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갑을 찬 고슴도치
기억과 추억 사이/손바닥 동화
2005-12-25 16:10:42
수갑을 찬 고슴도치
고슴도치 굴 앞에서 잠을 깬 너구리 형사는 아함 하고 기지개를 쭉 폈어요. 앞발을 쭉 내밀고 털을 탈탈 털었더니 뒹굴며 자다 뭉친 낙엽이 허공으로 흩어졌어요.
너구리 형사는 매우 피곤했나 봐요.
범인을 잡는 형사의 신분이라 며칠 동안 뜬눈으로 밤을 새우는 일이 많았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어저께 고슴도치 굴 앞에서 잠복근무를 서다가 그만 깜빡 잠에 곯아 떨어졌어요. “아차차, 이거 큰 일 났네, 놈이 도망을 갔겠는데” 하늘을 보니 10시가 넘은 것 같았어요. 이미 동쪽 산을 솟구쳐 오른 해가 뜨겁게 햇살을 뿌려대고 있었거든요. 간혹 낙엽들이 바삭바삭 마르는 소리를 냈어요. 너구리 형사는 옆구리에 찬 수갑을 만지작거렸어요. 그런데 고슴도치란 놈을 잡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어요. 아주 변장술에 능해 너구리 형사의 날카로운 눈을 피해 잘도 도망을 다녔기 때문이지요. 사실 너구리 형사는 고슴도치를 거의 10일 동안 쫓아다녔어요. 천연기념물을 잡아먹은 죄 때문이지요. 동물의 세계에도 법이 있었거든요. 도마뱀이나 개구리, 달팽이는 잡아먹어도 되었지만 아주 귀한 천연기념물은 되지 않았어요. 바로 수달을 잡아먹은 죄 때문에 고슴도치는 쫓기는 신세가 되고 말았어요. 너구리 형사는 고슴도치 굴 앞에 주둥이를 바싹 들이 밀고 킁킁 냄새를 맡기 시작했어요. 고슴도치가 간신히 몸만 들이밀 정도로 비좁은 굴이라 도저히 굴속으로 들어갈 엄두가 나지 않았거든요. 그러나 아무런 냄새도 나지 않았어요. 어저께 고슴도치가 분명히 굴속으로 들어간 것을 보았는데 아마 너구리 형사가 깜박 잠이 든 틈을 타서 굴속을 빠져 나와 도망을 친 것이 분명했어요. 너구리 형사는 앞발을 머리에 갖다 대고 깊은 생각에 잠겼어요. 그러다가 손뼉을 탁 쳤어요. 고슴도치가 밤나무 골로 숨어든 것이 분명했거든요. 점점 포위망이 좁혀 드는 것을 눈치 챈 고슴도치로서는 그래도 안전하게 몸을 피할 수 있는 곳이 밤나무 골밖에 없었거든요. 그 숲에는 주먹만 한 밤송이들이 많아서 고슴도치가 몸을 말아 밤송이로 변장하기가 제일 좋았으니까요. 너구리 형사는 곧장 밤나무 골로 향했어요. 밤나무 골까지는 무척 멀었어요. 험한 산 한 개를 넘고 강줄기를 건너면 바로 감나무 골이 나타나지요. 너구리 형사가 밤나무 골에 도착하자 날이 어두워졌어요. 주먹만 한 밤송이들이 주렁주렁 매달린 수백 그루의 밤나무들이 울창하게 가지를 뻗은 채 하늘을 가리고 있었어요. 늦가을이라 낙엽도 많이 쌓이고 밤송이들이 수없이 흩어져 있었어요. 밤송이들 틈에 분명 고슴도치가 숨어 있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어요. 너구리 형사는 주먹을 불끈 쥐었어요. 고슴도치가 아무리 밤송이로 변장을 잘해도 이번에는 놓치지 않을 작정이었어요. 밤나무 골을 샅샅이 뒤져서라도 꼭 찾아내고야 말겠다고 다짐을 했어요. 너구리 형사는 밤나무 골을 훑기 시작했어요. 조심조심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낙엽들이 바삭바삭 소리를 냈어요. 너구리 형사는 골짜기로 점점 포위망을 좁혀 들어갔어요. 낙엽 위에 깔린 밤송이들은 물론 가지에 매달린 밤송이까지 샅샅이 훑고 지나갔어요. 그런데 그 순간 너구리 형사는 바싹 긴장을 하며 발걸음을 멈추었어요. “음, 냄새가 나” 너구리 형사의 눈빛이 매섭게 빛났어요. “틀림없어, 저 놈이 고슴도치가 틀림없어” 너구리 형사의 눈길이 머문 곳에 둥그런 물체 하나가 들어왔어요. 너구리 형사는 가만가만 다가가 그 물체를 자세히 들여다보았어요. 모양이나 색깔이 약간 다른 걸 봐서는 밤송이가 아닌 것이 틀림없었어요. 주먹만 한 몸에 흰색과 갈색 가시들이 뒤덮여 있었는데 간혹 팔딱팔딱 숨을 쉬기도 했어요. 게다가 체온도 따스하게 느껴졌어요. “음” 너구리 형사는 팔을 걷어붙이고 한쪽 손에 수갑을 쥐었어요. 그러더니 갑자기 날쌘 발로 그 물체를 세차게 걷어찼어요. 무작정 손을 댔다가는 억센 가시에 찔려 상처를 입기 쉬웠기 때문이지요. 바로 그때였어요. 밤송이처럼 똘똘 말았던 몸이 풀어지더니 절룩절룩 산 능선이 있는 골짜기로 달아나기 시작했어요. 그 놈은 바로 고슴도치가 틀림없었어요. 얼마를 못 가서 고슴도치는 푹 쓰러졌어요. 너구리 형사는 고슴도치의 팔에 찰깍하고 수갑을 채웠어요. 얼굴 가득 미소를 띠며 밤나무 골을 내려가는 너구리 형사의 발걸음이 날아갈 듯 가벼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