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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향인 각계인사와의 대담>
-화순군 군민신문 창간 3주년 기념
1. 교수님의 고향이 도곡면 원화리로 아는데요? 지금도 고향에 친인척 들이 기거하고 계시나요?
예, 맞습니다. 화순군 도곡면 원화리 1구 89번지( 변경된 새 번지 화순군 도곡면 원화리 156번지 300여 평의 생가 터도 있어 복원계획이며, 조상을 모시는 삼계정사가 있고 300여년 역사를 가진 마을 (우리씨족 집성촌)로서 60호였으나 지금은 많이 흩어지거나 줄었지만 선산을 지키는 친척들이 살고 있습니다.
2.도곡은 온천지역으로 유명하지만 선생님 마을 뒷산에 문필바위가 선생님을 상징하는 것처럼 보여요 어떤 전설이라도 연관되어 있는가요?
우리 마을은 동리명이 원동이었고 바로 밑에 있는 마을이 온천리(溫泉里)였는데, 우리 마을의 元자도 溫자의 변음이 아닌가 합니다. 따뜻한 물이 솟는 샘이 있었다고도 하여 일제시대부터 온천개발이 시도되었지요? 남포동이라는 곳이 있었는데, 온천발굴을 위해 다이나마이트를 터뜨려 공사를 한데서 유래했어요. 1945년 일제가 패망하면서 공사가 중단되었다가 결국 그 후에 온천지구로 개발된 것입니다. 저의 고향은 동요에 나오는 ‘꽃피는 산골’로 아름다운 생장지인데 오히려 유흥지로 바뀌는 듯해 저로선 희비 반반입니다. 생가복원 계획도 있고 욕심 같아선 서은 문병란 문학관 건립 같은 꿈도 계획하고 있습니다만... 문필봉, 원래 바위명칭은 그 생김새에 따라 고동바위, 쌍교암, 장군바위, 등 전설도 있습니다. 저의 문우들이 보고 저것은 필봉, 문필바위라 불러주기도 했고 온천이 나온 뒤로 사람들은 남근임이 아니냐라고 갸웃거리기도 합니다. 아무튼 종괘산 상봉에 솟은 거대한 문필봉은 마치 펜 끝이나 붓과 같이 생겨서 독특한 운치를 보여 줍니다. 저와 관련이 있든 없든 그 바위 곁에 편상바위가 있는데 사방이 절벽이면서 그 위에 묘소 하나 쓸 수 있는 면적이 있고 거기에 저의 5대조 할아버지가 모셔져 있습니다.
풍수설에 의하면, 명당이라 전해지지요. 과연 명당이라면 저의 작은 문명으론 과분하지 않나 여겨지기도 하지요. 그런 것 떠나 온천과 연결되어 개발한다면 분명 명소가 될 것입니다.
3. 동심의 기억 속에 아련한 묵은지 같은 추억이 있을 것 같아서요 추억담 한 말씀요?
초등학교 4학년 때 도곡초등학교에서 도시공부를 하기 위해 광주서석초등학교로 전학 촌놈이란 별명을 딛고 반장도 어린이회장도 지내고 그 당시 썼던 동요, <고향 계신 어머니>는 정용상 은사님에 의해 작곡 중고등학교 검인정교과서에 수록되어 있지요. 물론 공부도 잘하여 외우는 기계란 별명도 있었고 사범학교병설중학교에 입학했을 땐 압도적으로 최고득점을 해서 천재(?)말을 듣기도 했지요. 나는 1959년 김현승 문하생이든 조선대학교문리대 문학과 3학년 때 <가로수> 라는 작품으로 현대문학지를 통해 문단에 등단했는데, 재학생이 시인이 되기는 처음이었지요. 그때 나는 시골집에서 통학을 했습니다. 앵남이라는 간이역에서 새벽차를 타고 남광주에서 내려 학교를 다녔어요. 대학생도 처음이고 졸업을 한 것도 처음이었지요. 그때 물래를 돌려 실을 뽑으시는 어머니 곁에서 호롱불에 비추어 쓴 시가 바로 <가로수> <밤의 呼吸> <꽃밭> 등이었고 <호롱불의 역사>란 장시도 거기서 썼습니다. 저의 고향은 1975년 넘어서야 전기가 들어온 곳이었습니다. 6.25 전쟁이 끝난 전후 1950년대 우리 고향은 초근목피 보릿고개도 늘 있던 시절인데, 도곡초등학교 고등공민하교 교사였던 문병석(중형)의 도움으로 학비조달을 받으며 문필봉을 가슴에 안고 문학도의 꿈을 키웠습니다. 나는 조태일시인이 만들던 시인이란 잡지에<문필봉의 뻐꾸기>라는 자전적 에세이를 썼고 <땅의 연가> <고무신> <겨울산촌> 상당수의 초기작품을 그 고향의 호롱불 아래서 썼습니다. 이보다 더 아련하고 아름다운 추억이 어디 있겠습니까.
