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천부인과 천부경의 비밀 원문보기 글쓴이: 우리
1.세종의 자방고전(字倣古箋)이란?
지금 우리가 쓰는 한굴은 어떻게 만들어 졌는가? 또 인류가 쓰는 글자중에 가장 우수 하다는 이 한글은 어떻게 만들어 졌는가?
그야
세종대왕의 훈민정음을 들지 않을 수 없고 그 세종실록에도 신제(新制) 28 자라 했으니 정말로 세종이 전연 없던 無에서 한글을 창작한 줄로 안다. 또 [훈민정음 해례본 제자해]도 있으니 우리 한글이 창제된 원리를 알 수 있다 한다.그러나 세종은 틀림없이 자방고전(字倣古篆)이라 했으니 옛 조상의 글자를 본받아 만들었다 했고 그 훈민정음의 제자 원리를 설명한 제자해를 쓴 정인지의 서문에 상형이자방고전(像形而字倣古篆) 이라 했으니 그 상형은 옛 조상의 글자를 본받았다는 것이다. 여기서 古人이란 자기의 조상을 이르는 말 이지 남의 나라 조상을 이르는 말은 아니다. 그러니까 지금 우리는 세종이 전연 무에서 한글을 창제 한 것인지 옛 조상의 글자를 모방 한 것인지 학자들 간에 의견이 분분한데 이에 글쓴이는 이 문제를 확실히 집고 넘어 가려고 글쓴이가 3 월말에 새로 낼 [천부인 ㅇ ㅁ ㅿ 의 비밀]에서 인용한다.
우선 일본 학자들은 세종전 대락 700 년 전에 이미 일보에 신대문자(神代文字)가 있었으므로 세종은 그 신대문자를 본받았다 한다.
* ‘미야시다문조(神代文字)’는 일본역대 천황들에 대해 상세히 기록한 내용인데 이 미야시다 문조는 한자가 들어오기 전 수 백 년 전부터 일본에 있었다.
신대문자 사진
한편 인도의 델리대학 언어학의 권위자 푸렘싱 교수는 부라미(BRAHMI) 문자의 전공 교수인데 그는 확신에 찬 어조로 칠판에 자모 하나 하나를 쓰고 예를 들어가며 한글이 인도에서 건너갔다고 설명했다
부라미 문자
* 델리에서 인도 북서부의 ‘구자라트’ 주의 ‘바도다라’ 시내까지는 기차로 열 두 시간쯤 거리인데 자동차 광고판이나 간판의 글씨가 한글과 매우 흡사해서 그 글씨를 우리말로 읽어도 보고 그들보고 우리 한글 글자를 읽어보라고 했는데 발음이 같은 것이 많았다.
간판에 쓰여 있는 구자라트 문자.
그렇다면 세종은 이런 글자들은 모방한 것인가?
우선 세종이 모방했다는 옛 조상의 글자, 자방고전(字倣古篆)의 전(篆) 자의 뜻을 알아본다. 篆 자는 도장 새길 때나 쓰는 꼬불꼬불하다는 글자로 알고 있으나 그 뜻은 다르다.
1010. 한글날 KBS에서 방연한 것을 캡춰.
그렇다면 세종이 자방고전(字倣古篆) 이라 하였고 훈민정음 해례본에서 정인지는 아예 그 글자 모양도, 상형이자방고전(象形而字倣古篆) 이라 했으니 이는 우리 조상의 글자를 모방 했다는 말이다. 즉 고인(古人)아란 절대 남의 조상에게는 쓰지 않은 말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 조상의 글자란 신지혁덕이 환숫(桓雄)의 명을 받고 만든 하느님 말씀 [진본천부경]이 있으나 이는 천제 때나 쓰는 신의 글자였기 때문에 다시 인간의 글자를 만드는데 그 글자가 유기(留記)에 나오는 신지신획으로 곡일(曲一)과 직이(直二)란 ㄱ ㄴ ㄷ ㄹ 과 같은 직각이 이 된 글자다. 그리고 이 신지신획은 선조들에 의해 일본으로 건너갔으며 또는 12 환국의 하나였던 수밀이국을 통하여 지금 스메르 지방에 가서 쐐기 문자가 되는가 하면 인도까지 건너 갔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세종이 인용한 古人이란 말은 그 신지신획을 말 하는 것으로 밖에는 볼 수가 없다.
