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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서각역사공원(御書閣歷史公園) 탐방기
-어서각의 주인공과 버들잎사랑 이야기-
글쓴이: 운곡(雲谷) 강훈기(康勳基)
새로운 행정도시를 건설하는 행정중심복합도시건설특별법이 2005년 3월 2일 국회 본회의에서 의결되고, 3월 18일 정부가 공포했다. 이 법에 의해 충남 연기군 및 공주군의 일부지역을 수용하여 새로운 행정도시를 건설하게 된 것이다.
조선개국(朝鮮開國) 초인 1398년에 정안군(靖安君) 이방원(李芳遠: 후에 太宗)이 일으킨 제1차 왕자의 난에 의해 피화(被禍)를 입은 우리 신천강씨 자손들이 전국 각지로 흩어졌다. 그 당시 재령백(載寧伯) 문원공(文元公) 강순룡(康舜龍: 연기파조) 공(公)의 자손들은 충남 연기군 남면 고정리(忠南 燕岐郡 南面 高亭里)로 피신했고, 피화로 몰락한 가문의 한을 달래며, 600년이 넘는 세월을 세거지로 삼아 살아왔다. 그런데 새로운 행정도시의 건설로 이제 다시 조상의 얼이 숨쉬는 정든 고향땅을 등지고 뿔뿔이 흩어진 것이다.
정든 고향을 잃어 향수를 달래야 하는 아픔 속에서도,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은 우리 신천강씨 문중의 자랑거리인 조선의 태조, 영조, 정조, 고종 임금님들의 어서를 모셔두었던 어서각의 역사적, 문화적인 가치가 인정되어, 행정중심복합도시건설청이 문화재의 보존 및 활용을 위해 어서각 주변을 새롭게 단장하고 여러 조형물을 새로 세우는 등, 역사를 테마로 한 기념공원으로 조성한 것이다.
▲ 어서각역사공원의 위치도
2012년 9월에 착공하여 2014년 10월에 완공된 어서각역사공원은 세종특별자치시 아름동(구 충남 연기군 남면 고정리)의 어서각 자리에 총 면적 6,000m²로 조성되었다. 어서각은 원형대로 보존했고, 어서각의 주인공인 문원공 강순룡과 태조 이성계와 신덕왕후가 서로 밀접한 관계임을 헤아려, 백전백승의 장수 이성계와 강씨처녀의 아름다운 버들잎설화를 어서각역사공원의 테마로 도입, 버들잎 모양의 잔디마당과 전통담장을 조성하였고, 보호수도 하나 심어 놓았다.
그리고 2014년에 행정구역명칭변경에 따른 후속조치로 어서각이 “연기군 향토유적 제41호”에서 “세종특별자치시 향토유적 제41호”로 변경 지정고시되었다.
역사공원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세운 표지석에는 태조 이성계가 친필로 문원공 강순룡에게 내려준 봉작왕지(封爵王旨)의 문양(文樣)을 그대로 옮겨, 어서각의 주인공이 누구인지와 왕지의 내용을 바로 알 수 있게 했다.
▲ 어서각역사공원으로 들어가는 입구
▲ 강순룡왕지를 그대로 표지석에 옮겼다
공원 입구를 따라 들어가면 버들잎 잔디마당과 약 16m 길이의 전통담장을 만난다. 붉은 점토판 위에 부조된 벽화는 태조 이성계와 신덕왕후가 젊은 시절 첫만남을 가진 우물가의 버들잎설화를 표현한 것으로 두 분의 상반신, 우물, 뛰어오르는 말, 버들잎 등으로 상징화했다. 여기에 담장 아래에서 위로 향하는 조명이 설치되어 있어 야간에 이곳을 찾는 이들에게도 아름다운 버들잎 사랑이야기를 음미할 수 있도록 해놓았다.
