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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과 예는 모두 동이족의 종교적 의식에서 나온 것, 예악(禮樂)을 만든 이(夷)족이 융(戎), 하(夏)족과 융합하여
화하 집단을 만들고 오늘날의 한(漢)족을 만든 것
서량지는 종교의식에서 예(禮)가 출발되었다는 제하에서 다음과 같은 상상이 자연스레 나오게 되었다고 말한다.
즉, 육가(陸賈)의 「신어(新語)」에 ‘우러러 천문을 바라보고 엎드려 지리를 살펴 건곤을 그리는 것으로 인도(人道)
를 정하니, 백성이 활연히 깨닫기 시작해 부자지친, 군신지의, 부부지도, 장유지서(長幼之序)를 알게되어 백관
(百官)이 설 수 있게 되고 왕도가 곧 생겨났다’하고, 왕가(王嘉)의 「습유기(拾遺記)」에 ‘예의문물이 이에서 시작
했다....예교(禮敎)를 세워 문(文)을 이끌고, 방패와 창을 만들어 무(武)를 꾸몄다’
서량지는 종교의식에는 무술(巫術)과 기도가 있는데, 종교가 바탕(體)이 되고 무술(巫術)과 기도가 용(用)이 되어
다음과 같은 생각들이 나오게 되었다고 말한다.
즉, 「백호통(白虎通)」에 ‘복희가 역(易)을 짓고 8괘를 그어 중추가 따라 움직였다’‘8괘를 그어 천하를 다스렸다’
「시자(尸子)」에 ‘복희가 8괘를 그어 8 마디(節)를 열거하기 시작하여, 천하가 따라오기 시작했다’
관자(管子)의 「경중무편(輕重戊篇)」에 ‘복희(虙戱)가 육계(六峜:셈법 계로 고대의 算法이름)를 만들어 음양을
추산하여(以迎陰陽) 구구단의 산술을 지으니(作九九之數) 써 천도에 합해 천하가 이에 따랐다’하고,
「고사고(古史考)」에 ‘포희씨(庖犧氏)가 괘를 그어 대나무로 점치는 서(筮)를 시작했다.
그 후 은(殷) 나라 때에 무함(巫咸)이 대나무점 서(筮)를 잘 쳤다’고 했다. 「춘추내사(春秋內事)」에 ‘복희(伏羲)
가 3광(三光)을 추산, 배열하여 8절(節)을 나누어 세우고, 써 효(爻)로 응기하니 무릇 24개라(伏羲推列三光 建分
八節 以爻應氣 凡二十四), 천지시운의 화복변화를 써 길흉으로 제어하였다(消息禍福 以制吉凶)’고 했다.
「습유기(拾遺記)」에 ‘써 팔괘를 긋는 것으로 팔풍(八風)을 조화시키고, 귀신으로 하여금 써 많은 사당에 이르게
했다’ 하고, 「역건착도(易乾鑿度)」에 ‘이에 복희가 곧 하늘의 상을 우러러 관찰하고, 엎드려 땅을 본받아 관찰하고,
가운데로 만물의 마땅함을 관찰하여, 팔괘를 긋기 시작하니, 써 신명의 덕을 통하고, 써 만물의 정(情)을 본떴다
(於是伏羲乃仰觀象于天, 俯觀法於地, 中觀萬物之宜,始作八卦, 以通神明之德,以類萬物之情)’ 했다.
「주역」<계사하전(繫辭下傳)>에 ‘옛 사람 포희씨(庖犧氏)가 천하에 왕노릇을 했느니라. 하늘의 상을 우러러 관찰
하고 엎드려 땅을 본받아 관찰하고, 땅의 마땅함과 더불어 조수(鳥獸)의 문(文)을 관찰해, 가까이는 인간의 몸에서
진리를 취하고(近取諸身) 멀리는 만물에서 진리를 본받으니(遠取諸物), 이에 8괘를 긋기 시작하여 써 신명의 덕을
통하고 써 만물의 정을 본땄다.’ 했다.
