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사람, 겨울호
마음으로 읽는 시/언론과 문학지 서평
2005-12-28 22:08:26
유진택 역시 낯선 길가에서 서성거리고 있다. 왜 서성거리고 있는가. 자신이 가고자 하는 길이 아니기에 선뜻 발을 옮길수 없기 때문이다. 그의 길은 자연과 인간이 문명속에 지배당하는 삶을 향해 있지 않다. 오히려 인간과 자연이 어울려 살았던 세계다. 그에게 있어 중요한 것은 이런 세계가 지금은 어디에도 없다는 사실이다. 어디에도 없을 뿐더러 이런 세계를 고집하는 사람들의 삶이란 낯선 이방인의 삶에 불과하다. 변화된 문명의 세계는 더 큰 힘으로 우리의 삶 전부를 휩쓸고 있기 때문이다. 시인은 이런 삶을 가난으로 노래한다.
가난한 세월이 밟고 간 길 위에는
가난한 상표가 찍혀있다
낡은 필름처럼 옛 추억을 되돌려보면
누런 보리밭 이랑을 불어오는 바람,
그 바람에 떠밀려 산비탈을 넘는 등 굽은 황소
질척이는 울음은 멍에에 매달려 먼 옛날을 부른다
가난을 감추려고
32인치 초대형 텔레비전을 사고
요술 같은 컴퓨터를 들여놓아도
내 책상머리에 꽂힌 시집은
토장국의 구수한 냄새만 풍긴다
읽을수록 더 선명해지는 시골길과
등 굽은 황소의 그늘진 울음,
그것들은 모두 우리가 목말라하는 가난의 그리움이다.
__ 「가난이 밟고 간 길」전문
이 시를 이끌고 있는 정서는 그리움이다. 그리움 속에 펼쳐지는 추억은 누런 보리밭과 산비탈을 넘는 황소의 모습으로 구체화된다. 이들은 서로 떨어져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누런 보리밭 이랑을 불어오는 바람, /그 바람에 떠밀려 산비탈을 넘는 등굽은 황소"에서 보듯, 바람은 곡식을 익게 하고 힘든 소의 수고를 들어준다. 서로가 서로에게 의존하고 있는 건강한 관계다. 그는 이런 관계맺음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던 삶을 향한 그리움을 노래한다. 따라서 현재를 살아가는 시인에게 있어서 가난의 의미는 달라진다. 우리가 주목할 바는 가난을 감추려고 32인치 텔레비젼을 사고 컴퓨터를 들여놓는 행위다. 문명의 이기요 농가의 재산품목인 큰 텔레비젼이나 컴퓨터가 가난을 감추기위한 것이라면 그의 가난은 허전함이요 상실감의 표현이다.
그의 가난은 토장국의 구수한 냄새를 잃어버린 세계, 진실된 마음들이 어우러진 세계를 잃어버렸기 때문에 비롯된 것이다. 이런 현실은 시인 한 사람만의 현재가 아니다. 농촌이나 도회와는 상관없다. 어디에 살고 있던,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적인 삶의 모습이다. 그러나 시인은 과거의 추억과 그리움에 매달려 비애와 탄식에 젖어 있지 않다. 비록 물질적으로 궁핍했지만, 자연과 인간이 함께 어울리며 살았던 세계는 지금 어디에서도 찿을수 없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명백하다. 오늘날의 각박한 세태와 상실감은 농촌의 문제에 국한되지 않는 다는 전언이고, 우리 삶에서 건강한 생명력을 회복 할 때 그 상실감을 치유할 수 있다는 믿음이다. 오늘날의 문명은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점점 멀리 벌려 놓고 있을 뿐만 아니라 폭력이고 공격적인 형태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다음의 시를 보자.
