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출정(龍出亭)에서
김 두 녀
은평역사한옥박물관 3층에 올라 양팔을 벌리니 병풍처럼 펼쳐진 북한산
이 품에 들어온다. 정갈한 용출정은 한복 정장을 차려입고 시조를 읊으시
던 내 아버지 모습. 나는 아버지 무릎 위에 안겨 북한산과 하나가 된다.
무서워 기어오르던 산, 누구라도 손 붙잡고 당겨주어야 올랐던 의상봉,
하얀 고사목 밑에서 등산객을 맞던 고양이를 앞세운 원효봉, 태극기를
높이 들고 서 있던 백운대가 참 반갑다고 멀리서 눈웃음을 짓는데 봉긋
솟은 용출봉이 가슴을 파고든다.
용혈봉, 증취봉, 나월봉, 715봉, 문수봉까지 차례로 눈을 맞춘 뒤 양팔
저어 응봉산에 올라 능선을 따라가다가 비봉에서 잠시 머문다. 아슬하게
기어올라 진흥왕 순수비를 만나 숙연해지던 시간 떠올리며 춤추듯 향로
봉에 다다라 긴 호흡으로 이 땅을 지켜낸 조상의 얼을 되새긴다.
산이 좋아 쫓기듯 능선을 뛰어다닐 때는 산이 나를 품었지만 멀찌감치
떨어져 있는 북한산을 오늘 다 품었다고 우쭐대니 이산 저산 여기 놔두고
어서 물러나라 용출정(龍出亭)이 이른다. 이미 산이 된 내게. 살면서 아무런
말이나 내뱉던 입, 황당한 혀끝에 베인 시퍼런 바다는 제 몸 쓰다듬느라
수많은 물봉오리를 스스로 피워낸다 어서 가서 보라 한다.
※龍出亭(용출정):은평역사한옥박물관에 있는 정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