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단한 시대, 영혼의 실업 일지[한기 서울시립대교수]
마음으로 읽는 시/언론과 문학지 서평
2005-12-28 22:06:11
"하느님이 보시기에/ 이 미세한 씨앗도 우주이다"(씨앗론)고 시인은 말
하고 있다.그렇게 한 편의 시 속에도 우주가 깃들여 있는 법이라고 시
학자들은 말한다. 그 세계의 무량함이 한 권 시집의 경우라면 더욱 말
할 것이 없을 것이다. 시집을 읽고 반응한다는 일의 두려움이 이로부
터 주어진다고 여겨진다. 비의의 언어로 가득 찬 우주적 신비의 시적
사유의 세계를 제한된 지면의 언어분량으로 재고, 명명한다고 하는
일, 그것이 난감한 일일뿐더러, 애초 불가능한 일일 수도 있다는 생
각은 비록 초심의 평자가 아니라, 대가 비평가라 하더라도 주어질
수 있다고 생각된다. 더구나 일면식도 없는 시인의 시집을 읽고 거
기에 주석을 달아야 하는 일이라면.......
"해설"이라고 하는 것은 알다시피 대상에 관해 잘 안다는 것을 전
제로 씌어지지 않으며 안되며, 그렇기 때문에 모르고도 괜히 아는
척 하지 않으면 안되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교사노릇과 똑같은 이
치의 일인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경우, 시인을 잘 알지 못하면서,
그 시인이 쓴 시는 잘 알겠다고 할 수 있는가.그럴수는 없는 일이라
고 나에게는 생각된다. 시도 결국은 사람이 하는 일이라고 나는 믿
기 때문이다. 물론 사람을 안다고 하는 것이 많은 경우 우리에게는
그 사람의 일을 통해서 주어지는 법이기도 하지만, 반면, 일의 주체
를 모른다면, 우리는 그 사람 일의 종작에 대해서 매번 불확실한 느
낌에 사로잡히게 될 것이다. 「시여, 침을 뱉어라」에서 김수영은 시
를 쓴다고 하는 일이 매번 기존의 시를 부수지 않으면 안되는 일이
라고 했지만 , 결국 우리가 아는 김수영은 그 시들의 총체로서 김수
영인 셈이다. 매일 매일의 자기 갱신으로서 댄디즘과 모더니즘의 이
념을 말한 사람이 또한 보들레를였지만 ,보들레르에 대한 어느만큼
의 이해를 가지고서 우리는 또한 보들레르의 시들을 이해하는 것이다
시/시인 분리론이 근본적으로 성립될 수 없다고 보는 것은 이 때문
이다. 모더니즘의 시론들이 지나치게 기호놀이의 성격을 지니게 된
것도 기본적으로 이 시/시인 분리론에서 연유한다고 나는 본다.
그렇게 되면 속성적으로 난수표의 성격을 지닐 수 없다고 지적되는
현대시에 대해서 그 풀이의 작업은 더욱 난해한 암호풀이의 위험부
담을 우리에게 지우게 될 것이다. 시 풀이이에 나서기 전에 시인을 좀
알았으면 하는 소망을 이런 이유 때문에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나는 시인을 만날 수 없었다. 시인이 지방에 거주한 탓이다.
직장에서 현재 시인은 눈코 뜰 새 없이 바뿐 와중에 있는 것으로
여겨졌다. 시인을 만나러 서울에 있는 사람이 지방행 나들이를
시도할 수 있었으리라. 그럴 수도 있었겠지만, 그러나 어떤 식으로
든 나 역시 서로간에 부담을 주는 일은 피하고 싶었다.
그래서 전화로 연결을 시도했고,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그의 목소
리는 작고 부드러웠다. 그때 서로간에 어떤 말들이 오갔던가.
자세한 기억은 없다. 다만 혹시 서울에 올라오던 때가 있다면, 연락
주기 바란다는 말을 했던 것으로 나는 기억한다.
