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스크 수술 다섯 번의 후유증을 벌침으로 완쾌
안녕하세요?
저는 전 울산폴리텍평생교육원 교수 김명철입니다.
저는 운동선수 시절에 허리를 다쳐 근 20년이란 긴 세월동안 고통과 생활의 불편함을 함께 했지만, 다행히 벌침으로 수술도 하지 않고 지금은 정말로 살맛나는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여러 회원님들이 안계셨다면 아직도 병원에 다니는 불편함에 나날이 고통 속에서 하루하루를 살고 있었을 것입니다.
발목에 마비가 오고 허리 통증으로 고통스런 나날을 보내던 지난 시절을 생각해보면 벌이야 말로 저에겐 너무나 고마운 존재인 것이 틀림없습니다.
2005년 3월 어느 날
동료직원의 남동생이 디스크 수술을 여러 번 하고도 허리의 통증이 심하고 다리의 휘어짐에 거동이 불가능한 상태에서 서울에 있는 S병원에서 4번째의 기대를 걸고 온몸을 맡겼지만, 역시 나날이 고통이 심해지고 다리의 휘어짐은 변함이 없고, 5번째 수술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근 5년을 하루하루 통증의 고통 속에서 살다가 절망의 끝에서 누나의 끈질긴 설득으로 저와 만나게 되었습니다.
환자를 만나 보니 술 냄새가 진동하고 항상 인상을 찌푸리고, 술과 진통제로 살았으며, 정신과 치료를 병행하고 하루에도 수십 알의 약을 먹어야 통증의 괴로움을 잠시나마 잊을 수 있다는 처지에 영원히 고통을 잊을 수 있는 길을 택했다면서 눈시울이 금세 벌겋게 변했습니다. 수면제 수십 알을 먹고, 눈을 뜬 곳은 울산 D병원 응급실.
손발이 꽁꽁 묶인 채로 희미하게 보이는 형광등 불빛에 자신을 확인하고 더없이 초라하고 멍든 자신이 미웠다고 합니다. 다시 정신과 치료를 받으며 요통에 관한 진통제를 번갈아 맞아야 했고, 우울증과 통증에 시달리는 그는 큰 병마와 싸우고 있는 처지라 말조차도 하기 힘든 형편이었습니다.
첫날 몸을 만져보니 어느 한 곳 성한 곳이 없었습니다. 더군다나 허리에 쇠를 다섯 개나 요추에 박아 놓았으니 만지는 곳마다 고함소리와 짜증이었습니다. 그야말로 엄청난 고통이 온 몸에 있다는 걸 알고 벌침에 관련된 상세한 보충설명을 늘어놓았습니다.
그는 열심히 임상에 임할 것을 맹세하고 가슴이 터질 것 같은 시한폭탄, 모든 것을 비관하는 극히 부정적인 응어리를 푸는 게 제일 급선무라 생각하고 전중에 첫 침을 찔렀습니다.
그냥 클릭 정도인데도 고개를 번쩍 들고 가슴을 만지며 고함치는 소리에 가슴이 철렁했습니다. 찌그러진 인상, 그래도 계속 소리를 지르며 고통을 호소했습니다.
어찌 할 바를 몰라 안절부절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침묵의 시간이 흐르고 환자는 긴 한숨을 쉬면서 다시는 안 오겠다고 가버렸습니다.
만약에 직침이나 놓았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벌침을 맞으려고 숙직실에 계시던 다른 분들도 다들 나가버렸습니다.
그리고 3일 후 직원의 동생 분한테서 전화가 왔습니다. 죄송하다고 그러면서 다시한번 맞아 보고 싶어 했습니다. 4시경 그분은 부인의 부축을 받으며 저와 숙직실로 향했습니다.
제일 먼저 마음을 치료하기로 결심하고 전중, 심유를 놓고 보냈습니다. 계속해서 3일에 한번씩 7회째 되는 날, (약 한 달정도)
“아! 선생님 가슴이 탁 트였어요. 시원해요.”
처음으로 환한 웃음을 보였습니다. 부인에 의하면 통증은 변함이 없지만 말을 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선생님! 저 좀 고쳐주세요.”
부인도 손을 비비며 무엇이든지 다해 드릴 테니 우리 남편 제발 좀 고쳐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좋아요. 열심히 맞기만 한다면 최선을 다할테니 걱정은 마세요.”하고 돌려보냈습니다.
그때 저는 도서관 이동버스 순회를 하고 있었습니다. 가는 곳마다, 정지하는 곳, 어디든지 찾아와 매일 매일 봉고차에서 5~6명씩이 벌침을 맞았습니다.
