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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0 총선에서 10.26까지>
1948년 5. 10 총선
1948년 12월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정에 따라 1946년 3월 1차 회담과 47년 5월 2차 회담이 회담 참석 사회 단체에 대한 이견으로 모두 결렬되자 미국은 47년 9월 한국 문제를 유엔 총회 의제로 상정하고, 유엔총회는 11월 유엔감시하의 총선 실시, 유엔한국임시위원단 설치, 정부 수립 후 미소양군 철수안을 가결한다.
1948년 1월 유엔임시위원단(UNTCOK, 호주, 캐나다, 중국, 엘살바도르, 프랑스, 인도, 필리핀, 시리아 8개국, 우크라이나는 참여 거부) 35 명이 서울에 들어오고 소련은 입북을 거부한다.
위원단은 좌익인사들과는 접촉할 수 없었고 우익 인사들 중에서도 김구, 김규식 같은 단선 반대 세력이 많다는 것을 알았고, 당시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자유로운 선거가 실시될 수 있을지 걱정하면서 2월 9일 다수결로 유엔에서 결정을 내려달라고 요청했다. 2월 유엔소총회는 위원단이 활동을 계속할 것과 선거 실시가 가능한 지역에서의 선거를 감시할 것을 결정했다. 위원단은 논란 끝에 미군정이 제시한 5월 선거안을 찬성 4, 반대 2(호주, 캐나다), 기권 2로 가결한다.
미군정의 공식 집계조차 전체 남한 인구의 1/3에도 못미치는 숫자만이 투표에 참여했음을 밝혀주고 있다. (박세길 다시쓰는한국현대사 122쪽 - 출처 볼드윈 편 한국현대사102쪽으로 표시)
“미군정과 이승만계가 발표한 공식적 투표자 수는 남한 인구의 1/3, 한국 전체 인구의 1/4에 못 미치는 숫자로 집계되었다.”(볼드윈 편 한국현대사 102쪽)
남한 인구 1,919만명 중 784만 유권자 (40.9%) 투표율 95.5%
54년 3대 총선 2,018만명 중 유권자 845만명(41.9%) 투표율91.9% (16대 총선 70.6%)
북한 당국의 집계 발표에 의하면 북한에서는 총 유권자의 99.97%가 투표하였고, 반면에 남한에서는 총 유권자 1,745만 명 중 77.52% 가 비밀 선거에 참여한 것으로 밝혀졌다. 남한에서의 투표자 수는 5.10 단독선거의 그것보다 65만명이 더 많은 것으로 되어 있다. (박세길 131쪽)
총유권자 1,745만명(?)의 77.52% 1,352만 명이라면 5. 10 선거의 두 배 (?)
5. 10 총선 결과
남로당 등 좌익계 선거 거부, 중도 계열 근로인민당, 김구 한독당,, 김규식 민족자주연맹 불참 속에 이승만 독촉계 및 한민당 계 대거 당선
(무소속 85, 독촉 55, 한민당 29, 이청천 대동청년단 12 명 등 총 198명, 제주도 1년 후 2명 선출, 임기 2년)
이승만은 5월 31일 초대 제헌의회 의장으로 선출되었고 곧 헌법 제정에 착수, 30명으로 된 기초위원 (위원장 서상일)과 유진오 씨 등 6명의 전문위원을 선정하였다. 당시 전문위원단 초안은 바이마르 공화국을 모델로 한 내각책임제 헌법안이었으나 이승만이 강력히 반발하여 대통령제에 의원내각제를 절충한 묘한 헌법안이 7월 12일 국회에서 통과되었다.
7월 20일 재석의원 196명 중 180 명의 찬성으로 초대 대통령 이승만 당선, (김구 13표)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 (부통령 이시영, 국회의장 신익희, 대법원장 김병로, 국무총리 이범석)
친일파 처벌, 미군 철수, 토지 개혁 등을 강력히 요구하는 소장파의 리더였던 국회부의장 김약수를 비롯 국회의원 10여명이 1949년 5월 남로당 프락치 사건으로 구속되자 이승만과 협력 관계였던 한민당은 점차 야당으로 변신, 한독당원이던 신익희와 지청천을 포섭하고 대한국민당을 끌어들여 민주국민당을 창당한다.
한민당은 1952년 3월 내각제 개헌안을 제출하였으나 찬성 79표, 반대 33표, 기권 66표로 부결되고, 이승만 지지 의원들은 대한국민당을 결성한다. 5월 30일 2대 총선이 실시되는데 총 210석 중 이승만 계 55석, 민국당 계 25석으로 기존 정치 세력이 대패하고 무소속이 126명 당선된다. 평소 북진통일을 호언장담하던 이승만 정부는 ‘50년 6월 6. 25 전쟁이 발발하자 부랴부랴 대전으로 피신했고, 무능한 정부와 국민방위군 사건, 거창 양민 학살 사건 등에 분개한 이시영은 이승만을 비난하며 ’51년 5월 부통령을 사임하고 민국당 김성수가 부통령으로 선출된다. 이러한 국회 분위기에 놀란 이승만은 자유당을 창당하고 ‘52년 1월 직선제 개헌안을 제출했으나 찬성 19표, 반대 143표로 부결된다.
당황한 이승만은 ‘52년 4월 지방선거를 전격 실시하여 자유당과 그 추종 세력이 대승을 거두고 민국당은 참패하여 새로운 지지 세력을 창출하는데 성공한다. 민국당이 개헌선을 초과하는 124명의 연서를 받아 의원내각제 개헌안을 제출하자 정부도 직선제 개헌안을 제출하였다. 정국이 긴장하면서 부산에 계엄령이 선포되고 정체불명의 괴집단들이 국회의원들을 협박하는 벽보를 부착하고, 7개 도의회는 국회 해산을 결의하고, 국회의원 통근 버스가 헌병대로 연행되어 일부 의원들이 국제공산당 관련 혐의로 구속되는 등 공포분위기가 조성되자 김성수 부통령은 사임하고, 7월 4일 두 개헌안을 발췌한 직선제 개헌안이 기립 표결을 통해 찬성 163 표, 반대 0, 기권 37 표로 통과되어 전쟁 중인 ‘52년 8월 5일 실시된 2대 대선에서 이승만은 유권자 826만 명, 투표자 727만 표의 74.6%를 획득 당선된다.