우리의 육성 통화는 그렇게 짧게 끝이 났다. 나는 이제 한 시인의
시집 해설에 나서야 한다. 아는 척하지 않으면 안된다. 나에게 무엇이
있는가. 시들이 있다. 그 수많은 시들중에서 내가 가장 잘 이해할수 있
는 시, 내 눈에 척 들어온시, 한 편을 들어본다. 「어느 실직자의 변」
이다
풍구질을 한다
몇 해 만에 내려와 돌려보는 풍구질
잠시 기력 잃은 손으로도 풍구는 잘도 돌아간다
알맹이는 풍구 앞에 쌓이고
쭉정이는 멀리까지 날아 흩어진다
아, 야속하구나
산들바람 술렁대는
이 넓은 들판에도 치열한 생존 법칙이 있구나
순금빛의 햇살을 받아
차별 없이 익는 것 같아도, 그대들끼리
눈에 보이지 않는 경쟁을 하는구나
들판을 보니 잠시 허망해진다
그 오랜 세월 삶의 비명에 도시는 무너져가도
이 들판만은 풍성한 가슴으로
날 맞아줄 줄 알았는데
풍구는 인정 없는 들판의 주인처럼
알맹이와 쭉정이를 마구 골라낸다
이제는 어느 곳에도 쉴 수 없는
나의 자리
알맹이들만 만고 쭉정이들은 영혼처럼 흩어진
거대한 빌딩숲을 생각하며
나는 쫓겨난 쭉정이가 되어
열심히 풍구질만 해댄다
이와같은 시를 굳이 해설해야 한다고 믿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
다. 그렇지만 왜 이 시가 내 눈에 척 띄게 되었는가를 설명하기란
쉽지 않다. 아마도 그때 나는 시인이 누구인가, 어떤 사람인가에
관심과 주의를 기울이며 시를 읽는 과정에 있지 않았던가 싶다.
그리하여 여기서 나는 시인의 한 편린의 모습, 프로필과 실루엣을
살짝 엿본 기분에 잠겨들지 않았을까.
물론 이 시에서의 실직자, 시적 화자의 "나"가 반드시 시인 자신의
직접 경험과 일치하는 인물인가에 대해서는 일정하게 판단을 유보해
두지 않으면 안될, 미학상의 문제가 제기되는 것이 사실일 것이다.
요컨데 모든 시적 경험의 진술이 반드시 시인 자신의 직접 경험과
일치한다고 볼 이유는 없다는 것이 현대시 이론의 가르침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 시의 경우, 여러 정황으로 보아, 시인 자신의 직접경험이
바탕이 되어 시가 씌어졌을 가능성은 매우 높다고 판단되며, 설혹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여기에 시인 특유의 세계 인식의 면모와
경험적 공감의 지대가 잘 나타나고 있어서 시집 전체의 염탐을
위한 한 단서로서의 시로서는 충분하다고 여겨진다. 하나의 시집에도
이를테면 매듭과 같은 것이 있어서 그 매듭을 풀어헤친다면 시세계
의 전체적인 윤곽과 면모가 확연히 몸체를 드러내는 그런 요격의
시가 있다고 볼 수 없을까. 이처럼 미리 척후병이 나가 적정을
살피듯이 시집 전체의 요해를 위한 한 단서의 시로서 나는 이 시를
선택했다고 할 수 있으며, 따라서 이 시의 잘나고 못난 것과 시의
선택 사이에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생기기로만 친다면야, 이보다
잘 생긴 시를 이 시집안에서 얼마든지 더 꼽을 수 있을지 모르나,
때로 현실의 대표자들이란 반드시 잘생긴 자들만은 아니지 않던가.
이 시인이 누구인가에 대해서 아직은 주어진 정보가 태부족인
상태에 있지만, 그래도 희미하게나마 실마리를 재공해주고 있다고
판단되는 위의 시를 길동무 삼아 이제부터 숨은 시인찿기의 한
추리 여정을 시작해보도록 하자. 우리의 작업을 통해 몽타주가 더욱
선명하게 그려질 수 있다면 물론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일이겠지만, 설
혹 그렇지못하고 빈 수배전단만이 여전히 우리손에 남게된다 하더라도
어떤가. 이 고단한 시대를 사는 시인의 "실업일지" 몇 구절쯤은 우리가
음미한 셈이 될테고, 그 육성의 증언을 마음에 새기는 것만으로
치열한 생존경쟁의 밀림 속을 정신없이 살아가지 않으면 안되는
우리 대부분 가난한 영혼의 쭉정이들은 얼마쯤 위로받고 정화되는
것일지 모른다. 시인이 됨으로써 스스로 쭉정이의 길을 선택해버린
이 시인은 누구인가.