이제 가슴이 틔었기에 혈 자리를 바꾸었습니다. 4월초 대장유, 환도, 위중, 승산, 승부, 은문등에 침을 꽂았습니다.
이제 환자의 몸엔 면역이 충분히 생겼다는 생각에 이틀에 한 번씩 일주일에 2번에서 3번 씩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약속을 어기지 말라했습니다.
아카시아 꽃이 조금씩 피기 시작했고. 벌통 옮겨 놓은 산골짜기 까지도 고통에서 벗어나려는 환자는 3번의 채밀이 끝날 무렵 통증이 조금씩 좋아진다는 것이었습니다.
7월초 환자는 허리요통이 완전히 사라졌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얼마나 기다렸던 시간입니까? 환자를 벌컥 안아주고 싶은 맘 밖에 생각나질 않았습니다. (약4개월정도)
이제 남은 것은 휘어진 다리를 펴는 것, 나는 위의 혈 자리 중 환도에 직침 5~7개를 이 삼일에 한 번씩, 나머지 혈 자리는 클릭정도로 약하게 놓았습니다.
그러니까 고통이 없어지고 약 한 달이 되는 날...
다시 근무처인 도서관 숙직실, 점심시간을 이용해서 그와 부인, 그리고 몇몇의 환자가 찾아왔습니다. 왠지 그날따라 무엇인가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는 그를 보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오늘 다리 한번 펴 볼까?”
그는 피식 웃으면서 옆 눈으로 주위를 살피더니
“네? 어찌 병원에서 안 된다는 다리를 펼 수 있겠습니까?” 하면서 옷을 내리고, 부인은 연신 기도를 하면서 선생님 제발 좀 도와달라는 것이었습니다. 평소와 같이 환도에 아홉 마리의 직침을 찌르고 은문, 위중, 곤륜등에 침하고 요추 전체와 임맥인 전중, 관원, 중극에 침을 했습니다.
“자, 이제 한번 펴보자!”
벌침의 통증으로 얼굴을 찌푸리고 이마엔 땀이 송송 맺혔습니다. 유침한 지 수분이 지났습니다. 오! 신이시여 이게 웬일입니까, 다리를 덜덜 떨면서 다리가 펴지는 게 아닙니까.
“여보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옆에서 보고 있던 환자들도 환호성을 지르며 젊은 양반 힘내라면서......
그리고 저는 이렇게 주문을 했습니다. 그만 펴라고,
5년이란 세월을 그렇게 살았기에 완전히 다 펴면 더욱더 심한 고통이 오리라 생각했기에 운동으로 나머지를 펴기로 하고 흘린 땀을 쓸어주면서 "침 맞을 때 너무 아팠지?" 하고 위로의 말을 하니 "아! 선생님 진짜로 내 다리가 펴졌습니까?"
“그동안 열심히, 부지런히 맞은 결과일세. 나머지는 걷기 운동을 하고 계속 침을 맞으면 펴질 걸세.”
모든 사람의 축복을 받는 순간 난 꼼꼼히 메모해둔 환자의 기록을 살펴보면서 조용히 집으로 보냈습니다.
근 열흘 후 갑작스런 전화를 받고 이층에서 내려가 보니 휠체어를 타고 링겔을 뽑지도 않은 환자복 차림으로 글쎄 도서관에 찾아온 게 아닙니까? 이럴 수가! 아니 당신들은 밥그릇 날릴 생각으로 이곳을 왔냐면서 고함을 지르니 아주머니께서 다름이 아니라 우리 젊은 사람 다리를 펴고 고통이 없이 나은걸 보니 선생님이 너무나 궁금했다는 것입니다. 웃을 수밖에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 후 그는 일주일에 한 두 번씩 벌침을 맞으면서 끈질긴 노력으로 몸담아 있던 자리에 복직까지 하는 쾌거를 이루었습니다. 그는 지금 울산 H자동차에 근무하면서 점심시간이면 즐거운 맘으로 많은 사람에게 벌침을 놓고 있으며 제가 강의 하는 곳이 세 곳인데 가는 곳마다 힘든 일을 도와주고 있습니다.
저 또한 수많은 임상으로 좀 더 정확한 결과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우리 회원님들의 힘이라 생각하고 더없는 고마움을 가지고 있으며, 그동안 협회를 이끌어 오신 회장님 이하 모든 회원님께 감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대단히 감사합니다.
전 한국폴리텍울산대학평생교육원 교수
한국봉료보건연구회
이사 김 명 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