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동행
2014. 03. 29 ~ 03. 30
백제의 꿈과 혼을 찾아서
☾♔♕♘☿⎈♆♖♗♙❀❆❁⨷☾♔♕♘☿⎈♆♖♗♙❀❆
안경원/ 이순희/ 고태화/ 곽영순/ 김태헌/ 박미숙
아름다운 동행 2편으로 택한 여행지는 부여/공주이다. 남도에선 봄꽃 소식이 한참인데, 우리는 백제의 흔적을 찾아 거꾸로 북상한다. 이번 여행테마는 “백제의 꿈과 혼을 찾아서”이다.
전날부터 찌푸린 날씨가 고속도로에 들어서자 빗방울이 들기 시작한다. 다소는 씰쌀한 기운이었지만, 일상을 벗어나 새로운 곳으로 떠나는 여행이란, 들뜬 기대감에 마음은 한결같이 상쾌하다.
07:00 경산휴게소에 들러, 구수한 시래기된장찌게와 햇김치를 곁들인, 잡곡밥으로 아침을 해결한다. 보온통에 담아 와서 아직까지 김이 모락모락 나는 게, 맛이 꿀맛이다.
첫째날
꿈을 안고서
10:20. 1일차 첫째 목적지인 궁남지에 도착했다. 연꽃이 활짝 피는 7, 8월이면 백연과 홍연이 마음 설레게 하는 아름다운 곳으로, 옛 백제의 궁궐지이다. 또한 이곳은 신라 선화공주와 백제 서동(백제 무왕의 아명)의 애틋한 사랑의 전설도 새겨진 곳이기도 하다.
"사비시대에 왕궁 남쪽 못 가에는 궁궐에서 나온 한 여인이 궁남지의 용과 교통하여 아들을 낳았으니 그가 바로 백제 30대 왕인 무왕 장(璋)이다.”
그의 어머니가 용과 교통하여 아들을 낳았다고 하니 아마도 그의 아버지는 왕이거나, 태자였을 것이다. 그러나, 궁궐 밖의 생활은 궁핍하여, 생계유지를 위해 마를 캐다 팔았다. 그래서 그의 아명이 서동(薯童)이 되었던 것이다. 서동의 어머니는 가난에도 불구하고 그를 정성으로 키웠다. 그는 기골이 장대하고 효성이 지긋한 장부로 성장했다.
그러던 어느날 밤, 궁중에서 한 노신이 찾아와 왕의 밀명을 전하는데, 신라 서라벌에 잠입하여 국정을 탐지하라는 것이었다. 서동은 기꺼이 마를 파는 상인으로 위장하여 신라에 잠입, 탑지활동을 충실히 수행해 나갔다.
그러던 어느 날, 신라 26대 진평왕의 셋째딸인 선화공주와 마주치게 되었고, 두 사람의 만남이 잦아지면서 사랑이 싹텄다. 그러나 서로는 국적과 신분이 달라 맺어질 수 없는 사이였다. 그렇지만 헤어질 수 없었던 두 사람은 지혜를 짜내, 서동요를 만들어 전국에 터트리기로 했다.
서동은 서라벌의 아이들이 많이 모이는 곳에 가서, 마를 나누어주며 노래를 부르게 하였다. “선화공주님은 남몰래 시집가서 서동도련님을 밤이면 몰래 안고 간다”는 노래였다. 이 노래는 아이들의 입을 통해 온 나라에 퍼져 나갔다. 결국, 대궐까지 알려지게 되어 오해를 받게 된, 선화공주는 귀양을 가게 되었다. 그러나 이를 미리 알고 있었던 서동이 선화공주를 백제로 데려와 행복하게 살았다는 사랑 이야기이다.
충남 부여군 부여읍 동남리 117번지일대에 위치한 백제 사비시대에 조성된 우리나라 최초의 별궁, 인공연못인 궁원지(宮苑池)로, 삼국사기의 기록을 근거로 궁남지로 불리고 있다.
33만여 평방미터의 크기에 오오가연꽃, 백련, 홍련, 황금련, 수련, 가시연 등 다양한 연꽃이 아름다운 자태와 그윽한 향기를 내뿜는 7월이면, 이곳에서 해마다 서동연꽃축제가 열린다.
3월 말, 이른 시간에 비까지 내려 쌀쌀한 날씨에, 연꽃대만 드문드문 보여 을씨년스럽지만, KBS 1박2일에서도 다녀갔다기에 그 흔적을 쫒아 구경하니 이 또한 멋지다..
백제 무왕 35년(634년)에 만들어진 궁남지의 한가운데에는 신선과 불로초, 황금으로 된 궁궐이 있는, 이상향인 방장선산(方丈仙山)을 본뜬 산이 있었다는 고증을 따라, 1965년부터 9605평의 연못을 보수하고, 1971년에 정자를 세우고, 2005년에 나무다리를 놓아, 구경하기 좋게 만들어진 포룡정(抱龍亭)이다.
교룡이생소명서동(交龍而生小名薯童) 즉 용과 관계하여 서동을 낳았다는 삼국유사 기록에 따라, 정자 이름 또한 특이하다..
호기심 많은 우리들이 그냥 갈 리 없다. 연못 가운데 있는 포룡정 안으로 들어가 본다.
포룡정의 역사적 흐름도 알아보고,
궁남지 중간에 조성된 정자에도 앉아보고,
창공을 힘차게 뛰어올라도 보며, 궁남지를 두루두루 구경한다.
네시간이란 긴 시간을 차를 몰고, 타고 온 피로도 어느새 씻기어, 나들이 오기를 정말 잘 했다는 기분에 마음까지 힐링이 된다.
