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은 촌스러워도 얼굴은 매혹적인---명자꽃
기억과 추억 사이/야생화 이야기
2006-04-13 21:55:29
요즘도 맘에 들지 않는 이름 때문에 개명신청을 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내 고향에서도 이름 때문에 빚어지는 에피소드가 많았다. 그 당시 시골의 어디든 거의 다 비슷하겠지만 왜 그 땐 아이들의 이름을 그렇게 흔해빠지고 매력없게 지었는지 알 수가 없다. 내 고향만 해도 그렇다. 끝순이, 붓돌이, 창수, 순자, 옥순이, 숙자, 명자 등, 촌스러운 이름이 대부분이다. 남자들은 보통 이름을 고심한 끝에 지었지만 여자들은 아무렇게나 지었다. 부르기 좋으면 그만이엇다. 남존여비나 남아선호사상이 이름까지 영향을 미친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매력없는 이름도 자주 부르다 보니 친근해졌다. 아무 탈없이 통용되었다.
그 중에도 명자라는 이름이 유독 내 가슴을 쳤다. 마음 속에서 명자를 떠올릴 때마다 누나 친구인 명자 누나가 생각났다. 중학교 2학년때 고향을 뜬 이후로 아직 한번도 본적이 없지만 얼굴만은 내 기억 속에 또렷이 남아있었다. 매혹적은 아니었지만 청초한 얼굴이었다.
바로 명자꽃이 그랬다. 촌스러운 이름 중에 유독 명자라는 이름만이 꽃이름에 붙는 영광을 누릴 정도로 명자꽃은 눈길을 사로잡도록 청초했다.
“조숙”, “평범”이란 꽃말을 보아도 명자꽃은 많은 요란한 꽃들중에서도 조숙한 것 같았고 그렇다고 튀지도 않아 평범하게ㅡ보였다.
둔산의 샘머리공원을 돌다가 만난 명자꽃, 화단 전체를 빽빽이 채운 명자나무가 망울망울 꽃망울을 터뜨린 풍경을 보고 괜한 향수에 젖어들었다. 정신없이 뛰놀앗던 시골의 들판이나 그리운 친구들보다 괜시리 명자누나 얼굴이 아른아른 떠올라 견딜 수 없었다. 명자꽃은 이렇게 내 마음을 싱숭생숭하게 만들었다.
명자꽃은 집안에 심지 않는다는 속설이 잇다. 봄날 명자꽃이 활짝 꽃망울을 터뜨리면 동네여자들이 콩닥콩닥 가슴이 뛰고 바람이 나 집을 뛰쳐나간다는 말이 있다. 아가씨 나무라고 부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명자꽃에 눈길을 맞추고 있으려니 벌들이 웅웅 난리를 치며 정신없이 들락거렸다. 수줍게 오무린 꽃잎속으로 풍덩 빠져 노란 꽃가루를 다리에 뭉쳐서는 꽃과 꽃 사이를 바쁘게 들락이고 있다.
흐느적흐느적 온 몸이 무너져 내릴 것 같은 한낮, 갑자기 몰아치는 불볕 햇살 속에서 훗날 기약한 열매를 맺기 위해서 벌들은 분주하게 날개를 털었다. 그 날개의 속도와 떨림으로 명자꽃은 열매를 향해 쉼없는 변신을 계속하리라. 명자열매가 익으면 그것으로 과실주를 담아 먼데서 온 손님과 밤새도록 대작하리라.
산당화, 보춘화라고 하는 명자꽃은 바라볼수록 눈이 부셨다. 꽃망울이 봉긋하다 싶으면 그 다음 날 무성한 잎 사이에서 함초롬한 얼굴을 내밀었다.
명자꽃을 보면서 떠오르는 단상이 있다. 웬만하면 개명에 신중을 기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남이 불러 크게 손해를 보지 않거나 웃음거리가 되지 않는 이상 부모가 지어준 이름을 간직하는 것도 효라는 생각이 들었다. 부모나 가족들의 입내가 묻은 이름들이 어느 순간 미끈한 이름으로 바뀐다고 생각해보라. 본인은 맘에 들지 모르지만 어릴적의 향수가 말끔히 사라지는 황망함을 느낄지 모른다. 이름이 촌스러워도 사람들의 눈길을 사로잡는 명자꽃을 봐도 이름이 출세나 입신양명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