4. 자녀들은 몇 분이나 두셨나요?
저는 대학교 졸업 후 1961년 순천고등학교에 가서 교편을 잡았습니다. 가방 하나 들고 가서 총각선생이었던 나는 동료교사였던 윤칠한선생(학생과장)의 중매로 순천여인과 결혼하여 큰 딸 명아, 둘째 딸 정아를 낳아 6년 후 광주일고로 전근 와서 동명동, 지산동에 살면서 찬기 (큰 아들) 막내(현화)네 명을 낳아 길렀지요. 아들은 경희한의대 출신 한의사 큰 딸은 주부 둘째 딸은 조선대 도서관 근무 막내딸은 스포츠댄싱 전문가로 무용학원을 경영, 대학에서 박사학위 코스를 밟고 있어요. 1970년대 반유신, 5.18항쟁 중 내란음모종사자로 수배 구속 어려움을 겪었지만 가족과 자신을 지키면서 문필도 꺾거나 굴하지 않고 26권의 시집 20여권의 산문집을 펴내면서 지금 76세의 황혼기를 맞고 있습니다.
5. 광주 5.18 항쟁으로 민중시인으로 많은 분들이 선생님을 떠올리는 데요? 당시 여수 어느 다락방에 피신처를 삼고 상무대 감옥에서 고통스런 날을 보낼 때 마다 제자들의 도움이 컸다고 들었습니다.
여수 덕충동 은신처도 제자 서충석군의 집이었으니 그 난리통에 폭도로 수배중인 나를 숨겨줄 사람이 제자 아니곤 가능했겠습니까. 상무대(보안대)에 자진 출두하여 처음엔 내란 음모 폭도로서 반공법 저촉으로 A급 조사를 받았지만 광주민중항쟁 배후에 공산주의자의 조종이 있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었기에 저의 시집<벼들의 속삭임> (양서협동조합간행 비매품으로 계엄사에 의해 내란 음모 선동 자료로 압수 되었지요). 조사도중 공산당 조종이라는 반공법 적용이 바뀌어 무거운 짐을 벗을 수 있었습니다. 순고, 일고, 조선대(의대) 출신 군의관 등 많은 제자들이 저의 무죄를 믿었고 고비마다 보이지 않는 도움을 주었지요. 박영식법무관(검사) 김이수법무관(제자이자 판사) 보안대 송수사관 등도 저의 시 <땅의 연가> 나 <고무신> 등이 민중성을 띠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것이 광주의 5월 항쟁을 불러온 내란음모라고는 생각지 않았어요. 77육군병원에 병감 되었을 때도 군의관을 지냈던 제자들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나와 나의 가족을 보살 펴 주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일화는 아직도 숨겨진 추억으로 광주의 아픈 상처와 함께 역사적 밀의로 보관되어 있다고 보아야 하겠지요.
6.한 인생을 보내셨는데요. 삶과 문학 시란 어떤 것이라고 말씀하실 수 있을까요 ?
인생이 무엇이냐 묻는 거와 같이 시가 무엇이냐 문학이 무엇이냐 묻는 것도 한 마디로 정의할 수 없는 난제에 속합니다. 그러나 학습의 편의상 요약하여 말한다면 문학이란 인생의 탐구로써< 본질적으로 아름답고 그 속성에서 진실하다>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아름다움은 예술로써 미적인 즐거움을 주는 것이고 진실은 그 미가 바탕에 둘 삶의 교훈 교시적 기능을 의미할 것입니다. 아름다움과 진실을 통하여 거기서 인생과 인간을 탐구하는 것이라 하면 어렴풋이나마 그 윤곽을 더듬어 보았다 할 것입니다.
7. 한 평생 시를 쓰시며 이름을 날리셨는데 시를 쓰게 된 연유가 있으실 것 같아요, 시골에서 문학적인 소질을 어떻게 길러 가셨는지 궁금하네요?