그러나 지금 학자들은 그 고인의 글자를 한자나 또는 다른 나라 글자를 본받은 것을 알고 있는데 한자에는 ㅇ 과 같은 글자도 없고 세종당시는 물론 당시도 위와 같이 비슷한 글자는 없다.
아래 좌측은 전자이고 우측은 훈민정음인데 그 글자 모양이 전자는 둥글고 훈민정음은 유기(留記)에 나오듯이 곡일(曲一)과 지이(地二)로 모가 져 있다.
단 그 고전(古篆)소리는 진시황이 천하를 통일하고 대전(大箋), 소전(小箋)을 만들 때나 또는 명 태조 주원장이 몽골군을 물리치고 천하를 통일, 글자도 통일 하여 홍무정운을 만들 때 나온 소리가 아닌지 모르겠다.
2.그렇다면 세종이 말한 자방고전 소리를 더 알아본다.
하느님의 무리아들(庶子 당히는 결혼 제도가 없었음이 여러 가지 청동기 유물로 증명 되므로 첩의 아들이 아님) 환웅은 새 나라를 개국 하려 할 때 하느님은 쾌히 승낙하시며 홍익인간 하는데 꼭 필요한 소위 교훈을 내려 주시는데 당시는 글자가 없었으므로 말씀으로 내려 주셨고 그 때문에 그를 말로 전하는 구전지서(口傳之書)라 하였다. 이를 후에 천부경 이라하였다는 말이 고운집이나 여러 사서에 기록 돼 있으며 그 민족이 써야할 글자의 원형을 내려 주시는데 이는 하늘과 땅과 사람이라는 ㅇ ㅁ ㅿ 이고 나중에 천부인 이라 하였다는 사실이 삼국유사나 여러 사서에 쓰여 있다.
신지녹도문 [진본천부경] 하나 둘 셋 ....열
그러나 그 한울소리와 한울글자를 받아 가지고 내려온 환웅은 말 이란 시간이지나면 변질 되거나 윤색 될 수 있음으로 그 신하 신지를 시켜 말은 보관 할 수 있는 방법을 명 하는데 녹음기가 없던 그 시절 신지는 말을 보관하는 방법을 고심 하다가 사슴 사냥을 나갔고 사슴의 발자국을 보고 말을 보관 하는 방법도 이와 같이 하면 할 것이라 생각하여 인류 최초의 글자를 만드니 이를 신지녹도문(神誌鹿圖文)이라 한다는 말이 환단고기나 규원사화등 우리 사서에 쓰여 있다.
그러나 이 글자는 우리 조상이 글자가 나오기 전 그림을 그려 의사 표시를 하던 암각화 등을 단축시켜 만든 청동기 등 금문(金文)을 보강한 글자이기 때문에 금문과 흡사한 점이 많았고 또 이 글자들은 평양 법수교 아래 있다는 아들을 낳게 해 달라는 기천문(祈天文), 또는 성 예찬서 등과 같이 신을 위한 글자로 그 뜻은 열 이나 글자수는 16 자였다. 따라서 당시 사람들은 순진하게도 신을 위한 글자는 16 자에서 더 되도 안 되고 덜 되도 안 되는 줄 알았던 모양이다.
따라서 이 글자는 신을 위한 글자이므로 신지는 다시 인간이 쓰는 글자를 만드는데 이는 먼저 하느님이 환웅께 주신 하늘과 땅과 사람이라는 ㅇ ㅁ ㅿ 으로 만드니 이것이 신지신획(神誌神劃) 이고 바로 우리 한글, 또는 윈시 한글인 가림토의 어머니가 된다.
이 한울소리 천부경과 한울글자 천부인은 한 쌍이 된다.
그렇다면 여기서 다시 세종의 자방고전의 고전이란 무엇인가 분명 해 지는데 단 자방고전의 篆 자가 문제다.