「귀장(歸藏)」에 ‘옛날 여와(女媧) 점(筮)을 치는데, 장막매(張幕枚)가 이를 점쳐 말하기를 “길하다. 9주(州)가 환히
빛난다. 일월이 대를 이어 다하고(代極), 토지가 고르게 다스려지니(平均) 사국이 화합한다(和合四國)” ’ 했다.
(「역사(繹史) 권3 인용」)
「역통괘험(易通卦驗)」에 ‘복희(伏羲) 방아(方牙)가 역(易)을 자세히 지었으니 글씨는 없고 그림으로 지었다’ 했다.
(「역사(繹史) 권3 인용」) 「회남자(淮南子)」<요략훈(要畧訓)>에 ‘팔괘는 가히 써 길흉을 의론하고 화복을 안다...
그러나 복희가 한 것은 64괘의 변화를 밝힌 것이다’ 했다. 이상으로 무술(巫術), 기도(祈禱)에 대한 기록을 알아
보았다.
다음의 음악무도(舞蹈)에 대한 기록은 종교적 절문(節文)에서 비롯한 것임을 말하고 있다. 즉, 음악과 예는 모두
동이족의 종교적 의식에서 나온 것이다. 악기의 시원이 우리 동이족에서 기원했음은 앞서 상세히 고증한 바 있다.
「세본(世本)」에 ‘포희씨가 슬(瑟:거문고)을 만들었으니 줄이 50이다.(庖犧氏作瑟 五十絃) 슬(瑟)은 결(潔:깨끗)
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마음을 맑고 깨끗하게 하여 행동하는데 순일(淳一:순박)하게 하는 것이다’ 하고 또 말하기를
‘생(笙:동쪽에 설치하는 생황)을 만든 것을 따라 여와(女媧)가 황(簧:관악기 부리에 장치하여 진동으로 소리를 내는
엷은 조각)을 만들었다’ 했다.(「역사(繹史) 권3 인용」)
*우리의 전통악기 생황은 중국에 없는 악기다. 그런데 여와가 바로 생황을 처음 만들었다는 기록이 보이고 그
그림이 천수시 복희묘에 그려져 있다. 물론 악기형태는 우리의 생황과 다르지만 동일한 이름이 그대로 우리에게
계승되고 있다는 점에서 그냥은 결코 지나칠 수 없는 놀라운 기록이 아닐 수 없다. 여와씨가 생황을 만들어 들고
있는 그림이다. 복희 천제가 흙을 구워 만든 취주 악기(피리)의 하나로 6개나 8개의 구멍이 뚫린 난(卵)형의
악기 "훈(壎)"과 같은 것인지 아니면 이명동기인지 알려져 있지는 않다.
*여와씨의 생황과는 달리 지금의 생 황은 박통 속에 죽관(竹管)을 나란히 꽂은 것이다. 대륙시대의 생황이 반도
시대로 들어와 변질된 모습. 이 종류의 악기는 이미 삼국시대부터 있어 왔다. 고구려악에도 생의 이름이 보인다.
죽관이 아래쪽 외면에 있는 구멍을 막으면 소리가 나고, 열면 안난다.죽관 하단(下端)에 금속청이 달려서
하모니카와 같은 원리로 숨을 내쉬고 들여마실 때 소리를 낸다.36개의 황을 가진 우와 13개의 황을 가진 화 등이
있다. 국악기 중에 두가지 이상의 음을 동시에 낼 수 있는 유일한 악기로서 이를 쌍성주법이라 한다. 秉奴痼�
이중주에 많이 쓰였다.이 악기는 삼국시대부터 있었으며 조선 영조때까지 사용되었다. 순조때 서유구가 편찬한
{임원경제지}에 그림과 더불어 연주법이 설명되어 있다. 생황을 포부(匏部:박)에 넣은 이유는 입김을 불어 넣는
통을 옛날에는 박통 을 썼기 때문이다. 지금은 나무로 만든다.우리나라 악기 중 유일한 화음 악기인 생황은 단소나
양금과의 병주 또는 세악합주에 쓰인다.