저의 인생은 시를 통하여 삶의 방편을 삼았지만 그와 아울러 교단을 통하여 교육자의 길을 걸었습니다. 초등학교는 빼고 중고등학교 대학교 학원 사회적인 여러 형태의 강좌, 현재도 사회교육원 같은 데서 정기적인 강좌를 맡고 있는 둥 저의 생애 중 대부분 교육에 봉사해온 셈입니다. 문학과 교육의 일치 어느 쪽에도 기울지 않는 그 양자의 균형 잡기 속에서 사회와 민족에 대한 사명감으로서의 민족문학 민중문학 그 근원적 진실을 위한 민족운동과 맥락을 같이 해온 참여(engagement)와 저항(resistance)의 성격도 거기에서 연유한 것입니다. 문학적인 환경은 어린 싹을 키운 것은 향리의 자연이었고 조선대학교 교수이자 당대의 대표적인 시인이신 다형(茶兄)김현승시인의 문하가 되어 그 분의 지도와 인도에 의해 그 싹을 키우고 꽃피워 50여년의 문학 활동을 영위해 왔습니다.
8. 선생님은 형님의 뒷바라지로 어려운 시절에 농촌에서 조선대를 나오셨는데 남다른 감회가 있으실 것 같아요?
6.25직후 50년대 말기 당시 면단위에 대학생 하나 있을까 말까한 시절이었어요. 초등학교 교사를 지낸 형님께서 부모님 모시는 일 외에 나의 학비조달도 해 주셨지요? 보릿고개가 있던 초근목피의 시절이었는데 앵남이라는 간이역에서 2학년까지 기차통학을 하면서 시골집 호롱불 밑에서 공부를 했지요. 부모님이 계셨지만 막내인 저는 중형 (문병석)의 큰 사랑을 입어 대학을 졸업했고 시인 되는 일과 중고교 교사 마침내 대학교수까지 거치게 되었지요. 이는 고향 산 문필바위의 힘이 아니라 형님의 사랑과 뒷바라지 덕이었지요.
9.다형 김현승 시인하면 기독교적이며 광주양림동 출신으로 광주를 대표하는 시인이신데 한때 스승과 제자로 사후엔 시비도 건립해 드렸는데 그 기쁨은요?
사람은 모든 것에서 스승삼아 배우는 존재입니다. 특히 사람에게서 배우는 스승의 감화와 지도는 그 인생에 커다란 축복이라 생각합니다. 시뿐만 아니라 인생 전반에 걸친 교육자적 소양을 길러주셨기에 그 뒤를 이어 부끄럽지 않은 제가가 되려 최선을 다했고 그 분의 100주기가 다가오고 있어 그 기념사업 위원장을 맡아 여러 가지 구상을 하고 있습니다.
10.노래방에서 가면 선생님의 노래 <직녀에게> 등 노래를 젊은이들이 많이들 불러요 5.18광주 항쟁 때 불렀던가요?
직녀에게란 시는 1976년 심상에 발표된 일종의 통일염원가였는데, 작곡되어 노래를 불러진 것은 1980년 광주의 5월 항쟁 이후입니다. 동양의 전설 견우와 직녀의 생이별을 남과 북의 이념적 분단에 의한 이별에 연결, 우리는 어떠한 고난을 극복하고라도 만나야 한다고 절규한 노래입니다. 남과 북을 잇는 민족적 엘레지로서 분단을 극복하자는 민족의 염원이 담겨 있습니다. 남북문화교류를 통해서 직녀에게 외에도 <동소산 머슴새(항일민족서사시)>는 북쪽에서도 애독서로 소개되고 있어 남북을 아우르는 노래와 예술 문학적 통일운동은 정치적 통일운동을 앞당길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남과 북이 서로 이기고 지는 그런 대결이 아니라 서로 절장보단(絶長補短)하여 상생(相生)하는 평화통일, 외세에 의존하지 않는 우리끼리의 만남을 이루려는 노력이 바로 통일문학이라 생각합니다.
11. 문학 후배 제자들이 문학관이나 기념관이 있고 선생님 고향에도 시문학 기념관 같은 것 세움직한데 어떤 계획이 있으시나요?
해남의 김남주(고인이 됨) 보성의 조정래(태백산맥) 등이 눈에 띄는데 경제사정이 열악한 광주나 화순에선 염두도 못 내고 있습니다. 전완준 군수 부임 후 그런 문제를 건의한 적 있는데 약속을 받은 바는 있으나 아직 착수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제가 아직 건강하고 작품 활동을 하고 있는 중이니까 뭐 그리 바쁠 건 없습니다. 경제사정이 좋아지면 생가복원과 함께 그런 일이 이루어지리라 믿고 있습니다.
