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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홧가루
벼랑 아래로 날아다니는 송홧가루는
누구에게 보내주는 사랑 같은 것이다
어디선가 소나무 같은 사내를
기다리는 여자가 있는 모양이다
푸른 군복 껴입고
늠름하게 서있는 사내,
길 잃은 새가 날개를 접어도
군말 없이 솔가지를 벌려
가슴 따스한 사내를 맞이하고 싶은 마음이다
폭설이 소나무의 허리를 내리눌러도
맹세처럼 주먹 꼭 쥔 솔방울들,
폭풍이 몰아쳐도
송홧가루 날려 보내자는 그 약속 때문일까
바라만 보아도 늠름하다
벼랑아래를 날아다니는 송홧가루가
하염없이 사내를 기다리는
여자의 분 냄새처럼 향긋하다
강의 입
여자가 꽃떨기처럼 벼랑에서 몸을 날린다
벼랑을 굽이치던 강은 여자의 추락에 놀라
여자를 짐승처럼 날름 집어삼켰다
강은 여자를 품에 안고 으르렁거렸으나
여자가 죽은 사연보다
어떻게 강이 여자를 집어삼켰는지가 더 궁금했다
아, 물에도 입이 있었던가
방금 여자를 집어삼킨 그곳이 강의 입이었던가
평소에는 잔물결 치며 흘러가던 강물인데
저렇게 순한 강이 시커먼 입을 숨기고 있었다니!
오늘따라 강가에 서는 일이 왜 이리 두려운지
강물은 벼랑 끝처럼 위험스레 살지 말라고
죽비처럼 철썩철썩 제 몸을 때리며 흘러가는데
요양병원에 온 날
팔순의 아버지 늘 혼자였다
엄마 먼저 떠난 뒤 빈집 들락거리던 자식들
이것도 귀찮은지
cctv로 노인의 사생활 엿보고 있다
갈수록 밥 먹는 것을 잊어버리고
복도에 나가면 길을 잃을까 두려워
마침내 자식들은 노인을 덜컥 요양병원에 가두었다
겉으로는 눈물콧물 빼면서도
속으론 마음 속이는 것이 미안했던지
한동안 장작 같은 노인의 손을 어루만졌다
눈시울 적신 채 자식들을 떠나보낸 노인
집보다 이곳이 더 아늑한지 침대에 무덤처럼 누웠다
줄 무덤처럼 누워 있는 환자들 곁에서
무덤이 되어가는 노인
간병인이 노인의 입에 밥을 떠 넣어 줄 때도
죽음이 저승사자처럼 다가와
재깍재깍 시간을 재고 간다
범인
형사가 저수지를 범인으로 지목한 후
저수지엔 침묵이 흘렀다
풀밭 위에 낙엽처럼 누워 있는 신발 한 짝이
자살을 암시했지만
물결은 우울증에 걸린 듯 파랗게 질려 있었다
심심하면 저수지에 와서
턱을 괴고 먼 산을 쳐다보는 여자가
사라진 뒤에 저수지는 발길이 뚝 끊겼다
아직도 여자의 행방이 묘연해서
한번쯤은 현장 검증을 받아야 했다
흐린 날 한 무리의 형사들이 저수지에 왔지만
저수지는 수양버들 아래 우울한 그늘을 깔고
오직 알라바이만 주장하고 있었다
토란잎에 내리는 비
토란 밭에 햇살이 짱짱하다
토란은 빨리 비를 달라 잎사귀를 쫙 펼치지만
하늘은 쓸쓸히 뭉게구름만 쓸고 간다
저 뭉게구름이 뭉치면 빗방울이 될까
뛰어내리기라도 하는 걸까
목이 말라 헐떡거리는 토란잎
언제부터 넓은 잎 위에
청개구리 한 놈 올려놓고 주문을 왼다
지성이면 감천일까
이윽고 총탄처럼 토란잎에 내리꽂히는 비
토란은 목욕하듯 헤푸헤푸 잎사귀를 펼치며
움푹 들어간 배꼽에 빗방울을 주워 담는다
배꼽에 이르지 못한 빗방울은
수은처럼 굴러다니다
눈물처럼 벼랑 아래로 떨어진다
오래된 골목
골목은 늙어 있다. 대충 계산해도 마흔 해를 끌고 왔다. 골목을 거니는 사람들은 백발에 허리 굽은 늙은이들뿐이다. 매일 골목은 꿈을 꾸고 있다. 골목길은 뿌리처럼 각자의 집에 닿지만 산모가 있는 집은 웃음소리 밝다. 느린 골목을 신생아들의 울음소리로 채워주어야 한다. 아기들은 민들레꽃에 몰려드는 나비처럼 희망을 몰고 와야 한다. 골목 입구에는 떡집이 있고 떡집의 음식 냄새가 골목을 들쑤시며 퍼져나간다. 누군가 그곳에 깨진 유리창을 버리고 갔다. cctv가 없어 범인을 잡지 못했지만 나중에야 범인은 떡집 주인이라는 걸 알았다. 에이, 청결해야 손님이 오는 것을 모르나! 골목집에서 할머니가 꼬부랑거리며 나온다. 아직 아기가 태어나지 않는 골목은 저 할머니처럼 늙어간다.