2
그리하여 위 「어느 실직자의 변」을 곧이곧대로 자기 고백의 한
시편으로 간주하여 읽는다면, 이 시인은 현재 도시 노동자 계급의
일원으로서의 자기 인식을 갖고 있지만, 본래 농촌의 환경 속에서
자라났고, 현재도 그 곳에 여전한 존재의 뿌리를 간직해두고 있는
시인의 면모임을 알 수 있겠다. 흔히는 유기체적 농본주의자라고
지칭되는 역사적 존재의 전통적 면모에 그의 의식의 뿌리가 닿아
있으리라는 뜻인데, 시를 통해서 이 면모는 좀더 자세히 확인될 수
있다. 시 「벌촛날」을 통해서 보건대, 시인의 아버지는 이미
세상을 떠나, "오랜만에 벌초(를) 하러 온" 자식의 손을 부끄럽게
하는 상태에 있지만, 아직 생존하여 부지런하고도 억척스런 농민의
상을 간직하고 있는 어머니의 모습은 시 「어머니의 도리깨질」에
잘 나타나 있다. 남편을 잃고 자식들을 모두 도시의 삶을 찾
아 떠나 늙어 혼자 사는 어머니의 일상적인 모습은 시
「다림질을 하며」에 잘 포착되어 있는데, "주름진 옷을 펴듯,
설움에 얼룩진 밤을 펴" 며, "활짝 피어나도 주름투성이인
꽃망울들/..../달빛차인 댓돌 밑, 답답한 봉창 속에서/.....사랑이 숯불처
럼 타는 밤" 을 홀로 지키는 노인, '한맺힌 어머니의 모습' 이 바로
그녀인 것을 시인은 일상적이면서도 감각적인 언어의 주형을 통해
그려내고 있는 것이다. 늙으면 자식 걱정이 또한 부모들의 일이라
고 하거니와, "다리미를 들어 주름진 밤을 펴"는 시간에
홀로 된 어머니가 무엇을 생각하고 걱정할지는 묻지 않아도 알 수 있
다. 여러 자식들 중에도 부모에게는 못사는 자식이 항상 안타깝거니와,
혹시는 이 노인에게도 가난한 시인 아들이 항상 안쓰럽고 안타까운 것
은 아닐까. 시인 아들을 바라보는 그런 어머니의 마음을 시인 스스로
의식하여 쓴 듯한 시가 있다. 민중적 표상의 한 대표꽃이라고 할 수
있는 '민들레'에 의탁하여 감정이입의 시적동기를 발동하고 있는
시 「하소연」이 바로 그것이다. 상징적이고 함축적인 시적 언술의
양상이어서 비의적이라고 까지 할 이 시를 유심히 살핀다면, 이
시인의 실존적 정황과 시인 특유의 상상력의 면모에 대해서 매우
구체적인 정보를 우리는 얻게 될 지 모른다.
무슨 고민이 저리 많은지
민들레는 빡빡머리가 되어 담장 밑 양지쪽에 쭈그리고 있습니다
가끔씩 머리통이 박살나도록 담장을 치고 받으며
기구한 사연 더 들어 달라는 듯 앙탈을 부립니다
제 자식들은 어디로 가는 겁니까
길마저 끊긴 막막한 땅에서
도란도란 웃음꽃 필 가정을 꾸미고 살 곳은 어디입니까
이 시는 아마도 '민들레'에 대한 형용묘사의 동기로부터 시상이 주어졌을 법하다.하지마누 시작의 과정에서 어머니의 시선이 지배적으로 작용하게 됨에 모티브는 사뭇 변전하게 되었던 것으로 보이고, 이런 경우에 우리는 시적 무의식의 존재를 제기해봄직하다. 이를테면 상상력이라는것, 혹은 시인마다의 고유한 시적 사유의 형틀이 존재함을 밝히고, 이런 시야에서 최초 시상의 동기, 혹은 소재보다는 시적사유의 원형질이 하나의 시 형성에 보다 본질적인 요소로 작용한다고 보는 것이다. 몽상의 추동력, 혹은 예술적 질서화의 힘으로서의 시적 상상력이라고 하는 것이 바로 이런 개념일텐데, 이 시의 경우 소재로서의 '민들레'보다는 그 꽃을 바라보는 어머니의 시선이 시 형성의 보다 본질적인 요소로 작용하게 됨으로 말미암아 결과적으로 「하소연」이라는 제목의 저와 같은 시가 도출되기에 이르렀다고 설명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시가 자식을 염려하는 어머니의 시선과 의식으로 그려져 있다는 것은 직접적으로 "제 자식들은 어디로 가는 겁니까"의 구절로 우선 확인 될 수 있다. 