1954년 5월 3대 총선에서 자유당은 114석을 얻어 과반수 의석에 성공하고 민국당은 15석으로 참패한다. 11월 자유당은 초대 대통령에 한해서 중임 제한 규정을 적용하지 않는다는 희한한 개헌안을 제출하였으나 개헌 요건인 재적 2/3 이상 (135.3333) 인 136표에서 1표 모자란 135표를 얻어 부결된다. 그러나 다음날 자유당은 사사오입을 이유로 개헌안이 가결되었다고 번복 선포한다.
이승만에 반대하는 야당은 민주당을 창당하고 조봉암을 비롯한 혁신계 영입을 두고 논란을 벌인 끝에 결국 ‘56년 5월 3대 대선에 민주당 신익희와 진보당 조봉암이 각기 출마하여 이승만과 대결한다. 그러나 유력한 야당 후보 신익희가 유세 도중 급서하고 결과는 이승만 500만표, 조봉암 210만표, 무효 180만표로 정권교체는 실패한다. 강력한 정적으로 등장한 조봉암은 ’58년 1월 간첩 협의로 체포되고 ‘59년 7월 사형당한다.
1960년 4대 대선에서 자유당은 유력한 야당 단독후보 조병옥의 사망으로 이승만의 당선은 확실하였으나 고령의 이승만(1875년생) 때문에 대통령 승계권자인 부통령에 자당 후보인 이기붕을 무리하게 당선시키기 위해 도를 넘어서는 부정선거를 감행했고 결국 4. 19 혁명으로 자유당 정권은 몰락한다.
4. 19 혁명
1960년 3월 대선을 앞두고 27일 자유당 유세 때는 전 교사를 유세장에 동원하기 위해 수업을 전폐하고, 야당의 선거 유세가 있던 2월 28일이 일요일임에도 학생들의 참여를 막기 위해 등교를 명령하자 경북고, 대구고 학생 1,800여명이 학원의 자유를 외치면서 가두 시위를 벌였다.
자유당 정권은 이기붕 부통령 당선을 위해 4할 사전 투표, 조별 공개 투표, 투표함 바꿔치기, 완장부대 동원 공포분위기 조성, 야당 참관인 축출 등 관권을 동원한 조직적인 부정 선거를 실시했다. 선거 당일 마산에서는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대규모 시위가 벌어지고, 진압 경찰의 발포로 수십 명의 사상자가 발생하는 참사가 일어난다. 경찰은 시위 배후에 불순분자의 책동이 있다고 발표하고 강변하였고, 정부는 이승만은 963만 표(85%), 이기붕은 834만 표(73%)를 얻어 당선되었다고 발표했다.
부정 선거에 대한 비판 여론이 비등해지는 가운데 4월 11일 마산상고생 김주열군의 참혹한 시신이 마산 앞바다에 떠오르면서 수만 명의 학생, 시민들에 의한 시위가 발생하였고 이날도 경찰 총격으로 두 명이 사망한다. 이후 시위는 고교생들을 중심으로 전국적으로 계속되고 4월 18일 고대생 시위가 정치 깡패들의 기습 공격을 당함으로써 4월 19일 서울 시내 대부분의 고교와 대학생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시위를 벌이게 되며 경찰의 무차별 발포로 100여명 희생되면서 수십만 명의 학생 시민이 참가하는 혁명적 상황으로 전환된다. 정부는 오후 5시 서울 등 대도시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하였으나 20일 이후에도 시위는 전국적으로 계속되고 4월 26일 이승만은 하야 성명을 발표한다.
4월 27일 국회는 대통령 사임서를 수리하고 외무장관 허정을 대통령 권한 대행으로 지명함으로써 과도 내각이 출범한다. 당시 국회의원 총수 223명 중 자유당 의원은 138명이었는데, 10여명이 부정 선거 연루 혐의로 구속된 가운데 6월 1일 105명이 자유당을 탈당하여 무소속으로 남았다. 6월 15일 국회는 민주당 의원들이 중심이 되어 제출한 내각제 개헌안을 208대 3으로 통과시켰고 새 헌법에 따라 7월 29일 5대 총선을 실시한다. 새 헌법은 양원제를 채택하여 민의원은 총 의석 233석 중 민주당이 41.7%의 득표로 175명을 당선시켜 의석의 75%를 차지했으며, 참의원은 58 석 중 39%의 득표로 31석을 차지하여 의석의 53%를 차지했다. 자유당은 민의원 4석, 참의원 4석을 얻는데 그침으로서 사실상 정당 활동의 종지부를 찍는다.
8월 12일 국회는 12명의 후보 중에서 윤보선을 79%의 득표로 4대 대통령으로 당선시켰다. 그러나 실권을 담당하는 총리에는 윤대통령이 지명한 구파의 영수격인 김도연은 과반수보다 3표가 적어 부결되고 신파 장면은 과반수보다 2표가 많아 당선된다. 장면이 내각 구성에서 구파를 소외시키자 구파 70명의 의원이 민주당을 탈당하여 신민당을 창당하게 되고, 신파 내에서도 노장파와 소장파가 대립하게 되어 장면 정부는 사실상 소수파 내각이 되어 집권 9개월 동안 세 차례나 전면적인 개각을 하게 되고 장관의 평균 임기가 2개월 밖에 되지 않는 약체 정부가 되고 만다.
4. 19 혁명 후 진보주의 운동
허정 과도정부 시기에 김달호(진보당), 서상일, 이동화(민주혁신당) 등이 중심이 되어 사회대중당(득표율 6%, 4석)이 창당되고, 노동운동가 전진한은 한국사회당(득표율 0.6%, 1석)을 창당하고 원로 정치가인 장건상, 김창숙 등은 혁신동지총연맹을 결성한다. 고정훈의 사회혁신당은 혁명 후 4대 국회가 개헌 작업을 하는 것 자체를 비난하며 민주당을 포함한 보수 정치인의 총사퇴를 주장하다가 7월 공산주의자로 구속된다.
