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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청호반이 비에 젖어도 갈길은 간다
기억과 추억 사이/발길 닿는 데로 여행
2010-08-13 15:13:00
지난 봄 지리산 둘레길을 걷고 난 후로 또 한 번 지리산을 찾아보겠다고 다짐한 일이 있었다. 포근한 봄볕 아래 펼쳐진 둘레길 주변의 풍광이 너무 황홀해 아직도 내 마음속에서 멋진 한 장의 사진으로 머물러 있다. 땀 뻘뻘 흘리며 고산준령을 타는 것보다는 한적한 길을 걸으면서 사색도 즐기고 주변 풍광에 몰입하는 일은 여유와 느림을 추구하는 이들에게는 더없이 즐거운 일이다. 대전 주변에도 지리산 둘레길 같은 코스가 생겨 많은 사람들로부터 각광을 받고 있다.
숲에 묻힌 대청호의 호반을 걸으면서 야생화와 주변 풍광을 감상하는 일은 한 주 동안 업무에 시달린 사람에게는 더없이 좋은 코스가 되고 있다. 허수아비 마을로 유명한 찬샘 마을에서 시작하여 성황당, 무수동 반환점, 성치산성을 거쳐 돌아오는 10킬로의 여정은 걷기로는 다소 힘들고 지칠 수 있는 길이지만 한번 걷고 난후의 청량감은 지리산 둘레길에 못지않다.
찬샘마을의 물레방아가 휴식을 취하고 있다
찬샘 마을에 조성해 놓은 연못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차가 찬샘 마을에 도착하여 일행을 쏟아놓자 확 풍겨오는 밤꽃냄새와 함께 잔뜩 찌뿌린 날씨가 마음을 우울하게 했다. 하늘을 꽉 채웠던 흙빛 구름장은 여차하면 폭우라도 퍼부울 듯 무섭게 용트림을 치고 있었다. 정면으로 아득히 보이는 산꼭대기에는 급박한 날씨를 예감해주듯 물에 젖은 산안개가 뭉실뭉실 걸쳐 있었다. 그러나 이왕 도착한 이상 여기서 물러 설 수는 없었다. 일행들은 저마다 비옷을 걸치거나 우산을 챙겨 갑작스럽게 몰려올 폭우에 대비할 태세를 갖췄다.
찬샘 마을에서 눈길을 끈 것은 작은 연못에 조성해 놓은 물레방아다. 물레방아는 현재 쉬고 있지만 물위에 떠서 아늑히 잠든 수련과 함께 평화로운 마을의 풍경에 한몫을 더했다. 찬샘 마을에서 숲 속으로 이어지는 콘크리트 포장길로 접어들었다. 흙길이 아니어서 정감이 묻어나지는 않지만 한질로 솟구친 풀숲에서 눈부신 빛깔로 살포시 고개를 내미는 야생화가 그 분위기를 확 씻어주었다.
호반길에서 만난 밭의 정경
걷다보니 하늘이 기어코 가랑비를 몰고 왔다. 그러나 계속 비를 몰고오지는 않고 조금씩 퍼붓다가 그치는 일이 반복되었다. 변덕스런 여자의 마음처럼 수시로 변덕을 부리는 날씨 때문에 애를 먹어야 했다. 우산을 펴면 비가 그치고 우산이 거추장스러워 배낭에 구겨 넣으면 또 비를 뿌리는 날씨 속에서 걷는 길은 흙탕물을 튕기며 예고없이 다가오는 차량 때문에 불편을 겪었다. 차만 다니지 않는다면 더할 수 없이 손색없는 길인데 가끔씩 돌진해 오는 차들이 산 속에 묻힌 길의 적적함을 달아나게 했다. 밤꽃 냄새 확 풍겨오는 길이면 어김없이 밤나무 단지다. 꽃술들이 땅에 떨어져 뒹구는 계절이 되었지만 밤나무는 아직도 그 지독한 밤꽃 냄새를 가슴에 품고 있다. 찬샘 마을에 도착했을 때 확 풍겨오는 밤꽃 냄새를 맡으며 남자의 정액 냄새 같다고 좋아라 했던 그녀처럼 밤꽃 냄새에 묻혀있으니 기분이 야릇해졌다.
