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구 범일동에 있는 子城臺의 처음 이름은 釜山鎭支城입니다. 증산(甑山)에 있는 釜山鎭城을 모성이라고 한다면, 부산진지성은 자성에 해당된다고 하여 부르게 된 이름입니다. 부산진지성은 동서의 산을 따라 성벽을 쌓고, 바닷물을 끌어들여 참호를 20m쯤의 넓이로 만들어 배가 바로 성벽에 닿도록 되어 있었으며 높직한 대(臺)가 있어 자성대라 불려왔습니다.
*증산(甑山) : 지금의 좌천동 뒷산. 산의 모양이 시루(甑)와 가마솥(釜)처럼 생긴데서 붙여진 이름으로 부산이라는 지명도 여기서 유래된 것으로 보임.
자성대 안에 있는 부산진지성은 본래 부산포의 外城이었던 것을 임진왜란 때 왜적이 일본식으로 축성하여 지휘소로 이용하였으며, 왜군이 물러간 뒤에는 명나라 군대가 잠시 주둔하기도 했습니다. 뒤에 우리 조정에서는 새로 성을 쌓고 사대문인 진동문(鎭東門 : 동문), 금루관(金壘關 : 서문), 종남문(鐘南門 : 남문), 구장루(龜藏樓 : 북문)를 세우고 관아를 정비한 후 부산진첨사영으로 사용했습니다. 자성대는 그 이후 모습을 잃었다가 1974년 이후 복원 작업을 거쳐 동문(建春門이라고 고침), 서문, 장대(將臺, 鎭南臺)가 그 모습을 되찾았습니다.
자성대에는 현재 최고 10m, 최저 1.5m의 왜성이 남아 있으며, 이 성 서문의 양측 성곽에 끼여 있는 우주석(隅柱石)에는 “南徼咽喉 西門鎖鑰(남요인후 서문쇄약)”-이곳은 나라의 목에 해당하는 남쪽 국경이요, 서문은 나라의 자물쇠와 같다-이라는 글이 새겨져 있습니다.
진남대 동쪽에는 임진란에 참가하였다가 귀화한 명나라 장수 천만리(千萬里)의 후손이 세운 千將軍記念碑가 있고, 동쪽 비탈에는 부산에 자주 출몰하는 왜구를 물리친 공적을 기리기 위해 지역민이 비각을 세우고 제사를 지낼 수 있는 崔瑩장군 사당이 있습니다.
또 이곳에는 영가대(永嘉臺)가 있습니다. 영가대는 일본에 파견되었던 조선통신사와 관련이 깊은 곳으로, 1614년(광해군 6년) 경상도 순찰사 권반(權盼)이 부산진성 근처의 해안이 얕고 좁아 새로 선착장을 만들었는데, 이때 바다에서 퍼 올린 흙이 쌓여 작은 언덕이 생겨 이곳에 나무를 심고 만든 정자입니다. 1624년(인조 2년) 선위사 이민구가 일본 사절을 접대하기 위해 부산에 파견되었다가 이 정자를 보고 권반의 고향, 안동의 옛 이름인 영가를 따서 <영가대>라고 이름 지었다고 합니다.
이곳에서 조선통신사 일행이 안전 항해와 무사귀환을 비는 海神祭를 올렸고, 경치가 빼어나 시인묵객들은 많은 시를 남기기도 했습니다. 영가대가 원래 있었던 곳은 지금의 성남초등학교 서쪽이었는데, 1905년 경부선 개통으로 철거되어 그 흔적을 찾을 수 없게 되었고, 2003년 동구청에서 지금의 자리에 복원하였습니다.
자성대의 면적은 옛날에는 꽤 넓었으나 세월이 흐르면서 부두와 주거지와 도로로 되어 옛 모습을 찾을 길이 없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부산시 지방문화재 기념물 제7호로 지정되고, 공원으로 만들어 동구청에서 관리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