하지만 이 시에서 더욱 흥미로운 것은 "무슨 고민이 저리 많은지" "빡빡머리가 되어 담장밑 양지쪽에 쭈그리고 있"는 "가끔씩 머리통이 박살나도록 치고 받으며" "기구한 사연 더 들어 달라는 듯 앙탈을 부리"는 존재로서의 '자식'의 형용이 바로 다름아닌 어머니가 걱정하는 '시인 아들'의 존재적 형용과 매우 흡사하게 여겨진다는 점이다. 일상적 삶을 사는 어머니의 눈으로 바라볼 때, 시인 아들의 존재 형용이란 곧, 유난스런 번민과 투쟁, 그리고 앙탈같은 언어적 자기 피로 작업에만 집착하여 "도란도란 웃음꽃 필 가정을 꾸미고 사"는 것과는 거리가 먼 존재가 아니겠는가. 이와같은 시인의 지의식, 어머니의 시선에 의탁하여 자기를 바라보게 되는 시적 사유의 형질이 곧 이 시인의 내부에 존재하는 시적 무의식이라 할 때, 때로 짐스럽게 여겨지는 이와같은 타자로서의 어머니의 시선, 자기 밖에 있으면서 동시에 또 자기 안에 있기도 하는 이와같은 타자의 시선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시인은, 모든 학대당하는 것(존재)들이 발하는 저항의 외침을 대변하는 것을 자신의 시적 소업으로 인식함으로써 억센 도리깨질 뒤에 잠시 쉬고 있는 어머니의 모습을 콩깍지들의 시선을 빌려, "대청에 누워계신 어머니/번들거리는 땀을 씻을 새 없이/흰 수건을 꽉 졸라맨 때 전 모습이/힘에 부쳐 졸고 잇는 고문 기술자 같다"고 회화하시킨 장면으로 연출해 보이기도 하지만, 더 자주는 "어머니는 죽어서 별이 된다고 했지/뙤약볕 아래 풀밭을 매다가도/행복한 사람들만 모여 사는 별이 된다고 했지/...../그래서 밭고랑의 풀꽃만 떨어져도/어쩌나, 저 별들/어머니의 마음은 애타게 흔들렸지"와 같이 소박한 민중적 환상 담론 소유자의 모습으로 그리거나, 또 "애초부터 떨어진 자식들을 손짓한다/내 몸의 일부였다가/ 어쩌다가 남남이 된 사연들, /간간이 그리움에 젖어/갈매기 몇 마리 보내 애원을 해봐도/냉큼 돌아서 앉는/ 내 옹졸한 자식들아"라고 하든지, "자식들아 굳건히 참아야 한다/너희들 무엇이 서운해/원수처럼 등 돌리고 앉아 있지만/이것만은 알아야 한다/이제는 늙어빠진 내 육신/더 이상 너희에게 도움줄 수 없다는 사실을,/우리서로 마음만 열고 노래한다면/불러도 먼 거리 외롭지 않으리/손짓해도 먼 거리 슬프지 않으리"와 같이 노래 함으로써, 비록 바다위에 떠 있는 섬 풍경을 묘사하는 가벼운 서경시의 자리에서일망정, 생을 발원시키고, 존재를 유지시키는, 생명의 근원요소, 존재의 근본 바탕이 모성, 곧 어머니의 존재임을 거의 본능적으로 깨우치고 있다.
이 시인이 대지의 신, 곧 어머니의 아들이며, 그리하여 땅의 아들이라는 것은 "길마져 끊긴 막막한 땅"(하소연)이라는 본능적 어구 표현에서도 확인되는 바라고 하겠거니와, 「민들레의 왕국」과 같은 자연 소재의 시편들, 특히 식물의 생물을 소재로 한 시편들에서 생명앙양의 주제 의식이 모성 존재에 대한 몸의 상상력, 그 육체의 상상력과 거의 하나의 태반으로 나타나거나, 최소한 동일한 시적 원천에서 자라난 일란성 쌍생아의 모습으로 시적 언술성이 제시된다는 점으로도 확인된다고 하겠다.
