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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범위
이스라엘 백성의 죄와 하나님의 용서, 그리고 언약의 회복을 다루는 중요한 부분입니다.
질문 몇가지를 올려드리겠습니다.
1. 이스라엘 백성은 어떤 죄를 지었으며, 그 죄의 심각성은 무엇이었습니까? (32:1-6)
**송아지 형상을 만드니(1b-4절)
(1) 백성이 모세가 산에서 내려옴이 더딤을 보고 모여 백성이 아론에게 이르러 말하되 일어나라 우리를 위하여 우리를 인도할 신을 만들라 이 모세 곧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사람은 어찌 되었는지 알지 못함이니라
조급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더이상 모세 기다리기를 포기하고, 아론에게 찾아갑니다.
“우리를 위하여 우리를 인도할 신을 만들라”는 백성들의 부탁이 참 당혹스럽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을 인도할 신을 사람이 만들 수 있다고 여겼던 것입니까? 아니면 그토록 의지했던 모세가 자신들 앞에 보이지 않아 패닉에 빠져 헛말이 나온 것입니까? 백성들은 모세가 어찌 되었는지 알지 못한다고 말함으로, 모세가 산 위에서 죽었을 것이라 추측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자신들을 애굽에서 인도한 모세가 산 위에서 죽었기에 깊은 불안함이 그들에게 엄습해 왔고, 그 불안을 해결하기 위해서 아론에게 우리 앞에 보이는 신을 만들 것을 부탁하고 있습니다.
우리를 인도할 보이는 신을 만들어 달라는 부탁에 아론은 이렇게 반응합니다.
(2-4) 아론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의 아내와 자녀의 귀에서 금 고리를 빼어 내게로 가져오라 모든 백성이 그 귀에서 금 고리를 빼어 아론에게로 가져가매 아론이 그들의 손에서 금 고리를 받아 부어서 조각칼로 새겨 송아지 형상을 만드니 그들이 말하되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의 신이로다 하는지라
아론은 백성에게 그들의 아내와 자녀의 귀에서 금 고리를 빼내어 가져오라 말합니다. 우상숭배와 금 귀고리는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당시 금 귀고리의 상당수가 다름 아닌 우상의 형태로 조각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백성의 손에서 금 귀고리를 받은 아론은 자신의 손으로 그것들을 녹여 거푸집에 부어 조각칼로 시간과 정성을 들여 다듬었습니다. 그리고 당시 주권, 리더쉽, 넘치는 에너지와 다산의 상징이었던 송아지 형상으로 만듭니다. 아론이 금으로 송아지를 만든 것은 당시 근동에 팽배했던 신에 대한 관념을 그대로 표현한 것입니다. 아론에 의해 여호와 하나님께서 하찮은 금 송아지로 표현되어 버렸습니다.
시편 106편에서 시인은 이 사건에 대해 이렇게 고백합니다.
(시편 106:20, 새번역) 그들은 자기들의 영광이 되신 분을 풀을 먹는 소의 형상과 바꾸어 버렸습니다.
영광이 되시는 분을 풀을 먹는 소의 형상으로 바꾸어 버린 아론은 더나아가 백성에게 금으로 된 송아지를 보여주며 '이것이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의 신이로다'라고 선포하며, 백성으로 하여금 하찮은 금송아지를 하나님으로 여기도록 하는 죄의 통로가 되었습니다. '우리를 위하여 신을 만들라'는 백성의 요구도 문제였지만, 그들과 한통속이 되어 금송아지를 만든 아론의 행위가 더 심각해 보입니다. 무한하시고 초월하신 하나님을 자신들의 두 눈에 보이도록, 그리고 자신들의 손 위에 두려는 죄악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결코 사람의 손 위에 계신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친히 돌판에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라'라고 써주심으로 창조주 하나님을 피조물의 형상으로 만들어 그것을 섬기는 것이 하나님을 질투하게 하는 행위, 즉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피조물로 표현한 죄악임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론을 대제사장으로, 그의 아들과 자손을 영원한 제사장으로 임명하셨지만, 이 금송아지 사건을 통해 그들이 처음부터 제사장이 되어 하나님 앞에 섬길만한 믿음의 소유자가 아니었음을 보게 됩니다.