이처럼 혁신계 정당은 우후죽순처럼 생겨나 결국 후보 난립과 유권자들의 보수 성향으로 5대 총선에서 참패한다. 총선 후에는 선거 참패의 책임을 둘러싸고 사회대중당이 분열하여 서상일, 이동화, 박기출, 윤길중, 고정훈 등이 모여 통일사회당이 창당된다.
혁신 정치 세력은 자주적인 한미 관계, 중립화 통일, 이대 악법 폐지 등을 주장하였으나 원내 세력이 미약하고 보수화된 국민 대중들의 지지를 받지 못하여 정치적 성과를 얻지는 못했으나 언론, 학원과 연대하여 장면 정부를 어느 정도 압박하는데는 성공했다.
자유당 정부 아래서 노동조합 운동은 어용화되고 관제화되어 대한노총은 권력의 시녀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혁명 후 620개에 불과했던 노동조직은 불과 5개원만에 820여개로 늘어난다. 주로 은행원이나 교원 등 사무직 노동조합의 결성이 두드러지는데 특히 대구 지역을 중심으로 시작된 교원노조는 장면 정부와 심각한 갈등을 유발하면서 한미경제협정 반대 시위 등 진보주의 정치 운동에 적극 참여함으로써 5. 16 후 큰 상처를 입게된다.
혁명 후 대학가에서는 남북통일운동, 신생활운동, 국민계몽운동, 국토개발운동 등 각양각색의 다양한 학생 운동이 봇물 터지듯 쏟아져 나온다. 그 중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바로 통일 운동이었다. 서울대학교 문리대의 신진회라는 독서모임을 중심으로 전국 대학에서 민족통일연맹이 조직되었다. 이들은 반외세 자주통일에 깊은 관심을 보였으며 혁명 후 대학생 특유의 혁명적 낭만주의와 연결되어 열정적 행동을 전개했다. 이들은 ‘60년 11월 발기대회 건의문에서 “기성세대는 분단의 비극을 가져 온 도의적 책임을 통감하며 민족 통일에 대한 새로운 세대의 정당한 발언을 억압하지 말 것, 정부는 조국 통일을 위한 적극적 외교를 펼칠 것, 모든 정당 사회단체는 패배의식을 불식하고 총선거에 대비하는 연합 기구를 만들 것”을 요구했다. 이들은 ’61년 5월 20일 판문점에서 남북 학생 회담 개최를 결정하고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라는 구호를 외쳤다. 당시 정부와 보수 진영은 북한의 공산 독재 정권이 무너지지 않는 한 남북 통일은 불가능하므로 우선 경제를 건설하고 후에 통일을 하자며 학생들의 통일 운동을 비판하였다.,
사회대중당, 한국사회당, 천도교, 유도회, 민주민족청년동맹, 4월학생혁명연합회 등은 연합하여 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를 1960년 9월 발족한다. 민자통은 1961년 2월 ‘자주, 평화, 민주’ 3대 원칙에 입각한 통일 운동을 표방하고 그 구체적인 실천 방안으로 “즉각적인 남북 협상, 민족통일 전국최고위원회 구성, 외세 배격, 남북 대표자 회담을 제시했다. 이중 일부 세력은 중립화 통일 방안을 강조하며 탈퇴해 중립화조국통일운동총연맹을 결성한다. 민자통과 ‘61년 2월 창간된 민족일보는 민통의 남북학생회담을 적극 지원했다.
※참고
☞사회대중당의 통일방안 (반외세의 통일논리 87-95쪽)
① 유엔과 제휴하고 민주주의의 승리를 확보할 수 있는 조건 하에서 국토의 평화적 통일을 기한다.
② 통일 계획에 있어 김일성 일당의 퇴진이 당연히 전제되어야 한다.
③ 공산주의자들의 기만적 통일방안과는 결코 타협하지 않을 것이다.
④ 국토 통일 문제에 있어서는 전민족적인 초당외교가 수행될 것을 희망한다.
민족자주연맹의 장건상은 중공을 유엔에 가입시켜 유엔을 명실상부한 세계기구로 만들고 중립적인 유엔의 감시 하에 남북총선거를 통해 통일해야 한다고 주장하여 민주당은 물론 같은 혁신계 사회대중당조차도 중공은 우리나라 침략자이며 유엔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고 있는데 ‘유엔 가입’ 운운은 시기상조라고 비판.
☞민주당 통일 방안
① 유엔 감시하 남북한을 통한 완전한 자유 선거로써 평화 통일을 도모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② 선거 감시단의 구성원은 유엔 결의로써 하되 각자 진정한 자유 선거를 실시하는 회원국가로 한다.
③ 선거 전 남북연합위원회 구성은 대한민국이 유일한 합법정부라는 유엔 결의와 배치되므로 반대한다.
④ 통일 전 남북 교류는 공산파괴공작이 진정하게 정지되리라는 보장이 없으므로 이를 반대한다.
⑤ 통일된 한국은 민주주의와 민권 자유를 보장하는 국가가 되어야 하며 적색 독재나 백색 독재를 반대.
☞북한의 남북협상 통일 방안 (1960년 8월 14일 제안)
① 어떠한 외국의 간섭도 없는 민주주의적 기반 위에서 자유로운 남북총선거를 실시할 것.
② 아직 남조선 당국이 자유로운 총선거를 받아들일 수 없다면 과도적 조치로써 남북 조선의 연방제를 제의한다. ( 남북 조선에 현존하는 정치 제도를 그대로 두고 양 정부의 독자적인 활동을 보장하는 동시에 양정부 대표로 구성되는 최고민족회의를 조직하여 주로 남북간의 경제 문화 발전을 통일적으로 조절한다)
③ 만일 상기 제안들을 남조선당국이 동의치 않는다면 남북조선실업계 대표로 구성되는 순전한 경제위원회라도 조직하자.
④ 남북 조선의 문화 사절 왕래와 과학, 문화, 예술, 체육 등 모든 분야에서의 교류를 다시 한 번 제의한다.
⑤ 남조선에서의 미군의 즉시 철퇴를 요구하며, 남북조선 군대를 각각 10만 또는 그 이하로 축소할 것을 제의한다.