이는 신지의 녹도문 하나 둘 셋 ...열 이나 역시 신지의 녹도문으로 써진 평양 법수교 아래 있다는 아들을 낳게 해 달라는 기천문, 그리고 창성 조적서 비만 봐도 알 수 있다. 이 글자들은 ([진본 천부경] 신지녹도문에서 해독)
사실 [진본천부경]신지녹도전자(神誌鹿圖篆字)는 사슴 그림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다만 사슴의 발자국을 보고 만든 글자니 신지녹도전자라 한 것이다. 그러나 지금 중국 섬서성 백수현에 남아 있어서 우리가 항상 볼 수 있는 창성조석서비(創聖鳥跡書碑)는 새(鳥) 발자국 같아서 조적서라 하는데 정말 신지녹도문 글자체는 새 발자국 같을망정 사슴이나 사슴 발자국과 같지는 않다. 즉 신지의 16 자는 신을 위한 글자이므로 꼭 16 자를 새려 놓았는데 창힐 (創詰)는 같은 글자이면서도 신을 위한 글자가 아니라 견문록이니 12자(시실은 같은 글자가 있음으로 11자)를 추가하여 28 자로 만들었다.
창성(創聖) 이라는 창힐은 환숫(환웅)한데서 글자 만드는 것을 배운 사람이고 [창성조적서] 비란 글쓴이가 동시에 출간하는 [진본천부경} 신지녹도문 풀이에 해독해 놓았듯이 한자의 창제과정을 말 하는 게 아니라 환숫이 밝달임금의 밝달나라(첫 조선)을 세우는 과정을 보고 적어놓은 일종의 견문록 이라 중국의 국보가 아니라 우리의 국보이다.
이와 같이 같은 글자를 가지고도 글자 이름이 달라진다는 것은 바로 신지녹도문이 진실 이라는 증거가 된다. 즉 사슴과 비슷하지도 않은 글자를 녹도문 이라 한 것은 신지는 사슴을 보고 만들었으니 녹도문 이라 한 것이 구전된 것이고 그 제자 창힐은 아무리 선생의 글자라도 새 발작 같으니 조석서라 한 것을 보면 안다.
따라서 이 글자들이 녹도전자이니, 조적서이니 말이 달라지는 것은 당시는 한자나 어떤 글자가 없었고 그 후대에서 전해지는 말을 듣고 한자로 표현할 때 진시황의 대전(大篆), 소전(小篆)이나, 주원장 시대 홍무정운(洪武正韻)으로 한자를 통일 하고 나서 글 글자가 꼬불꼬불 하니 그저 전서(篆書)라 한 것으로 본다. 그래서 글쓴이는 세종의 자방고전(字倣古篆)의 篆 자란 신지 유기에 나오는 ㄱ ㄴ ㄷ ... 등으로 보고 이 글에서는 ‘신지녹도문’이라 할 것이다.
1) 신지신획
*.....유기(留記)에 이르되 신획(神劃)이 일찍이 태백산의 푸른 바위의 벽에 있는데 그 모양이 ‘ㄱ’ 과 같으니 세상 사람들이 이르기를 신지선인이 전한바라. 하며 혹자는 ‘이것이 글자 만듬의 시초가 된다’ 라고 하는데 즉 그 획은 직일(直一)과 곡이(曲二)의 형상이며 그 의의 는 관리 통제한 형상이 있고 그 형태와 소리 또한 계획된 뜻에서 나온 것 같다.1)... - (소도경전)
...留記云神劃曾在太白山靑岩之壁其形如 ㄱ世稱神誌仙人所傳也或者以是爲造字之 始則其劃直一曲二之形其義有管制之象其形其聲又似出於計意然者也...(蘇塗經典)
1) 형태와 소리또한 계획된 뜻에서 나온 것 같다.- 이것이야 말로 천부인 해설에서 자세히 논의되겠지만 우리말과 글자가 동시에 천부인을 중심으로 계획되어 창제 되었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3. 훈민정음 해례본 제자해 정인지 서문의 상형이자방고전(象形而字倣古篆)
세종이 훈민정음을 반포하자 50 일도 되지 않아 최만리 파들이 말도 되지 않는 말로 중국을 팔아가며 결사반대하자 하루 저녁 하옥 시키고는 마음이 편치 않았을 것임으로 고육지책으로 그래도 반대는 하지 않았던 정인지 파에게 중국과 최만리 파에게 마음이 드는 음양오행설로 훈민정음의 제자 원리를 쓰게 한 것이 바로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국보 70 호 [훈민정음 해례본 제자해] 이다.