아론은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말씀하신 성막에서 평생 하나님을 섬기게 될 것입니다. 그 성막에서, 특히 지성소에서 무한하시고 초월하신 창조주 하나님의 영광을 마주할 때마다 아론은 영광이 되시는 분을 풀을 먹는 소의 형상으로 바꾸어 자신의 손 위에 하나님을 두려 했으며, 자신의 손으로 만든 형상을 백성들에게 하나님으로 소개한 자신의 모습을 후회하며, 회개하는 삶을 살았을 것입니다. 이 사건은 아론의 인생에서 가장 후회되는 순간이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는 죄의 통로 역할을 했던 아론을 은혜의 통로인 제사장으로 불러주셨습니다. 그런 하나님의 사랑이 크고 놀랍습니다.
하나님을 우리의 손 위에 두려는 죄를 조심하십시다. 우리의 짧은 경험과 얕은 지식과 좁은 이해의 수준으로 우리를 인도하시는 하나님에 대해 쉽게 말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은 결코 우리의 생각 안에, 우리의 지식 안에, 우리의 손 안에 담을 수 있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을 내 생각과 내 이해의 수준으로, 내 두 손에 담으려 했던 교만함을 내려놓고, 하나님 손 위에 우리의 인생을 맡겨드리십시다. 우리가 하나님의 손 안에 있을 때, 무안하시고, 오묘하신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우리의 삶에 펼쳐질 것입니다. 금송아지를 다듬던 아론의 두 손을, 하나님께서 거룩한 성막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두 손으로 바꾸어 주신 것처럼, 죄의 통로가 아닌 은혜의 통로로 주님은 우리를 다루어가실 것입니다.
뛰놀더라(5-6절)
(5-6) 아론이 보고 그 앞에 제단을 쌓고 이에 아론이 공포하여 이르되 내일은 여호와의 절일이니라 하니 이튿날에 그들이 일찍이 일어나 번제를 드리며 화목제를 드리고 백성이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뛰놀더라
아론이 만든 금송아지를 보고 백성은 흥분했습니다. 그리고 아론은 백성에게 '내일은 여호와의 절기로 지키며 축제를 벌이자'라고 선포했습니다. 그리고 이튿날 온 이스라엘 백성은 금송아지 앞에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며 먹고 마시며 뛰놀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번제와 화목제를 드렸으나 하나님은 그들의 제물을 받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은 기뻐 뛰놀았으나, 하나님은 그들의 죄악에 분노하셨습니다. 이들의 기쁨은 오래가지 못했고, 하나님께서 백성을 향해 진노하셨습니다.
백성의 요구사항은 분명했습니다. '우리를 위하여 우리를 인도할 신'을 만들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아론은 '너희를 인도하여 낸 너희의 신'이라며 금송아지를 만들었습니다. 자신을 위한 삶을 추구했고, 눈에 보이는 세속적인 가치관을 따라 살아가는 이스라엘 백성이 펼치는 향락의 축제가 마치 그토록 원하는 것을 손에 쥐고 기뻐하는 우리의 모습을 보는 것만 같습니다. 눈에 보이는 세속적인 만족으로부터 얻는 기쁨이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추구하고 기다려야 하는 기쁨은 이 땅에서 그 무엇과도 견줄 수 없는 영원한 기쁨이며, 영원한 만족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해 주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자신의 생명을 내어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와 영원히 함께하시기 위해 성령님을 보내 주셨습니다. 그 무엇과도 견줄 수 없는 이 기쁜 소식, 이 은총 아래에서 오늘 하루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 되기를 소망합니다.