방세
도로변 전봇대가 키다리처럼 서 있다. 발기한 사내처럼 새벽을 들어 올리고 있다.
방세 노습니다. 누군가 붙여 놓은 월세 쪽지, 맞춤법 띄어쓰기는 안중에도 없는 골목의 어느 무식쟁이가가 붙여 놓았겠지. 혹시 그 노인인지도 몰라, 방 하나 비었다고 나에게 넌지시 고백을 하던 이웃집 영감, 어두운 밤이 느린 고양이처럼 별빛을 몰고 올 때 우우, 바람이 불고 단독주택 텃밭에 심어놓은 옥수수 잎들이 칼 가는 소리를 냈지. 아마 나도 전봇대에 붙여 놓은 쪽지처럼 누군가를 그리워하고 있는지 몰라, 방세 노습니다. 대신 에이늘 차습니다 로 바꾸어 붙여놓고 놓고 싶은데
장대비 소리치는 밤
칠월의 비가 장대처럼 굵게 내렸다. 끊기지 않고 후려치는 빗방울이 하늘에 닿아 있겠지, 아마 별이 울고 있는지도 몰라. 장대로 하늘에 늘어진 별 나무를 후려쳐 떨어진 별들이 서러워서 지상에 뿌리는 울음인지도 몰라. 비는 양철지붕을 앙가슴처럼 때리는데 이때 오는 비는 아암, 굵은 장대비지. 그 옛날 엄마와 감을 따던 장대도 굵긴 굵었지, 감 따기 힘들어 장대로 감나무를 후려치면 주먹 감들이 우르르 떨어지는 소리, 그 소리 장대비처럼 아득히 비에 젖는 소리,
한때 우체부가 되고 싶었다
한때 우체부가 되고 싶었다. 한 송이 백합처럼 꿈을 꾸었지만 아직도 우체국 앞에 가면 그 꿈은 살아났다. 희미한 별빛처럼 멀리 떠나가는 자전거가 체인을 감는 소리 감질나서 자주 우체국에 가보았다. 우체국 앞 낡은 평상에 앉으면 삐걱 비명을 질렀지만 그 비명이 멀리 사라진 뒤에 꼭 우체부는 왔다. 자전거 뒤에 한 다발의 우편물을 싣고 자그락자그락 체인을 돌리며 왔다. 이제라도 묶어 놓은 꿈을 풀어야겠다. 산짐승이 그렁대는 두메산골에 갈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우체부 밖에 없었다.
