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피는 봄날 진들 풍경
꽃피는 봄날이지만 날씨는 초여름을 치닫고 있다. 달려가는 차 속으로는 아스팔트에 녹아버린 열기가 훅훅 몰아쳐 들어온다, 콱콱 숨통이 막힌다. 고개를 들어보니 산자락은 온통 꽃물에 젖어 화사하다. 진달래며 산벚꽃이 산자락 드문드문 수를 놓아 알록달록 꽃방석을 깔아 놓은 모습이다. 이런 날 영동으로 달려가는 기분은 남다르다. 남들은 산으로 들로 꽃구경을 간다고 야단이지만 난 아내와 함께 산촌의 외딴집으로 달려가는 길이다. 산촌의 외딴집은 부천 누나 네가 오래전에 사놓은 오래된 농가주택이다. 집 몇 채가 옹기종기 모여 있는 진들이란 마을에서 산길을 따라 한참 떨어진 곳에 주택 두 채가 자리 잡고 있는데 그중 한 채가 사돈집이고 한 채가 누나네 빈집이다.
누구라도 이 빈집에 오면 탐을 낼만하다. 집을 빙 둘러싼 돌담에는 무궁화와 보리수나무, 골단추, 무더기로 한 가족을 이루고 있는 산국들이 지천이다. 이것들이 계절에 맞춰 꽃망울을 터뜨리는 날에는 몰래 꽃씨를 피운 황화코스모스와 더불어 주변은 온통 꽃물결로 출렁거린다. 누나네는 이 빈집 뒤편 밭에 취미삼아 야콘 농사를 짓고 있다. 평소에는 부천에서 생활하다가 틈만 나면 주말을 이용해 이 빈집에서 도시생활에 짓눌린 스트레스와 피로를 풀고 가곤 한다.
한 달 전 부천에서 전화 연락을 해온 누나가 돌아오는 주말에 야콘 농사를 거들어 달라고 부탁한 날이 오늘이다. 형식적으로는 야콘 농사를 거들어 달라는 부탁이지만 실상은 하룻밤 묵으면서 먹고 노는데 목적이 있었다. 그래서 바람도 쐴 겸해서 쾌히 승낙을 하고는 달려가는 길, 동행에는 아내 말고 산내에 사는 셋째 누나도 일원이 되었다. 거의 한 시간 반을 달려 진들마을의 빈집에 도착하니 부천 누나네는 벌써 와있고 공교롭게도 우리와 함께 도착한 문수형님 부부가 합세하자 빈집은 금세 떠들썩한 분위기가 되었다.
점심을 걸판지게 먹고는 남자들은 야콘을 심을 준비를 서둘렀다. 우리 한발 앞서 안마당을 가로 질러 밭으로 들어간 경운기는 연신 엔진 소리를 뿜어내느라 야단이다.
경운기를 따라 도착한 밭은 한눈으로 보아도 정갈하다. 고랑을 따라 흙을 쌓아올린 두둑을 덮어 씌운 검은 비닐들이 일렬로 늘어서 있는 모습이 자연이 만든 작품 같다. 농사꾼 부부가 마지막 두둑에 구멍을 내고 야콘 씨를 심는 걸 보니 농사가 거의 마무리 단계에 접어 든 듯하다. 그러고 보면 밭을 임대해 농사를 짓는 사람들이 더 부지런한 법이다. 넓은 밭 전체에 야콘 농사를 짓기가 힘들어 누나네가 밭 한 귀퉁이만 남겨놓고 빌려준 것인데 그들은 벌써 야콘 농사를 끝낼 준비를 하고 있다. 매형과 문수 형님이 두둑을 내는 것이 답답한지 농군 아내가 한마디 한다.
“후치로 갈면 편한데, 후치 없어요”
후치는 옛날에 순전히 소의 힘만을 빌려 밭을 갈던 농기구이다. 말하자면 쟁기다. 소를 앞세워 쟁기를 끌면 아무리 험한 비탈밭이라도 금방 갈아엎어 밭을 가는데 여간 수월한 게 아니었다.
그러건말건 남자들은 고랑을 따라 흙을 끌어올려 두둑을 만드느라 여념이 없다. 초여름 문턱에 들어선 날씨처럼 무더워서 조금만 움직여도 훅훅 땀냄새가 진동한다. 흙의 열기 때문에 남자들은 손이 더 느려지고 쉬기를 밥 먹듯이 한다. 삽질 한 두 번 하고 쉬고 괭이질 몇 번 하고 멀리 산을 바라본다. 답답한 김에 나 역시 함께 두둑 쌓는 일을 도와주고 싶지만 마음뿐이다. 지난 봄 다친 팔의 후유증 때문에 힘들여 삽질을 하다보면 어깨 죽지가 빠질 것처럼 통증이 몰려온다. 그래서 그냥 보는 것도 미안해서 비닐 덮을 때만 도와주기로 하고 할 일 없이 서성거리기만 할 뿐이다. 산을 보니 산자락 전체가 봄빛이 완연하다. 산벚꽃과 싸리꽃이 연두빛 산자락에 번진 젖빛 같은 꽃물을 바라만 모아도 눈이 감길 지경이다. 무더위 속으로 휘날리는 꽃향기에 취한 여자들의 목소리가 시끄럽다. 누나들과 아내가 한데 어울려 나물을 캐러 다니느라 정신이 없다.
