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죽은 이가 그토록 기다리는 내일
전창수 지음
나의 인생은 거기서부터 엇나갔다. 나의 중학교 시절이었다. 내 인생 처음으로 아버지한테 매로 얻어맞았다. 반항해 보았지만, 아버지는 나를 막무가내로 때렸다. 내가 맞아야 하는 이유를 몰랐고, 내가 반성문을 써야 하는 이유를 몰랐다. 내가 잘못한 게 없는데 반성문을 왜 써야 하는지 몰라서, 나는 내가 뭘 잘못했는지 모르겠다고 썼고, 아버지는 그 이유로 잘못했다고 빌라고 하면서 매로 여기저기를 때렸다. 나는 끝까지 잘못했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다음은 어떻게 되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때부터 나의 마음에 어둠이 시작되었다. 나는 그 이후로, 한순간도 자살의 유혹에서 벗어난 적이 없었다. 어려운 일이 생길 때마다 나는 자살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으며, 살기 싫다는 생각을 했다. 내가 만약 정말로 용기가 있었다면, 나는 이미 자살을 해 버렸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자살을 하는 것보다 자살에 실패했을 때의 아픔이 두려웠다. 어딘가 불구가 되어서 살아난다면 나는 남은 인생 어떻게 살아가지, 고층에서 밑을 내려다보면, 내려다보는 게 무서웠다. 그렇게 무서워서 나는 자살을 하지 못했다.
자살생각은 내 삶에서 항상 따라다녔다. 언젠가는 죽겠지, 하면서 죽음을 기다려야 하는 시간들이 너무 힘겨웠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나를 살려주는 것들이 있었다.
TV속의 드라마, 또 신나는 음악들, 또 잔잔한 노래들, 또한, 영화들, 또 흥미진진한 프로야구 경기, 또 비록 빠져들어서 몸의 어딘가가 아파야만 끝나는 악순환을 반복하긴 했지만, 게임이 나를 자살의 유혹으로부터 벗어나게 해 주었다.
나는 아버지를 볼 때마다 그때의 기억이 났고, 성질이 났다. 아버지가 말할 때마다 그때의 기억들이 떠올라 열이 올랐다. 언젠가부터, 아버지가 성질을 부리면, 나는 고함을 질렀다. 아버지가 내게 충고 같은 것을 할라치면, 또 소리를 질렀다. 아버지는 언젠가부터 내가 혼자 사는 집에 오지 않았다.
아버지에게 상처받은 기억들은 많다. 그러나 나는 여기서는 이것만 밝힌다. 아버지에게 상처받은 이야기들은 나의 작품 여기저기 어딘가에서 있다. 그것을 궁금해하지 말길 바란다. 그러나 분명히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부모가 자식을 사랑할 때는 차별하지 말아야 한다는 사실이고, 자식을 놀리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고, 자식을 미워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자식은 이런 것들 때문에 마음의 병이 들어간다. 자식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자식을 소유물로 여기지 말아야 한다. 그것은 부모로서의 사랑이 아니다. 그것은 자식에 대한 집착일 뿐이다. 부모가 자식에게 집착할 때, 자식들은 부모로부터 받은 상처 때문에 자살을 생각하게 된다.
부모가 자식의 의견은 경청하지 않고, 부모의 말대로 다 하라고만 할 때 부모가 내 말대로만 하면, 다 된다고 하면서 자신의 생각을 강요할 때, 자식에겐 자신이 인생이 없기 때문에 결국은 불행해지고, 평생을 자살의 유혹과 싸워야 한다.
나를 자살로부터 구해준 것은 솔직히 말해 예수님아 아니다. 나를 자살로부터 구해준 것은 음악이고 드라마고 영화고 스포츠다. 내가 힘들게 살아갈 때마다 그것들을 보면서 힘을 얻었다. 그렇게 살아가다가 예수님을 만났다. 예수님을 만나게 된 것은 내가 자살을 하고 싶지 않다고, 그래서 자살을 하고 싶은 생각을 더 이상 하고 싶지 않다는 그런 생각을 했을 때였다.
