 현실에서 무수히 양질전환을 경험한다. 헤겔과 마르크스가 헷갈릴 만하다. 무한동력은 없다. 그런데 우리는 현실에서 무수히 무한동력을 본다. 그것은 그냥 느낌이다.
태양은 100억 년 후에 작동을 정지한다. 100년을 못 사는 인간과 비교하면 거의 무한이다. 풍력, 수력, 태양광 발전 또한 마찬가지다. 옛날 어부들은 바다에 무한히 많은 고기가 있다고 생각했다. 거의 무한이지만 그게 백 퍼센트 무한은 아니다. 헤겔이 양질전환이 있다고 믿은 것은 거의 무한이나 진짜 무한이나 비슷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느낌이 무한이면 대략 무한이지. 이런 식이다. 그런데 우리가 말을 이렇게 대강 해도 되는가? 농담은 대충 해도 되는데 과학을 대충 하면 안 된다.
우리는 줄다리기라고 한다. 줄로 당긴다고 믿지만, 사실은 발로 땅을 민다. 엄격하게 따지면 줄다리기가 아니라 발로 땅밀기 시합이다. 우리는 이런 것을 대충 뭉갠다.
유는 있고 무는 없다. 무가 있다면 없음이 있는 것이다. 없음이 있다면 그게 없다는 말이 아닌가? 우리는 무도 있고 유도 있다고 착각한다. 무는 없으므로 유와 대칭되지 않는다. 막연한 생각은 모두 틀렸다.
엄격하게 따지면 인력은 없다. 우주 안의 모든 힘은 척력이다. 힘은 밸런스의 복원이기 때문이다. 밸런스의 복원에는 공간이 필요하고 공간을 확보하면 밀게 된다. 인력은 척력 둘이 꼬여서 교착된 것이다.
엄밀히 따지면 귀납은 없다. 지식의 조립에는 오직 연역이 있을 뿐이다. 지식은 원리의 복제다. 연역은 복제다. 귀납은 연역에 필요한 단서의 조달이다. 귀납은 연역의 하부구조다.
거의 양질전환이지만 사실은 양질전환이 아니고, 거의 무한동력이지만 사실은 무한동력이 아니고, 거의 귀납이지만 엄격하게 따지면 그것이 귀납은 아니다. 상부구조에 귀납을 부리는 원리가 있기 때문이다. 귀납은 발굴한 단서를 원리 앞으로 데려갈 뿐이고 지식은 원리에 의해 복제될 때 그 연역에 의해 완성된다.
물이 100도에서 끓는 것을 양질전환이라고 한다. 물의 온도가 올라간 게 아니라 사실은 불의 온도가 물로 이동한 것이다. 아래에서 위로 올라갔을 뿐이다. 물의 양이 증가한 것도 아니고, 물의 온도가 증가한 것도 아니고, 이동한 것이다. 물에 설탕을 타면 설탕물이 된다. 맹물이 설탕물로 변했으니 양질전환인가? 천만에. 물에 열을 타는 것과 물에 설탕을 타는 것이 다른가? 양질전환은 우주 안에 없다. 양질전환 착각은 무한동력 착각과 구조가 같다.
우리가 언어를 대충 사용하기 때문에 이렇게 된다. 아테네 시민이 무지한 것이 아니다. 그들이 언어를 대강 사용했을 뿐이다. 소크라테스가 현명한 것이 아니다. 그는 언어를 엄격하게 정의했을 뿐이다. 그는 언어를 바꾸려고 한 것이다.
수학자는 수를 대강 사용하지 않는다. 동양에서는 파이값을 대충 3이라고 했다. 왜냐하면 피곤하니까. 그거 일일이 따지고 싶겠냐고. 한옥을 지을 때는 그래도 된다. 돌로 성당을 그렇게 대충 지으면 노트르담이 무너진다. 동양은 대충 해도 되니까 대충 한 것이고 그래서 대충 하다가 서양에 밀렸다. 기슭에서는 대충 해도 되는데 정상에서는 제대로 해야 한다.
왜 동양인들은 5천 년 동안 소실점을 눈으로 뻔히 보고도 보지 못했을까? 보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거 본다고 쌀이 나오냐 떡이 나오냐. 서양은 달랐다. 피타고라스는 정리를 발견하고 황소 백 마리를 신전에 바쳤다. 그들은 신의 숙제를 끝내고 싶었다. 완벽하지 않으면 무너지는 돌집에 살았기 때문이다. 현대문명도 그렇다. 기슭에서는 대충 그래도 되는데 정상에서는 달라져야 한다. 지금까지 대충 뭉개고 넘어온 것을 이제는 전면적으로 재검토할 때가 되었다.
인생의 요체
과학은 자연환경을 극복하고, 진보는 사회환경을 극복하고, 깨달음은 내면환경을 극복한다. 기술은 자연의 에너지를 끌어내고, 의리는 집단의 에너지를 끌어내고, 사랑은 개인의 에너지를 끌어낸다.
과학의 기술로 자연을 이기고, 진보의 의리로 사회를 이기고, 깨달음의 사랑으로 자신을 이긴다. 인간에게는 과학의 기술과 진보의 의리와 깨달음의 사랑이 필요하다.
인간이 비참한 것은 손에 쥔 도구가 없어 환경에 맞서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기지 못하기 때문이다. 필요한 것은 세상과 맞서는 도구다. 도구는 기능이 있고 기능은 조절한다.
도구는 사건의 조절장치를 장악하여 자신이 능동적인 의사결정권자가 되게 한다. 문제를 해결하고 게임에 이기면 다음 게임에 초대된다. 그 외에 아무것도 없다.
농부는 밭을 이기고, 운전자는 차를 이기고, 배는 파도를 이기고, 인간은 비참을 이긴다.
존재는 사건이고, 사건은 상호작용이고, 상호작용은 게임이고, 게임은 이겨야 한다. 지면 연결이 끊어지고 이기면 주최 측을 만난다. 이기는 데 필요한 것은 기능이고, 기능이 하는 것은 조절이고, 기능을 쓰게 하는 것은 도구다.
조절은 힘의 진행 방향을 바꾼다. 그것은 권력이다. 권력은 수동을 능동으로 바꾼다. 자체 엔진을 가지는 것이다. 남의 게임에 선수로 뛰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게임의 주최 측으로 올라선다. 그것은 사건의 복제다. 일어난 사건에 말려들지 않고 스스로 사건을 일으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