이와같은 시적 사실들은 존재의 기원에 대한 시인 자신의 투철한 자각의 인식에서 비롯되는 바라고 할 터인데, 이 시인에게 있어서 생명으로서의 존재가치에 대한 인식과 모성적 육체를 매개로 한시적 환유의 상상력이 얼마만큼 내면적으로 단단히 통합, 육화된 상태에 있는 것인지는 다음 단형의 짧은 시 「밤꽃」이 웅변으로 입증해 준다고 하겠다.
흰 탯줄처럼 늘어진 밤꽃들이 술렁대고 잇다
어머니의 뱃속 같은 허공 속에서
탯줄은 끓임없이 구수한 꿀젖을 빨아올린다
탯줄이 말라붙어 배꼽이 될 때에
밤톨은 비로소 심장의 고동소리를 내는 것이니
새 생명이 태어나는 밤은 그만큼 거룩한 것이었다
이처럼 대지와 모성에 밀착된 시인이기에 오늘날 생태계의 위기로까지 치닫고 있는 환경 오염, 자연 훼손의 문명적 현실에 대해 경계와 주의의 경보를 발령하고픈 마음이 간단없이 솟아나오는 것일테다. 하지만 어머니의 마음으로 대지를 굽어보는 시인답게 환경위기를 고발하는 생태시학의 시들에서조차 그의 어조는 단순히 문명현실의 고발을 향해서만 치닫는 것이 아니라, 위기의 환경 현실 전체를 부드럽게 감싸면서, 오히려 낮은 목소리로 우리 각자의 세계관적 전환 결단의 요청을 촉구하면서, 그것이 실천되지 않았을 경우의 어두운 묵시록적 예정의 현실을 사뭇 날카롭게 대비하여 보여줄 뿐이다. 비관적인 문명의 미래를 내다보는 자리에서 그의 목소리는 어둡다 못해 차라리 비장하도록 우울한 죽음의 빛깔을 띠게 되는 것이지만, 이것이 누구의 책임이라기보다, 존재자 모두가 공동정범인 그러한 책임의 현실로 주어진 것으로서 그렇기 때문에 원죄의식에 기반한 속죄의 종교적, 윤리적 요청이 우리 모두의 존재 정언의 현실로 닥쳐들고 있음을 기회있을 때마다 깨우치고 있다. 최초의 시상은 비록 미학적인 동기로 주어졌을망정, 미학과 실천 윤리의 경계를 넘어, 마침내는 묵시록적 응시의 깊은 함묵의 태도로서, 생명주의자이며 농본주의자다운 신념의 예언적 지성의 발현을 통해 자기를 결착하고 있는 다음 시편을 보라.
구름 깔린 냇가를 따라
고개 숙인 버드나무를 본다
땅에 닿을 듯 풀어헤친 머리칼을 흔들며
버드나무는 한 생애 씻을 수 없는 속죄를 한다
미안하오, 다 내 책임이오
냇가를 따라 내려오는 폐수가
문명의 껍질을 껴않고 신음할 때
지옥의 범람 속으로 자결하는 버드나무의 꽃잎들
그 슬픈 추억의 풍경을 보듯
이내 우울해지는 시냇가
힘없는 약골로 꽃잎을 건지려는
길게 손 뻗은 냇가의 풀들을 보면서
부황 든 세상처럼
냇가에도 서서히 내려앉는 죽음의 그늘을 본다
___「속죄하는 버드나무」
주마간산격으로 훓어본 셈이지만, 이만으로도 이 시인의 시적 관심의 범위, 그 시 의식의 세계가 좁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확인해둘 수 있겠다. 유기체적 농본주의에 의식의 한 뿌리를 대고 있는 탓이기도 하겠지만, 생명주의, 혹은 생태주의로 명명되는 세기말 우리 시의 주요 동력학 속에, 비록 높은 목청은 아니로되, 설득력있는 울림의 목소리를 그는 보태고 있고, 또한 80년대 저 질풍노도의 시대를 "머리통이 박살나도록 치고 받으며" 통과해 나온 민중, 노동 세대의 일원답게, 사회적 소외 지대의 대변 노력에도 소흘치 않는 간결한 문학적 집념의 자세를 드러내 보이고 있다. 사회시학적 가치 추구 자세를 뜻하는, 이같은 문학적 현실주의, 리얼리즘의 태도에서 다섯 편 연작의 「노숙자」 제목 시들이 씌어졌다고 보겠거니와, 「정비소에서」 혹은 「폐차장 풍경」 같은 ,또는 「내시경 검사를 하며」 같은, 문명 비평 정형의 사들 역시 본질적으로는 이와같은 시적 자세의 연장선 상에서 씌어졌다고 하겠다. 