2.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과 어떤 언약을 맺었으며 그 언약의 이미는 무엇인가?(34:10-28)
**제 34 장
28 굶주림으로 고통당하지는 않았음(마 4:1-11)―이것은 하나의 특별한 경우로써 모세는 그토록 오랫동안(40일) 음식물을 먹지 않고 지냈지만 배고픔은 없었다. 그는 사악하고 힘센 원수의 손에 괴롭힘을 당하거나 고통을 당하지 않았다. 그는 인간 이상의 수준으로 높임을 받았고 하나님의 영광에 둘리어 있었으며 특별히 하나님께서 그의 생명을 유지해 주셨고, 탁월한 영광이 그를 감싸 주었다(살아 47).
29 그리스도는 그 율법의 영광이심―모세의 얼굴에서 빛났던 그 빛은 율법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의가 반사한 것이었다. 율법 안에 있는 그리스도가 구체적으로 드러나지 않으면 율법 그 자체만으로는 아무런 영광이 없다. 율법은 구원할 능력이 없다. 율법 안에 있는 그리스도가 의와 진리가 충만한 분으로 드러나지 않으면 율법은 그 광택을 잃어 버린다(리뷰 1902. 4. 22).
29-33 모세는 그리스도의 날을 보았음(고후 3:13-15)―그 산위에서 모세에게 율법이 주어졌을 때, 장차 오실 분도 그에게 보여 졌다. 모세는 하나님의 아들이 친히 인성을 취하셨을 때에 그가 땅에서 하실 사업과 사명을 보았다. 그리고 그분이 세상에서 교사와 인도자가 되시고 마침내 그들의 죄를 위한 속죄 제물로 당신을 주실 것을 보았다. 인간의 죄를 위한 완전한 제물이 드려질 때 메시야의 사업을 상징하는 희생 제물을 바치는 일은 그쳐질 것이었다. 그리스도의 강림으로, 베일에 가리웠던 불확실한 것들은 걷혀지고 빛의 홍수가 당신의 백성의 어두워진 마음에 이해의 빛을 환히 비출 것이었다.
모세가 그리스도의 날을 보고 그분의 피를 통하여 열리게 될 구원의 새롭고 산 길을 보았을 때 너무 기뻐 어쩔 줄을 몰랐다. 그의 가슴 속에는 하나님의 찬양이 있었고 율법을 주실 때 동반된 하나님의 영광이 매우 충격적으로 그의 얼굴에 나타났기 때문에 그가 이스라엘 백성과 동행하기 위하여 산에서 내려왔을 때 그 광채는 사람들에게 고통스러울 정도였다. 그들의 죄 때문에 사람들은 그의 얼굴을 쳐다볼 수가 없었고 그는 사람들을 두렵게 하지 않으려고 수건을 썼다.
만약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에게 공개된 복음의 빛을 깨달았더라면, 그들이 만약 폐지될 율법의 끝을 믿음으로 꿋꿋이 바라볼 수가 있었더라면 모세의 얼굴에서 반사되는 빛을 견딜 수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저희 마음이 완고하여 오늘까지라도 구약을 읽을 때에 그 수건이 오히려 벗어지지 아니하고 있으니 그 수건은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질 것이라”(고후 3:14). 한 백성으로서, 유대인들은 그들이 거절한 메시야가 광야 길을 걷던 그들의 옛 조상들을 인도하신 그 사자였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였다. 오늘날까지 그 수건은 그들의 마음에 덮여 있다. 하지만 십자가에 달리신 구주의 공로를 통한 구원의 복된 소식으로 그 어둠은 자취도 없이 사라진다(사인즈 1887. 8. 25).
제 35 장
2 엿새 동안은―히브리인들은 거룩한 사업에 종사해야 하였고 그러므로 그들은 안식일에 일을 해도 괜찮다고 생각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이 하는 일의 신성성 때문에 거룩한 안식일을 지켜야 할 의무를 소홀히 하도록 자신들을 속이거나 생각없이 거룩한 시간을 침범하도록 용납되지 않았다. 여기에 하나님의 날에 하나님의 일을 하는 목사들이나 그 외 다른 사람들을 위한 분명한 교훈이 있다. 성막 건축에 필요한 여러 가지 기술들과 재료들로 성막을 건축하는 일은 세상적인 일이므로 하나님의 거룩한 날에 할 만한 적당한 일이 아니었다.