틀니
물그릇 속에서 틀니가 웃는다
철렁철렁 틀니를 물에 씻을 때마다
벌어진 조개껍질처럼 웃는다
물그릇은 틀니의 욕탕
냄새나는 몸을 닦아주듯 틀니를 닦아주면
담장을 넘어가던 그 옛날의 웃음소리
엄마 지금 틀니 빼 놓고 어디 가셨나
잠이라도 드셨나
틀니는 엄마를 잃고서도
혼자 빙그레 웃기만 한다
밥그릇에 관한 예의
엄마는 밥을 먹고 나면 밥그릇을 살살 핥았다
숭늉으로 밥알을 씻어 후르륵 들이마셔도 좋으련만
엄마의 버릇은 고쳐지지 않았다
엄마가 밥그릇을 핥는 것은 오래된 버릇
팔순까지 살아온 세월이 고생으로 사무쳤기에
밥그릇에 붙은 밥 한 알이라도 신앙처럼 여긴다
밥그릇이 깔끔하게 반짝 빛났지만
그렇다고 핥는 것은 금물
보기 민망해 밥그릇을 뺐으면
사람은 밥심으로 산다
땅을 파봐라, 쌀 한 톨이라도 나오는지
감나무에 묶여 있는 백구도 그랬다
꼭 죽 그릇에 남아 있는 찌꺼기를 살살 핥았다
그것이 밥에 대한 예의라는 것을 아는지
죽 그릇을 핥아대는 백구의 혀가
꼭 엄마의 혀 같았다
개 짖는 소리
심야에 짖는 개는
공포를 주기 위해서가 아니다
사람이 그리운 것이다
아니 달과 달빛에 흔들리는
풀벌레 소리가 그리운 것이다
모깃불을 보고
짖는 개의 눈동자엔
그리움 한 됫박이 파랗게 담겨 있을 뿐
달이 덩치를 불리자
더 크게 짖는 개
더 깊이 빠져드는 밤
흔적
밤새 고구마 밭에 누가 들락거렸는지
발자국이 거대한 도장처럼 찍혔다
그 발자국만큼 덩치도 큰지
밭가로 쳐놓은 그물망도 속절없이 무너졌다
그놈은 그물방이 경계선이란 것을 알고 있을까
심야에 도둑처럼 와서
주인의 꿈과 희망을 박살낸 놈
그렇다고 밤을 향해 총구를 들이댈 용기도 없다
보름달이 밤새도록 고구마 밭에 후레쉬를 비쳐줘도
그것은 그놈을 쫓는 것이 아니라
그놈에게 길 밝혀 주는 것일 뿐
밭둑 너머로 뻗어 나간 고구마 넝쿨이 짓밟히듯
짓밟힌 희망에 가슴 아파하며
주인은 쑥대밭이 된 고구마 밭을 바라본다
노란 그늘
산수유가 내내 꽃 몸살을 앓았는지
그늘까지 노랗다
아니 황달을 알았는지
꽃눈까지 노랗다
꽃 몸살과 황달이 가을까지 계속되면
나뭇가지엔 붉은 해열제
숨차도록 열릴 거다
장대의 허리
돌담에 기대 늙어가고 있는 그의 허리가 반쯤은 탈이 났다 거뭇거뭇 비 맞은 자리가 삭았다 공중으로 들어 올리면 폭삭 내려앉을 듯 허리가 부실하다 용처럼 요리조리 허공 타고 올라가 나뭇가지 갉작갉작 간 보다 누런 감 한 개 꽉 물고 내려오던 아가리는 뭉툭해졌다 씹지 않으니 이빨도 닳아 없어지고 뒷방 늙은이처럼 돌담에 기대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돌담 옆 감나무에 누런 감이 자글자글 매달려도 부실한 그의 허리는 갈수록 병이 도졌다
인간에 대한 예의
이것은 너희를 위해 걸쳐 놓은 게 아니다
바지랑대를 곧추 세우면 팽팽해지는 빨랫줄
방금 제비들이 일렬로 앉아 수다를 떨고 갔지만
그렇다고 너희의 놀이터가 아니다
거친 풍파를 겪고 돌아온 가장의 젖은 옷 하나쯤
널어둘 자리 하나 남겨두는 것이
인간에 대한 예의가 아니겠나
빨랫줄에서 풍기는 물똥 냄새 지우기 위해
옷자락이 만국기처럼 펄럭였던 사실을 아느냐