⑥ 이상의 제 문제를 협의하기 위해 남북조선 대표들이 평양이나 서울 또는 판문점에서 합의할 것을 남조선 당국과 정당 사회단체 및 개인 인사에게 제의한다.
5.16 군사쿠테타
4월 혁명 후 ‘60년 5월 소장파 청년 장교들은 자유당 정권과 결탁한 부패한 군 고위 장성의 퇴진을 요구하는 정군 운동을 벌이다 김종필 등 육사 8기생 8명이 체포된다. 그러나 군이 동요할 것을 우려하여 육군참모총장 송요찬과 연합참모총장 백선엽이 사임하면서 이들은 석방된다. 육군에서 시작된 정군 운동은 해군, 공군, 해병대로 번져 나가며 많은 충돌이 일어난다. 9월 11명의 장교들은 국방장관에게 정군 단행을 건의하다가 하극상 혐의로 체포되고 이중 김종필, 김형욱 등은 ’61년 2월 자진 예편된다.
이들은 정규 육사 출신들로, 학력이 변변치 못하면서 군대 창설과 전쟁 등으로 고속 승진한 부패한 고위 장성들을 경멸하였고, 상대적으로 인사 적체가 심한 탓에 불만이 많았다. 특히 육사 8기생들은 수 백명으로 가장 많았고 수도권과 야전군 부대마다 참모로서 요직에 앉아 있었다. 더욱 장면 정부가 감군 정책을 검토하자 신분상 불안을 느낀 이들이 박정희와 공모해 5월 16일 불과 3,600 명의 병력을 동원하여 5. 16 군사쿠테타를 성공시킴으로써 30년 군부 독재의 발판을 마련하게 된다.
‘61년 들어 장면 정부는 점차 영향력을 확대해 나가는 혁신 세력을 누르기 위하여 3월 데모규제법 및 반공법 강화 방안을 발표했는데, 혁신계 정당들과 민족일보, 민자통, 대학생들은 이대 악법 분쇄 투쟁을 강력히 전개했고 이에 맞서 우익단체들은 용공규탄 궐기 대회를 갖는 등 해방 직후와 같은 좌우대립 양상을 보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군부 소장파 장교들은 거의 공공연히 동조자를 규합하면서 쿠테타 모의를 갖게 된다. 그러나 장도영 총장은 이미 박정희와 연계하여 기회주의적 처신을 하고 있었고 군 내부 사정에 어두운 장면 정부는 장도영만 철썩 같이 믿고 쿠테타 음모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다가 몰락을 자초하게 된다.
군사혁명위원회는 6 개항의 공약을 내걸었다.
① 반공을 국시의 제1의로 삼고 지금까지 형식적이고 구호에만 그친 반공체제를 재정비 강화한다.
② 유엔 헌장을 준수하고 국제협약을 충실히 이행할 것이며 미국을 비롯한 자주 우방과의 유대를 더욱 공고히 한다.
③ 이나라 사회의 모든 부패와 구악을 일소하고 퇴폐한 국민 도의와 민족 정기를 바로 잡기 위하여 청신한 기풍을 진작한다.
④ 절망과 기아선상에 허덕이는 민생고를 시급히 해결하고 국가자주경제 재건에 총력을 경주한다.
⑤ 민족적 염원인 조국 통일 위하여 공산도비와 대결할 수 있는 실력 배양에 전력을 집중한다.
⑥ 이와같은 우리의 과업이 성취되면 참신하고도 양심적인 정치인에게 언제든지 정권을 이야하고 우리는 본연의 임무에 복귀할 준비를 갖춘다.
쿠테타 발발 후 12시간이나 태도 표명을 보류하고 있던 장도영은 오후 4시 군사혁명위원회 의장직을 수락한다. 당시 1군 사령관 이한림은 만주군관학교 동기생 박정희를 극도로 불신하였고 따라서 휘하에 있는 20개 전투 사단 중 1개 사단만 동원해도 쿠테타 군을 진압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그러나 그는 1군 사령부 내에도 침투한 쿠테타 동조 세력에 당황하며 상부의 지침을 기다리느라 머뭇거렸고 결국 5월 19일 쿠테타 군에 의해 체포된다. 총성을 듣고 도피한 장면 총리는 수녀원에 피신한 채 쿠테타 진압을 위한 적극적인 노력을 하지 않았고, 정치적 영향력을 상실한 채 장면 총리에 내심 분개하던 윤보선 대통령은 당시 유엔군 총사령관 매그루더의 진압 요청을 내전은 절대로 안된다는 논리로 반대한다.
이 때 미국의 역할은 지금도 논란거리다. 미국도 쿠테타에 관한 정보는 알고 있었다 한다. 쿠테타 당일 11시 미대사관과 미군은 쿠테타를 비난하는 성명을 발표하고 미군 1개 기갑 대대와 한국 야전군 일부 병력을 동원한 진압 계획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국군통수권자인 장면 총리의 행방이 묘연했고 윤보선 대통령은 진압군 동원을 거부했다. 미국 정부에서도 은연중 반미적 색채가 짙은 혁신계의 영향력 확대와 무능한 장면 정부에 불안해하던 중 반공을 혁명공약 1항에 내세운 쿠테타 세력을 부정적인 시각으로만 본 것은 아닌 듯하다. 여기서 미국과의 사전 교감설이 제기되지만 진실은 알 수 없다.
※참고 :
<20세기 후반 아시아 나라들의 젊은 층과 지식인들은 지금까지는 그냥 아시아적인 병폐로 넘어갔던 독직, 부패, 권력자의 친인척 발호를 묵인하지 않을 것이다. 현 정권에 실망한 이들은 공산주의의 독재성과 인명경시 풍조까지도 애써 무시하면서 공산주의자들의 엄격성과 집념을 높게 평가하고 그들의 유혹에 빠질 위험성이 있다. 한국정부는 언론의 비판에 너무 너무 신경을 쓰고 있다. 정부는 젊은 층에게 희망을 줄 만한 생활수준 향상부문에서의 가시적인 성과를 보여주어야 한다. 만약 근시안적인 세력이 집권하고 이들이 다시 쫓겨나고 하는 혼란이 일어난다면 통일을 외치는 목소리가 높아져 한국을 공산주의자들의 함정에 빠뜨릴 가능성도 있다.>.