3 불도 피우지 말지니라―아주 옛날에는 불을 피우려면 상
3. 이스라엘 백성은 언약을 어떻게 위반했으며, 그 결과는 무엇이었습니까? (34:29-35)
**29 그리스도는 그 율법의 영광이심―모세의 얼굴에서 빛났던 그 빛은 율법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의가 반사한 것이었다. 율법 안에 있는 그리스도가 구체적으로 드러나지 않으면 율법 그 자체만으로는 아무런 영광이 없다. 율법은 구원할 능력이 없다. 율법 안에 있는 그리스도가 의와 진리가 충만한 분으로 드러나지 않으면 율법은 그 광택을 잃어 버린다(리뷰 1902. 4. 22).
29-33 모세는 그리스도의 날을 보았음(고후 3:13-15)―그 산위에서 모세에게 율법이 주어졌을 때, 장차 오실 분도 그에게 보여 졌다. 모세는 하나님의 아들이 친히 인성을 취하셨을 때에 그가 땅에서 하실 사업과 사명을 보았다. 그리고 그분이 세상에서 교사와 인도자가 되시고 마침내 그들의 죄를 위한 속죄 제물로 당신을 주실 것을 보았다. 인간의 죄를 위한 완전한 제물이 드려질 때 메시야의 사업을 상징하는 희생 제물을 바치는 일은 그쳐질 것이었다. 그리스도의 강림으로, 베일에 가리웠던 불확실한 것들은 걷혀지고 빛의 홍수가 당신의 백성의 어두워진 마음에 이해의 빛을 환히 비출 것이었다.
모세가 그리스도의 날을 보고 그분의 피를 통하여 열리게 될 구원의 새롭고 산 길을 보았을 때 너무 기뻐 어쩔 줄을 몰랐다. 그의 가슴 속에는 하나님의 찬양이 있었고 율법을 주실 때 동반된 하나님의 영광이 매우 충격적으로 그의 얼굴에 나타났기 때문에 그가 이스라엘 백성과 동행하기 위하여 산에서 내려왔을 때 그 광채는 사람들에게 고통스러울 정도였다. 그들의 죄 때문에 사람들은 그의 얼굴을 쳐다볼 수가 없었고 그는 사람들을 두렵게 하지 않으려고 수건을 썼다.
만약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에게 공개된 복음의 빛을 깨달았더라면, 그들이 만약 폐지될 율법의 끝을 믿음으로 꿋꿋이 바라볼 수가 있었더라면 모세의 얼굴에서 반사되는 빛을 견딜 수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저희 마음이 완고하여 오늘까지라도 구약을 읽을 때에 그 수건이 오히려 벗어지지 아니하고 있으니 그 수건은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질 것이라”(고후 3:14). 한 백성으로서, 유대인들은 그들이 거절한 메시야가 광야 길을 걷던 그들의 옛 조상들을 인도하신 그 사자였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였다. 오늘날까지 그 수건은 그들의 마음에 덮여 있다. 하지만 십자가에 달리신 구주의 공로를 통한 구원의 복된 소식으로 그 어둠은 자취도 없이 사라진다(사인즈 1887. 8. 25).
제 35 장
**2 엿새 동안은―히브리인들은 거룩한 사업에 종사해야 하였고 그러므로 그들은 안식일에 일을 해도 괜찮다고 생각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이 하는 일의 신성성 때문에 거룩한 안식일을 지켜야 할 의무를 소홀히 하도록 자신들을 속이거나 생각없이 거룩한 시간을 침범하도록 용납되지 않았다. 여기에 하나님의 날에 하나님의 일을 하는 목사들이나 그 외 다른 사람들을 위한 분명한 교훈이 있다. 성막 건축에 필요한 여러 가지 기술들과 재료들로 성막을 건축하는 일은 세상적인 일이므로 하나님의 거룩한 날에 할 만한 적당한 일이 아니었다.