「「사기(史記)」<봉선서(封禪書)>에 ‘태제(太帝)가-<정의(正義)>에 이르기를 태제(太帝)는 태호복희를 이른다
-소녀(素女)로 하여금 50현(絃) 거문고를 연주하라 했다. 슬프다. 제(帝)가 금하여 중지하지 아니하니 파(破)하여
그 거문고가 25현(絃)이 되었다’
「효경(孝經)」<구명결(鉤命訣)>에 ‘복희악(伏羲樂)을 일러 가로대 터를 세운 입기(立基)라 하고, 하나 가로대
부래(一曰扶來)라 하니 또한 일러 가로대 근본이 서는 입본(立本)이라 했다’ 또 가로대 ‘축융(祝融:「제왕세기」에
여와(女媧) 뒤에 기재)의 음악을 일러 가로대 촉속(屬續)이라 한다’ 했다.(「역사(繹史) 권3 인용」) 「초사(楚辭)」
<대초(大招)>에 ‘복희가변(伏羲駕辯)’이라 하고 그 주(注)에 ‘복희씨(伏羲氏)가 슬(瑟:큰 거문고)을 만들어 가변
(駕辯)의 곡조를 만들었다’고 했다.
「습유기(拾遺記)」에 ‘(伏羲) 뽕나무 실로 슬(瑟:큰 거문고)을 만들었으며, 균질한 흙(均土)으로 훈(塤)을 만드니
예악(禮樂)이 이에서 흥기했다’ 고 했다. 참고로 훈(塤)은 곧 훈(壎)으로 흙을 구워 만든 취주 악기(피리)의 하나로
6개나 8개의 구멍이 뚫린 난(卵)형의 악기를 말한다.
보통 훈지상화(壎篪相和)라 함은 훈은 흙으로 만들어 부르짖는 듯한 소리를 내고 지는 대나무로 만들어 어린애
울음소리 닮았으니 형과 동생이 각기 하나씩 불어 조화된 음률을 이룬다는 뜻으로 형제화합을 이르는 말로 쓰여
왔다.
「여씨춘추(呂氏春秋)」<적음편(適音篇)>에 ‘옛날 고대의 주양씨(朱襄氏)-(「한서고금인표(漢書古今人表)」에
의하면 복희 뒤 신농 앞에 기재됨, 아래의 갈천씨(葛天氏) 음강씨(陰康氏) 또한 그렇다)-가 천하를 다스렸는데,
바람이 많이 불고 양기(陽氣)가 축적하여 만물이 흩어지고 과실이 열지 않으므로 사달(士達)이 오현금(五絃琴)을
만들어 써 음기(陰氣)를 가리고(采) 써 군생(羣生)을 다스렸다.
옛날 갈천(葛天)씨의 음악은 세 사람이 소 꼬리를 잡고 발을 던져 써 8결(八闋)을 노래했다. 그 첫째가 재민(載民),
둘째가 현조(玄鳥), 셋째가 수초목(遂草木), 넷째가 분오곡(奮五穀), 다섯째가 경천상(敬天常), 여섯째가 달제공
(達帝功), 일곱 번째가 의지덕(依地德), 여덟 번째가 총만물지극(總萬物之極)이라 일렀다.
옛 음강씨(陰康氏)의 시초에 음 기운이 많아 심히 적체되어 쌓여 있으므로, 수의 도(水道)가 옹색하고 그 근원이
행치 아니하니, 민기(民氣)가 가로막혀 적체가 분명하므로 근골(筋骨), 슬(瑟:거문고)의 다스림이 미치지 아니한
고로 춤을 만들어 추게 하여 펼침으로써 이를 통하게 했다.
예악(禮樂)을 만든 이러한 이(夷)족이 서쪽으로 가서 산서성, 섬서성, 감숙성 동부에 이르렀으며 대다수의 동이족은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융(戎), 하(夏)족과 융합하여 화하 집단을 만들고 오늘날의 한(漢)족을 만든 것이다.
이 사진에 악기 설명만 있고 악기는 찍히지 않은 골적 설명은 다음과 같다. 필자가 호북성 무한 황학루에 게시된
상고시대 악기를 찍어온 자료.