연분홍 진달래와 새하얀 산벚꽃 사이에서 언뜻언뜻 비치는 여자들의 옷들이 너무나 선연해서 그 옛날 산으로 들로 나물을 캐러 다니던 처녀애들이 환생을 한 것만 같다. 지금 그녀들의 마음속엔 그 옛날 어린 시절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간절한지도 모른다. 차라리 그 시절이 좋다고 할런지도 모른다. 세월이 흐를수록 삶은 편해지지만 메말라가는 인정을 탓할지도 모르겠다. 한데 어울려 다니는 여자들의 모습이 그림처럼 선명해서 내 마음은 자꾸만 옛날로 되돌아가기만 하는데 그때서야 두둑 쌓기를 끝낸 남자들이 비닐 씌울 준비를 하고 있다. 어깨 통증 때문에 내가 할 일은 두둑에 비닐을 덮어씌우는 일이다.
원통형 막대기에 한드름 감긴 비닐을 두둑을 따라 덮어나가면 뒤에서 매형과 문수 형님이 비닐자락이 바람에 날리지 않도록 흙을 덮으며 따라온다. 그렇지만 일은 여간 더딘 게 아니다. 하기야 도회에 사는 사람들이 반거충이로 농사를 지으니 그럴 만도 하다. 해거름이 되어도 진척이 없자 누나네 밭을 임대해 야콘을 심던 농사꾼이 경운기를 몰고 와 밭에 시원하게 고랑을 낸다. 경운기에 쟁기를 달아 엔진 힘으로 밀고 나가니 일의 속도가 숨 돌릴 새도 없이 빠르다. 그 고랑에서 흙을 퍼 올려 두둑을 만들고 비닐을 덮어씌우기를 끝내니 한결 마음이 가볍다.
해거름이 되니 바람이 선선하다. 초여름 같은 한낮의 날씨는 달아나고 그늘 한 장을 넓게 깔아주는 산의 풍경이 적막하다. 내일 심을 야콘 씨를 자르며 농사거리를 준비하던 누나가 보여 줄 것이 있다며 우리를 비탈 밭으로 안내했다. 늙은 감나무와 호두나무들이 들어찬 밭은 묵정밭이다. 삽과 괭이를 매고 함께 올라온 매형과 문수 형님이 무언가를 부지런히 캐내고 있다. 생전 듣지도 보지도 못한 아스피오란 식물이다. 흙을 파낼수록 동글동글한 알뿌리들이 실뿌리에 줄줄이 붙어 밖으로 나오는데 그 모습이 꽤나 신기하다. 문수형님은 알뿌리를 3개 이상 먹지 말라는 부탁이다.
성분이 인삼과 같아서 욕심을 내면 탈이 난다는 이유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점심 때 먹은 아스피오 맛이 그만이다. 숯불에 구워 속이 팍팍해진 구수한 밤을 먹는 맛이다. 그 윗쪽은 온통 더덕 밭이다. 연하게 줄기를 뻗어 올린 크고 작은 더덕들이 빽빽이 한 가족을 이루고 있다. 일부러 더덕 씨를 뿌려 기른 것이라며 시간이 날 때 옮겨 심을 거라며 누나는 걱정이 태산이다. 산그늘을 안고 자란 더덕의 뿌리 냄새가 진하다. 내일 대전으로 돌아갈 때 더덕 몇 뿌리를 캐가라는 주문이다. 안 그래도 꽃나무 몇 그루 덩그러니 꽃을 피운 화단에 나물 몇 종류 심을 작정인데 더덕이 한 가족이 되면 화단은 더 싱그럽게 보일 거다. 비탈 밭에서 아스피오와 더덕 냄새에 취하고 살랑대는 꽃 냄새에 젖다보니 해는 설핏 꼬리를 감추었다. 외딴집에 짙은 어둠으로 물든 적막이 몰려온다. 술이 취한 문수 형님이 경운기 엔진처럼 그렁그렁 코를 고는 사이 오줌이 마려워 밖에 나왔더니 쟁반 같은 달이 산과 들을 적막한 달빛으로 채우고 있다. 달빛이 서러워 소쩍새 울음조차 속을 아리게 파고들었다. 역시 소쩍새 울음은 산촌에서 들어야 제 맛이다. 언젯적 울음이던가. 도회에 살면서 한번도 들어보지 못한 저 울음소리, 부귀와 공명도 저 서러운 소쩍새 울음소리엔 한갓 부질없는 짓임을 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