3 불도 피우지 말지니라―아주 옛날에는 불을 피우려면 상당한 노동이 필요하였다. 시내 산 지역은 꽤 더운 기후를 가졌으므로 일부러 불을 피우지 않아도 되었고, 오직 요리하는 목적을 위해서만 불이 사용되었다. 그러한 기후에서는 건강을 위해서 안식일에 굳이 따뜻한 음식을 준비해야 할 필요가 없었다(16:23). 카라파(Karaites: 서기 8 세기에 일어난 유대 학파로서 랍비들의 가르침과 탈무드의 효용성을 부인하면서 전적으로 성경에서만 교훈을 얻고자 한 사람들. 역자 주) 유대인들은 추운 날씨 속에서도 여전히 엄격하게 이 계명을 지키고 있으며, 안식일에는 가정에 불을 피우거나 켜지 않는다. 그러나 많은 유대인들은 이 지시를 일시적인 성격의 것으로 보고, 팔레스틴에서도 집에 불도 피우고 또 켠다. 그러나 오늘날의 정통 유대인들은 안식일에 절대 요리를 하지 않는다.
29 즐거이 드림―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나타난 즐거이 드리는 정신은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가장 좋은 것이다. 이는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고후 9:7)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얼마나 많이 내느냐보다(눅 21:3) 어떤 정신으로 내느냐에(4절) 더 관심이 있으시다. 즐겨내는 마음과 충성심은 우리의 봉사를 하나님께 가납되게 해 주는 요소들이며(실물 402), 그분께서는 당신의 계획에 따라 넘치게 우리를 상 주실것입니다
29 모세가 그 증거의 두 판을 모세의 손에 들고 시내 산에서 내려오니 그 산에서 내려올 때에 모세는 자기가 여호와와 말하였음으로 말미암아 얼굴 피부에 광채가 나나 깨닫지 못하였더라
30 아론과 온 이스라엘 자손이 모세를 볼 때에 모세의 얼굴 피부에 광채가 남을 보고 그에게 가까이 하기를 두려워하더니
31 모세가 그들을 부르매 아론과 회중의 모든 어른이 모세에게로 오고 모세가 그들과 말하니
32 그 후에야 온 이스라엘 자손이 가까이 오는지라 모세가 여호와께서 시내 산에서 자기에게 이르신 말씀을 다 그들에게 명령하고
33 모세가 그들에게 말하기를 마치고 수건으로 자기 얼굴을 가렸더라
34 그러나 모세가 여호와 앞에 들어가서 함께 말할 때에는 나오기까지 수건을 벗고 있다가 나와서는 그 명령하신 일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하며
35 이스라엘 자손이 모세의 얼굴의 광채를 보므로 모세가 여호와께 말하러 들어가기까지 다시 수건으로 자기 얼굴을 가렸더라
출 34:27-35 / [열 가지 명령을 주시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셨다. `너는 네가 지금까지 너에게 내린 이 명령을 기록하여라. 내가 이 명령을 계약 조건으로 삼아 너뿐만 아니라 이스라엘과 계약을 맺는다.' 28) 모세는 거기에서 여호와와 함께 40일 밤낮을 지내면서 물도 마시지 않고 음식도 입에 대지 않았다. 모세는 이스라엘과 하나님 사이에 맺은 계약의 기초가 되는 열 가지 명령을 두 돌판 위에 기록하였다. 29) [모세가 얼굴을 가리다] 모세는 손에 증거판 두 개를 들고 시내산에서 내려왔다. 산에서 내려올 때, 하나님과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누었기 때문에 자기의 얼굴이 환하게 빛나고 있다는 사실을 모세는 알지 못하였다. 30) 아론과 온 이스라엘 사람들은 모세의 얼굴이 환하게 빛나는 것을 보고 모세에게 가까이 다가가기를 두려워하였다. 31) 모세가 아론과 이스라엘 공동체의 지도자들을 불러들였다. 그리고 모세는 그들에게 모든 것을 이야기해 주었다. 32) 그러자 그제서야 온 이스라엘 사람들이 모세에게 다가갔다. 모세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여호와께서 시내산에서 자기에게 이르신 모든 말씀을 지키라고 명령하였다. 33) 모세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다 이야기한 뒤에 자기 얼굴을 가리개로 가렸다. 34) 모세가 여호와와 이야기하러 들어갈 때는 가리개를 벗고 밖으로 나올 때까지 쓰지 않았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것을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일일이 이야기하였다. 35) 이스라엘 사람들은 모세의 얼굴이 환하게 빛나는 것을 보았다. 그래서 모세는 여호와께 말씀드리러 들어갈 때까지 다시 가리개로 자기 얼굴을 가렸다.
