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적인 피아노 콩쿠르에서 18세로 역대 최연소 우승한 임윤찬의 활약을 볼 수 있는 다큐멘터리 영화 <크레센도>. 꼭 챙겨 보고 싶은 음악영화다. 자주 가는 영화관에서는 상영관이 없어, 과천에서 가장 가까운 평촌의 CGV 영화관을 찾았다.
영화는 2022년도 미국 텍사스에서 개최한 반 클라이번 국제 피아노 콩쿠르(Van Cliburn International Piano Competition) 실황을 담았다. 이 대회는 냉전이 절정이던 1957년 차이코프스키 국제 피아노 콩쿠르에서 우승한 미국의 피아니스트 반 클라이번의 이름을 건 국제 피아노 경연 대회다.
51개국 388명의 피아니스트 중에서 미국 텍사스 주 포트워스에서 개최된 본선까지 올라온 30명의 피아니스트 소개로 영화는 시작한다. 1차 경연에서 30명이 16명으로 추려지고, 이어서 12명이 선발되어 준결승을 치르고, 6명이 결승에 오른다. 영화 제목 크레센도 (Crescendo: 점점 세게)처럼 두 시간 가까운 러닝타임 동안 감동이 크레센도로 다가왔다.
임윤찬은 준결승전에서 리스트가 피아노 연주 테크닉을 집대성한 12곡의 <초월적인 연주를 위한 연습곡>을 연주했다. 발표 당시 너무나도 어려워 슈만이 “이 곡을 이 세상에서 연주할 수 있는 사람은 손꼽을 정도일 것이다.”라고 말했을 정도다. 임윤찬은 이 곡을 60여분 동안 집중하여 온몸으로 연주하였다. 임윤찬이 만드는 피아노 소리는 섬세하나 힘차고 대담하여 오케스트라 연주를 뚫고 명징하게 귀를 때렸다. 진지한 연주 속에 폭발하는 에너지가 분출되었다. 탁월하다는 말이 부족할 정도의 연주다.
준결승 진출자 12명의 공연이 모두 끝나고 심사위원장이 금은동을 겨루는 결선진출자 6명을 호명하여 무대로 부르는 긴장된 순간이었다. 5명이 호명되었으나 임윤찬의 이름은 불리지 않았다. 마지막 여섯 번째로 임윤찬의 이름이 호명되었다. 무대에 오르는 소년 임윤찬의 표정은 다른 참가자처럼 기뻐하거나 안도하는 표정이 아닌, 놀랍게도 담담한 모습이었다.
임윤찬은 결선 무대에서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3번>을 연주했다. 라흐마니노프가 이 곡을 그의 친구이자 당대 최고의 피아니스트에게 헌정했으나, 너무 어려워 연주하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만큼 연주하기도 어렵고 힘이 드는 곡이며 콩쿠르 대회에 자신의 기량을 드러낼 수 있는 도전적인 곡이라는 뜻이다.
임윤찬의 연주는 당당하면서도 겸손하고, 조용하면서도 찬란하고, 절제미속에서도 격정적이었다. 피아노 건반을 두드리는 그의 손에 불꽃이 튀고, 그가 내는 소리는 맑게 흐르는 개울물이었다가 벼랑에 쏟아지는 폭포수가 되었다. 자신에게 주어진 특별한 재능에 열정과 노력을 담으면 어떤 엄청난 결과가 나오는지 보여주었다. 이마에 흐르는 굵은 땀방울이 그의 재능과 삶의 무게처럼 느껴졌다. 모든 참가자들이 대단한 연주솜씨를 보였으나, 임윤찬은 군계일학이었다.
연주가 끝나자 여성 지휘자 마린 알솝도 울컥하여 눈시울을 훔쳤다. 고수는 고수를 알아보는 법이다. 연주가 끝난 후 오케스트라 단원 여러 명이 ‘평생 기억에 남을 연주’라고 엄지 척을 하면서 미래의 전설과 사진을 남기려는 모습에 뭉클했다. 영화가 끝나고 자막이 올라가도 아무도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극장을 나오면서 아내가 감탄하며 말했다,“임윤찬에게 이창호의 모습이 보이네.”전적으로 아내의 말에 공감하였다. 기시감인가? 임윤찬에게 어린 나이에 ‘돌부처’라 불린 바둑 국수 이창호의 내공이 보였다. 코로나로 대회가 1년 연기되어 가까스로 출전자격을 얻은 18세 소년에게 거인의 모습을 엿본 게다.
한 해가 저물어간다. 금년 겨울에는 눈이 많이 내렸다. 내리는 눈과 함께 클래식 음악으로 차분하게 한 해를 마무리했다. 얼마 전에 클래식 동호회 모임에서 80년 전에 만들어진 전설적인 음악영화 <카네기홀>을 보면서 러닝타임 내내 영화속 주인공과 함께 대가의 실황 연주회를 감상하며 클래식의 향연을 누렸다. 아내와 함께 코리안 챔버 오케스트라가 예술의 전당에서 공연한 송년음악회도 즐겼다. 이렇게 2023년 한 해가 음악으로 가슴을 채우며 저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