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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8장 28-29절
오늘 저녁에는 8장을 마치기 위하여 매 구절마다 시간을 조금씩 쓰는 것이 필요할 줄로 안다. 그러나 어제밤에 공부한 말씀들을 간단하게 복습하는 것이 좋으리라 믿는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여 하심이니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롭 8:29-30)
이 구절의 동사의 시제가 모두 과거형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여기서 말하는 축복과 약속은 계속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모든 사람들의 것이다. 누가 부름을 받았는가?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 곳에 있는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행 2:39). 그는 '원하는 자'를 부르신다. '원하는 자는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계 22:17).
그러면 모든 세상 곧 그에게 나나오는 사람을 모두 그에게 부르시는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가?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엡 1:10). 디모데 후서 1장 9절에서 같은 문제에 대하여 바울은 말한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부르심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 뜻과 영원한때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뜻과 은혜를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아 함께 모여야 할 것이다. 이것을 알 때에 우리의 할 일은 무엇인가? "그러므로 형제들아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너희가 이것을 행한즉 언제든지 실족지 아니하리라."(벧후 1:10).
그러면 어떻게 하여야 우리의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할 수 있는가? 누구나 부르심을 받았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그리스도 안에 있다.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롬 11:36). 우리 모두는 부르심을 받았으므로 그리스도를 받고 그 안에 거하므로 우리의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할 수 있다. 그러면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따라 부르심을 받은 것이다. 자신이나 자신에 관련된 모든 것을 완전히 버리라. 그러면 그리스도를 가질 수 있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부르심을 받는다.
만일 '주여 여기 있나이다. 나를 받으소서'라는 말은 진정이어야 한다. 단순히 말만 할 것이 아니라 그 말의 의미를 알아야 한다. 그러면 우리는 그 안에 있고 그러므로 그의 아들의 형상을 본받는 자들이 되도록 예정을 입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언제? 지금이다. 어떻게 하여 그렇게 되는가?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느니라.' '보라 아버지꼐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주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얻게 하셨는고'(요일 3:1). 날마다 주님에게 '주여 내 마음을 드립니다. 내 마음을 변하지 않았습니다. 당신이 내 마음을 차지하기를 원합니다'라고 말할 때에 그는 거룩한 사랑의 끈으로 번제단의 뿔에 우리를 묶으실 것이다. 그때에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예정을 받는다. 주님이 가지신 것을 우리가 가진다. 그는 우리에게 영생을 주시고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라고 몸소 말씀하셨다(요 10:28).
하나님은 하나의 뜻을 가지셨다. 그 뜻이 변경될 수 있는가? 아니다. 그 뜻이 확정되어 있다. 부르심을 받은 자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다 함을 받으며 그러므로 우리가 의롭다 함을 가지게 된다. 그러나 의롭다 함을 받은 자들은 또한 영화롭게 된다. 이것을 믿을 수 있는가? 만일 믿을 수 있다면 우리는 엄청난 능력을 붙들었다. 그렇다.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저희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라.'(요 17:22).
시제가 과거인 것을 유의하자. 하나님이 그리스도에게 주신 영광은 오늘날 우리의 것이다. 그 영광이 아직 나타나지 않은 것은 사실이므로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한다. 왜냐하면 세상이 그리스도를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영광은 우리의 것이고 장차 나타날 것이다. 지금도 그 영광은 은혜의 모습으로 나차나 있다. 그 영광을 우리의 마음에 가지고 있다. 바울은 '그 영광의 풍성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 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옵시며'라고 말했다(엡 3:16). 이와 똑같은 이유에서 예레미야는 '주의 이름을 위하여 우리를 미워하지 마옵소서 주의 영광의 위를 욕되게 마옵소서.'(렘 14:21).
'여호와께서 은혜와 영화를 주시며 정직히 행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아끼지 아니하실 것임이니라.'(시 84:11). 베드로는 우리가 믿을 때에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라고 말한다(벧전 1:8).