비 그친 뒤 돼지 젖꼭지처럼
빗방울이 오종종 매달린 것도
빨랫줄에 아무나 앉으면 안 된다는
경고의 표시인 줄 모르나
풀
시든 풀들도 빗줄기 앞에서 피가 돈다
빗방울에 맞아 뿌옇게 부서지는
물안개 속을 걷듯이
희뿌연 내 시야 속에서
풀은 푸른 물결처럼 출렁인다
바람이 불어가는 길 따라 향기로 눕는다
비 젖은 수양버들 머리카락 말리는 강둑에도
물안개는 봄이 건너갈 길을 위해
푸르른 장막을 펼쳐 놓는다
엘리베이터 유령선
철문이 관 뚜껑처럼 닫히고
공중열차가 위로 올라간다
보턴은 사람들이 도착할 행선지를 눌러주지만
그곳까지 갈 동안에 서로는 침묵한다
간혹 바닥을 내려다보며
혹은 여자의 목덜미를 보며
그러나 짧은 순간 모두가 약속한 듯 생각에 잠긴다
철문이 잠깐 열릴 때
약속한 듯 얼굴 한번 쓱 스캔하지만
단지 그것뿐
사람들은 다시 생각에 잠긴다
생각은 생각을 낳고 꼭대기 층까지 올라간다
아마도 콘크리트 건물 속을 오르내리는 공중열차가
웜홀을 통과하는 유령선처럼
그렇게 건물 속을 빠르게 오르내리지
잠시 생각의 끈이 풀리자
공중열차가 잠깐 관 뚜껑을 활짝 연다
저 멀리서 흰 옷을 입은 여자들 머리 푼 채 달려온다
잠깐만요
꼭 관 속으로 흘러 들어오는 유령들처럼 섬뜩하다
엘리베이터 유령선
공중 열차의 문이 살짝 열리고 닫힌다
마치 관 뚜껑이 열리고 닫히듯
난 소리 없이 닫히는 열차 속에 덜컥 갇힌다
없던 공항장애가 생겨났나
누가 목을 조인다
자동으로 문이 열리고
누군가 내 머리채를 확 낚아채는데
맙소사, 꿈이었구나
밤새도록 해부학을 공부하다 눈 비비며 나온 길
시간은 새벽에 닿아
침묵으로 버튼을 누를 때
어인일인지 열차는 안치실 옆에 머문다
아직도 불 켜진 안치실
도대체 저곳을 맘대로 들락거리는 간 큰 이는 누구일까
죽은 엄마의 얼굴을 보지 못하던 내가
해부학 의사가 된 건 운명이었다
운명은 그렇게 무서움도 이기는 거라고
또 생각에 잠길 때
관 뚜껑이 열리듯 다시 열리는 철문
새벽을 밟으며
걸어가는 내 구두 속에서
여자의 기괴한 울음소리가 들린다
6월 요양원
요양병원에 들렀더니
미라처럼 바싹 마른 아버지
니 엄마 어디 갔나 하시며
눈물 글썽이는데
혹시 기억 돌아오지 않았나 싶어
옛날 낫질하던 고향 들판
기억나시나 물었더니
이젠 가야지, 가야지
어디로 가요, 아버지
산으로 가야지 하시며 눈시울 붉히신다
혹시 어제 떠난 엄마 소식 아는지 몰라
가슴 졸이고 있을 때
얼굴 뽀얀 간병인 달려와
아버지 입에 밥 떠 넣어주는
인정 많은 6월
창밖에 꽃잎 흩뿌리며
비바람 거칠게 몰아치는 소리
어죽
온몸 갈려 걸쭉한 죽이 된다 해도
서로 뒤엉켜 살 비비던 옛날을 잊지 않으리
바케스에 담겨 짠 소금에 눈 못 떠
발버둥치는 그날을 잊지 않으리
요리조리 세월을 빠져 다니며
간사하게 살지 않았어도 받지 않았을 벌 한 줌
그 죄로 사람들에게 온몸 통째로 바치는 공양
집착
저것들은 이제 사랑을 잊었나보네
봄물 같은 그리움도 잊었나 보네
사람만 보면 바짓가랑이 붙잡고 늘어지는 심보가
그 옛날 나에게 집착하던 그녀를 닮았네
끝순이라는 이름을 가진 여자
파뿌리 같은 머리에 파 대궁 같은 몸매 때문에
한 번도 남자 맛보지 못한 여자
