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장 청부(請負)를 받겠소 -2
환비(幻飛). 그는 마천대장을 쫓느라 여념이 없는 상태였다.
마천대장은 가끔 방향을 급히 꺾곤 했다.
'신법이 정말 뛰어난 자다. 이 일이 성사되건 되지 않건 저자를
설득해 본좌의 비위(臂衛)로 삼으리라.'
환비는 나름대로 심복을 세우고 치달렸다.
"저곳 같습니다!"
사시경(巳時頃). 마천대장은 주위를 빙빙 돌다가 천막이 있던 곳
에서 불과 십오 리밖에 떨어지지 않은 황운봉 정상 근처로 다가갔
다.
"흠, 가 보자!"
환비는 손을 품에 넣으며 눈에서 살광을 뿌렸다.
'환교, 네놈은 이제 죽었다.'
그는 잔혹한 미소를 지으며 마천대장을 따라 동굴 어귀로 접어들
었다.
"아아……!"
동굴 속, 아련한 신음 소리가 나고 있었다.
환비가 어렸을 때부터 모질게 학대했던 환교라는 젊은이가 길게
누워 있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 곁에 한 젊은이가 앉아 있다
는 것이었다. 바로 천하제일색.
그는 환비가 마천대장을 따라 들어오는 것을 보고 차게 웃었다.
"이제 오시는구려?"
"아…아니? 어떻게 더 빨리 찾았소?"
환비의 목소리는 조금 전과 달리 지극히 공손했다. 그는 이제서야
천하제일색을 자처한 백리웅에 대해 경외감을 느끼는 것이었다.
"훗훗, 천하제일색이라 하지 않았소?"
"하긴……."
만병지존은 짐짓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더니 그는 갑자기 차디찬
눈으로 이복동생 환교를 노려보았다.
환교, 그는 반 공포, 반 저주가 가득 담긴 눈으로 환비의 눈을 마
주 쳐다보았다.
"훗훗, 잘도 숨어 다녔구나."
환비가 먼저 말했다. 그는 천천히 병기를 꺼내고 있었다. 그때였
다.
"잠깐!"
백리웅이 두 사람 사이에 끼여 들었다.
"왜 만류하시오? 그대는 대가만 받으면 그만 아니오?"
환비가 물었다.
"훗훗, 장사꾼이란 본시 이(利)가 가장 많이 남는 장사를 하는 법
이라오!"
백리웅은 도대체 무슨 꿍꿍이인가? 그는 두 사람을 번갈아보며 말
했다.
"나는 장사를 하고 있는 것이지, 누구를 돕고 있는 것이 아니오.
훗훗, 이 자리에서 둘 중 한 사람에게 청부를 받겠소!"
"청부라니?"
환비는 입을 딱 벌렸다.
백리웅은 들은 체도 안 하고 정좌를 했다.
굴 어귀, 마천대장이 단도 두 개를 꺼내 들고 근처에 누가 나타나
는가를 살피고 있고, 환교는 희한하다는 눈빛으로 환비와 백리웅
을 번갈아 보았다.
청부를 받겠소!
백리웅의 목소리는 메아리가 되어 굴 안에 울려 퍼졌다.
습기가 차지 않아 건조한 동굴 안에는 환교가 흘린 피의 내음이
짙게 풍기고 있었다.
"자, 먼저 불러 보시오!"
백리웅은 환비를 보고 웃었다. 묘한 웃음, 환비는 끓어오르는 분
노를 참지 못하고 손을 번쩍 쳐들었다.
"죽어라!"
피이이-잉- 슈슉-슉!
그의 손에서 다섯 개의 비표(飛 )가 던져졌다. 스슷-, 그것은
빙글빙글 돌며 백리웅의 가슴을 향해 날아갔다.
백리웅의 몸에 다섯 개의 구멍이 나기 직전, 투둑-둑, 투명한 벽
이라도 가로막고 있는 듯 다섯 개의 암기는 백리웅의 무릎 근처로
힘없이 떨어져 내렸다.
바로 다섯 개의 성형비도(星形飛刀)였다.
마접(魔蝶). 백리웅은 낯익은 암기를 보며 문득 오랫동안 잊었던
그 여인의 아름다운 얼굴을 기억할 수 있었다.