억새님이 오디를 따 먹느라 정신이 없다
떡갈나무님이 오디의 맛에 반해 자리를 뜰줄 모른다
하룻밤 긴긴 밤을 세웠던 남녀 간의 질펀한 사랑이 생각나서일까. 울창한 밤나무숲 아래에는 오랜만에 만난 남녀 한 쌍이 서로 부둥켜않고 뒹굴면서 애절한 사랑을 갈구하고 있는 듯 밤꽃 냄새의 지독함에 한참동안 정신이 아득해지기도 했다.
가랑비가 뿌리는데도 억새님은 아예 야생화 도감을 펼쳐들고 유유자적 있다. 풀숲의 야생화와 도감의 야생화를 비교해 가면서 그 이름을 알고 싶어하는 저 열정을 어떻게 막을까. 펑퍼짐한 성황당 고개에는 수백 년 묵은 상수리나무가 하늘을 떠 받치고 휘늘어져 있다. 상수리나무에 허리를 친친 감은 새끼줄이나 바람에 나부끼는 오색 줄이 분위기를 음산하게 하지만 험난한 세월을 껴않고 점잖게 늙어간 고목의 모습에는 경외감마저 느낀다. 그 옛날 마을 입구마다 서있던 둥구나무, 그 아래 음식을 차려 놓고 마을의 안녕을 빌었던 마을 사람들의 순박함은 첨단 문화가 발달한 요즘에도 예외는 아니다. 그만큼 인간은 자연 앞에서는 무력한 존재이고 세월을 거슬러 오랜 삶을 살아온 고목에게는 경외의 대상으로 삼는 아주 나약한 존재다.
산길에는 추적추적 비만 내리는데 갈길은 멀다
산나리꽃
성황당을 지난 길에서 만난 빨간 열매는 일행의 마음을 설레게 했다. 귀부인의 귀걸이처럼 빨간 빛이 감도는 매혹적인 열매들이 나뭇가지가 찢어지도록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 그러나 이름을 알 수 없는 것이 문제다, 이름을 불러줘야 열매들도 더 열정적으로 마음을 열어 보이지만 이름을 불러주는 사람이 없으니 나무는 그만 제 이름을 잊은 채 고독하게 살아간다. 야생화나 산열매에 눈길을 모으고 가는 길에는 뽕나무도 드문드문 얼굴을 내밀었다. 속까지 까맣게 물이 든 오디를 보자 점잖던 사람들의 욕심이 차 오르기 시작했다. 모두들 뽕나무 가지에 매달려 오디를 따 먹느라 정신이 없다. 주인도 없는 산열매는 얼마나 사람들의 욕심을 부채질 하는가. 뽕나무 가지에 매달린 아이들처럼 오디를 따서 입에 넣고 우물우물 씹는 사람들이 순박하기까지 하다. 아득한 옛날 초등학교를 오고 가면서 따 먹었던 오디의 맛이다. 친구들보다 더 많이 따서 먹으려고 눈에 벌겋게 쌍심지를 켜고 따 먹었던 오디의 맛이다. 우리 고향에서는 오디를 오돌개라고 불렀는데 그 때 따 먹었던 오디의 맛이 아직도 살아 입안에서 침을 고이게 한다.