이때 세종은 [훈민정음]의 원래 뜻, 옛 조상의 글자를 본떴다는 字倣古篆을 잠시 설명하고 [훈민정음 해례본 제자해)를 쓰게 했는데 정인지는 그 말대로 [제자해 서문] 첫 머리에는 有天地自然之聲則必有天地自然之文. 所以古人因聲制字. 以通萬物之情. 以載三才之道. 而後世不能易也.(천지자연의 소리가 있은즉 반드시 천지자연의 문자가 있다. 그러므로 옛 조상은 소리에 따라 글자를 만들어서 만물의 뜻과 통하게 했고 삼재의 도에 실리게 했으므로 후세에서 능히 바꿀 수가 없는 것이다) 라 썻으니 그렇다면 세종이나 정인지도 조상의 말과 글자가 동시에 만들어 졌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것인데 이는 글쓴이가 해독하는 ㄱ ㄴ ㄷ ...ㅎ 속에 뜻이 들어있다는 [천부인 ㅇ ㅁ ㅿ } 의 비밀만 봐도 안다
예 ㅅ 으로 된 말과 글자
1)사람 천부인은 △으로 만든 ㅅ의 예.
* △ 과 ㅅ은 그 모양이 서 있고, 또 솟는 모양이며, 그 끝이 뾰족하다. 여기서 ㅅ, ㅈ, ㅊ이 나왔다고 했다.
2) 서거나 솟는 모양으로 된 말.
* 서다, 세우다 (立)
* 사람
* 사내(丁) : 사내의 원 의미는 '장정의 남근'을 말하므로 서 있는 것이다.
* 솟다
* 숫 : 남근(男根)
* 솟대(山象雄常) : 생명의 핵심인 남근 상을 상징하는 서낭나무의 원조로 솟터 (蘇塗의 신단수神壇樹)
* 소도(蘇塗) : 솟대가 모셔진 성소 솟터
* 서울 : 섯벌(徐羅伐) >서벌 >서블 >서울
* 새벌(新羅) : 새로 선 벌 (섯벌 >서라벌)
* 스승, 스님 : 학문 등이 서 있는 사람 (이하 생략)
3) ㅅ 처럼 만들어진 것이 많다.
* 사람 : 두 다리 특징
* 샅, 사타구니
* 손 : 손가락 사이
* 서까래 : ㅅ처럼 대들보에 걸친 것
* 쑥 : 그 잎 모양
* 삼(麻, 蔘) : 그 잎 모양 (이하 생략)
4) △ 과 ㅅ은 그 끝이 뾰족하고, 뾰족한 것은 가늘고 좁다.
* 솔 : 소나무
* 솔 : 부추
* 솔기 : 옷솔기 등 가늘다
* (오)솔길 : 좁고 가는 길 (이하 생략)
4.세종은 옛 한글을 재조립했지만 우리말은 만들지 못했다.
위 ㅅ으로 된 말은 세종이 만든 말들이 아니다. 그런데 이 말들을 쓰려면 반드시 ㅅ을 써야 한다. 이 역시 위와 같이 '세종 전에 이미 ㅅ을 써야만 말할 수 있는 ㅅ의 어군이 있었다는 증거이고, 이는 말과 글자가 동시에 만들어지지 않았다면 도저히 설명이 불가능하다.
이는 ㄱ, ㄴ, ㄷ... ㅎ 모두 그렇다. 그렇다면 옛 글자는 '자연과 같은 모양'이고, 소리도 '자연과 같은 소리'이며, 그래서 지금 우리 한글도 뜻 글 이면서 소리글이 된다.
그러나 원시한글 가림토는 금문, 그리고 지금 한자도 그렇지만 당시의 글자는 어떤 정형이 있는 것이 아니라 지방마다 신지녹도문이나 금문을 혼용하는 등 쓰는 사람마다 달랐으니 그냥 그림글자인 한문, 즉 금문보다 더 이해하기가 헛갈렸을 것이고, 이는 가림토가 없어진 이유가 되기도 한다.
5. 세종실록과 최만리 상소문중 옛 글자가 있었다는 증거.
세종실록 중.
* 계해 25년 “시월초 임금님께서 친히 말글 이십팔자를 제정 하시니 그것은 옛 글자를 모방한 것이다”.(十月上親製言文二十八字其字倣古篆)
최만리 상소문중.