▲ 전통담장과 버들잎마당의 전경
▲ 버들잎설화가 부조되어 있는 전통담장벽
전통담장의 붉은 바탕색이 주는 따듯한 느낌을 받으며, 그림으로 형상화된 버들잎, 뛰어오르는 말, 화살통을 등에 멘 이장군과 다소곳이 머리를 숙인 강씨처녀의 아름다운 모습을 바라보자니, 먼 옛날 황해도 곡산부 가람산 용봉 밑에 있는 용연의 우물가에서 둘이 처음 만나 백년가약을 맺게 된 감미로운 버들잎설화가 떠오르며 금세 그 이야기 속으로 빠져든다.
심산유곡에서 말을 달리며 가람산(岢嵐山) 용봉 밑을 지나가다 갈증을 느낀 이 장군이 용연의 우물가로 찾아온다. 마침 그곳에서 물을 긷고 있던 강씨처녀에게 물을 청하자, 표주박에 물을 떠서 버들잎을 띄워 마시라고 건네준다. 이상하게 여긴 이 장군이 왜 그랬느냐고 묻자, 급히 마시면 체할까봐 그랬으니 천천히 마시라고 한다. 보살펴주는 섬세한 마음씨가 참 곱다고 생각하며, 다소곳이 머리를 숙이고 속삭이는 처녀를 힐끗 훔쳐보니, 수려한 용모는 더욱 아름답기만 하다. 첫만남에서 강씨처녀에게 넋이 나간 이 장군이 즉시 사랑을 고백했고, 둘이 뜨거운 사랑에 빠져 백년가약을 맺었다는 이야기이다.
이 버들잎 사랑이야기 만큼이나 태조 이성계에 대한 신덕왕후의 사랑이 얼마나 깊었고, 얼마나 멀리 알려졌는지는 신덕왕후가 승하하셨을 때 이웃의 명나라 태조 주원장이 보낸 칙위조서에서도 잘 나타난다.
“사자(使者)가 이르러 왕의 수비(首妃) 강씨(康氏)가 죽었다는 말을 아뢰니, 심히 슬펐노라. 왕은 반드시 아침저녁으로 권련(眷戀)하게 생각하여 스스로 마지못할 것이다. 무슨 까닭일까? 옛날 집을 변화시켜 나라를 만들 때에 근로하여 내조(內助)하고, 삼한(三韓)에 국모(國母)로 있던 이가 강씨(康氏)가 아니고 누구겠는가? 지금에는 사람은 죽고 자취만 있으니, 이것이 권련(眷戀)하여 스스로 마지못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하물며 옛날 생존하였을 때, 왕이 새벽 일찍 옷을 입을 즈음을 당하면 강씨가 경루(更漏)를 여러 번 고쳐가며 살피고, 정사에 바빠서 늦게 식사하면 강씨가 절도 있게 하여 받들며, 조회를 보는 날에는 강씨가 궁빈(宮嬪)을 거느려 배웅하고, 해가 저물면 강씨가 궁빈을 거느려 촛불을 잡고 영접하여 침소로 돌아갔을 것이다…중략”
또한 태조 이성계 역시 신덕왕후가 친정집안의 탄탄한 인맥을 배경으로 한낱 초라한 지방출신의 장수인 자신이 중앙정계에 진입하는 길을 열어주었고, 전장에 나가서는 백전백승의 영웅이지만 정치무대에서는 초보자인 자신을 출세길로 승승장구하도록 보살펴 주었으니 얼마나 사랑스럽겠었는가! 더욱이 조선을 창업하는 과정에서도 뛰어난 정치적 수완을 발휘하여 내조한 공로 또한 이루말할 수 없이 컸으니, 태조 이성계의 사랑이 극진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신덕왕후가 얼마나 태조 이성계에게 영향을 끼쳤는 지는 다음의 기록에서도 쉽게 가늠해 볼 수가 있다.
“내가 그렇게 고생하면서 나라를 세우던 날까지 오직 신덕왕후의 내조가 극진했다. 내가 왕위에 올라 만기(萬機: 임금의 여러 가지 정무)를 살필 때에도 또한 왕후의 도움이 컸다. 갑자기 세상을 떠나 더 이상 좋은 말을 들을 수 없게 되었으니 마치 보좌를 잃은 듯하다. 나는 너무나 슬프다”
그리고 조준과 김사형 두 정승이 올린 상언문에도 신덕왕후의 공이 얼마나 컸는 지 잘 나타난다.