아름드리 생나무의 밑동을 쓸어낸다
전기톱이 돌아갈 때 울리는 저 강렬한 떨림,
나무는 아픔의 전율로 우수수 낙엽을 떨어낸다
무더기로 생살이 튄다
전기톱의 억센 이빨은
단번에 수십 그루의 나무들을 토막내 버린다
벌목장에 금세 하늘이 뚫리고
대신 새파란 찬 기운이 내려와 앉는다
짐승들도 마땅히 숨을 곳이 없다
아늑한 짐승들의 낙원은 이제 사람들의 차지가 되고
집을 잃고 어슬렁대는 짐승들의 발자국에 서러움이 찍힌다
우리의 선조들이 당했던 그 설움을
이제 짐승들이 맛보는 시간,
잔인하게 넘어진 나무들은
머리칼 무성히 풀어헤친 채
한쪽 구석으로 끌려가고 있었다
__ 「 벌목장, 그 광란의 숲속에서」전문
위의 시에서 보듯, 문명의 힘은 전기톱의 폭력적 이미지 속에 섬뜩하게 드러난다. 아름드리 생나무의 밑둥까지 잘라버리는 것이다. 전기톱의 비정함과 나무의 대조적인 입장은 억센 이빨과 생살튀는 아픔으로 극대화된다. 여기에 화자의 감정이 개입하면서 파괴, 공포, 분노의 정서가 착색된다. 화자는 나무의 입장에서 벌목의 현장을 바라보기 때문이다. 그는 잠깐동안의 작업으로 금게 하늘이 뚫리고 대신 새파란 찬 기운이 내려앉는 공포를 느낀다. 그것은 삶의 터전을 잃어버린 짐승들의 공포와 같은 처지의 사람들이 겪었던 고통에 대한 인식이다. 시인은 여기서 자본의 논리를 배경으로 한 문명의 폭력성과 인간의 역사를 상기시킨다. 우리 선조들이 당했던 서러움을 현재와 시키는 것이다. 먼 과거로 거슬러 올라갈 필요도 없다. 우후죽순처럼 생겨나는 골프장에서 보듯 소수 건강한 생활을 위해서 다수의 피해를 정당화 하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 아닌가?
시인의 설움은 인간과 자연이 조화롭게 살던 세상을 빼앗긴데서 온다. 여기엔 자연과 더불어 살지 못하는 세상이란 얼마나 허무한가에 대한 안타까움이 배어 있다. 그러나 그는 흥분하거나 분노하지 않는다. 다만 오늘날 우리의 삶을 "머리칼 무성히 풀어헤친 채/ 한 쪽 구섯으로 끌려가고" 있는 모습으로 담담하게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이 시인의 시적 태도가 돋보이는 부분이다. 벌목현장의 광기를 보면서 끝내 냉정한 태도로 오늘날 삶의 위기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분노와 격정보다 나무의 처지에서 오늘날 우리 삶의 모습을 환기시키는 놀라운 인내심을 볼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이런 안타까움을 안고 그는 어디에 서 있는가?
언제부턴가 그 길은 침묵 속에 잠겨 있었다
무수한 사람들의 소란스럽던 발길은 끊어지고
대신 크지 못하는 질경이와 그 질경이의 뚝심 같은 햇살이
길을 덮고 있었다
하나둘 포근한 하늘 속으로 들지 못한 넋들이
그 길가에 서성이며 수런수런 풀들의 흐느낌으로 묻혀갈 때
난 알았다, 그 길을 열고 닫는 건 아직도 낯선 길가에 서성이는
생명의 귀한 넋들이란 것을
__「 잊혀진 길」전문
한때는 무수한 사람들이 오고가던 소란스런 길이었다.그러나 그 길은 잊혀져 있다.더이상 사람들이 지나다니지 않기 때문이다. 농촌은 이미 '간혹 우체부가 빈 집에 꿈같이 들렀다'(「폐가」)갈 정도로 비어 있다. 어린 나무조차 '서울쪽으로 기울어져'(「서울쪽으로」)있듯 오늘의 농촌은 더이상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으로 변해버렸다. 사람이 살지 않는 곳에 길이 있을 리 없다. 잊혀지고 낮선 길이 있을 뿐이다.
시인은 절망하고 있는가. 아니다. 그는 햇살고과 만나' ...제 스스로/ 꼬투리를 열고 나오는' 덤불콩(「안화리4」),새들과 진달래의 대화(「새들도 언어로 소식을 전한다」), '보석처럼 하얀 꽃을' 피우는 탱자나무(「탱자나무는 말이 없다」), '오랜 속앓이에 참는 법을 배우는' 바위(「바위」)...들과 어우러져 살고 있다. 비록 문명과 생존에 밀려 터전을 잃었지만, 그 버려진 곳에서의 삶이야 말로 진정한 삶임을 믿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믿음은 보다 철저한 현실인식을 요구한다. 현실에 대한 보다 깊은 이해가 있을 때, 문명의 이기와 물질적 풍요에 들뜬 낯선길가를 서성이면서도 이방인의 삶으로 똘어지지 않는 이유가 더 분명해진다는 의미에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