- 미국무성 보고서 - 내무덤에침을뱉어라
1961년 5월15일 밤. 민통 대변인이었던 광주 출신 정치과 이영일(李榮一)은 낙산 밑에 있던 나의 하숙방에서 나와 함께 자고 있었다. 새벽에 총소리가 연발하는 것을 듣고 이영일(李榮一)은 확신에 차서 말했다. "우리 편이다. 군부 안에 있는 우리 편이 쿠데타를 일으킨 것이다."
- 김지하회고록
국가재건최고회의
5월 18일 은신처에서 나타난 장면 총리는 국무회의를 소집 비상계엄을 추인하고 총사퇴했으며, 군사혁명위원회는 국가재건최고회의로 탈바꿈하여 실질적으로 정권을 장악하는데 성공한다.
이들은 15개 정당과 238개 사회단체의 해산 명령을 내리고 영세한 신문 잡지들을 모두 폐간시키는 포고령을 발표한다. 그리고 5월 22일에는 좌익혐의자 2,100명을 체포하고 4,200명의 깡패를 체포했다는 발표를 한다. 부정축재자가 구속되고 부패 공무원이 숙청되고 농어촌의 고리대 부채 폐기 선언 등 단호한 조치에 일반 국민들의 반응은 비교적 호의적이었다.
8월 12일 1963년 여름까지 정권을 민간인에게 이양하겠다고 약속한 박정희는 수천 명의 정치범 석방을 지시하고 11월에는 미국을 방문 케네디와 회담을 갖는다. 이러한 와중에 중앙정보부가 창설되고 민주공화당이 창당되면서 민정 이양 후에도 정권을 장악할 준비는 착실하게 해 나간다. (황태성사건)
1962년 3월 민주당 구파 인사들도 대거 정치정화법에 따라 정치활동이 금지된 사실을 안 윤보선 대통령은 하야 성명을 발표한다. 12월 27일에는 대통령제 개헌안 국민투표가 실시되어 86% 투표에 79%의 찬성으로 통과되었다. 그러나 이 와중에 쿠테타의 주체 세력이었던 김종필 등 8기 세력과 계급으로는 그들의 상관이었던 김동하, 김재준 등이 반목하면서 4대 의혹 사건이 터져나온다. 이들의 반목은 급기야 군을 동원한 실력대결 양상까지 보이자 박정희는 63년 2월 장충체육관에서 내외신 기자들을 모아놓고 민정불참 선서식을 갖게된다. 결국 김종필은 자의반타의반 중정부장에서 밀려나 외유를 떠나고 내부 분란을 수습한 박정희는 군복을 벗고 본격적으로 정치 일선에 뛰어든다.
1963년 10월 5대 대선에서 박정희는 470만표(46.6%)를 얻어 455만표(45.1%)를 얻은 윤보선을 가까스레 제치고 당선된다. 11월 6대 총선에서는 야당이 11개나 난립하면서 극심한 분열 탓에 공화당은 총의석 175석 중 33.5%의 득표로 110석(62.8%)을 얻어 41석의 민정당(20.1%), 13석의 민주당(13.6%)을 제치고 압승을 거둔다.
※참고 5대 대선의 사상논쟁
박정희는 이 연설에서 '민족의식이 없는 사람들에게 자유민주주의는 항상 잘못 해석되고 또 잘 소화되지 않는 법이다'고 했다. 그는 또 '사회질서를 요구하는 것은 탄압이다, 교통신호를 지키게 강요하는 것은 독재다, 외국 대사관 앞에서 데모하는 것은 자유다, 하는 이런 사고방식은 모두 자유민주주의를 잘못 이해하는 것이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번 선거를 '사상과 사상을 달리하는 세대의 대결이다.
즉, 민족적 이념을 망각한 가식의 자유민주주의 사상과 강력 한 민족적 이념을 바탕으로 한 자유민주주의 사상과의 대결이다' 라고 선언했다.
윤보선은 이렇게 말했다. "내가 할 말을 박후보가 방송을 통해서 했는데 국민이 현명하게 판단할 것입니다. 우리는 가식적, 이질적 민주주의와 대결하고 있습니다. 나는 오히려 박의장의 민주사상을 의심해마지 않습니다. 박의장의 '국가와 혁명과 나'라는 저서를 보면 '서구의 민주주의가 대한민국에 맞지 않는다'라고 말했는데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이 책을 보면 이집트의 낫세르를 찬양하고 히틀러도 쓸만한 사람이라고 했는데 과연 이 사람이 민주주의를 신봉하는 사람인가 의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나는 어제 여수에 서 유세를 하면서 느낀 바가 있는데 여순반란사건의 관련자가 정 부 안에 있다는 것을 상기해야 합니다. 여순반란사건은 민주주의 와 민족주의를 신봉하는 사람이 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민주공화당은 공산당 돈을 가지고 공산당 간첩이 와서 공산당식으로 조직한 정당이다. 북괴무역 부상 황태성이 20만 달러를 가지고 왔는데 김종필씨가 그를 조선호텔에 모셔다가 서울에 밀봉교육 장소를 다섯 군데나 만들어놓고 공산당 식으로 점조직을 했다.".
박정희는 "싸우다 힘이 부족하면 빨갱이라는 모략을 하는 것이 바로 야당이다. 과거 한민당이 이 따위 수법을 썼는데 오늘에 와서도 야당은 똑 같은 숫법을 쓰고 있다. 과거와 양상이 다르다면 과거는 여당이 야당 을 잡았는데 지금은 야당이 여당을 잡으려 하고 있다.".
"나는 전방 사단장도 하고 야전군 참모장도 했다. 내가 빨갱이였다 면 사단을 끌고 북으로 넘어갈 수도 있었다. 그런 위험한 사람이 혁명 을 일으켰는데 윤후보는 왜 대통령직에 앉아 있으면서 우리를 비호했나.".