무슨 열매일까
닭의장풀
드디어 반환점에 도착했다. 많이 온 것 같은 데 거리를 계산해 보니 3.5킬로다. 총 10킬로 중에 반도 못 온 거리다. 길 한복판에 자리를 펴고 허기진 배를 채웠다. 그러나 날씨는 참 용하게도 점심을 먹을 동안에는 잠깐 햇살을 내주기도 했다. 귀찮을 정도로 구질구질하게 흩뿌리던 빗줄기는 싹 그치고 흙빛구름이 휘도는 하늘마저 잠깐 개어 따스한 햇살을 내려주는데 이만한 호사도 없다. 배를 채우니 한결 낫다. 여기서부터는 오로지 산길을 타야 한다. 함께 왔던 일행 중 두 명이 왔던 길로 되돌아가고 나머지 사람들만 산길을 타고 가기로 했다. 비를 맞은 나뭇잎들은 숲길을 뚫고 가는 일행들의 옷을 촉촉이 적셔 주었다. 빗물에 젖은 바짓가랑이와 축축한 등산 신발이 걷는데 몹시 불편을 주었다. 아무리 걷는 것이 좋고 야생화가 좋아도 우산을 쓰고 비탈진 산길을 탄다는 것이 무모하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비오는 산길에는 이름 없는 야생화들도 많이 눈에 띄었다. 꽃이 진 노루말풀도 보이고 보랏빛 꽃을 피운 엉겅퀴꽃도 보였다. 빗물에 씻긴 얼굴이라 그런지 때깔도 참 곱다.
대청호
패랭이꽃
돌무더기가 뒹구는 곳에 왔는데 여기가 성치산성이다. 산허리를 두른 성곽은 간 데 없고 무너진 돌무더기에 내려앉는 폐허를 보면 도저히 산성처럼 보이지 않는다. 적군이 서로 눈을 부라리며 대치했던 긴장감도 없다. 창 조각하나 화살촉 하나 없다. 세월은 그 때의 모든 것들을 다 빼앗아 가고 적적한 허무만 남겨 놓았다.
성치산성을 벗어나는 길에는 간간히 고사리들도 고개를 지켜들었다. 갓난아기처럼 오종종 손가락을 말고 고개를 숙이고 있는 고사리들 옆에는 풋풋한 열매를 달고 있는 깨금나무도 많이 보였다. 깨금은 고향 마을에서 어릴 적 간식거리였다. 깨금을 깨 먹고 싶은 날에는 고향 마을 뒷산에 올라 누렇게 익은 깨금을 깨 먹곤 했다. 이빨로 바싹 껍질을 깨서 속을 씹으면 구수하게 풍겨 나오는 맛에 반해 한동안 자리를 뜨지 못했던 생각이 났다.
무너진 성치산성
산길을 오르면서 고사리를 하나하나 꺾는 일도 재미있다. 고사리를 꺾어 모으다 보니 시장에 내다 팔정도의 양이 되었다. 그러나 하늘을 치솟아 오른 숲에 가려 주변의 대청호가 한눈에 들어오지 않는 것이 흠이다. 대청호의 푸른 물결이 아름드리 나무 사이로 숨바꼭질 하듯 보이다 사라졌다.
산길을 내려오다 보니 어느새 찬샘 마을의 우람한 느티나무 앞이다. 그 느티나무 아래 만들어 놓은 두개의 들마루가 쉬기에는 제격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느티나무 옆에 세워놓은 찬샘정이란 이정표가 눈길을 끌었다. 일행들이 차를 타고 그곳으로 1킬로 정도를 달려 가보니 찬샘정은 샘이 아니라 8각형 정자였다. 금강을 내려다보는 찬샘정 아래 세워놓은 류환의 시를 적어놓은 수몰비가 가슴을 아리게 했다. 대청호에 수몰된 고향을 생각하는 애절함이 묻어난다. 애절한 수몰비의 노래를 흥얼거리면서 도착한 찬샘 마을엔 여전히 뭉클한 밤꽃 냄새가 확 풍겨와 정신을 어지럽게 만들었다.
지난 봄 지리산 둘레길을 걷고 난 후로 또 한 번 지리산을 찾아보겠다고 다짐한 일이 있었다. 포근한 봄볕 아래 펼쳐진 둘레길 주변의 풍광이 너무 황홀해 아직도 내 마음속에서 멋진 한 장의 사진으로 머물러 있다. 땀 뻘뻘 흘리며 고산준령을 타는 것보다는 한적한 길을 걸으면서 사색도 즐기고 주변 풍광에 몰입하는 일은 여유와 느림을 추구하는 이들에게는 더없이 즐거운 일이다. 대전 주변에도 지리산 둘레길 같은 코스가 생겨 많은 사람들로부터 각광을 받고 있다.