'역시 저놈이었다. 마접에게 암기를 던진 놈은… 그리고 내게 분
근착골형(分筋錯骨刑)을 가한 놈은!'
백리웅은 환비를 쳐다보았다.
"호…호신강기가 본좌의 다섯 배라니? 너…너는 누구냐?"
환비는 땀을 뻘뻘 흘리며 뒷걸음질치고 있었다.
"환보주(幻堡主), 겁먹을 건 없소. 공평한 거래니까!"
백리웅은 슬쩍 손을 흔들었다. 쿵-쿵-쿵! 환비는 백리웅이 잡아
끄는 힘에 이끌려 세 걸음 앞쪽으로 끌려나왔다.
세 개의 족인(足印)이 돌바닥 깊이 새겨졌다.
"거…거래라니?"
환비가 다시 묻자, 백리웅은 오만히 말했다.
"후훗, 둘 중 하나는 죽어야 하오. 훗후, 나는… 내가 바라는 것
을 줄 수 있는 사람에게 힘이 되어 줄 작정이오!"
"무…무엇을 바라느냐? 으으, 원한다면 백만금을 주겠다."
환비는 아래턱을 떨고 있었다.
"황금은 내게도 많이 있소. 훗훗, 나는 황금이 아니라 파괴력이
강한 화기(火器)를 구하고 있소!"
"화기? 으으, 그럼…벽력신탄(霹靂神彈) 백 상자를 주겠다. 그것
은 세상에서 가장 강한 화기이다. 세 시진 안에 그것을 받게 될
것이다!"
환비는 입 안을 바짝바짝 태우고 있었다. 그는 잃을 것이 많은 사
람이다. 하나, 바닥에 쓰러져 죽어가고 있는 환교는 잃을 것이 별
로 없는 사람이었다.
백리웅은 환비의 말이 끝나자마자 환교를 바라보았다.
"그대를 죽이려는 자는 청부대금으로 벽력신탄 백 갑을 말했소.
귀하는… 무엇으로 청부할 수 있소?"
"으으, 나는 아무것도 갖고 있지 못하오."
"흠, 그래도 팔 만한 것은 있는 걸로 아는데?"
"무슨 소리요?"
"그대는 제조법이 실전되었다고 전해지는 뇌화굉천탄(雷火宏天彈)
을 만드는 손을 갖고 있지 않소!"
"어…어찌 그것을 아시오?"
환교의 입이 딱 벌어졌다.
뇌화굉천탄(雷火宏天彈).
그것은 그의 아버지, 그를 서자로 낳은 아버지가 죄스런 마음에
환교에게만 살짝 알려 준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화기가 아닌가!
"훗훗, 그것으로 청부를 하겠다면 받아 주겠소. 나를 위해 백구
개의 뇌화굉천탄을 사흘 안에 만들어 주겠다면!"
백리웅은 이상한 눈빛을 던지고 있었다.
환교만은 그 눈빛을 느낄 수 있었다.
'한이 많은 사람이다, 나처럼!'
환교는 이상하게 백리웅에게서 친근감을 느꼈다. 그는 천천히 고
개를 끄덕였다.
"만들어 주겠소. 하나, 조건이 있소!"
"무엇이오?"
"나를 죽이려 하는 사람을, 죽이지 말아 달라는 것이오!"
"……?"
백리웅은 어이없어 했다.
"그의 잘못은 아니었소. 사실은 내가 죄인이었소. 아아, 나는 이
길로 천해채주와 함께 먼 곳으로 도망가겠소. 그것으로 족하오.
그러니 저 사람을 살려 주시오!"
"바보로군, 자신을 죽이려 하는 자를 살려달라니……."
백리웅이 그를 보고 비웃을 때, 이제껏 기회를 보고 있던 환비의
왼손이 백리웅의 등을 향해 짓쳐들었다.
"뇌화참(雷火斬)!"
우르르-릉-! 우르르-릉-!
양강(陽 )한 순양기공(純陽 功)이 영파로 일어났다.
무시무시한 화염(火焰). 동굴 안이 일순 대낮처럼 밝아졌다.
꽈르르-릉! 꽈르르-릉!
천둥치는 소리를 내며 뻗어 나가는 화염. 백리웅은 고개를 저으며
백옥수(白玉手)를 내저었다.