한일회담
박대통령 첫 임기 4년 중 가장 큰 정치적 위기는 한일회담이었다. 한일회담의 주역은 ‘63년 10월 외유에서 돌아 와 공화당의장을 맡은 김종필이었다. 그러나 민심은 굴욕적인 대일 외교에 반발했고, 군정 기간 중 이미 한일간 비밀교섭을 진행해 온 김종필이 제2의 이완용이라 불러도 개의치 않겠다고 공언함으로써 사태를 더욱 악화시켰다. ‘64년 3월 김종필이 5월 경 한일회담이 타결될 것이라 발표하자 다음 날 전국 주요 도시에서 8만명의 학생들이 대규모 시위를 벌고 이후 연인원 350만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항의 시위에 참여함으로써 한일회담 반대 운동은 ’46년 반탁 운동 이후 최대의 대중 운동으로 성장한다.
‘64년 6월 3일 15,000명의 학생들이 박 대통령의 하야 구호까지 터져나오자 정부는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김종필은 또 다시 당의장직을 사임하고 외유 길에 나섰다. ’65년 6월이 되자 다시 주요 도시에서는 반대 시위가 벌어졌고, 사분오열되었던 야당들도 민중당이란 단일 야당으로 통합되었다. 6월 21일 13개 대학과 58개 고등학교에 휴교령이 내려지고 6월 22일 ‘무상 공여 3억달러, 유상 공여 2억 달러, 무역 차관 1억 달러’ 선으로 대일 재산 청구권 문제를 종결짓는 한일협정이 정식 조인되고 야당 의원들의 강력한 회의 진행 봉쇄를 뚫고 8월 11일 밤 공화당 단독으로 1분만에 비준안은 통과되었다. 8월 18일에는 월남 파병 동의안이 공화당 단독으로 통과되었다.
‘67년 5월 6대 대선을 앞두고 윤보선의 신한당과 유진오의 민중당의 대립은 유진오의 사퇴로 신민당으로 통합되고 윤보선은 또 한번 박정희와 맞대결한다. 그러나 결과는 570만표를 얻은 박정희(51.5%)가 453만표를 얻은 윤보선(40.9%)을 누르고 5대보다 큰 표 차이로 재선에 성공했다. 이어 실시된 7대 총선에서는 공화당이 50.6%의 득표로 129석을 얻어 32.7%의 득표로 45석에 그친 신민당에 압승을 거둔다. 이처럼 박정희 정권이 승리할 수 있었던 힘은 ’63년부터 실시한 경제 개발의 성과가 나타나기 시작하고 지식인들조차 경제성장을 위해 개인의 자유는 희생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특기할만한 점은 ‘63년 선거에서 박정희는 남쪽에서 이기고 북쪽에서 졌지만 이번에는 동쪽에서 이기고 서쪽에서 졌다는 점이다.
삼선개헌
1969년 1월 공화당은 삼선 개헌을 검토한다고 발표한다. 야당인 신민당은 즉각 개헌에 반대한다고 선언하고 범국민투쟁위원회를 결성한다. 개헌안 통과에는 175석의 2/3인 117표가 필요하여 공화당은 7대 총선에서 부정 선거 비판을 잠재우기 위해 당에서 제명했던 의원들과 문교부 장관 불신임 항명 파동으로 제명된 의원들은 물론이고 신민당에서 3명의 의원을 회유하여 122명의 의원을 확보하였으나 야당의 본회의장 점거 농성이라는 강력한 저항에 부딪혀 9월 14일 새벽 2시 지지의원들만 국회 별관에서 비밀리에 모인 가운데 만장일치로 통과시킨다.
신민당은 본회의장이 아니고, 심야 회의였으며, 야당 의원에게는 사전 통고도 없었다는 점을 들어 무효라고 주장했으나 정부는 10월 17일 국민투표를 실시한다. 야당의 결사적인 반대 운동에도 불구하고 유권자 1,500만명 중 77.1%인 1,160만명이 투표하여 유효투표 1,119만표 중 755만표(67.5%)의 찬성으로 확정된다.
‘70년 9월 7대 대선을 앞두고 야당인 신민당에서는 전당대회를 개최, 40대 세 후보들이 격돌하여 극적으로 김대중 후보를 선출하였다. 1차 투표에서는 유진산 총재의 지원을 받은 김영삼이 421표를 얻어 385표의 김대중을 눌렀으나 과반수 득표를 하지 못해 2차 투표를 한 결과 1차 투표에서 탈락한 이철승 계가 김대중을 지원하여 458표를 얻은 김대중이 410표에 그친 김영삼을 누른 것이다.
‘70년 11월 전태일 분신 자살 사건이 발생, 그동안 민주화 투쟁에만 골몰하던 학생 운동과 재야 운동은 큰 충격을 받게된다. 이를 계기로 학생 운동은 노학 연대 투쟁의 길을 모색하게 된다. 전태일은 동료 재단사들과 ① 16시간 노동을 9시간으로 단축할 것 ② 야간 근무 수당을 지급할 것 ③ 작업 환경을 즉각 개선하고 매년 건강 진단을 실시할 것을 업주 대표들에게 호소하고 농성을 하였으나 경찰의 제지로 실패하자 분신 자살을 감행했다.
1971년 4월 7대 대선을 앞두고 대학, 재야, 언론의 저항 운동은 격렬했다. 동아일보의 젊은 기자 30여명은 4월 15일 “기관원의 상주나 출입은 허용될 수 없다.”는 내용의 언론자유수호선언을 발표했고 이 선언은 전국의 언론사로 파급되었다. 4월 19일에는 학계, 언론계, 법조계, 종교계, 언론계, 문학계 각계 인사들이 참여한 가운데 민주수호선언을 채택하고 민주수호국민협의회를 결성했다. 김대중은 박정권은 종신 총통제를 획책하고 있다고 비판했으며 박정희는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호소했다. 김대중 후보의 유세장에는 청중들이 문자 그대로 인산인해를 이루었고 그의 인기는 전국적으로 폭발적이었다. 그러나 결과는 박정희 후보가 634만표(53.2%)를 얻어 540만표(45.3%)를 얻은 김대중 후보를 누르고 승리한다. 5월 대학가에서는 부종 선거를 규탄하는 시위가 연일 계속되었다.