영광은 모두 우리의 것이며 지금 우리는 그것을 가지고 있다. 머니 않아 우리는 그의 영광의 풍성함을 따라 이 은혜를 받고 그의 뜻을 우리 안에 이루었을 때에 은혜에서 나와 같은 차원에 있는 영광 가운데로 들어 갈 것이다.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이 구절을 읽고 외우도록 하라. 그 다음에 '어린양의 피와 자기의 증거하는 말을 인하여 저를 이기었으니'라는 말씀을 기억하여 말하라(계 12:11). 그리스도꼐서 증거의 말씀으로 사단을 정복하시는 본을 보여 주셨으며 시험이 닥칠 때마다'기록하였으되'라고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라. 그러므로 어두움의 구름이 덮히고 짙은 어두움이 서릴 때에 단순히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라고 말하라. 하나님은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시도록 그리스도를 주셨고 우리를 의롭다 하기 위하여 다시 살리신 사실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항상 우리의 편이시다.
하나님이 그의 뜻을 따라 모든 일을 이루시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뜻대로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을 생각할 때 평화가 있다. 그러므로 우리를 거스려 무슨 일이 일어나든지 상관할 것이 없다. 우리를 대적하여 일어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대적하는 것이며 이것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존재만큼 분명하고 확실한 것이다.
그러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는가? 사단이 우리를 대적한다. 만일 사단이 우리를 대적하더라도 아무런 상관이 없다. 사단이 그리스도에게 그의 권세를 행사해 보려 했으나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이 드러났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라고 그리스도는 말씀하셨다(마 28:18). 그러면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그리스도에게 주셨다면, 사단의 몫으로 남은 권세가 어디 있는가? 아무 권세도 남아 있지 않다. 그리스도와의 싸움에서 사단은 아므론 권세가 없다. 그러므로 만일 우리에게 그리스도가 계신다면 우리를 대적할 자는 아무도 없다.
과거에 우리 가운데 어떤사람이 사단의 권세에 애하여 이야기하는 것을 들었다. 그러나 사단은 아므런 권세가 없고 그를 위해 아무런 권세가 남아 있지 않다. 기교적으로 말하면 사단이 우리를 대적한다고 할 수 있다. 그는 누구인가? 그는 '공중의 권세 잡은 자'이며 전염병과 질병을 퍼뜨리고 우리의 길을 방해하고 우리에게 방해가 되도록 일을 늘어 놓는다.그러나 우리를 방해하고 멸망시키려고 하는 바로 그 일을 하나님은 받아서 우리의 유일이 되오록 만드신다. 모든 일이 유익하게 된다. 그래서 자주 이런 노래를 부른다. '선한 일, 악한 일이 일어나나, 나에게는 모든 일이 선할 뿐, 모든 일에 당신이 있고 당신 안에 모든 것이 있으니 안전할 뿐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흔히 전혀 믿지 않고 찬미를 부를 때가 많다. 이제 어느 누구나 이렇게 찬미를 부르지 않기를 바라지만 원하는 것은 그 노래의 내용을 더욱 믿기를 바란다. 자주 노래에서 가사를 떼 내어서 평범한 글로 써 놓으면, 이 회중에서 어느 사람도 그 글을 비ㄷ으려고 하거나 감히 말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찬미에 있기 때문이 아니고 성경 진리이기 때문에 믿도록 하자.
우리는 선지자 에스겔이 말하는 사람들과 같다. "민족이 담 곁에서와 집 문에서 너를 의논하며 각각 그 형제로 더불어 말하여 이르기를, 자 가서 여호와꼐로부터 무슨 말이 나오는가 들어 보자 하고" 사실 그렇다. 자, 집회에 가서 설교를 들어 보자라고 그들은 말한다. "백성이 모이는 것 같이 네가 나아오며 내 백성처럼 네 앞에 앉아서 네 말을 들으나 그대로 행치 아니하니 이는 그 입으로 사랑을 나타내어도 마음은 이욕을 좇음이라 그들이 음악을 잘하며 고운 음성으로 사랑의 노래를 하는 자 같이 여겼나니 네 말을 듣고도 준행치 아니하거니와"(겔 33:30-32).