숲에 묻힌 대청호의 호반을 걸으면서 야생화와 주변 풍광을 감상하는 일은 한 주 동안 업무에 시달린 사람에게는 더없이 좋은 코스가 되고 있다. 허수아비 마을로 유명한 찬샘 마을에서 시작하여 성황당, 무수동 반환점, 성치산성을 거쳐 돌아오는 10킬로의 여정은 걷기로는 다소 힘들고 지칠 수 있는 길이지만 한번 걷고 난후의 청량감은 지리산 둘레길에 못지않다.
찬샘마을의 물레방아가 휴식을 취하고 있다
찬샘 마을에 조성해 놓은 연못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차가 찬샘 마을에 도착하여 일행을 쏟아놓자 확 풍겨오는 밤꽃냄새와 함께 잔뜩 찌뿌린 날씨가 마음을 우울하게 했다. 하늘을 꽉 채웠던 흙빛 구름장은 여차하면 폭우라도 퍼부울 듯 무섭게 용트림을 치고 있었다. 정면으로 아득히 보이는 산꼭대기에는 급박한 날씨를 예감해주듯 물에 젖은 산안개가 뭉실뭉실 걸쳐 있었다. 그러나 이왕 도착한 이상 여기서 물러 설 수는 없었다. 일행들은 저마다 비옷을 걸치거나 우산을 챙겨 갑작스럽게 몰려올 폭우에 대비할 태세를 갖췄다.
찬샘 마을에서 눈길을 끈 것은 작은 연못에 조성해 놓은 물레방아다. 물레방아는 현재 쉬고 있지만 물위에 떠서 아늑히 잠든 수련과 함께 평화로운 마을의 풍경에 한몫을 더했다. 찬샘 마을에서 숲 속으로 이어지는 콘크리트 포장길로 접어들었다. 흙길이 아니어서 정감이 묻어나지는 않지만 한질로 솟구친 풀숲에서 눈부신 빛깔로 살포시 고개를 내미는 야생화가 그 분위기를 확 씻어주었다.
호반길에서 만난 밭의 정경
걷다보니 하늘이 기어코 가랑비를 몰고 왔다. 그러나 계속 비를 몰고오지는 않고 조금씩 퍼붓다가 그치는 일이 반복되었다. 변덕스런 여자의 마음처럼 수시로 변덕을 부리는 날씨 때문에 애를 먹어야 했다. 우산을 펴면 비가 그치고 우산이 거추장스러워 배낭에 구겨 넣으면 또 비를 뿌리는 날씨 속에서 걷는 길은 흙탕물을 튕기며 예고없이 다가오는 차량 때문에 불편을 겪었다. 차만 다니지 않는다면 더할 수 없이 손색없는 길인데 가끔씩 돌진해 오는 차들이 산 속에 묻힌 길의 적적함을 달아나게 했다. 밤꽃 냄새 확 풍겨오는 길이면 어김없이 밤나무 단지다. 꽃술들이 땅에 떨어져 뒹구는 계절이 되었지만 밤나무는 아직도 그 지독한 밤꽃 냄새를 가슴에 품고 있다. 찬샘 마을에 도착했을 때 확 풍겨오는 밤꽃 냄새를 맡으며 남자의 정액 냄새 같다고 좋아라 했던 그녀처럼 밤꽃 냄새에 묻혀있으니 기분이 야릇해졌다.
억새님이 오디를 따 먹느라 정신이 없다
떡갈나무님이 오디의 맛에 반해 자리를 뜰줄 모른다
하룻밤 긴긴 밤을 세웠던 남녀 간의 질펀한 사랑이 생각나서일까. 울창한 밤나무숲 아래에는 오랜만에 만난 남녀 한 쌍이 서로 부둥켜않고 뒹굴면서 애절한 사랑을 갈구하고 있는 듯 밤꽃 냄새의 지독함에 한참동안 정신이 아득해지기도 했다.