다행히 늙은 사내 만나 알콩달콩 사랑에 빠지다가
엄마에게 들켜 농약 마시고 목숨 끊은 자리에
까칠까칠 솟아오른 도깨비풀
뿔 같은 씨앗을 무소처럼 들이밀며
바짓가랑이 붙잡고 늘어지는데
밭둑에 혼자 앉아
그녀의 집착을 떼어내는 가을
버들잎과 술잔
달빛이 수정처럼 밝다 해도 저수지를 훤히 밝힐 수는 없소
저수지에는 그녀와의 밀월이 새겨져 있소
달빛 출렁이는 술잔에도 그녀의 웃음이 떠돌고 있소
넘쳐흐르는 술에는 그녀의 주름이 자글자글 맺혀 있소
난 그녀의 주름을 마실 수 없소
태풍에 버들잎이 다 떨어진다 한들 놀라지 않겠소
뿔
폐가의 마당을 벗어나니
도깨비들이 내 바짓가랑이에 옮겨 붙었다
까만 뿔들이 옷자락에 박혀
내 발걸음을 붙잡는다
집착일까 그리움일까
마당가에 멀대처럼 서서
자나 깨나 기다린 것이 내 바짓가랑이었다
도대체 넌 누구의 혼령인가
헤어지지 말자고
바짓가랑이 움켜쥐던 여자가 생각나는 밤
난 옷자락에 박힌 저것들을 털어내며 중얼거린다
이제 가라, 멀리 멀리 떠나거라
아무리 네 신세 괴로워도
사람들 옷깃에 붙어 괴롭히지 말아라
그래도 네가 피운 꽃들은
노란 게 정이 간다
나무의 손금
나뭇잎에 나무가 걸어온 길이 있었다
전생과 후생이 있었다
점쟁이가 손금을 보며
내 불안한 앞날을 알려주듯
나도 나뭇잎을 읽으며
그의 미래를 점쳐본다
연두에서 단풍이 들 때까지
지치면 나뭇잎 번데기처럼 말아
겨울의 품속에 드는
나무의 비애가
나뭇잎에 손금처럼 박혀있었다
풀벌레
그들은 풀더미 속에서 맑은 소리를 냈다
먼지 낀 날개를 풀잎으로 닦은 것인가
칼날 잎으로 먼지 쌓인
날개의 현들을 반짝이게 만들었을까
봄비 맞으면 내장까지 오그라들 듯
은구슬처럼 굴러가는 소리들
그들의 울음소리 애절해서
별들도 눈망울 반짝이며 아래를 내려다본다
그들은 어떻게 이승의 험한 다리를 건너 여기까지 왔을까
그들의 울음 속엔 무슨 곡절이 있는 듯했다
가을이 지나면 곧 이곳을 떠나야한다는 소문에
어딘가에 숨어 집단 통곡을 하는 것 같았다
장마
집을 뜨고 싶은 마음 간절해서
비 뿌리는 창가에 죽치고 앉았다
빗줄기는 세차게 가슴을 긋는데
내 마음은 대문을 열고 줄행랑친다
지금쯤 밭둑 밝히던 홍시 떨어지지 않았을까
밭 매던 엄마 감나무 밑에 앉아
비 그치기를 기다리고 있을까
팔자 좋은 아버진 지금쯤
어느 주막에서 막걸리를 들이키고 계실까
게으른 고양이 하품 쩍쩍거릴 때
마당에 떨어진 가랑잎 하나
빗물 따라 여기저기 떠돌며 방황을 한다
저것이 나를 태우고 하염없이
강물 따라 떠나가는 쪽배였으면
감자
땅 속의 보물을 채굴하듯 감자를 캔다
호미로 흙 슬슬 긁어내면서
여린 살갗 다치지 않게 살살
풀숲 적시는 이슬비처럼 살짝살짝
담 위를 지나가는 고양이처럼 느릿느릿
옹골차게 매달린 감자를 캔다
대처로 떠난자식들 생각에
눈물 찔끔거리다가
콧물 팽 풀다가
애들아, 너희들 감자처럼 어울려 살아라
굶지 말고 감자처럼 포동포동하게 자라라
발톱
아내 앞에 발톱을 내밀었다
냄새만 나도 코를 막던 아내가
오늘따라 저리 다정하다
발톱을 깎을 때마다
파편이 벼룩처럼 튄다
발톱이 튀는 거리만치
나를 멀리했던 아내
늙어보니 알겠다
눅눅한 신발 속에서
거친 바닥을 눌러댔던 발톱처럼