이 많은 진리가 많은 사람들에게 한낱 노래에 불과하다. 그들은 진리를 들으며 관심을 가지고 지나치지만 그 진리를 믿거나 행하지 않는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가 믿고 행하도록 진리를 주셨으므로 이 진리들이 우리ㅐ의 능력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 우리는 언제 그 방법을 알 수도 없고 말할 수도 없으나 하나님이 그렇다고 말씀하셨으므로 그렇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믿는 이유를 말할 수 없는 것들이 많으며 우리의 지각에는 그렇게 보이지 않으나 우리가 믿으면 그렇게 될 것이라는 것을 하나님이 약속하신 사실 때문에 우리가 그들을 붙잡고 믿을 때에 그렇게 된다. 우리가 믿을 때까지 이것을 결코 알 수 없다. 그러나 믿을 때에 비로소 알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할 수 있겠는가?
하나님의 외로운 선지자 엘리사를 생각하자. 그는 사마리아에 내려가 있었는데 그의 주위에는 온통 산 밖에 없었다. 수 많은 무장한 군사들이 그를 잡으러 왔다. 그의 사환과 단 둘이 있었는데 그 사환은 무서워했다. 그 순간 그는 이스라엘의 왕이 그를 보호하기 위하여 말이나 군사를 보내야 한다고 생각하거나 말하지 않았다. 그 사환이 와서 '아아 내 주여 우리가 어찌하오리까'하고 말했을 때(왕하 6:15), 엘리사는 '여호와여 원컨대 저의 눈을 열어서 보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했다. 여호와꼐서 그 사환의 눈을 열어서 보게 했으므로 불말과 불병거가 산에 가득한 것을 보았다.
온 산과 들이 병거와 말로 가득하였다. 그들 중 어느 한 사람도 적의 온 무리보다 더 강하지 않았다. 우리의 경우도 엘리사의 경우와 같이 '우리와 함께한 자가 저와 함께한 자보다 많으'므로(왕하 6:16)우리가 해야 할 일은 오로지 이러한 것을 보도록 우리의 눈이 열리는 것이다. 무엇으로 우리의 눈을 여는가? 말씀이다. 말씀은 우리의 발에 등이며 우리의 길에 빛이므로 만일 우리가 말씀을 믿으면 우리와 함께한 자가 우리를 대적하는 자보다 많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우리와 함께 하는 자는 이스라엘의 살아꼐신 하나님이며 흑암을 빛으로, 연약함을 강하게 만드는 권세를 가지셨으며 우리에게 닥치는 모든 악한 일을 축복으로 바꾸어 우리의 가는 길을 돕는 분이시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꼐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32절). 하나님이 왜 그리스도와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실까? 모든 것이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이다. 에베소서 1장 23절을 보자.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
그리스도를 옷입는 자는 '모든 능력으로 능하게 하'심을 받는다. 왜 그렇게 되는가?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모든 권세와 정사와 능력과 주관하는 자와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뚜어나게 하시고 또 만물을 그 발 아래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느니라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기 때문이다(엡 1:21-23).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엡 1:3).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를 앎으로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 찌어다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이는 자기의 영광과 덕으로써 우리를 무르신 자를 앎으로 말미암음이니라 이로써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로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셨으니" (벧후 1:2-4).
그리스도는 모든 권세를 가지고 계시므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고 과거 시제를 사용한 것을 유의하라. 이 일을 우리에게 주셨다. 그런데 왜 우리가 이것들을 가지고 있지 않은가? 단 한가지 이유 때문인데 우리가 이것들을 맏아들이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가 아주 오랫동안 이것들을 얻으려고 애통하였으며 이것들을 원한다고 말하뎠다. 이것들을 가질 수 있고 또 이미 우리에게 주셨다. 그러므로 이것들을 우리의 것으로 만들지 못할 이유가 조금도 없다.
