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14장 모세의 중보
가나안 정찰 이후 백성의 마음이 나뉘는데, 애굽으로 돌아가자는 파와, 가나안으로 들어가자는 파로 나뉘었다. 가나안으로 들어가자는 여호수아와 갈렙 외에 나머지 사람들은 돌아가길 원했다.
가나안 진군은 분명한 하나님의 약속이었다. 그러므로 이들의 반역은 큰 아픔일 수밖에 없었다. 원수같은 그들을 두고 그러나 모세는 중보기도를 하였다. 속이 부글부글 끓었을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그 분노를 내 마음에 담지 말고 주께 고백하며 시시로 토하며 맡기라고 말한다. 그런데 놀랍게도 오늘 본문은 모세가. 하나님께서 분노를 모세에게 토하실 때, 모세가 하나님의 분노를 타이르며 하나님을 달래고 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와 대속의 밑그림이다.
15~19 이제 주께서 이 백성을 하나같이 죽이시면 주의 명성을 들은 여러 나라가 말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가 이 백성에게 주기로 맹세한 땅에 인도할 능력이 없었으므로 광야에서 죽였다 하리이다 이제 구하옵나니 이미 말씀하신 대로 주의 큰 권능을 나타내시옵소서 이르시기를 여호와는 노하기를 더디하시고 인자가 많아 죄악과 허물을 사하시나 형벌 받을 자는 결단코 사하지 아니하시고 아버지의 죄악을 자식에게 갚아 삼사대까지 이르게 하리라 하셨나이다 구하옵나니 주의 인자의 광대하심을 따라 이 백성의 죄악을 사하시되 애굽에서부터 지금까지 이 백성을 사하신 것같이 사하시옵소서.
우리는 이러한 중보를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게 된다. 예수님은 심지어 십자가에서까지 죄를 사해달라고 기도하셨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뜻이다. 주권자의 뜻이 어디있느냐이다. 예레미야처럼 가야 하는지 아니면 모세처럼 가야 하는지 모른다. 통일을 운운하며 쉬쉬 하는 것이 맞는 것인지, 아니면 예레미야처럼 아니라고 하는 것이 맞는 것인지. 나는 통일에 대한 마음을 받은 적이 없다. 오히려 수성의 때라고 생각한다. 하여간 말씀과 성령의 확증이 우리를 굳건하게 서게 한다. 거기서 우리는 주의 음성을 듣고 확신을 얻을 수 있다. 내가 믿는 믿음은 약속 말씀에 대한 믿음이지, 내가 원하고 내가 상상하는 것이 믿음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