현실에 대한 비판적 자세가 치열해지면서, 이에 비례하여 주어지게 되는 현실에 대한 무력감의 의식이 가끔씩 몇몇 작품들, (예컨대 「우리시대의 변학도들」이나 「작동하라, cc카메라」 「쓰레기란 누명을 쓰고 」 「연예인 공화국」 「환락가의 묘비」와 같은 시편들 속에 짙은 분노와 냉소족 부정의 어조로 이룩된 날카로운 풍자 언어들을 산출케도 하고 있지만, 이런 공격성의 시편들보다 더 많이 가난한 서민들의 삶을 부드럽고 따뜻하게 비추는 노래들이 이 시집의 주요한 길목마다를 차지하고 있어서 시의 마을을 밝고 환한 것으로 만들고 있다.가령 저녁 끼니의 빵을 배급받는 가난한 실업자 마을의 풍경을 '환한
달빛 아래의 풍정'으로 인상적으로 묘사하고 있는 다음과 같은 시편을 보라
몰골 앙상한 개가
부푼 달을 보며 짖어대는 것이
어쩌면 헐벗은 사람들의 서러운 원망 같아 숙연해진다
달이 빵으로 보였는지,
누렇게 단 꿀을 입힌 달이 별안간 뜯고 싶어진다
저물 녘, 훤한 달빛아래
일자리를 잃은 사람들이 줄줄이 서서
푸석푸석 부푼 빵을 배급받고 있다
__「 가난한 대열」
아마 이와같은 시편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시집을 읽어나가는 중에 가끔씩 미소짓게 하거나, 때로 고개 주억거리게 하면서, 일상의 삶 속에서 무시되거나 간과되어왔던 지난 일들, 존재의 작은 부분들을 새삼스럽게 뉘우치고, 다시 돌아보게 하는 것은, 가령, "그래 너 잘났다/나 배따면 똥밖에 없다. 어쩔래"(「멸치)」와 같이 촌철살인형 짧은 만담풍 시거나, 또 "오랜만에 덧문을 여니/쏜살같이 튀어나온 놈 하나, 분신자살을 한다/얼마나 삶이 답답했으면 저토록 처절한가/온 몸에 불이 불이 붙어/속절없이 삶의 흔적 지우는 그대여/그 시절 노동자들도 그러했으리/어둠의 두께 내려 덮이는 세상에서/미운 정치에 길들여진 자본을 깨기 위해/마른 육신에 활활 불을 지핀 채"(「성냥」) 와 같이 ,일상주변의 사소한 소재들을 가지고 엉뚱하게 우화적인, 그리하여 일종 뜻있는 이야기 시(담시)로의 형태로 시적 담론을 전환해가는 솜씨가 심심치 않게 우리의 무디고 마비된 의식을 일깨워 자극하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의 차가운 냉동된 의식을 일깨워 따뜻한 숨결을 불어넣어주는 이 시인의 능기의 시적 장치는 그러니까 해학과 기지의 언어인 쪽이며, 그 시적 언어의 긴장이 새로운 발견의 인식을 통해 적절히 유지되고 견지될 때, 마치 부비트랩을 밟은 것마냥 튀어오르는 용수철의 시적 탄력을 그의 시는 발휘할 수 있다. 이런 각도에서 「개망초도 자손을 퍼뜨릴 줄 안다」나 「민들레의 왕국」과 같이 미미한 식물의 존재에도 낭만적 상상력의 시적 숨결을 불어 넣어, 민중주의적 전통의 이념을 계승하는, 새로운 생태주의형 녹색시들도 좋지만, 보다 덜 이념적이고, 덜 의식적이면서도 자연속의 생태, 생명현실과 그 속의 인간적 현실을 아름답고 순순하게 그림을 그리듯 묘파하고 잇는 인상파적 녹색 그림의 시들이 더 좋아 보인다. 「날다람쥐가 찾는 달빛」이 바로 그러한 경우의 더 순순한 사례에 속하겠지만, 조금은 이념적인 의식을 바탕에 깔면서도, 문명과 자연의 중첩 현실, 그 대비의 풍경 속에 인간의 자리를 오롯히 마련해 놓고, 설득력있게 이 세상 공존의 윤리, 원리와 그 의욕까지를 말하고 있는 다음 시편이 더 아름답고 풍요롭게 보여서 좋게 느껴진다. 이만한 시 몇 편으로도 이 시집은 풍성해지지 않던가.