가령 내가 여러분에게 와서 배가 매우 고프다면서 무엇을 좀 먹고 싶다고 말했다고 하자. 여러분은 '그러세요. 여기 식탁에 앉아 계세요. 먹을 것을 가져다 드리겠습니다.'라고 말한다. 잠시 후에 집에서 가장 좋은 것을 식탁에 가져 와서 어서 먹으라고 말한다. 그러나 나는 말하기를 '몹시 배가 고픕니다. 무엇을 대단히 먹고 싶습니다'라고 말한다. 어서 음식물을 들고 먹으라고 했더니 '그러나 대단히 배가 고파요. 먹을 것을 좀 주세요. 며칠 동안 아무 것도 못먹었습니다.' 만일 내가 이렇게 말하면서 앞에 잘 차려 놓은 음식을 먹지 않는다면 아마 미쳤다고 여러분은 말할 것이다.
지난 밤에 어떤 분이 나에게 와서 '만일 주님께서 생병과 경건에 속한 축복을 이런 방법으로 주신다면 그 축복을 받지 않는 우리가 아주 어리석은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이 주시려고 하는 이런 것들을 복 수 없고 음식물은 볼 수 있기 때문에 이 대화가 적절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나 역시 그것이 적절한 예화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으로는 그 의미를 절반도 나타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보지 못하던 것이 보인다고 흔히 생각한 적이 없는가? 눈이 우리를 속이는 일이 흔히 있지 않는가? 때때로 보이지 않는 것이 보인다고 생각되어서 그 때에 다시 자세하게 볼 때에 존재하지 않는 것들이 실제로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에는 결코 거짓이 업쇼다. 그러므로 내가 그것들을 볼 수 있고 그 하나님의 말씀에서 약속한 것을 더욱 확신할 수 있다.
"그러므로 후사가 되는 이것이 은혜에 속하기 위하여 믿음으로 되나니 이는 그 약속을 그 모든 후손에게 굳게 하려 하심이라 율법에 속한 자에게 뿐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자에게도니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 모든 사람의 조상이라."(롬 4:16). '보이는 것은 잠간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고후 4:18). 이 문제에 있어서 우리의 생각을 조금 교정해야 한다. 보이는 것은 모두 좋고 확실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집이나 땅 또는 다른 자산을 붙들고 있으면서 보이는 것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에 무엇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실은 우리가 의존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보이지 않는 일에 있다. 땅과 하늘은 볼 수 있는 것이지만 다 지나가 버릴 것이다.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라."(벧전 1:25).
시편 기자와 같이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 그러므로 땅이 변하든지 산이 흔들려 바다 가운데 빠지든지 바닷물이 흉융하고 뛰놀든지 그것이 넘침으로 산이 요동할지라도 우리는 두려워 아니하리로다'라고 말할 수 있다(시 46:1-3).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는가? 형제들이여 그 때는 다가오고 있다. 따이 술취한 사람같이 비틀거리고 오두막 집과 같이 옮겨질 것이며 산들이 깡충 뚜이어 바다 속에 들어 갈 것이다. 그런 일이 일어날 것이지만 그러한 때에도 완전히 평온과 신뢰감을 느끼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고 말하기를 배운 일이 없는 남녀들이 아니다. 지금 하나님을 의심하는 사람을 그 때에도 의심할 것이다. '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거하는 자는 전능하신 자의 그늘 아래 거하리로다.'(시 91:1).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여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꼐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이 약속에는 모든 것이 다 들어 있다. "그런즉 누구든지 사람을 자랑하지 말라 만물이 다 너희 것임이라 바울이나 아볼로나 게바나 세계나 생명이나 사망이나 지슴 것이나 장래 것이나 다 너희의 것이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니라."(고전 3:21-23). 이것은 미래의 일이 아니다. 모든 일이 지금 우리의 것이다. 모든 것이 우리의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시편 기자와 같이 '내게 줄로 재어 준 구역은 아름다운 곳에 있음이여 나의 기업이 실로 아름답도다'라고 말할 수 있다(시 16:6).