훈민정음이 반포된 지 50일 만에 당시 최고의 지성인이라는 최만리 등 집현전 학사들은 훈민정음 반포 반대 상소를 올렸는데 이 상소문 속에는 당시 세종이 옛 글자를 모방한 것이냐 아니냐에 대한 논쟁과 훈민정음을 만든 것이 중국에 대하여 얼마나 실례인가 하는 당시 선비들의 생각과 현실을 잘 말해주고 있음으로 그중 언문이 있다는 부분만 소해한다.
1)부제학(副提學) - 당시 집현전의 사실상 책임자로 그 위 대제학(大提學)은 명예직이었음
* “언문은 다 옛글자를 근본으로 했음으로 새로운 글자가 아니라 하시는데 글자의 모양은 비록 옛것을 모방했다고 하나 소리를 사용하는 것이나 글자의 조합은 옛것과 달라서 실로 근거한바가 없사옵니다” (諺文皆本古字非新字也則字形雖倣古之篆文用音合字盡反於古實無所據)
* 전 조정 때 부터 있었던 언문을 빌려 썼다고 하나 지금 같은 문명의 치세에는 오히려 글자를 분별하여 도에 이르게 하는데 뜻을 두어야 하는데 지나간 것을 따르려 하시오니까? (借使諺文自前朝有之以今日文明之治變魯至道之意尙肯因循而襲之乎)
* 대왕께서 상소문을 다 보시고 최만리 등에게 말씀 하셨다. ‘너히들이 말하기를 소리를 사용하는 것이나 글자의 조합이 옛것과 다르다 했는데 설총의 이두역시 소리가 다르지 않더뇨? (上覽䟽謂萬里等曰汝等云用音合字盡反於古薛聰吏讀亦非異音乎)
* 지금 언문은 모든 (옛) 글자를 합하여 아울러 쓰고 그 소리의 해석만 변경하였으니 (한문)글자의 형태가 아닙니다. (今此諺文合諸字而並書變其音釋而非字形也)
* 하물며 언문은 문자(한자)와는 맹세코 서로 아무런 상관됨이 없는 시골것들이 전용하는 말일뿐 이옵니다.
(况諺文與文字誓不干涉專用委巷俚語者乎)
* 속용문자(俗用文字) - 신경준의 훈민정음 운해(訓民正音 韻解)에 의하면 동방에는 예로부터 속용문자가 있었는데 그 수는 가추어 지지 않고 그 꼴의 법칙 또한 없었다.
훈민정음이 반포 된지 불과 50일 만에 최만리 등의 상소문이 올라오는데 이 상소문에 벌써 7 개의 언문(諺文)이라는 단어가 등장한다. 만약 훈민정음이 사상 초유의 문자였다면 언문이라는 단어대신 ‘훈민정음’ 이라는 단어가 대신 올라 있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언문은 훈민정음 반포 이전부터 유치한 형태로나마 백성들 사이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세종의 자방고전은 유기(留記)에 이르는 원시 한글의 모태가 되는 신지신획이 아닐 수 없고 다만 세종은 최만리, 중국 때문에 고육지책으로 그 제자해 본문만은 중국 易經의 음양설과 연나라때의 오행설로 만들었다고 쓸 수밖에 없었다고 본다.
6. 훈민정음이 만들어진 동기 추정.
세종은 태자 충령대군 시절 자신은 셋째 이므로 왕이 된다는 생각은 꿈에도 못 꾸고 왕도(王道) 보다는 시내 궁궐 박으로 나와 상것들과 어울려 놀다가 그 상것들이 쓰는 언문을 보고 놀랐을 것이다. 즉 그 상것들이 쓰는 언문만 되살린다면 우리 글자가 없어 고생하는 상것들의 글자를 만들 수 있을 것 같았고 중국의 홍무정운(洪武正韻)은 문제가 많았음으로 그가 평소 그렇게 만들고 싶어 하던 우리말 사전도 만들 수 있을 것 같아서 였다.
이때 마지 양령대군은 선경지명이 있었던지 왕도 보다는 큰 아버지의 애인을 가로채 말썽을 부리자 맞 아들을 다음 왕으로 세우려는 그 아버지 태종은 할 수 없이 충령에게 왕위를 돌리니 그가 세종이다
7.[훈민정음 해례본 제자해]가 나오게 된 동기.