*청해, 감숙 등지에서 출토된 채도 . 양끝이 거칠고 가운데 허리가 가늘다. 한 쪽끝은 항아리형이고 한쪽 끝은
나팔형으로 대소입이 서로 통해 있으며 양끝을 가죽을 덮어 두드린다. 그 척촌, 문양장식 색채가 각기 다르며 지금
으로부터 2600년 전의 유물이다.
*확대사진을 보면 골적사진은 없지만 설명서만 나오는 중요한 자료가 붙어있다. 지금으로부터 8천년 전(환인천제
시대) 하남성 오양에서 출토된 골적은 학의 척추로 만들었으며 구멍은 7개 구멍을 잘 갈아서 만들었으며 6개의
성음계를 낼 수 있고 대륙에서 연대가 가장 오래된 취적악기라 한다.
엉터리 왜곡사서 <삼국사(三國史) 樂>편을 보면 무어라 나오느냐 하면, 가야국 가실왕이 당나라 악기를 보고 이를
만들었鳴� 하여 국악이 당악을 모방했다고 헛소리를 하고 있다. 과연 그런가? 우륵이 거문고를 창작한 것이 아닌
것은 사실이다. 따라서 우륵이 거문고를 창작했다는 주장 역시 견강부회(牽强附會)에 불과하다.
그러나 서기 550년대에 살았던 우륵이 서기 618년에 비로소 건국된 당나라 악기를 보고 가야금을 만들었다는 것은
이만저만한 견강부회(牽强附會)가 아닐 수 없다.
「산해경(山海經)」 <대황동경(大荒東經)>을 보면 조(鳥) 도등족(따라서 동이족) 소호가 전욱을 키운 대학(大壑)이
있는데 소호가 거문고를 버려 두었다고 나온다. 소호씨가 가야금을 만들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또 「산해경
(山海經)」<해내경(海內經)>을 보면 제준(帝俊)이 안룡을 낳았는데 안룡이 거문고와 비파를 만들었으며(帝俊生晏龍,
晏龍是始爲琴瑟) 제준(帝俊)이 아들 8인이 있어(帝俊有子八人) 노래와 춤을 시작했다는 기록이 있다. 소호 금천씨가
누군가. 복희의 후예가 아닌가? 이 기록의 주석은 물론 거문고를 처음 만든 이는 복희, 신농이고 위(爲) 앞에 무(務)
를 첨가해 안룡이 즐긴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순조롭다 했다.
역사의 뿌리를 추적해서 실마리를 찾아 근원을 살피면 산해경 자체가 다 동이 제 족의 종합적 역사, 지리, 신화서
임을 확인 할 수 있다. 눈만 열리면 아니 사관만 열리면 누구나 확인 할 수 있다. 「산해경(山海經)」 <대황서경(大
荒西經)>에 보면 음악을 시작한 동이 족으로부터 구변과 구가를 훔친 기록이 사실대로 나온다. "서남해의 밖, 적수
(赤水)의 남쪽, 유사(流沙)의 서쪽에 사람이 있어 두 마리의 푸른 뱀을 귀에 걸고 두 마리의 용을 타고 있는데
이름을 하후개(夏后開)라고 한다.
개는 세 차례 하늘에 올라가 천제의 손님이 되어 구변(九辯)과 구가(九歌)를 얻어가지고 내려왔다. 이 천목야(天穆
之野)는 높이가 2000길인데 개가 여기서 처음으로 구소(九招:순이 제정한 九韶의 원본)를 노래했다. 대만의 석학
서량지(徐亮之) 교수는 「중국사전사화(中國史前史話) 」에서 '동이족의 음악교육이 중국역사가 시작되기 전부터
그 이름이 높았다(동이적음악교육(東夷的音樂敎育), 재중국사전야(在中國史前也), 부성명(負盛名))'고 말하고,
중국의 많은 춤과 악기는 모두 동이인이 창안한 것이라 하여 '가견중국허다악기(可見中國許多樂器) 무도(舞蹈),
도시동이소창선(都是東夷所創選)'이라 했다.(안원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