그렇다. 우리는 모든 것을 다 가지고 있다. 우리는 왕과 지존자의 자녀들이다. 사람들이 우리를 인정해 주지 않는다 하더라도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하나님이 우리를 인정하시고 우리를 아신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우리에게 비난과 핍박을 퍼붓는다 하더라도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그들을 불쌍히 여기고 그들을 위하여 힘써 일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유업의 부요함을 모르기 때문이다.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33절) 이런 일을 할 존재가 분명히 있다. 그의 이름은 사단이다. 여기에 그에 관해서 이렇게 증거하고 있다. "내가 또 들으니 하늘에 큰 음성이 있어 가로되 이제 우리 하나님의 구원과 능력과 나라와 또 그의 그리스도의 권세가 이루었이니 우리 형제들을 참소하던 자 곧 우리 하나님 앞에서 밤낮 참소하던 자가 쫓겨났고"(계 12:10). 그렇다. 사단은 형제들을 참소하는 자이므로 밤낮으로 참소하였었고 지금도 여전히 참소하고 있으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하나님의 택함받은 자들을 비난한다. 그러나 그는 쫓겨났고 지금은 구원과 능력과 하나님의 나라와 그리스도의 권세가 이르러 왔다. 그리스도는 모든 권세를 가지고 있으며 그 권세는 얼마나 선한가!
그러나 어떤 실망과 낙담을 하는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나는 그 모든 것을 믿는다. 그러므로 나의 죄들을 자복하였으며 하나님이 미쁘시고 의로우사 나의 죄를 용서하시고 모든 불의에서 나를 깨끗케 하시는 것을 믿는다. 그런데 이 죄들이 항상 내 앞에 떠오르거든' 그 죄들을 떠오르게 하는 것은 사단이라는 것을 믿는가? 이것은 중요한 점이다. 왜냐하면 여러분이 이것을 확신하는데 그 죄들이 떠오른다면 가장 행복한 사람 중의 하나가 되어야 한다.
왜 사단은 이런 일들을 들추는가? 그는 형제들을 참소하는 자요 거짓 참소자이며 거짓말쟁이요 거짓말 쟁이의 아비이다. 그러므로 만일 이 죄들을 들추면서 우리를 참소한다면 이 죄들이 용서받았다는 것을 우리가 알고 있기 때문이다. 만일 용서받지 않았다면 사단이 그렇게 참소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사단이 아무리 진리를 말하려고 해도 할 수 없으며 그 죄들이 용서받지 않았다면 결코 들추어 내어 말하니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자백하고 용서받게 되는 것을 꺼려하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은 이런 질문을 한다. '모를 일이지만 그것은 사단이 아닐거야 하나님임에 틀림없어' 아니다.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만일 하나님이 의롭다 하셨으면 아무도 정죄할 수 없다. 하나님이 정죄하지 않는데 누구에게 정죄할 권리가 있다는 말인가? 아무도 정죄할 수 없다. 하나님만이 유일한 심판자이다. 그러므로 하나님 외에는 어떤 사람도 정죄할 권리를 가지고 있지 않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죄를 보여주면 우리는 그 죄를 자백하고 그에게 복종한다. 그러면 하나님은 우리를 의롭다 하신다. 하나님은 변함이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의롭다 하시는 이 우주상에서 누가 정죄할 수 있는가? 누가 그 일을 할까? 사단이다. 그러나 우리가 사단을 어떻게 대하여야 할까?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진리를 더욱 신뢰하고 사단의 거짓말을 신뢰하지 않는다면 우리에게 문제될 것이 없다.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르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34절). 하나님이 의롭다 하시고 그 의롭다 하심의 보증으로 그리스도는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셨는데 누가 우리를 정죄할 것인가?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셨으며 지금하나님의 우편에 계셔서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고 계신다. 이러하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이 실망할 틈이 조금도 남아있지 않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가?
