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조의 파천
申砬은 충주에서 모은 8,000여의 군사로 탄금대에서 배수진(背水陣)을 쳤는데 4월 28일 왜군이 단월역을 따라 조총으로 공격해오자 말을 달려 적진에 돌진했으나 실패하고 전군이 함몰하며 전사하고 이일은 탈주하였다.
고니시의 군사는 가토의 군과 충주에서 잠시 합류하여 고니시의 군은 경기도 여주 양근으로 빠지고, 가토의 군은 죽산 · 용인으로 한강에 이르렀다.
구로다 · 모리의 군은 25일에 성주에 이르렀고 지례 · 김산 추풍령을 넘어 충청도 영동으로 나가 청주성을 함락하고 서울로 향하였다.
4월 29일 충주 패보가 전해지자, 이원익(李元翼)을 평안도의 도순찰사 최흥원(崔興源)을 황해도의 도순찰사로 임명하고 4월 30일 이른 새벽 파천을 단행했다 선조는 세자 광해군 왕세자 신성군信城君과 정원군定遠君이 도성을 떠나며 맏아들 임해군(臨海君)을 함경도로 순화군(順和君)은 강원도로 보냈으나 순화군은 일본군이 강원도에 들어오자 임해군과 동행했다,
우의정 이양원(李陽元)을 유도대장(留都大將)으로 김명원(金命元)을 도원수로 한강을 수비토록 했으나 무너지고 고니시의 군이 5월 2일, 가토의 군이 3일 한양에 입성하니 침략한지 20일만이다 난민(亂民)이 노비문서가 있던 장례원과 형조를 불질렀고 경복궁 · 창덕궁 · 창경궁이 모두 불탔다
선조는 5월 1일 개성에 도착하고 3일 양주 해령蟹嶺에서 부원수 신각(申恪)의 기습을 받고 패한 왜군이 계속 북진하여 임진강 방어마저 실패하여 개성이 함락되었다
5월 1일 왜적이 매호 하풍진을 거처 상주의 적과 함께 당교에 머무르다가 5월 2일 산서 산북에서 약탈과 살인을 일삼자 5월 5일 석문의 왜적을 권의중 등이 6냥시六兩矢 봉시蓬矢 세모난 몽둥이 목창木槍 석거石車 등으로 10여명을 베었고 5월 6일 당교의 왜적들은 산5면(산양 산북 산서 산동 영순)을 포위하였다
옥포해전에서 도도다카트라藤堂高虎의 왜군이 조선 수군에 패하자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 도해渡海는 연기되고 경상 충청도에 진행되던 어재소御在所 숙영지宿營地 건설계획도 중지됐다
선조는 5월 7일 평양에 도착했고 6월 11일 평양성을 떠나며 6월 13일 선위를 시도했다. 고니시군이 6월 14일 평양을 점령하자 내부론內附論(명나라 망명의사)를 피력했으나 6월 19일 명의 요양부총병遼陽副摠兵 조승훈祖承訓이 1300여명의 원군이 입국하고 이순신의 승전보에 6월 26일 내부론을 철회하고 22일 의주에 도착했다
7월 17일 부총병 조승훈이 평양성 수복 전투에 나섰다가 패하고 8월 1일 평안도 관찰사의 평양성 수복 전투도 실패하고 8월 중순 평양북쪽 순안전투에서 왜군의 북상을 저지하는 승리를 거둔다
함경도로 침입한 가토의 군은 함경도 감사 유영립(柳永立)을 체포하고 병사 이혼(李渾)은 반민에게 피살되었다. 임해군과 순화군도 반민에 의해 포박되어 왜적에 넘어갔고 황해도로 침입 한 구로다 군은 해주를 본거로 분탕질을 자행하였다.
심유경은 1592년 8월 29일 평양에서 고니시를 만나 쌍방의 강화 조건으로 왜군이 평양 이상은 침입하지 않고, 조선군도 남쪽에서 작전하지 않기로 50일간의 휴정 협정을 체결하여 구원병이 오는 시간을 벌었다
명나라는 간쑤성[甘肅省] 영하(寧下)에서 반란을 평정하고 복귀한 이여송(李如松)을 동정제독(東征提督)으로 삼아 12월 23일에 4만 3000여의 군사를 거느리고 부총병 양원(楊元)을 좌협대장(左協大將), 부총병 이여백(李如栢: 이여송의 아우)을 중협대장(中協大將), 부총병 장세작(張世爵)을 우협대장(右協大將)으로 삼아 압록강을 건너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