가랑비가 뿌리는데도 억새님은 아예 야생화 도감을 펼쳐들고 유유자적 있다. 풀숲의 야생화와 도감의 야생화를 비교해 가면서 그 이름을 알고 싶어하는 저 열정을 어떻게 막을까. 펑퍼짐한 성황당 고개에는 수백 년 묵은 상수리나무가 하늘을 떠 받치고 휘늘어져 있다. 상수리나무에 허리를 친친 감은 새끼줄이나 바람에 나부끼는 오색 줄이 분위기를 음산하게 하지만 험난한 세월을 껴않고 점잖게 늙어간 고목의 모습에는 경외감마저 느낀다. 그 옛날 마을 입구마다 서있던 둥구나무, 그 아래 음식을 차려 놓고 마을의 안녕을 빌었던 마을 사람들의 순박함은 첨단 문화가 발달한 요즘에도 예외는 아니다. 그만큼 인간은 자연 앞에서는 무력한 존재이고 세월을 거슬러 오랜 삶을 살아온 고목에게는 경외의 대상으로 삼는 아주 나약한 존재다.
산길에는 추적추적 비만 내리는데 갈길은 멀다
산나리꽃
성황당을 지난 길에서 만난 빨간 열매는 일행의 마음을 설레게 했다. 귀부인의 귀걸이처럼 빨간 빛이 감도는 매혹적인 열매들이 나뭇가지가 찢어지도록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 그러나 이름을 알 수 없는 것이 문제다, 이름을 불러줘야 열매들도 더 열정적으로 마음을 열어 보이지만 이름을 불러주는 사람이 없으니 나무는 그만 제 이름을 잊은 채 고독하게 살아간다. 야생화나 산열매에 눈길을 모으고 가는 길에는 뽕나무도 드문드문 얼굴을 내밀었다. 속까지 까맣게 물이 든 오디를 보자 점잖던 사람들의 욕심이 차 오르기 시작했다. 모두들 뽕나무 가지에 매달려 오디를 따 먹느라 정신이 없다. 주인도 없는 산열매는 얼마나 사람들의 욕심을 부채질 하는가. 뽕나무 가지에 매달린 아이들처럼 오디를 따서 입에 넣고 우물우물 씹는 사람들이 순박하기까지 하다. 아득한 옛날 초등학교를 오고 가면서 따 먹었던 오디의 맛이다. 친구들보다 더 많이 따서 먹으려고 눈에 벌겋게 쌍심지를 켜고 따 먹었던 오디의 맛이다. 우리 고향에서는 오디를 오돌개라고 불렀는데 그 때 따 먹었던 오디의 맛이 아직도 살아 입안에서 침을 고이게 한다.
무슨 열매일까
닭의장풀
드디어 반환점에 도착했다. 많이 온 것 같은 데 거리를 계산해 보니 3.5킬로다. 총 10킬로 중에 반도 못 온 거리다. 길 한복판에 자리를 펴고 허기진 배를 채웠다. 그러나 날씨는 참 용하게도 점심을 먹을 동안에는 잠깐 햇살을 내주기도 했다. 귀찮을 정도로 구질구질하게 흩뿌리던 빗줄기는 싹 그치고 흙빛구름이 휘도는 하늘마저 잠깐 개어 따스한 햇살을 내려주는데 이만한 호사도 없다. 배를 채우니 한결 낫다. 여기서부터는 오로지 산길을 타야 한다. 함께 왔던 일행 중 두 명이 왔던 길로 되돌아가고 나머지 사람들만 산길을 타고 가기로 했다. 비를 맞은 나뭇잎들은 숲길을 뚫고 가는 일행들의 옷을 촉촉이 적셔 주었다. 빗물에 젖은 바짓가랑이와 축축한 등산 신발이 걷는데 몹시 불편을 주었다. 아무리 걷는 것이 좋고 야생화가 좋아도 우산을 쓰고 비탈진 산길을 탄다는 것이 무모하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비오는 산길에는 이름 없는 야생화들도 많이 눈에 띄었다. 꽃이 진 노루말풀도 보이고 보랏빛 꽃을 피운 엉겅퀴꽃도 보였다. 빗물에 씻긴 얼굴이라 그런지 때깔도 참 곱다.