8대 총선에서는 대통령 선거에서의 부정 선거 비판을 의식해서인지 비교적 부정이 덜한 선거가 이루어져 공화당은 48.8%의 득표로 113석을 신민당은 44.4%의 득표로 89석을 획득했다. 7월에는 헌정 사상 최초의 사법파동이 일어났고, 8월에는 서울에서 밀려난 광주대단지 빈민 3만여 명이 실업자 구제, 세금 감면 등을 요구하며 대규모 집회를 열고 출장소와 파출소를 습격하여 불을 지르는 소요 사태가 발생했다. 10월에는 서울 일원에 위수령이 선포되고 무장 군인이 수업 중인 대학생 1,889명을 연행하고 8개 대학에 무기휴업령을 내리더니, 12월 6일에는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했다. 12월 21일에는 대통령에게 비상대권을 부여하는 국가보위에관한특별조치법을 야당이 단상을 점거하자 국회 제3별관에서 변칙 통과시켰다.
10월 유신
1972년 2월 미국의 닉슨 대통령이 전격적으로 중국을 방문 세상을 놀라게 하더니 7월 4일에는 느닷없이 7. 4 남북공동성명이 서울과 평양에서 동시에 발표되었다. 정부는 ‘북괴’라는 호칭을 ‘북한’으로 고치고 김일성에 대한 중상비방을 삼가라고 관계 기관에 시달했다. 8월 3일에는 사채동결에 관한 긴급재정명령이 발표되었다. 남북적십자회담과 남북조절위원회가 서울과 평양에서 번갈아 열리면서 국민들이 남북 통일의 기대감에 부풀어 있던 10월 17일 오후 7시 정부는 전국에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헌법 기능 일부 정지, 국회 해산, 정치 활동 중지라는 10월 유신을 발표하였다. 이는 지난 대선에서 총통제 소문이 사실임을 입증하는 장기 집권을 위한 친위쿠테타였다.
헌법을 무시하며 국회를 해산한 가운데 비상국무회의는 헌법개정안을 의결하고, 개헌안에 대한 찬반 토론이나 일체의 정치 집회가 금지되는 공포분위기 속에서 실시된 국민투표에서 개헌안 투표율 91.9%, 찬성률 91.5%로 통과되었다. 국민투표는 실로 형식적법치주의를 위한 요식절차에 불과한 셈이었다.
유신헌법은 대통령에게 모든 권력이 집중되는, 말 그대로 독재정치를 합리화하는 헌법 아닌 헌법이었다. 국력 낭비를 이유로 임기는 4년에서 6년으로 늘어나고 국론 분열을 빌미로 직선제는 간선제로 전환되었다. 국회의원 재적 1/3은 사실상 대통령 임명제였다. 새 헌법에 따른 통일주체국민회의가 선출되고 대의원 2,359명은 시도별로 경찰의 호위 속에 서울로 와 외부와 차단된 가운데 지정된 숙박시설에서 머물다가 장충체육관에 모여 단독 후보에 대한 찬반투표에서 찬성 2,357표, 반대 0표, 무효 2표로 박정희를 8대 대통령으로 선출하였다. ‘73년 2월 9대 총선에서는 중선거구제가 채택되어 공화당이 38.7%의 득표로 73개 선거구에서 73명 전원 당선되었고 신민당은 32.6%의 득표로 52석을 얻는데 그쳤다. 공화당은 유정회와 함께 재적 2/3를 차지함으로서 국회는 사실상 행정부 견제의 기능을 상실하고 실질적인 일당 독재가 시작되었다.
긴급조치 시대
‘73년 4월 서울 남산 야외음악당에서 10만 명이 모여 부활절 연합 예배를 하고 내려오는 길목에서 몇 명의 청년들이 ’민주주의의 부활은 대중의 해방이다. 주여! 어리석은 왕을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적힌 수백 장의 유인물을 나누어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으로 목사를 포함 15명이 검거된다. 10월 2일 강력한 탄압에 숨죽이고 있던 대학가 최초로 서울 문리대에서 유신반대 시위가 시작되어 몇몇 대학으로 번져나갔다. 12월에는 장준하, 백기완씨가 중심이 된 백만인 개헌청원 서명 운동이 시작되었다. 박대통령은 국민의 절대적 지지를 받는 유신체제에 대한 도전은 용납할 수 없다는 담화문을 발표했지만 개헌 청원 운동은 뜨겁게 달아오른다.
‘74년 1월 7일 문인 61명이 개헌지지 성명을 냈고, 공화당 초대 당의장 정구영과 전 사무총장 예춘호가 공화당을 탈당하면서 집권 세력을 당황하게 했다. 다음날 긴급조치 1호와 2호가 발표되었다.
긴급조치 1호
1. 대한민국헌법을 부정, 반대, 왜곡 또는 비방하는 일체의 행위를 금한다.
2. 대한민국헌법의 개정 또는 폐지를 주장, 발의, 제안 또는 청원하는 일체의 행위를 금한다.
3. 유언비어를 날조, 유포하는 일체의 행위를 금한다.
4. 전 1,2,3호에서 금한 행위를 권유, 선동, 선전하거나 방송, 보도, 출판, 기타의 방법으로 이를 타인에게 알리는 일체의 언동을 금한다.
5. 이 조치에 위반한 자와 이 조치를 비방한 자는 법관의 영장 없이 체포, 구속, 압수, 수색하며 15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 이 경우에는 15년 이하의 자격정지를 병과할 수 있다.
6. 이 조치에 위반한 자와 이 조치를 비방한 자는 비상군법회의에서 심판 처단한다.
7. 이 조치는 1974년 1월 8일 17시부터 시행한다.
이 조치로 비상군재에서 재판을 받은 사람은 장준하, 백기관 등 23명이었다.
1월 14일에는 국민생활안정을 위한 대통령 긴급조치 3호를 발표하지만 이 조치는 경기침체로 인한 서민 대중의 경제적 불만을 무마하고 긴급조치에 대한 이미지를 쇄신하기 위한 정치적 술책에 불과했다.