하나님을 대면한 모세의 얼굴에서 광채가 났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주고 동시에 모세에게 주신 말씀의 권위를 더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얼굴 피부에 광채가 나다(27-29) 산에서 40주야를 보낸 뒤에 모세는 하나님께서 언약 회복의 상징으로 주신 돌판을 들고 내려왔습니다. 모세가 산 위에서 하나님을 대면하고 돌아왔을 때 그의 얼굴은 빛났습니다. 이 빛은 출애굽기 24장 16-17절에서 그가 원래의 돌판을 받으러 산에 올라갔을 때, 산 위에서 빛나던 여호와의 영광을 상징적으로 반영한 것입니다. 모세의 빛나는 얼굴은 모세가 정말 하나님을 만났음을 백성들에게 알리는 표시였습니다. 그러나 정작 모세는 자신의 얼굴이 빛나고 있는 줄 알지 못했습니다.
수건으로 얼굴을 가렸더라(30-33) 모세는 백성들이 광채 나는 자신의 얼굴 때문에 두려워하는 것을 보고 먼저 사람들을 안심시킨 후,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야 했습니다. 모세의 얼굴에서 난 광채는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을 경외심을 갖고 더 주의 깊게 듣도록 했을 것입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명령을 이스라엘에게 모두 전한 뒤에야 수건으로 자신의 얼굴을 가렸습니다.
다시 수건으로 얼굴을 가렸더라(34-35) 모세는 백성들을 염려하여 그들 앞에 설 때에는 수건으로 자기의 얼굴을 가려 광채를 차단했습니다. 모세가 수건을 벗을 때가 있었습니다. 그 때는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와(33:7-11) 나와서 사람들 앞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였습니다. 모세의 빛나는 얼굴의 광채와 빛으로 생생하고 강렬한 느낌을 사람들에게 준 것은 하나님의 말씀의 신비로움과 거룩함과 권위를 충분히 드러낸 일입니다. 모세는 말씀을 전한 후에는 얼굴의 광채를 감추기 위해 다시 수건으로 얼굴을 가렸습니다.
4. 하나님은 어떻게 언약을 회복하셨으며, 그 회복의 의미는 무엇이었습니까? (35:1-40)
제 35 장
**2 엿새 동안은―히브리인들은 거룩한 사업에 종사해야 하였고 그러므로 그들은 안식일에 일을 해도 괜찮다고 생각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이 하는 일의 신성성 때문에 거룩한 안식일을 지켜야 할 의무를 소홀히 하도록 자신들을 속이거나 생각없이 거룩한 시간을 침범하도록 용납되지 않았다. 여기에 하나님의 날에 하나님의 일을 하는 목사들이나 그 외 다른 사람들을 위한 분명한 교훈이 있다. 성막 건축에 필요한 여러 가지 기술들과 재료들로 성막을 건축하는 일은 세상적인 일이므로 하나님의 거룩한 날에 할 만한 적당한 일이 아니었다.