아내의 생도 저랬을까
발톱을 깎으면서 아내는 눈물짓는다
툭툭 튀는 발톱처럼
아내의 눈물방물이 툭툭 땅에 떨어진다
내시경
몇 해 만에 내시경 검사를 받았다
그것도 위와 대장 두 군데
마취도 없이 위 아래로
대가리를 들이미는 내시경
목과 항문의 통증이 사라지길 기다려
모니터 화면에 나타나는 뱃속의 고요
의사가 눈길로
내시경이 다녔던 길을 추적한다
용케도 견디셨군요
완전 폐허입니다
그냥 덮어 놓으세요
세월이 말해줄 겁니다
정비소에서
만신창이가 된 차가 목쉰 소리를 낸다
어느 태풍의 계곡을 달려왔는지 폐차 직전이다
보닛은 흉측하게 찌그러져 있고
부품은 빠져나와 기름이 줄줄 샌다
살고 싶다고 구조신호를 보내던 미등은
별안간 꺼지고
신나게 뽕짝을 뿜어대던 라디오는
엿가락처럼 늘어져 청승을 떤다
노련한 기사가 차 속을 훑어보더니 혀를 끌끌 찬다
갈 곳은 차들의 무덤이라며
길에서 주운 국화꽃을 보닛에 꽂아준다
벼
황톳물이 논둑을 넘어가는 소리처럼
벼는 바람결에 몸을 뒤채며 흔들린다
벼 포기 꼿꼿하던 시절에도
언젠가는 온몸 황톳물 들어
논둑을 넘어다보게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면 농부들이 날 벼린 낫으로
뎅강뎅강 모가지 쳐내며
땀에 젖어 웃는 얼굴을 보게 되리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못줄에 맞춰 겸손하게 고개 숙이고 있는 것들
새들도 벼들의 겸손에 놀라
무작정 부리를 대지 않는다
흔적 1
빈 셋방에 도둑이 다녀간 흔적이 있다
밤늦게 일하고 온 여자 기겁하며
나를 붙들고 벌벌 떠는데
방에 들어가니 방바닥에 담뱃재 떨어져 있고
이리저리 뒤진 서랍에
퀴퀴한 담배 냄새 자욱하다
전에 이삿짐을 날라주던
전 남편이 아닐까 의심을 하는데
여자가 내 마음을 알았는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 남자는 집에 올 때 꼭 전화를 하고 온다고 했다
그렇다면 도둑이 방에 들어온 경로가 궁금하다
방문 굳게 잠겨 있어
도둑이 부엌 쪽창으로
검은 손 내밀고 문을 따지 않았을까
머릿속엔 온갖 억측이 난무하는데
여기선 무서워 잠 못 자겠다며
언니 집으로 종종걸음 치는 여자를 보며
파출소 전화번호를 누른다
득달같이 달려온 순경들
여자가 오면 도둑이 만진 물건 절대 손대지 말라고
그래야 지문을 뜰 수 있다며 신신당부하는데
달빛이 섬뜩하게 내 목덜미 낚아채는 순간
머리카락 쭈뼛해지는 밤
흔적 2
엿새 만에 궁금증이 풀렸다
지문을 떠간 순경들에겐 소식 없고
내 목덜미를 낚아챘던 달빛도 희미해졌다
언니 집에서 자고 온 여자
쓴 웃음 지으며
소란스러웠던 그날의 흔적을 풀어내고 있었다
그날 아침 무언가를 찾고 있다가
정신 나간 듯 서랍을 뒤지다가
속상해 담배 한 개비 피워 물다가
출근 시간 늦어 헐레벌떡거리다가
깜박하고 방문을 잠그지 않았다는데
그렇다면 그날의 범인은 누구일까
잠시 도망쳤던 여자의 기억일까
봉숭아
꼬투리를 잡지 마세오
나쁜 짓 했다고
꼬투리를 잡으면 툭 터질지 몰라요
꼬투리 터지면 큰 일 나요
그 속에 쟁여진 울분이