4월 3일에는 긴급조치 4호가 발표된다. ‘전국민주청년학생연맹’의 관련자 처벌에 주안점을 둔 이 조치는 그밖에도 정당한 이유 없는 학생의 결석이나 시험 거부 또는 집단적 행동에 대해서까지 징역 5년 이상 최고 사형에 처할 수 있도록 규정하였다. 또 이 조치 위반자가 소속된 학교의 폐교 처분을 내릴 수 있는 권한을 문교부 장관에게 부여했다. 5월 27일 중앙정보부는 1,204명이 조사를 받고, 745명이 훈방되고 253명이 비상군법회의에 회부되었으며 배후 조직은 인민혁명당으로 밝혀졌다고 발표했다.
이 사건으로 일본인 두 명이 구속된 관계로 김대중 납치 사건 이후 냉랭해진 한일 관계는 더욱 악화된다.
10월에는 동아일보를 시작으로 언론사들의 자유언론실천운동이 벌어지고 12월 26일에는 백지광고 탄압이 시작된다. 12월 29일에는 홍종인씨의 ‘언론의 자유와 기업의 자유’에 관한 4단 전면 광고를 시작으로 격려광고가 시작되며 각계각층의 뜨거운 지지를 받았으나, 강경한 정부의 탄압에 굴복한 사측은 ‘75년 3월 8일 경영난을 이유로 부서를 폐지하고 18명을 전격 해임한다. 이에 항의하여 송건호 편집국장은 사표를 제출했고 기자와 아나운서들은 3월 11일부터 제작 거부에 들어가고 농성에 들어가자 3월 17일 사측은 경찰의 지원 아래 보급소 직원과 가판원 200명을 동원하여 농성 중인 기자들을 끌어내고 130여명의 기자, 프로듀서, 아나운서들을 해고한다. 조선일보에서도 12명의 기자들을 해고한다.
한편 2월 12일에는 국내외의 강력한 비판을 피하기 위해 정부는 유신 헌법에 대한 찬반 투표와 신임 여부를 묻는 국민투표를 실시한다. 결과는 1,679만 명의 유권자 중 79.8%인 1,340만 명이 투표하고 유효투표 1,317만 표 중 74.4%인 980만 명이 찬성하는 결과가 나온다. 당시 민주화 진영은 공포정치 아래서의 국민투표는 국민의 의지를 강제하는 독재의 수단이지 진정한 선택의 자유를 허용하는 민주 행동이 아니라며 거부한다.
4월 8일에는 고대생 시위 직후 긴급조치 7호를 발동하여 고려대에 휴업령이 선포되고 군대를 진주시켰다. 11일에는 성토 대회 도중 서울대 농대 김상진군이 양심선언을 한 후 할복 자살을 결행하고, 재야와 학생운동은 더욱 거세게 유신 독재 타도 운동을 전개했다. 다급해진 박정권은 5월 13일 긴급조치 9호를 선포한다. 그 내용의 일부만 보면
1. 다음 각호의 행위를 금한다.
가. 유언비어를 날조, 유포하거나 사실을 왜곡하여 전파하는 행위
나. 집회 시위 또는 신문 방송 통신 등 공공전파수단이나 문서 도서 음반 등 표현물에 의하여 대한민국 헌법을 부정 반대 왜곡 또는 비방하거나 그 개정 또는 페지를 주장 청원 선동 또는 선전하는 행위
다. 학교 당국의 지도 감독 하에 행하는 수업 연구 또는 학교장의 사전 허가를 받았거나 기타 의레적 비정치적 활동을 제외한 학생의 집회 시위 또는 정치 관여 행위
라 이 조치를 공연히 비방하는 행위
이러한 강압 조치에도 불구하고 학생, 노동자, 종교인, 문화예술인들의 끈질긴 저항은 계속된다.
10. 26 사건
1976년 11월 인권 외교를 강조하는 미국 카터 대통령의 당선으로 한미관계는 악화되기 시작한다. 박동선 게이트 사건이 터지면서 청와대 도청설, 미의회 의원들에 대한 로비설 등이 미국 언론을 장식한다. 미국은 주한미군 철수로 박정권을 길들이려 하고 박정희는 자주국방을 내세우며 독자적인 무기 개발에 나선다.
1978년 7월 박정희는 체육관 선거에 단독 입후보하여 2,378명의 대의원 중 2,377표의 찬성으로 9대 대통령에 다섯 번째로 당선된다. 물론 반대표는 없고 무효 표는 한 표였다. 이어 12월에 실시된 10대 총선에서는 사상 처음으로 신민당이 32.8%의 득표로 공화당의 31.7% 보다 1.1%를 더 얻는데 성공한다.
1979년 신민당 전당대회에서 민추협이 미는 김영삼이 총재에 당선되면서 선명 야당 노선을 내걸며 박정권에 정면 도전한다. 6월에는 카터가 방한했지만 한미간에 갈등 관계는 더욱 심화되고 10월 4일 마침내 공화당은 다수의 힘으로 국회에서 야당 총재를 제명 처리한다. 이에 자극 받은 부산에서 10월 18일 학생 시위에 시민들이 합세하면서 대규모 시위로 발전하고 정부는 부산 지역에 계엄령을 선포한다.
시위가 경남 일원으로 번지면서 20일에는 마산과 창원에 위수령이 발동되고 정국은 급박하게 돌아간다. 이 상황에서 강경책을 주장하는 차지철 경호실장과 온건책을 주장하는 김재규 중앙정보부장 간에 권력다툼이 발생하고 10월 26일 중앙정보부 궁정동 비밀 안전가옥에서 벌어진 소연회장에서 김재규는 부하들을 동원 청와대 경호원들을 사살하고 본인이 직접 박정희와 차지철을 사살함으로 18년 박정희 군부 독재는 막을 내린다.
10. 26 사건의 배후에 미국이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들도 있으나 정확한 사실 관계는 알 수 없다. 다만 김재규의 거사를 우발적인 사건이라고 보기에는 정승화 참모총장의 사건 현장 등장이 뭔가 찜찜하고, 나름대로 계획이 있었다면 그렇게 허망하게 체포되었다는 게 의심스럽다. 일부에서는 이용만 당한 거 아니냐는 분석도 있으나 글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