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는 과거 소련의 영광을 잊지 못하고 옛 소련의 영역은 자신들의 영역으로 남아야 한다고 생각했었는데, 옛 바르샤바 조약기구의 회원국들이 NATO에 가입한 것은 물론 소비에트 연방의 구성국이었던 나라들도 NATO에 가입하기에 이르자 국경에 붙은 나라들에 대한 공격적인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다.
유로마이단 이전에 동맹국으로 우대하던 우크라이나가 정권 교체 이후 친서방으로 돌아서자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에 대한 태도를 적대적으로 바꾸었고, 결국 이는 2014년 러시아의 크림반도 합병과 돈바스 전쟁으로 이어졌다. 이러한 분쟁에서 우크라이나가 친러 반군들을 소탕하지 못하고 지리멸절하자 러시아는 우크라이나를 손쉽게 차지할 수 있을 것이라 오판했고, 결국 2022년 2월 24일 현지 시각 5시 50분경, 러시아의 포병대와 미사일 부대가 전면적인 포격을 시작하면서 전쟁이 시작되었다.
미국과 반미 세력 간의 신냉전에서 중요한 사건 중의 하나로 러우 전쟁 혹은 우러 전쟁, 우크라이나 전쟁 등으로 부르기도 한다.
실제로 러시아인들과 우크라이나인 모두 자신들의 민족적 근간을 키예프 루스로 생각한다. 하지만 몽골 제국의 침략으로 이들의 운명이 나뉘게 되었고, 훗날 모스크바 대공국이 우크라이나 지역을 재정복하고 루스 차르국으로 다시 하나가 될 때까지 수백 년 동안 나뉘게 되었다.
러시아인들과 우크라이나인들이 다시 하나가 된 것이 16세기 경이었으나 러시아인들은 자신들이 외세로부터 재수복한 지역의 루스족 동포를 2등 국민 취급했다. 우크라이나인들은 러시아인들의 차별 때문에 같은 뿌리를 지니고 있었음에도 자신들만의 정체성을 잃지 않고 유지할 수 있었다.
우크라이나인들과 루스인들은 범슬라브 민족과 루스 문화권이라는 같은 틀 안에 있었기 때문에 극단적인 갈등이 생기지는 않았다. 그러다가 소비에트 연방의 스탈린 치하에서 우크라이나 대기근이 발생하면서 러시아인들과 우크라이나인들 사이에 치명적인 갈등이 생기기 시작했다. 특히 2차 대전기에는 스탈린의 차별로 인해 불만을 가진 우크라인들이 나치의 침략에서 독일 편을 드는 등, 갈등이 매우 심화되기도 했다. 스탈린 사후,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령이었던 크림반도를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에 할양하는 등, 우크라이나인들 달래기에 매진했으나, 이미 깊어진 골은 치유하기 힘든 수준이 되었다.
소련이 해체될 당시, 우크라이나는 발트 3국과 더불어 소련으로부터의 분리에 가장 적극적인 구성국이 되었다. 하지만 스탈린 시절 우크라이나의 공업화를 우크라이나인이 아닌 러시아인들이 했었고, 이런 기조를 후에도 유지했었기 때문에 우크라이나 공화국에는 러시아계 혹은 친러시아 우크라이나인이 상당수 있었으며, 이들이 독립 당시 우크라이나를 지배했기에 우크라이나의 친러 기조가 기적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었다.
이러한 민족은 반러 성향인데 국가는 친러 성향인 기형적인 구조는 유로마이단으로 해소되게 되었고, 이후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갈등의 근본적인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2013년 11월 유럽연합(EU)과의 협력 협정 체결 잠정 중단으로 시작된 대규모 시위를 계기로 빅토르 야누코비치 대통령의 탄핵과 도피, 러시아의 크림 반도 합병 등을 겪은 우크라이나는 내전 상태와도 같은 국가적 위기에 처했다. 이번 우크라이나 사태가 촉발한 배경에는 유럽연합과 협력 좌절과 러시아와 경제 지원 협약 체결로, 그동안 독단적이며 권위적으로 나라를 운영해 온 야누코비치 정권에 쌓여왔던 불만이 폭발해버린 것이다.
이 와중에 우크라이나는 크림 반도를 러시아에게 빼앗겨 버렸다. 크림 자치 공화국은 주민 투표를 통해서 크림 공화국으로 분리 독립, 러시아로 편입해버렸다. 거기에 도네츠크를 비롯한 러시아계 다수 지역까지도 독립 요구를 하며 시위대가 무장하고 군복 차림으로 나섰다. 이를 진압한다고 투입된 우크라이나군이 되레 무장 시위대에게 포위되며 무기를 넘겨주고 굴욕적으로 철수를 하는 상황이었다. 물론 이는 함부로 러시아계 무장 시위대를 건드리다가 러시아를 자극할 수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