씨알처럼 쏟아져 나오면
마당은 날아온 새떼들로 소란해져요
울분을 참는 소리들이
허공으로 퍼지면
어느덧 서리는 내리고
꽃대는 늙어 푹 주저앉아요
아무리 울분이 하늘을 찔러도
절대 꼬투리 잡지 마세요
요즘 같은 세상엔 양보가 필요하지요
꼬투리만 잡다 툭 터지면
득볼 자는 아무도 없지요
따스한 말들
자, 밥그릇 나오십니다
어느 식당에선가 들었던 말
그릇에 존대를 하는 그녀에게
이유를 물었더니 위대하지 않나요
밥을 담는 그릇이
얼마나 따스한가요
따스하게 하는 것은 위대하지요
김 모락거리는 두엄덩이도 그렇고
얼음장 녹이는 햇살도 그렇고
고목에서 악수 청하는 새싹도 그렇고
그것들이 아버지, 어머니만 못할까요
앞으로는 따스한 것들에게
존칭어를 붙일 겁니다
두엄덩이 님, 햇살 님, 새싹 님
들을수록 따스한 말
자, 밥그릇 나가십니다
꽃가루 알레르기
눈동자에 핏발이 서서
안과에 갔더니
눈동자에 진하게 꽃물이 들었단다
방금 전 창밖에 어룽지는 목백일홍을
한참동안 바라보다가
꽃물이 들었다는 것인데
어린 날 손톱에 물들였던 봉숭아 꽃물만큼 진했다
꽃물은 손톱에만 드는 것이 아니라
눈동자에도 든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굳은살
김 씨가 목장갑을 끼면
장갑의 반이 헐렁거린다
반 정도 잘려나간 손가락이
바람 빠진 풍선처럼
공간을 만들기 때문이다
온전치 못한 손가락으로도
김 씨의 손놀림은 노련하다
손을 움직여 기계를 조립하는 것쯤은
드릴로 피스 몇 개 박는 것쯤
누워서 떡먹기라는 듯
김 씨는 목장갑을 살며시 벗어 보여 준다
순간 잘려나간 손가락에서
슬픔의 그림자가 묻어난다
손가락을 에워싼 뭉툭한 살들
저렇게 어설프게 굳은살이
성한 손가락처럼 김 씨 가족들을
먹여 살렸다는 사실이 눈물겨웠다
시렁에 걸린 메주
딱딱한 콩꼬투리에 싸여있을 땐 몰랐지만
꼬투리 터져 사방으로 튈 때도 몰랐지만
쩔쩔 끓는 아랫목
삼베보자기에 쌓여 메주로 태어날 땐
살만 난 듯 구수한 냄새 온방에 지천이다
열매처럼 시렁에 매달려
중력을 이기고도 거뜬한 것은
묵사발 될 때까지 서로 손잡고 힘이 되어준
콩알들의 단합이었다
전생을 딱딱한 콩으로 살 땐 몰랐지만
시렁에 매달리고서야
알게 된 콩의 실체.
제 몸 속에 구수한 냄새를 숨기고도
한여름 잎사귀를 흔들어 무더위만 쫒던
그 눈물겨운 사랑을 뭐라고 해야 하나
콩에게 있어 사랑은 구수한 냄새인가보다
메주로 태어나기 위해
답답한 사각의 틀 속에 갇혀
고난과 실연의 나날을 견뎠던 저 몸,
만져보니 갑충의 껍질처럼 딱딱하다
세상의 부대낌 같은
아스라한 중력을 지겹도록 견뎌야
제 몸 황토빛으로 붉어지는 법이다
붉어지고 붉어지다 지쳐
온몸 파랗게 곰팡이꽃이 필 때쯤
메주는 제 한 몸
열탕지옥 속에 던져질 운명이란 걸 안다
펄펄 끓는 뚝배기 속에서
또 한 번 된장으로 태어나는 아픔을 겪으면서도
온전히 세상에 내놓는
저 무한정의 사랑,
저 사랑이 바로 메주의 마음이다
딱딱한 콩 속에 들어앉아
보이지 않는 힘으로
콩꼬투리를 열어젖히던
연하디연한 떡잎의 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