위에서 보듯 세종은 훈민정음은 발표한지 50 일도 되지 않아 당대 최고의 학자들 모임인 집현전 학사들 절반인 최만리 파에 의해 폐기하라는 반대상소가 올라온다. 즉 "우리의 종주국은 중국이고 중국에는 이미 한자가 있는데 왜 우리와 같은 속국에서 새로운 글자를 만들어 이것이 중국에라도 알려지면 크나큰 실례가 아니냐? " 라는 것이 세종실록에 쓰여 있다.
이 상소를 보신 세종은 그들을 불러 몇 가지 물어보려 했으니 그들의 말이 논리에 맞지도 않고 갈팡질팡하므로 모조리 하옥을 시켰으나 역시 마음이 편치 않았을 것이므로 다음날 아침 풀어주시고 그 대신 그 집현전 학사들 중에 그래도 반대는 하지 않았던 정인지등 에게 잠시 설명을 하신다음 그 제자해를 쓰라고 명하신 것이다.
훈민정음 제자해는 이 책과 같이 출판되는 [천부인의 비밀]에서 보듯 훈민정음을 직접 만드신 세종께서 쓰신다 해도 무척 어려울 것인데 이것을 잘 알 리 없는 정인지 파에게 그 제자해를 쓰게 했다는 것은 그 최만리 파 선비들이나 또는 최만리 파 말처럼 중국의 비위를 건드리지 않게 적당히 쓰라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이 근거는 정인지 서문과 [천부인의 비밀] 보면 대강 짐작을 할 수 있다.
따라서 글쓴이는 우리말과 글자는 훈민정음 제자해대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주신 천부인으로 만들어 진 것을 입증할 것이다.
훈민정음 해례본 제자해의 비판
우선 [천지인 ㅇ ㅁ ㅿ]을 기초로 하여 ㅇ 에서는 ㅎ 등, 그리고 ㅁ 에서는 ㄱ ㄴ ㄷ ㄹ ㅂ ㅍ 등, ㅿ에서는 ㅅ ㅈ ㅊ 등 글자를 만든 현재 한글은 아무리 세월이 흐르고 일본으로 건너갔어도 그 자음은 변하지 않는다.
그러나 검둥이, 감둥이 또는 파랏파릇, 퍼릇퍼릇, 포릇포릇, 푸릇푸릇 의 예에서 보듯 모음은 ㅏ ㅓ ㅗ ㅜ 아무것이나 써도 같은 말인데 훈민정음 해례본 제자해 에서는 그 모음을 天地人 三才라 하여 ㅣ 은 사람이고 ㅡ 는 땅이며 파리똥만한 꽉 막힌 점()은 하늘이라 했다.
즉 ㅇ 은 목구멍을 본따 만들었다 하면서 하늘은 꽉 막힌 점이다. 그리고 사람이 ㅣ 이니 이 사람 좌에 하늘인 점이 붙어 ㅓ 가 되며 우에 붙어 ㅏ 가 되고 하늘이 둘 씩 붙으면 ㅕ, ㅑ 가 된다.
또 ㅡ 인 땅 위에 점이 붙어 ㅗ 가 되고 하늘이 두 개 붙으면 ㅛ 가 되는 것은 좋은데 장영실이 만든 혼천의로 보아 아직 지동설도 없던 그때 하늘이 땅 아래 붙으면 ㅜ, ㅠ 가 되며 상치형(象齒形)으로 ㅅ을 만들었다는 것도 혹 앞 니는 그럴지 몰라도 어금니는 아니며 어금니가 동서로 붙어야 하는데 동쪽에만 붙는다는 것도 말이 않된다.
또 먼저 신지유기에서 말했듯이 이미 우리 조상 때 이미 만들어지진 우리 한글을 중국 문왕 공자 때의 음양설과 연나라 때 만들어진 오행설에 맞추다 보니 우리나라 계절이 4 계절이 되었다가 5 계절이 되기도 한다.
따라서 세종의 자방고전 이란 전 자는 신지신획을 말하는 것이며 따라서 훈민정음 해례본 제자해는 우리 한글을 먹칠만 하고 있음으로 국보 70 호에서 폐해야 할 것이다.
http://cafe.daum.net/chunbuinnet - 우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