“현비 전하(顯妃殿下)께서는 품성(稟性: 타고난 성질)이 정숙(貞淑)하시고 조행(操行: 태도와 행실)이 근신(謹愼: 힘쓰고 삼감)하시어 평시에도 항상 경계(儆戒: 조심)하는 마음을 두시고, 위태할 때에는 대책(大策: 큰일)을 결정하는 데에 참예하여 내조(內助)의 공이 역사(竹帛)에 빛나서 이루 다 말할 수 없습니다.”
태조 이성계는 사랑하는 신덕왕후가 승하하자 애통해 하며 왕후가 묻힐 능지를 친히 물색했고, 결국은 자신의 궁에서 가까운 도성 안 취현방(지금의 정동)의 정릉에 왕후를 모셨고, 원당사찰인 흥천사를 지었다. 그리고 조석으로 정릉을 바라보며 왕후의 넋을 위로하는 기도를 드린 후에야 수라를 들었다. 나아가 신덕왕후를 얼마나 사랑했으면 자신이 죽은 후에 왕후의 곁에 묻히기를 원했겠는가!
이처럼 두 분의 아름답고, 애틋하고, 고귀하고, 극진했던 사랑이야기는 시간과 공간을 뛰어 넘어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도 바른 길잡이가 되고, 영원히 본받아야 할 사랑문화의 진수(眞髓)인 것이다. 결혼을 앞둔 젊은 연인들에게는 아주 좋은 교훈과 본보기가 되고, 오늘을 바쁘게 사는 이들에게는 쌓인 스트레스를 풀어주고, 답답한 마음을 씻어주는 좋은 청량제가 될 것이다.
어떤 이들은 버들잎 사랑이야기가 한낱 설화에 지나지 않는다고 가볍게 여길 지도 모르지만, 낭만적인 버들잎 사랑이야기가 한 순간으로 끝나버린 것이 아니라, 그 사랑이 백년가약으로 맺어졌고, 멀리 이웃나라까지도 알려졌음은 물론, 우리나라의 역사서에서도 뚜렷이 기록된 참사랑의 진수를 어찌 가볍게 여겨버릴 수 있겠는가? 죽어서도 먼저 간 임의 곁에 묻히기를 원했던 남자 주인공의 간절한 소원이 끝내는 타인, 아니 아들 태종에 의해 묵살되고 말았으니 참으로 아이러니하고 안타까운 일이라 아니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로 인해 못 다한 사랑이야기로 끝나버린 버들잎 사랑이야기에 아쉬움을 달래는 동안, 어느덧 깨어나 현실로 돌아와 보니 아직도 전통담장 앞에 서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어서각역사공원에 참으로 좋은 테마를 유효적절하게 잘 도입했다는 생각이 든다.
전통담장과 버들잎 잔디마당을 뒤로하고 이제는 발길을 어서각으로 향한다.
▲ 어서각 전경
어서각은 낮은 야산 중턱 남향에 정면 1칸, 측면 2칸으로 전퇴칸에 마루를 조성한 작은 건물이나 겹처마에 팔작지붕을 갖추어 지은 멋진 건축물이다. 화강암을 이용한 원형 초석 위에 원주를 올리고 중앙의 상단부에 ‘어서각기’를 사방에 하나씩 걸어놓았다.
▲ 강순룡왕지를 봉안한 어서각 본체
어서각은 1744년(영조 20년)에 영조로부터 사액 받아, 1845년(헌종 11년)에 건립되었고, 그 후 1984년에 한번 개축했다. 현재는 정면 중앙의 벽에 조선의 태조 이성계가 문원공에게 내린 친필 봉작왕지의 영인본만 걸려있다. 원본은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다.
어렸을 적에 아무것도 모르고 어서각 주위에서 동네 아이들과 뛰어놀던 생각이 머릿속을 주마등처럼 스치며 지나간다. 문중 어른들로부터 들은 이야기는 우리의 훌륭하신 조상 할아버지께서 임금님으로부터 받은 어서를 모셔둔 곳이라고 했고, 우리 가문의 자랑거리라고 했기 때문에 그저 아주 소중한 곳이구나! 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고, 타성받이 아이들을 만나면 늘 자랑하곤 했었다.