이번에는 궁남지 서쪽 맨 끝에 있는 백제오천결사대 기념탑으로 이동한다.
서기 66D년 신라 김유신장군이 나.당연합군 5만대군을 이끌고 황산벌로 쳐들어오자, 의자왕의 명을 받든 계백장군이 불과 5천의 결사대를 이끌고 나가, 장렬하게 최후를 마친 황산벌전투 출정상으로, 부릅뜬 두 눈과 굳게 다문 입 등 당시의 비장함이 생생하게 살아 숨쉬듯 섬세하게 잘 묘사되어 있었다.
백제의 인(仁), 의(義), 신(信), 충(忠)의 4대정신과 부여인의 자긍심을 고취시키기에 충분한, 힘찬 기백이 조각 하나 하나에 새겨져 있었다.
백제는 도읍지에 따라 한성(서울)시대, 웅진(공주)시대, 사비(부여)시대로 나누는데 우리가 그 사비시대의 마지막을 보고 있는 것이다.
궁남지의 또 다른 이름은 서동공원이다. 아까 지나온 길을 다시 거슬러가며, 목교를 건너,
입구에 만들어 놓은, 조금은 유치한 서동과 선화공주 조형물까지 보고, 다음 목적지로 떠난다.
두 번째는 국립부여박물관이다.
마침 박물관보수공사중이라 별도로 조성된 기획전시관에서 백제의 유물을 관람하였다.
세 번째로 찾아간 곳은 부여의 맛집으로 유명한 백제향이다. 궁남사거리에서 궁남지 방향으로 내려가다 보면 있다.
(041-837-0110). 우리는 연잎모듬정식인 백연향(@16,000원)을 주문한다.
조금 이른시간(11:40)인데도, 칠장주(부여 전통막걸리) 한 잔을 곁들여 폭풍흡입이다. 먹다보니 어느새 전부 빈 접시만 남았다.
나중엔 여기 명물이라는 부여연꽃빵까지 하나씩 먹는다. 아- 맛있다.
식사 후 찾아간 곳은 정림사지박물관이다.
정림사지는 옛 백제 고도인 부여 시가지의 중심부에 위치한 백제시대의 대표적인 절터이다. BC 538년 봄, 백제성왕은 지금의 부여인 사비성으로 도읍을 옮기면서 왕궁, 관청, 주거지 등을 건설하면서 사찰도 함께 창건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는 곳이다.
탑과 탑을 둘러싼 건물들의 배치와 구성은 매우 정교한 수치로 구성되어 있다. 탑이 아름다워 보이는 것은 우리가 자세히 알지 못하는 수리적 원리가 작용한 때문이다.
그 아름다운 정림사지5층석탑 앞에 아름다운 여인들이 함께 자태를 뽐내어 본다.
박물관 안에는 여기저기 숨은 아름다운 공간들이 있다. 백제로 대승불교가 들어와 다시 일본으로 전파한 경로를 설명한 안내도와,
연꽃으로 장식된 터널식 조형공간도 눈에 띈다.
그냥 대충 구경하고 나갈 팀이 아니다. 호기심 많고, 장난기가 가득한 어린아이처럼,
여기저기를 분주히 오가며, 일하는 사람들을 격려하기도 하고,
불상을 만드는 석공에게는 무언가 모를 귓속말을 전하고,
대형 바둑판 위에서 인생이란 바둑도 두어 본다.
정림사지박물관은 불교의 상징인 卍자 모양으로 중앙홀을 중심으로 사방으로 날개 뻗은 형태로 구성되어 있다.
그 중앙홀에 1/12로 축소한 정림사 모형이 복원되어 있었다.
영상실에 들러,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두 기록에 의거하여, 백제에 처음 들어온 승려는 서역의 마라난타이며, 동진에서 왔으므로,
우리나라 불교는 백제 침류왕 원년(384년)에 중국 동진으로부터 전래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정림사지로 가는 길에 비가 내렸지만 씩씩하게 빗속을 거닐며, 장엄한 백제 문화를 구경한 뒤, 구드래조각공원으로 간다.
당초는 부소산성 먼저 올라갔다가 내려올 때 들릴 예정이었으나, 오다보니 먼저 당도하여 순서를 뒤집어 먼저 구경하게 되었다. 여기엔 96년부터 여러 유명작가의 작품, 약 85점이 설치되어 있다. 짧은 시간에 다 구경하기란 어려워 작가분에게는 죄송하지만, 대충 적당히 빨리 구경하며 한 바퀴를 휙 돌아본다.
“흰색의 터”란 제목이 붙어있긴 했지만, 그냥 아름답게 배치된 큰 자갈이란 개념 외에는 선뜻 와 닿지 않았다.
그래도 그 위에 앉아도 보고, 출산의 고통을 색다른 퍼포먼스로 표현해 본다.
그런데 사진으로 보니 알(?) 너무 많이 낳았다(?).
구드래조각공원은 부소산성 서쪽, 백마강변의 나루터 옆에 조성되어 있다. 구드래는 지리학적으로 원래 “큰나라”라는 뜻이라 한다. 짐작컨대 백제의 도읍이었던 부소산성 지척에 있는 아주 큰 나루터였기에 이런 명칭을 썼지 않나싶다. 또한 역사학적으로는, 백제시대에 지배의 정점에 있는 사람을 어라하, 백성은 건길지라 하였는데, 구드래는‘구ㄷ으래’로 구가왕을 칭하는 어라하의 지격촉음인 ㄷ이 끼어들어 “구ㄷ어라하”가 되고, 이 말이 줄어들어 구ㄷ으래 즉 구드래로 변천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간혹 비가 흩뿌리는 날씨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여섯 번째로 낙화암을 찿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