정오의 햇살이 깔린 열차 몇 냥,
뱀같이 꼬리를 끌며 오다가, 아지랑이 슬프게 일어서는 산밑에
풍경화 한 폭 깔았습니다
차창마다 내비치는 삶의 온기,
손때 묻은 보따리들이 차창 속 흐린 불빛에 졸 때
엉겅퀴꽃 까맣게 터져 허공을 날았습니다
누가 봐도 위험한 이 철길에
끈질기게 삶을 틀고 일어서는 그대여
졸지 말아요, 아주머니들
그대들에게 드리워진 삶의 무게가
보따리속보다 더 암울하고 어두워도
나, 엉겅퀴는 이렇게 질긴 뿌리를 내려
당당하게 꽃을 피우고 흐린 하늘에 자손될 씨앗
수북히 뿌리잖아요
___「열차와 엉겅퀴꽃」
4
프로필도 다 그리지 못하고, 겨우 인상 착의만을 알린 꼴이 되고 말지도 모르지만, 이 쯤에서 내일 이 시인이 획득할 그럼직한 시인의 초상이 어떤 것인가를 그려보는 것도 무용한 일은 아닐 것 같다. 그 과제는 요컨대 체질화된 민중시학의 감수성과 새로운 생태시학의 방법론적 추구를 어떻게 조화시킬 것인가의 문제로 주어지지 않을까. 이 시집의 몇몇 성공적인 사례들을 통해 살펴보았듯이, 우리 생활의 비근한 곳에서 발견될 수 있는 민중적 이미지의 풀, 꽃, 자연 생태계의 사물들을 소재로 하여 새로운 공존의 윤리를 깨우치는 시편들은 그 서정적 환기력이 뛰어나고, 메시지의 전달력도 강해서 성공적인 시가 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마치 우리 산야에 지천으로 널린 미미한 풀꽃들만을 찍어 모아 아름다운 도감으로 보여준 한 탐색자의 작업이 존재하듯이, 이 국토에서의 가난한 민중의 현실과 그렇게 미미하게 존재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무엇에도 비교할 수 없는 아름다움의 자태를 뽐내고 있는 군락의 풀꽃들, 그 자연 생태게의 사물들에 대해 이 시인이 바치는 애정의 관심은 각별하다. 엉겅퀴라거나, 민들레라가나, 개망초라가나,하는 이름으로 이 시집을 아름답게 꾸미고 있는 풀꽃들이 바로 그러한 존재들의 대명사인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정향의 시적 자세가 앞으로 어떻게 전개되어서 좀 더 힘있고 설득력있고 풍요로운 시세계의 구현으로 나아갈수 있을까.
앞서 가장 먼저 인용해본 시에서 시인 스스로 "이 넓은 들판에도 치열한 생존 법칙이 있구나"라고 말했듯이, 우리의 문학판, 시단에도 엄연히 생존경쟁의 원리는 작동하고 있다는 것을 먼저 전제해 둘 필요가 있겠다. 이와함께, 시단에 작용하는 생존경쟁의 원리는 언제든 미학적 원리외에 다른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새삼 확인해들 필요도 있겠다. 미학적 원리라는 것, 요컨데 '미학'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손쉽고 간단한 대답이 주어지기는 어렵다고 해도, 적어도 익숙하고 진부한 것들과의 결별이 그것이라는 점은 이 문맥에서 강조해들 필요가 있겠다. 김수영이 갈파했던대로, 한 편의 시를 쓸 때마다 매번, 그 때까지의 모든 것을 부수고, 새로이 고쳐쓰지 않으면 안된다는 원칙의 천명이 이 원리와 관련된 것이다. 매일매일 자기자신을 갱신해 나가지 않으면 안된다고 한, 보들레르의 댄디즘, 모더니즘의 개념이 또한 이 원리와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새삼 환기해둘 필요가 있겠다.