그런데 오늘 그것도 50년이란 세월이 훨씬 지난 후에 찾아와 어서각 앞에 서니 참으로 감개가 무량하다. 점점 자라면서 특히 역사공부에 관심이 많았던 나는 문중의 출중한 한학자이시고, 나의 스승님이기도 했던 용기(龍基) 종형님으로부터 어서각의 주인공인 문원공 할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아주 관심있게 듣고 배웠던 기억이 떠오른다.
문원공은 고려(高麗) 말(末) 권문세가인 우리 신천강씨(信川康氏) 문중의 탄탄한 인맥을 배경으로 1392년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의 조선건국(朝鮮建國)에 큰 공헌을 한 장본인이었고, 신덕왕후의 친 오빠이다. 그리하여 태조 이성계가 1393년에는 검교문하시중(檢校門下侍中)에, 그리고 1395년에 특진보국숭록대부(特進輔國崇祿大夫) 재령백(載寧伯)에 봉작하는 왕지를 친필로 써주었을 정도로 극진한 신뢰를 받았다.
고려 말에 일찍이 원(元)에 들어간 문원공은 숭문감소감(崇文監少監)이 되었고, 몽골식 이름은 빠이엔티무르(伯顔帖木兒)이었다. 1354년(공민왕 3년) 2월에 덕령공주와 함께 원에서 돌아와 지밀직사사 (知密直司事: 종 2품)가 되었고, 6월에는 원으로부터 장사성(張士城)이 일으킨 난(亂)을 토벌하기 위한 지원군을 고려에 요청하는 사절로 파견되기도 했다. 7월에는 찬성사(贊成事: 정 2품)로 승진되었고, 이어서 은성부원군(銀城府院君)에 책봉되었다.
1374년(공민왕 23년) 9월에는 북원(北元)에서 온 호승(胡僧)이 퍼트린 헛소문에 말려 잠시 옥고를 치루기도 했고, 1375년(우왕 1년) 4월에는 간신(奸臣) 이인임(李仁任)의 모함으로 억울하게 원지로 유배되었다가 1376년 6월에 풀려나 낙향하여 관직에 복귀하기까지 고향인 황해도 곡산부 가람산 용봉 밑 초야에서 후배 양성에 힘쓰기도 했다.
문원공은 고려말(高麗末)에 도당(都堂)에서 정치를 주도하던 재추(宰樞)들과 활발한 교류를 하였는데, 주요 인사들로는 문하시중을 역임한 곡성부원군 염제신(廉悌臣), 칠원부원군 윤환(尹桓), 한산부원군 목은(牧隱) 이색(李穡) 등이었다. 문원공이 이색의 목은시고(牧隱詩藁)에 강평장(康平章) 또는 재령군(載寧君) 강공(康公)으로 7편의 시(詩)에 등장한다. 이로써 문원공이 교류하던 인사들의 면면이 밝혀진 것이다. 목은 이색이 1382년을 전후로 해서 쓴 시(詩)들에서 밝혀진 문원공의 관직은 평장사(平章事)였고, 재령부원군(載寧府院君)에 봉해졌으며, 재추들의 정책 결정기구인 도당의 일원이었다. 그 당시 목은 이색은 신진사대부를 주축으로 한 친명파의 수장 격이었고, 문원공은 친원파의 수장 격이었는데, 두 분이 함께 어울려 교류했던 것이다. 비록 정치적인 노선은 달랐지만, 서로 교류하며 지냈다는 사실에서 고려 말기의 정치문화를 일부분이나마 엿볼 수가 있게 되었고, 오늘날의 정치문화와 비교해볼 수 있는 단서도 제공해준다.