3 불도 피우지 말지니라―아주 옛날에는 불을 피우려면 상당한 노동이 필요하였다. 시내 산 지역은 꽤 더운 기후를 가졌으므로 일부러 불을 피우지 않아도 되었고, 오직 요리하는 목적을 위해서만 불이 사용되었다. 그러한 기후에서는 건강을 위해서 안식일에 굳이 따뜻한 음식을 준비해야 할 필요가 없었다(16:23). 카라파(Karaites: 서기 8 세기에 일어난 유대 학파로서 랍비들의 가르침과 탈무드의 효용성을 부인하면서 전적으로 성경에서만 교훈을 얻고자 한 사람들. 역자 주) 유대인들은 추운 날씨 속에서도 여전히 엄격하게 이 계명을 지키고 있으며, 안식일에는 가정에 불을 피우거나 켜지 않는다. 그러나 많은 유대인들은 이 지시를 일시적인 성격의 것으로 보고, 팔레스틴에서도 집에 불도 피우고 또 켠다. 그러나 오늘날의 정통 유대인들은 안식일에 절대 요리를 하지 않는다.
29 즐거이 드림―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나타난 즐거이 드리는 정신은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가장 좋은 것이다. 이는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고후 9:7)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얼마나 많이 내느냐보다(눅 21:3) 어떤 정신으로 내느냐에(4절) 더 관심이 있으시다. 즐겨내는 마음과 충성심은 우리의 봉사를 하나님께 가납되게 해 주는 요소들이며(실물 402), 그분께서는 당신의 계획에 따라 넘치게 우리를 상 주실 것이다(실물 397).
성막에서 어떤 제사가 드려졌으며, 그 제사의 의미는 무엇인지 연구하면 좋겠습니다. (29-30장)
**1 할 일이 이러하니―이것은 위임식(28:41)에 관한 설명이다. 위임과 기름 부음에 뒤 이어 있을 제사를 위해 “젊은 수소” 한 마리와 “수양” 두 마리가 준비되어야 하였다. 그러므로 이 준비가 가장 먼저 언급되었다.
흠 없는―문자적으로 “완전한”이란 뜻이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께 실례가 될 것이었다(말 1:6-14). 위임식은 시종 거룩함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복음을 위하여 일하는 모든 교역자들은 그들이 맡은 성직의 성격과 책무를 바로 이해하기 위하여 출애굽기 28 장과 29 장을 철저하게 연구함이 좋을 것이다.
2 무교병―누룩은 죄와 부패의 상징이기 때문에(출 12:15; 마 16:6,12; 고전 5:6-8), 무교병은 의식상 유교병보다 순결하다.
4 회막 문으로 데려다가―이것은 아마도 회막 문과 번제단 사이에 있던 놋 물두멍을 말한 것 같다. 법의 요구에 따라 여러 가지 씻는 일들이 이곳에서 행해졌다(30:18-21).
물로 씻기고―의식상 씻는 일은 대부분의 고대 종교 예식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였다. 이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신체적 청결로써 도덕적 영적 청결을 나타낸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제사장들은 성막에 들어갈 때나 번제단에 희생제물을 드릴 때마다 이 씻는 일을 꼭 해야 하였는데(30:20), 이는 다른 사람의 죄를 속하는 직무를 수행하기 전에 그들 자신이 먼저 죄의 얼룩과 불결로부터 벗어나야 했기 때문이다(시 51:7; 사 52:11; 요 13:10, 11). 그러나 그들이 어떤 특정한 죄들을 저질렀을 때에는 희생을 드려야 했다(레 4:3-12). 씻는 일은 보다 일반적 의미에서 죄를 다루고 있고 제사장들의 개인적 생활보다는 직무상의 기능과 관계된 일이라 볼 수 있다.