12. 문학과 교육자로 한평생을 보내셨고 대학에서 퇴임하시어 조대평생교육원, 금호문학관 등에서 열정적인 후학들을 양성하고 계시지요? 제자들 중에 기억난 제자들이 있다면요?
각계각층에 많은 제자들이 그 나름대로 많은 활동을 하고 있지요. 문학계나 교육계에 있는 몇 사람만 생각해 보지요. 우선 대담자인 리경재님도 교육계라는 점에서 시인이라는 점에서 사제동행, 줄탁동시의 제자라 생각되네요. 목포대학교에서 정년을 앞두고 있는 교수이자 시인인 허형만 광주의 민중시인인 김준태, 김종, 백수인,..... 이런 식으로 거명하자면 저를 스쳐간 인연들이 참 많지요.
13. 선생님은 교육계에 계시면서 왜 그런 고난을 겪으셨는지, 군사정권과의 악연이 궁금해요?
문학을 통하여 교육을 하고 교단을 통하여 사회정의나 분단극복 같은 민족문제에 봉착 反유신 反군부 민주지향적 통일지향적 참교육과 민족문학을 지향하는 나의 시 정신과 교육정신이 그러한 고난과 사명감을 자초한 것이지요. 괴테의 명작 파우스트도 사람이 진실하고자 하는 한 ‘방황’ 한다 하였습니다. 나 또한 그 진실과 정의 때문에 악연이 생기고 고난과 방황의 길을 걸었다고 생각합니다.
14. 김대중 노무현 참여정부 시절에 북한과의 문화예술인들의 교류가 있었잖아요? 그때 북한의 지도자가 선생님의 안부를 묻고 대표적 시인이 인사말을 하면서 선생님에 대한 존경의 표시로 동소산의 머슴새 한 대목을 낭독했다는 보도가 났었는데요?
보도 보신대로입니다. 6.25 한국전쟁이 60년을 경과한 지금 우리는 원한을 민족적 이념으로 삭힐 때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우선 장벽을 헐고 문화부터 교류하여 그 원한을 승화시키고 통일의 물꼬를 터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일에 나의 통일 시 같은 작품이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봅니다. 우리도 북한의 시와 소설도 읽고 우리의 시와 소설도 북쪽에서 읽어야죠. 그것은 너무도 당연한 통일운동의 새로운 진로라고 생각합니다. 동기춘 같은 북쪽의 대표적 시인이 남쪽의 김남주나 문병란을 좋아한다면 통일은 누가 막아도 차츰 가까워 온다고 확신합니다.
15.지금까지 많은 시집들이 나왔는데요. 대표적인 시집이라면 어떤 것이라고 보시나요?
글쎄요, 26권 모두 그때 그때 힘들여 쓴 대표작이 끼어 있지만 두서너 권 고르라면 <땅의 연가(1981. 창작과 비평사)> <동소산의 머슴새(1984 일월서각)> <인연서설(1999. 시와 사회사)> <매화연풍(2009. 코리아 기획)>을 들고 싶습니다.
16. 지산동에서 오랫동안 은거하시면서 서은(瑞隱)이라는 아호를 붙인 문학연구소를 개원하여 많은 문인들을 양성하고 계시는데 큰 생각이 있을 것 같아요?
큰 생각보다는 본가에 책 둘 곳이 없었고 고향에 생가나 문학관 건립이 멀었고 나를 찾는 각지의 문학인들을 접견하고 이 고장 젊은 학도들과의 교류 같은 것을 염두에 두고 제자가 기증한 50여 평 남짓한 연구실이지요? 문학적 행사 세미나 시 창작 강의 연구발표 중고생 문학기행 방문 등 지속적으로 무등산 밑에 사는 사람들의 아름답고 진실한 문학정신 연마의 장소로 그 활력을 펴나가는 것 그것이 큰 꿈이지요.
17. 현대시 100주년 기념행사로 상무 지하철역에서 시 낭송회를 개최하는 등 시민과 대중과 함께하는 문학행사가 열리고 있던데요.