마음으로 예수님을 만나기 이전에 다녔던 교회는 나에게 자살할 생각을 더 부추기고 있었다. 교회를 가면 재미없었고 교회를 가면 우울했었다. 그렇게 나는 교회를 자주 떠났다.
내가 교회에 다닐 수 있었던 계기는 교회에서 주던 식사였다. 교회에서 무료로 밥을 주기도 하네, 이러면서 밥을 주는 교회를 찾아다녔다. 그러다가 우리 동네의 조그만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고 가려는데 밥을 먹고 가라고 해서 밥을 먹었다.
그런데, 밥이 너무 잘 나왔다. 내가 평소에 먹을 수 없는 밥들이 나왔다. 그렇게 나는 그 교회를 몇 년을 다녔다. 교회를 다니면서, 자살에 대한 생각을 하지 않았다. 교회를 다니는게 너무도 신나고 행복했다.
그러나 나는 어느 날, 그 교회를 나오게 되었다. 마음의 답답함이 있어서 나왔다. 그렇게 나의 또다른 인생이 시작되었고, 거기서 나왔어야 하는 이유는 나에게 있는 “텔레레터”능력을 활용하기 위해서였다고 지금은 알게 되었다.
나는 여전히 아버지를 보면, 그때의 기억들 때문에, 또 어떤 말을 하면 고함지르고 또 화를 낼지도 모른다. 그래서 아버지를 보지 않길 원한다. 그렇데 소리지르고 화내고 나면 나는 그것대로 또 스트레스를 받고, 며칠을 힘들어한다. 아버지에게서 받았던 상처는 어느 날 크게 터져나왔고, 그 상처는 평생동안 아물지 않을지도 모른다.
나는 지금 평온한 삶을 산다. 그렇게 할 수 있는 건, 예수님이 내 마음을 치유해 주셨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내 마음을 치유해 주시기 전에는 하루 종일 마음의 어두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항상 우울한 삶을 살았다. 그러나 여전히 누군가와 만나는 것, 아버지를 만나는 것, 또 무언가 세상에 나가서 하는 것은 자신이 없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다면 그래서 인생이 즐겁고 행복하다면 자살을 생각하지 않는다. 자산을 인생이 불행하고 하기 싫은 일을 매일 억지로 하면서 살고 있을 때, 그래서 정말 사는 것이 힘들기만 할 때 자살을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자살의 핵심은 몸이 아니라 마음이 힘들다는 것이다. 몸은 힘들지만, 행복할 수도 있다. 그러나, 몸은 힘들지 않는데 마음이 힘들다면, 그것은 위험하다. 몸도 마음도 다 힘들다면, 더 위험하다.
오늘은 어제 죽은 이가 그토록 기다리는 내일이다. 그러므로, 아침햇빛이 있길 바라기도 한다. 아침햇빛을 맞으면서 살아있는 거 정말 괜찮네, 라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그렇게 삶의 희망을 찾기도 한다.
교회를 다니고 예수님을 믿으면서, 내게 즐겁고 행복한 일을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 한다면, 그것은 결국은 자살을 꿈꾸게 한다. 하고 싶은 일을 하지 않고 그저 교회만 다닌다면, 결국은 불행한 삶으로 빠져든다. 교회를 다니는 것은 물론 중요하다. 하지만, 교회를 다니는 것 때문에 자신의 행복을 포기하는 어리석음을 범하진 말길 바란다. 그것은 예수님이 바라는 것이 아니다.
교회를 다니면서 정말로 행복한 삶을 살아가시기 바란다. 교회를 다니면서 마음의 안정을 얻는 삶을 살길 바란다. 교회를 다니면서 최고의 축복된 삶을 살아가게 되기를 바란다. 교회를 다니면서 이제는 더 이상 자살을 꿈꾸지 않는 삶이 되기를 바란다.
오늘도 나는 즐거운 글을 쓴다. 그리고 행복한 신앙생활을 할 걸 생각하면서 기쁨에 젖는다. 행복한 삶이 되시기 바란다. 이 세상에 자살을 하는 사람들이 한 사람도 없기를 바란다. 그렇게 좋은 세상이 오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