제 30 장
6 장 밖에―분향단은 성소 안의 지성소와 성소를 분리시키는 “휘장” 혹은 커튼 가까이에 놓여 있었다(40:21-27). 성소에 있었지만 이 분향단은 지성소에 속하는 것으로 여겨졌다(히 9:3, 4). 이 생각은 제사장들이 직무시에 속죄소 위의 하나님의 임재 앞에 나아올 때 바로 이 제단에 나아왔던 사실에서 비롯된 것이다(부조 353). 대속죄일을 제외하고는 그들이 그 이상 더 가까이 접근해 올 수 없었다. 이 분향단은 그들이 지성소에 계신 하나님을 뵙고자 나아왔던 곳이다. 성소를 연기로 가득 채울 뿐만 아니라, 그 연기로 휘장을 넘어 지성소까지 미치게 했던 향이 이곳에 드려졌다(26:32). 향단이 “속죄소 앞에” 있었다는 사실은 기도가 우리를 하나님께서 계신 곳으로 인도한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준다. 비록 우리 육신의 “휘장”(고전 13:12)이 우리 눈으로 하나님을 볼 수 없게 하지만 믿음과 기도를 통하여 우리는 몸이 갈 수 없는 곳까지 나아갈 수 있다.
10 일년 일차씩―이것은 대제사장이 피를 취하여 향단 뿔에 발라 “그것을 위하여 속죄”(레 16:18)하였던, 7월 10일 대속죄일을 말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것이 속죄의 단이 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대제사장이 범죄하였거나(레 4:3-12), 전체 회중이 “부지중에” 불의를 행하였거나 “여호와의 금령 중 하나라도 그릇 범하여”(레 4:13-21) 허물이 있는 경우 이 단이 속죄에 관여되었다. 그럴 때 대제사장은 희생의 피를 제단 뿔에 묻혔다. 이 두 경우 분향단은 개인의 속죄제의 피를 그 위에 뿌렸던 번제단을 대신하였다(레 4:22-35). 성막의 모든 기구들 중에 분향단은 거룩함에 있어서 법궤와 속죄소 다음가는 위치에 있었던 듯하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기도를 얼마나 중히 여기시는지를 간접적으로 말해준다(부조 353 참조).
<결론적으로 이스라엘 백성이 범한 죄들은 반복됩니다 그러나>
1-이스라엘 백성들이 지은죄는 너무나 엄청난 죄입니다
송아지를 만들어서 우상을 섬긴 그들은 도저히 용서받지 못합니다
2-그러나 우리 용서의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해 새로운 언약 을 주시고 다시 화해를 하시려고 언약을 주셨습니다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킬수 있도록 주선해 주셨습니다
엿새동안 거룩한 사업에 종사하도록 하셨습니다
3-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언약을 지키지 못했을때 그들은 결국 큰 죄를 지었습니다
성전 봉사를 통하여 하나 하나 성소를 들어가면서 절차를 밟아서 들어가는 과정 속에서
현대 이스라엘 백성들은 오직 주님의 십자가 에서 피를 흘리는 속제제물이 되셔서 우리를 살리셨습니다
4-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안식일을 지키면 복을 받고 축복속에 산다고 약속을 했습니다
그 결과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특권을 주신다는 약속이 였습니다
결론-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새하늘과 세상에 가서 살수 있는 특권을 주셨습니다
오늘날 현대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모든것을 깨달아 알고 결론적으로 하나님을 선택하고 오직 그분께 순종하는 길입니다
성령을 통하여 주님과 동행하는 삶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최선을 다하여 충성하자
하늘은 우리들에게 주는 은혜의 선물입니다
위기를 만나는 순간 그것이 위험이 될 수도 있고 기회가 될 수도 있습니다.
위기를 만나면 이제까지 단단하게 굳었던 마음과 습관이 부드럽게 변하여 힘을 약간만 가해도
새로운 마음과 습관을 얻을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됩니다.
그리고 위기를 만나는 순간 영의 눈이 열려 새로운 가치와 의미를 찾게 되며, 하나님을 만나는 기회가 되기도 합니다.
위기의 순간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면 그 위기는 아름다운 기회로 이어져 새로운 삶을 살게 합니다.
적용: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표상과 관련해 모세의 얼굴 광채를 보며 빛나는 하나님의 얼굴을 떠올렸을 것입니다.
친히 하나님께서는 아론의 축도문을 통해 당신에게 얼굴의 빛을 비춰주시는 분이라고 말씀합니다(민 6:25).
바울이 말한 없어질 광채와 영원한 광채에 대해 묵상하고 나누기 바랍니다(고후 3:16,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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