문원공은 1398년에 정안군 이방원(李芳遠: 후에 太宗)이 일으킨 제1차 왕자의 난에서 신덕왕후 소생의 세자(世子) 이방석(李芳碩), 무안대군 (撫安大君) 이방번(李芳蕃), 사위 흥안군(興安君) 이제(李濟) 등이 참살될 때, 신천강씨 문중에서 주 협력자였기 때문에 함께 죽임을 당했고, 조선 최고의 품계인 특진보국숭록대부(特進輔國崇祿大夫: 정1품) 재령백(載寧伯)에 봉작(封爵)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문원공의 시신은 경기도 광주군 중대면 거어미동 상마천리(현 서울시 송파구 마천동)의 초라한 묘소에 묻혀야 했다. 영달한 재추들의 묘소에는 공적을 기리는 신도비 및 각종 석물을 세워 가문의 위상을 높이지만, 문원공의 묘소에는 비참한 최후 및 몰락한 가문의 처지를 대변해주 듯 아주 초라한 2 개의 비석만 세워져 있었고,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새겨놓은 글자도 대부분이 마모되어 지금은 제대로 판독을 할 수없는 상태에까지 이르렀다.
1744년(영조 20년)에 문원공의 13대손 강치경(康致慶)이 이태조의 친필 왕지(王旨)를 영조(英祖)에게 올리니, 임금이 보고 “이 교지 가운데 인전(印篆)을 보니 바로 성조께서 나라를 창업하신 초기였다…중략”며, 친히 발문(跋文)을 썼다. 그 후에 정조(正祖)가 신덕왕후의 옛집터를 찾아내고, 구기비(舊基碑) 앞면에 새길 어제(御製)를 내려주었고, 세 분 선대왕의 진적(眞跡)을 보고 하사한 고종의 어제도 어서각에 함께 봉안했다.
강순룡왕지는 현재 전해지는 조선 초기의 희귀문서로 관직임명 제도를 비롯하여 임명장의 서식, 어보, 서체 등 문서의 변천 과정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가치를 가지고 있어 단연 국보급이다. 더욱이 조선왕보(朝鮮王寶)에 관한 역사적 사료는 유일무이하게 강치경이 영조에게 올리는 강순룡왕지의 실록기사 뿐이다. 조선 개국 초에 명 황제가 조선을 승인하고 국새를 내려주는 1401년까지 공백기인 약 10년간을 자체 제작한 국새인 조선왕보 (朝鮮王寶)를 사용했었다. 조선이 제후국으로써 중국의 황제가 내려주는 국새인 조선국왕지인 (朝鮮國王之印)을 사용치 않고, 조선왕보를 사용했던 특수하고 유일한 사례에 대한 증거사료는 강순룡왕지에 대한 영조실록의 기사뿐이므로, 아주 중요한 역사적 가치가 있다.
그리고 1985년에 착공한 중부고속도로의 건설로 서울시 송파구 마천동(구 경기도 광주)에 모셔져 있던 문원공의 묘소를 부득이 이전해야 하는 상황에 처해, 1989년에 현재의 소재지인 세종특별자치시 아름동(구 충남 연기군 남면 고정리 대비실 산 54의 2)으로 이장하였다.
▲ 재령백 문원공의 묘소
그런데 행정도시의 건설로 이제 다시 문원공의 묘소를 타 지역으로 이장하여야 하는 위기에 처해있다. 그러나 우리 문중에서는 문원공이 어서각 역사공원에 있는 어서각의 주인공이라는 상징성과, 고려사, 조선왕조실록 및 목은시고 등에 나오는 문원공에 관련된 기록들이 역사적인 가치가 있고, 세종특별자치시 아름동(구 충남 연기군 남면 고정리)은 600년이 넘는 세월동안 문원공 자손들이 뿌리를 내린 세거지였던 점 등을 감안할 때, 문원공의 묘소를 문화재로 지정받을 충분한 이유가 있다고 판단하고, 현재 이를 위한 신청서류를 준비 중에 있다.
나아가 현재 서울대 규장각에 보관되어 있는 강순룡왕지는 반드시 어서각이 있는 본래의 장소인, 그리고 주인공 자손들의 역사가 서려있는 세종특별자치시로 이전 보관되어야 하고, 아울러 문화재로 지정받아야 한다.
이러한 일련의 일들을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해야겠다는 생각에 어서각 앞에서 다시 한 번 마음을 굳게 다지고, 아쉬움을 뒤로한 채, 어서각역사공원을 나왔다.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