이런 원론적 이야기를 이 자리에서 되풀이 강조해보는 것은 한 권의 시집 안에서 동일한 성격의 방법론이 너무 쉽게, 자주 되풀이되는 경우를 우리는 늘상 보아오기 때문이다. 이 시집의 경우에도, 사물을 의인화시키거나, 물상에 정령을 부여하는, 소위 낭만주의 기원의 감정이입의 방법이 지나치게 자주 애용되고 있지는 않는가 하는 점을 아쉬움으로 지적해 볼 수 있다. 생태시가 지니는 속성상 이와같은 낭만적 상상력의 작용이 일면 불가피한바 있다 하더라도, 상투적이라는 느낌을 줄 정도로 그것이 남용되는 양상이 빚어질 때 오히려 시적 발상 전체를 상식적 관념의 차원에 머무르게 하면서, 독자에게 식상감을 안겨줄 우려가 크다. 새로운 발견의 기쁨과 더불어 이룩된 민중적 생태시학의 시들이 드물게 보는 시 읽기의 재미를 안겨줄 수 있는 것에 비하면, 과도하게 이념 지향적이고, 의식 지향적인 시들은 거기에 아무리 높은 열도의 생명호흡을 불어 넣어본다고 했댔자, 무미하여 덤덤한 시적효과를 산출할 수 밖에 없다는 점을 독자의 입장에서 적기해둘 필요가 있겠다. 오늘날 우리가 시를 쓰고 읽는다는 것은 이 시집의 「컬러 텔레비젼 속의 우상들」 가 적절히 환기하여 보여주고 잇듯이, 말초의 감각을 향해서만 달려가는 수많은 대중문화의 양식, 매체들과 차열하게 생존경쟁을 벌이는 현실 속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감안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며, 이 생존법칙의 현실 속에서 나름대로의 경쟁우위를 확보하지 못한다면 오늘날 우리의 시작업이란 푸념이거나, 화풀이에 지나지 못하게 될 우려도 크다는 것을 문학자의 한 사람으로 명기해두지 않을 수 없다. 이처럼 가난하고 고단한 시대에 독야청청 소나무처럼, 대나무처럼, 차라리 숯의 운명이 되기를 각오하고, 투구게의 함성을 길어올리는 시인의 옥빛같은 소금의 역할에 대해서 언제나 경의를 표하게 되는 것이지만, 나는 그것이 「컬러 텔레비젼 속의 우상들」 속 가수들의 노래처럼 더 많이 인구에 회자되는 것이기를 바란다. 나는 이것이 "단절된 방안에 갇혀/세상을 개혁 하"자는 것 같은, '나비의 꿈'을 꾸는 번데기의 소망같은 것에 불과함을 잘 알지만, 기적이라도 그것이 황금소나무의 송홧가루처럼 가난한 달동에, 세상 속에 널리 퍼지기를 바란다. 이것은 물론 나의 설법이 아니라, 그의 설법을 보다 더 잘 듣고, 잘 간작하기 위함이다. 그는 본질적으로 자연의 시인, 생태계의 시인이다. 마지막으로 「그의 설법」을 보자.
그의 설법을 들으러 새벽 산에 올랐습니다
낙엽 속에 숨은 노루귀꽃이
쬐끄만 귀를 열고 말없이 앉아 있습니다
빛보다 더 눈부신 설법,
세상을 보는 눈으로는 대체 알아들을 수 없는 그 설법이
햇살처럼 새벽 산자락을 감쌌습니다
삶이 고되어 등 돌렸던 꽃들과 목쉰 짐승들
그리고 산너머로 달아나는 바람이 한데 모여
그 설법을 잘 익은 꿀밤처럼 맛보았습니다
그래서 새벽 산은 누부셨습니다
내일도 오늘처럼 눈부실지 아무도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