하나님이 죄를 우리 앞에 들추실 때가 있는데 그 때는 죄를 자복하지 않았을 때이다. 이때가 하나님이 죄를 들추어 내시는 유일한 때이다. 그러나 보혜사가 죄를 깨닫게 하기 때문에 어디에서나 우리를 위로하시고 우리가 저지른 잘못을 기억나게 해 주는 때에라도 위로하신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내가 자백하지 않은 죄들을 들추어 알게 할 때에 그 위로를 인하여 하나님에게 감사할 것이며 사단이 다시 들추어 말할때에 또 다시 하나님에게 감사할 것이며 사단이 다시 들추어 말할 때에 또 다시 하나님을 찬양할 것이다. 왜냐하면 죄가 용서받지 못했다면 사단이 들추어 내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죄가 용서받지 못했다면 사단이 들추어 내지 않을 것이나 만일 죄를 자백했다면 용서를 받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자비와 진리가 함께 만난다. 율법을 들고 있는 같은 손이 용서의 손도 들고 있다. 형제들이여, 시내산에서 우뢰의 소리로 율법을 말씀하셨을 ㄸㅒ에 그 율법은 중보자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손에 있었다는 것을 기억하라. 그러므로 공의를 들고 죄를 깨닫게 하는 같은 손이 역시 용서의 손을 벌리고 있다ㅓ.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 안에서 항상 승리하게 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하라.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란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35-37절).
5장에서 눈에 띄었던 '더욱(넉넉히)'이라는 말이 여기에서도 다시 볼 수 있다. 흔히 '내가 하는 성문 안에 들어갈 수만 있다면 원이 없을 것이다'하는 말을 듣는다. 우리가 그곳에 들어간 후에 거기에 있는 것을 미안하게 생각하여 사과하기를 원하는 것처럼 들어갈 필요가 없는 것을 인해서 대단히 감사한다. 왜 그럴 필요가 없는가? 왜냐하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감을 넉넉히 너희에게 주시리라'고 약속하셨기 때문이다(벧후 1:11).
어떤 사람은 '우리에게 싸울 원수들이 있다'고 말한다. 원수들이나 시험이나 시련에 대해서 이야기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능력에 대해서 말하라. 모든 권세를 그에게 주셨다. 그러므로 우리가 씨름을 할 때에 그것은 양쪽이 팽팽한 싸움이 아니고 믿음의 싸움을 싸우는 것이며, 우리에게 능력을 주셨으며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길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라. 죄가 많은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다.
누가 이기는 자들인가? 승리를 얻는 자들이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엡 6:12).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딤전 6:12).
악을 저항할 수 있는 유일한 능력은 무한한 생명의 능력이며 하나님의 아들을 가진 자는 그 생명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워야 한다. 믿음이란 무엇인가? 상대방을 신뢰하는 것이다. 만일 내가 내 주멱으로 싸움을 한다면 내가 싸우는 것이다. 만일 믿음의 싸움을 한다면 다른 사람이 나를 대신하여 싸우고 나는 그 혜택을 받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를 사랑하는 이를 통하여 넉넉히 이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에게 감사드리자.