"너는 여색을 너무 밝혀 양강진기(陽 眞氣)를 자유롭게 쓰지 못
한다!"
파팟! 둔탁한 소리가 나며 환비는 사색이 되어 일곱 걸음 물러났
다.
"흐으으…윽, 뇌화참을 간단히 흐트리다니!"
그의 가슴, 하나의 녹색 장인(掌印)이 선명히 찍혀 있지 않는가?
백리웅의 오 성 진력이 환비의 양강진력을 헤치고 들어가 가슴에
장인 하나를 찍은 것이었다.
환비는 울상이 되어 무릎을 땅에 댔다.
"제…제발… 목숨만……."
그는 만병지존이 아니었다. 그는 만병지존의 후광을 입고 있는 자
에 불과했다. 진짜 만병지존은 환교라 할 수 있었다. 그의 태도는
환비에 비할 수 없을 만큼 의연했다. 환교는 탄식하며 눈을 감아
버렸다.
"형제상잔의 비극이 일어난 것이 안타까울 뿐이오. 아아, 아버님
이 살아계시기만 했어도 이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을 텐데……."
환교는 아버지를 그리워했다.
그의 아버지 환망(幻望). 그는 수년 전 의문의 죽음을 당했다. 그
일은 아직까지 비밀이었다. 만병보 측은 환망이 혈가람사의 첩자
에 의해 살해되었다고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 그 일 이후, 만병보
는 창궁혈의맹의 다섯 기둥 중 하나가 되었고, 수백 년 간 모은
모든 기문병장기를 창궁혈의맹에 기증했다. 그것은 강호인들이 잘
모르는 비밀스러운 사연 중 하나였다.
백리웅은 환비를 쏘아보고 있었다.
'죽이고 싶은 자.'
백리웅은 손에 강기를 모았다.
사감(私感)에 얽매이면 아니 된다!
그때였다. 영주의 가르침이 뇌리를 때린 것은.
백리웅은 강기를 스르르 풀며 나직하게 말했다.
"너를 죽이지는 않겠다."
"고…고맙습니다!"
환비는 눈물 콧물을 흘려가며 절을 했다.
"후후, 절까지 할 필요는 없다. 나는 네게 그 누구도 풀지 못할
점혈법을 시전할 작정이니까! 너는 영영 백치(白痴)가 되어야 한
다!"
파팟! 백리웅은 잇따라 칠지를 쳐냈다. 환비의 앞가슴 다섯 곳,
머리 부위 두 곳에 주홍색 지인(指印)이 찍혔다. 환비는 그 순간
부터 겁을 잃어 버렸다. 그는 희죽희죽 웃으며 환교를 바라보았
다.
"헤헤, 네…네가 누구지?"
그는 바보가 되어 버린 것이다.
"지…지독한 자!"
이번에는 환교가 백리웅을 노려보았다. 그는 두 주먹을 쥐고 바들
바들 떨고 있었다.
"너를 영원한 적으로 삼겠다. 그래도 나의 형인데… 크으으, 나로
인해 백치가 되다니."
환교는 이 일을 만병보의 수치로 아는 듯, 피를 한 모금 울컥 토
해냈다.
백리웅은 매사에 무감각했다. 정(情)에 우는 자는 그에게는 그저
바보로 보일 뿐이다.
"환교, 네가 나에 대해 어떤 마음을 먹건 상관없다. 다만, 나는
네가 나와 한 약속을 지켜 주기 바랄 뿐이다!"
"으으, 한 말은 꼭 지킨다. 악마!"
환교는 눈물을 주르륵 흘렸다.
'환교, 너는 조금 더 강해져야 한다. 이 험난한 세상을 울지 않고
살아가기 위해서는…….'
백리웅은 속으로 중얼거리며 뒤돌아섰다.
마천대장이 그를 보고 있었다. 그의 눈빛은 백리웅의 눈빛과 같았
다. 무정한 눈빛, 그것은 그들이 만든 눈빛이 아니었다. 그것은
강호가 그들에게 준 눈빛이었다.
두 사람은 얼마동안 전음으로 말을 나누었다. 정오가 될 무렵, 백
리웅은 마천대장에게 이후의 일을 맡긴 다음 밖으로 나갔다.
그는 환교를 믿었다. 환교라면 제 입으로 말한 것은 꼭 지키리라.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