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하드웨어 아니면 소프트웨어다. 물질 아니면 성질이다. 강체 아니면 유체다. 육체 아니면 정신이다. 생산력 아니면 동원력이다. 자본이 생산력이라면 지식은 동원력이다. 둘을 합치면 상호작용의 총량증대다. 그것이 진보다.
필요한 것은 밸런스다. 지식인은 국민의 잠재력을 최대한 동원하는데 기여한다. 그러려면 평등이 필요하다. 차별하면 국민을 동원하지 못한다. 동원하지 못하면 전쟁에 진다. 그런데도 차별하는 이유는? 고립된 지역은 침략받을 위험이 없기 때문이다. 전쟁에만 지는게 아니다. 문화경쟁으로도 지고 산업경쟁으로도 진다. 과거의 미국과 남아공이 흑인을 차별한 이유는 지리적으로 격리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한국도 인류 문명의 중심과 거리가 멀다.
섬이나 시골에서 텃세와 차별이 일어나는 일은 흔하다. 어느 나라든 그러하다. 상대가 맞대응을 할 수 없다고 확신하는 순간 인간은 공격적으로 변한다. 난폭해진다. 말리는 사람이 나타날때까지 폭주한다. 상대를 자극하는 방법으로 자신에게 허용된 한계를 알아내려고 한다. 군주가 폭군이 되는 이유다.
인간은 집단에 의지하는 동물이다. 부모가 필요하다. 제왕은 스트레스를 대신 떠맡아주는 부모가 없다. 부모의 존재를 발견할때까지 폭주한다. 연산군을 면전에서 조롱하고 모욕하는 사람은 장녹수 외에 없었고 윤석열을 면전에서 조롱하고 모욕하는 사람은 김건희 외에 없다. 자신을 제압하고 지배하는 대상을 발견할때까지 인간은 폭주한다.
지식인은 지식에 제압되어 있고 종교인은 신에 제압되어 있다. 그들은 집단이 진보하는 기세의 관성력에 의지한다. 집단의 에너지 흐름에 편승한다. 다 함께 큰 무리를 이루고 대오를 갖추고 당당하게 나아간다. 그 흐름 속에서 편안해진다.
군주는 자객이 어딘가에 숨어 있다는 망상에 빠진다. 누군가 나를 해치려고 주술을 걸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의지할 대상이 없는 것이다. 보수는 돈의 힘에 의지하고 폭력에 의지하지만 그것은 의지할만하지 않다. 인간의 본능은 집단의 중심을 가리키고 있기 때문이다. 태극기 할배들 눈에는 다 간첩으로 보인다.
아기는 엄마 품에서 편안하다. 그들은 편안하지 않다. 심리적으로 의지할 대상이 없으면 그렇게 된다. 자신을 불안하게 하는 보이지 않는 힘의 근원을 찾아서 끝없이 폭력을 행사한다.
한국의 진보는 반미와 친북에 매몰된 민족주의 세력과 국힘당과 결탁하고 노무현을 혐오하고 민중을 계몽의 대상으로 생각하는 엘리트 세력으로 양분되어 있다. 합리적인 판단을 하는 사람 한 명을 나는 본 적이 없다.
민족주의는 시대에 뒤떨어진 것이다. 누구나 알고 있다. 그러나 민중을 동원하려면 그렇게 하는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반쯤 사이비종교가 되어 있다. 그들은 진보당이다. 하긴 사회가 계급으로 쪼개지는 것을 막아주는 것이 종교의 순기능이다.
때로 지식이야말로 차별의 무기가 된다. 진보를 표방하지만 사실은 인맥질을 위한 학벌동맹이다. 그들이 정의당이다. 그들은 대중을 계몽의 대상으로 생각하고 대상화 하고 타자화 하고 소외시킨다. 대중을 동원하는 김어준과 노무현을 미워한다. 그들은 성소수자 문제와 페미니즘을 구실로 표현의 자유를 억압한다. 그들이 국힘당과 적대적 공생관계를 유지하며 뒤로 일베를 양성한다.
그들 역시 불안해 한다. 믿고 의지할 대상이 없기 때문이다. 대중의 자발적인 창의력과 결집된 대중의 치고나가는 기세의 힘이야말로 우리가 믿고 의지해야할 궁극적 진실이다. 우리는 동원력과 생산력의 혁신에 의지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