대청호
패랭이꽃
돌무더기가 뒹구는 곳에 왔는데 여기가 성치산성이다. 산허리를 두른 성곽은 간 데 없고 무너진 돌무더기에 내려앉는 폐허를 보면 도저히 산성처럼 보이지 않는다. 적군이 서로 눈을 부라리며 대치했던 긴장감도 없다. 창 조각하나 화살촉 하나 없다. 세월은 그 때의 모든 것들을 다 빼앗아 가고 적적한 허무만 남겨 놓았다.
성치산성을 벗어나는 길에는 간간히 고사리들도 고개를 지켜들었다. 갓난아기처럼 오종종 손가락을 말고 고개를 숙이고 있는 고사리들 옆에는 풋풋한 열매를 달고 있는 깨금나무도 많이 보였다. 깨금은 고향 마을에서 어릴 적 간식거리였다. 깨금을 깨 먹고 싶은 날에는 고향 마을 뒷산에 올라 누렇게 익은 깨금을 깨 먹곤 했다. 이빨로 바싹 껍질을 깨서 속을 씹으면 구수하게 풍겨 나오는 맛에 반해 한동안 자리를 뜨지 못했던 생각이 났다.
무너진 성치산성
산길을 오르면서 고사리를 하나하나 꺾는 일도 재미있다. 고사리를 꺾어 모으다 보니 시장에 내다 팔정도의 양이 되었다. 그러나 하늘을 치솟아 오른 숲에 가려 주변의 대청호가 한눈에 들어오지 않는 것이 흠이다. 대청호의 푸른 물결이 아름드리 나무 사이로 숨바꼭질 하듯 보이다 사라졌다.
산길을 내려오다 보니 어느새 찬샘 마을의 우람한 느티나무 앞이다. 그 느티나무 아래 만들어 놓은 두개의 들마루가 쉬기에는 제격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느티나무 옆에 세워놓은 찬샘정이란 이정표가 눈길을 끌었다. 일행들이 차를 타고 그곳으로 1킬로 정도를 달려 가보니 찬샘정은 샘이 아니라 8각형 정자였다. 금강을 내려다보는 찬샘정 아래 세워놓은 류환의 시를 적어놓은 수몰비가 가슴을 아리게 했다. 대청호에 수몰된 고향을 생각하는 애절함이 묻어난다. 애절한 수몰비의 노래를 흥얼거리면서 도착한 찬샘 마을엔 여전히 뭉클한 밤꽃 냄새가 확 풍겨와 정신을 어지럽게 만들었다.
지난 봄 지리산 둘레길을 걷고 난 후로 또 한 번 지리산을 찾아보겠다고 다짐한 일이 있었다. 포근한 봄볕 아래 펼쳐진 둘레길 주변의 풍광이 너무 황홀해 아직도 내 마음속에서 멋진 한 장의 사진으로 머물러 있다. 땀 뻘뻘 흘리며 고산준령을 타는 것보다는 한적한 길을 걸으면서 사색도 즐기고 주변 풍광에 몰입하는 일은 여유와 느림을 추구하는 이들에게는 더없이 즐거운 일이다. 대전 주변에도 지리산 둘레길 같은 코스가 생겨 많은 사람들로부터 각광을 받고 있다.
숲에 묻힌 대청호의 호반을 걸으면서 야생화와 주변 풍광을 감상하는 일은 한 주 동안 업무에 시달린 사람에게는 더없이 좋은 코스가 되고 있다. 허수아비 마을로 유명한 찬샘 마을에서 시작하여 성황당, 무수동 반환점, 성치산성을 거쳐 돌아오는 10킬로의 여정은 걷기로는 다소 힘들고 지칠 수 있는 길이지만 한번 걷고 난후의 청량감은 지리산 둘레길에 못지않다.
찬샘마을의 물레방아가 휴식을 취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