그러면 이 승리는 어떻게 얻는가? 그리스도가 싸우셨지 않았는가? 그렇다. 그가 이 지상에서 사단과 맞붙어 싸워서 사단과 그의 온 무리를 정복하셨고 '모든 정사와 권세와 능력'위에 계셨기 때문에 모든 권세와 지배권을 빼앗았다. 이런 것들이 우리가 싸워야 할 것들이다. 이런 것들에 대한 그리스도의 승리는 얼마나 컸었는가? '정사와 권세를 벗어버려 밝히 드러내시고 십자가로 승리하셨느니라.'(골 2:15). 그러므로 그리스도꼐서 우리가 싸워야 할 바로 그 원수들과 싸워서 승전하시고 그들을 패망시키셨다. 그들에게 승리를 하셨다. 그 승리의 결과는 무엇인가? 전쟁을 해서 한 쪽이 다른 쪽을 정복할 때에 그 결과로 항상 따르는 것은 평화이다. 사단이 항복하려고 하지 않았으나 구세주꼐서는 평화를 획득하셨다.
"그는 우리늬 화평하신지라."(엡 2:14).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 14:27).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그의 평안을 주셨고 평하는 승리에 뒤따르는 것이므로 그는 이미 승리를 얻었다. 그러므로 만일 우리에게 그리스도가 있다면 그 승리는 이미 우리의 것이다. 우리는 간단하게 그리스도의 영원한 생명을 취하며 이 영생은 영이요 생명인 그의 말씀을 붙들므로 얻어진다. 이와같이 그리스도를 우리의 마음에 모실 때에 우리에게 그리스도가 있게 되며, 그가 우리를 위하여 이루어 놓으신 승리를 얻게 된다.
우리에게 있는 큰 문제는 때때로 그리스도께서 승리를 하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왜 그러는가? 우리가 어떤 좋아하는 죄를 가지고 있으면서 버릴려고 하지 않으며 그 죄 외에는 다른 모든 것을 즐거이 버릴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가 승리하고 그 죄를 버리는 것을 두려워한다. 이것을 좀 생각해 보자. 우리가 원수를 쳐부수기 위하여 그리스도에게 도움을 청하고서 정작 그가 왔을 때에는 우리가 원수 편에 있다. 그러나 만일 이 모든 것을 버리면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무한히 가치있는 더 좋은 것을 주실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려고 하는 모든 것이 그리스도 안에 있고 그리스도는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보고 우리의 마음을 결정할 때에 이 세상의 하찮은 것을은 장차 우리에게 주실 것에 비교하면 가질 만한 가치가 없다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
요한일서 4장 2-4절에서 우리가 싸워야 할 악한 영들에 대하여 언급하면서 이런 보증을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주셨다. '자녀들아 너희는 하나님께 속하였고 또 저희를 이기었나니 이는 너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이보다 크심이라' 그러므로 엘리사와 같이 우리와 함꼐 한 자가 저와 함께 한 자보다 많다는 것을 알게 된다.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요일 5:5).
그리스도는 만물을 정복하셨으며 우리가 그를 모시고 있을 때에 모든 것을 가지며 우리를 해칠 수 있는 흑암의 권세가 결코 없다는 것을 믿는가?
이렇게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못박힌 것이다. 우리 자신의 생병을 그리스도에게 완전히 드렸으나 우리는 여전히 살아 있다. 그 후에 우리가 사는 생명은 다른 생명이며 이 생명은 그리스도의 생명이다. 시 생명은 우리가 자랑하는 생명이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생명이다. 그는 승리하였으며 그러므로 우리도 승리한다.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엡 6:11).
전신갑주를 입는다는 말은 무슨 의미인가?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하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는 진리이며 여호와 우리의 의이시다. 화평의 신을 신으셨으므로 우리의 화평이시다. 처음부터 끝까지 줄곧 그리스도이시다. 그러므로 손에 검을 들라 그 검은 하나님의 말씀이며 그리스도는 영원한 말씀이시다.
'너희도 그 안에서 충만하여졌으니'(골 2:10). 전신갑주인 그리스도를 옷 입었을 때에 우리는 그 안에서 완전하다.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입고'(롬 13:14) 그는 갑옷이며 갑옷이 그분이시다. 이와같이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이로 말미암아 넉넉히 이긴다. 우리로부터 갑옷을 벗길 수 있는 아무 것도 없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38,39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