소설과 시집 등이 잘 안 팔리는 시대, 대중적 전달 매체가 많이 달라진 것이나 역시 권위 있는 문학은 아직도 건재하다고 생각합니다. 도서관이나 서점 가득한 책들 중에 그래도 제일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지요. 독자가 줄었다지만 작자가 늘었지요. 작자들이 곧 독자가 되는 시대 250여가지 문예지, 계간지가 말해주듯 시를 찾는 사람은 아직도 많다고 생각합니다. 야구장에 몰리고 데모장에 몰리고 영화관에 몰리고 인기가수 쇼에 몰리고 그래도 남는 사람은 도서관에서 고요한 창가에서 아름다운 시를 읽는 제정신 가진 사람들은 아직도 많다고 봅니다.
18. 현대인들에게 문학과 시를 무엇이라 말할 수 있을까요?
따분하지만 그래도 골빈자(骨貧者)나 제정신 못 가진 미친자(美親者) 그들이 고함치고 술 마시고 야단법석 벌일 때 고요히 자기를 돌아보는 시간 문학이라는 인생의 거울 속에 자신이 무엇인가 생각해 볼 수 있는 시간 동물과 신 사이에서 그래도 내가 사람이라는 자존심을 마지막 지킬 수 있는 유일무이한 인류의 스승, 그리고 만인의 심장이 숨 쉬는 위대한 유산이라 말하고 싶군요.
19. 선생님께서 등단하던 때 보다 요즈음은 등단이 쉬어졌다가 하던데요, 시의 질적 수준이 못 미친다는 말이 있더군요.
권위주의는 모든 분야에서 사라져야 되지요. 요즈음 열린 시대이니까 모든 문은 다 열려 있지요. 자신의 눈높이에 맞추어서 고상한 취미나 교양의 하나로 갖는 시창작집이 늘고 있어요. 전문적이고 시험적이며 전위적 파격적 그러한 포스트모더니즘의 입장에서 보면 난잡한 예술풍토 문학풍토 어디서나 존립이 힘들고 가치기준이 무너진 이런 시대는 대중추수주의 상업주의 유행적 퇴폐문학 온갖 정신 나간 반미치광이 난잡한 문학도 등장하니까 질이니 가치니 그런 것 논의할 시대가 아닌 듯해요. 몇 백편 속에서 금싸래기 하나 있어도 그것은 다행 아니겠어요.
20. 시인, 출판사, 문학교수들 상호간 불목현상이 있고 문인다운 모습을 못 보이는 작태도 있다는 지적이며 퇴직한 사람들이 자리다툼 현상도 있다는데요?
질문요지를 모르겠고 저의 주변에선 그런 일 없으며 패거리 짓고 독자 시인들 서로 끌어들이려는 현상들 장사속이라면 나는 질색이고 관련도 없어요. 어느 잡지나 제정신가지고 원고료 주거나 원고료는 못 주어도 오식 안내고 예의 갖추어 청탁하면 저는 시 작품을 보내고 있어요. 편법이나 구걸식 출판보다 어깨 펴고 할 일 제대로 다하는 자존심 출판, 시적 정의(Poetic, Justice)에 맞는 그런 출판사나 동인 단체들이 작품이라는 실력으로 대결하기 바랍니다.
21. 정치적인 동서화합이 아니라, 문인들의 문학적인 동서화합으로 경상도와 전라도 섬진강, 지리산을 경계로 대구와 부산과 교류를 하시고 계신데 결과가 있었다고 보는데요?
정치적 화합은 남북관계처럼 정치적 헤게모니 싸움이 가로막고 있어요. 대구의 낙동강문학(성군경회장) 부산의 문예시대(배상호) 이 분들과 10여년 문학적 우정의 교류로 그 기반이 닦아져 있습니다. 인터넷을 통한 작품교류, 작품평가지도. 연구소방문교육, 초청강좌 등 자연스럽게 이루어지고 있으며, 앞으로도 활성화될 것입니다. 지리산과 섬진강을 사이에 두고 오가는 인정과 문화가 담긴 교류라면 낭만적인 휴머니즘의 문학, 홍익인간 이화세계 국적 있는 민족적 자긍심을 가지고 반목의 벽을 허물고 동지로 때로는 친구로 스승과 제자로 작품 속에 오가는 정이 바로 민족통일로 가는 평화와 화합 상생의 문학이라 생각합니다.
22. 수구초심(首丘初心)이란 고사성어가 있는데 고향에 선생님의 문학정신이나 시 사랑의 어떤 흔적 남기셨으면 하는 다른 바램이 있으실 듯 한데요?
대담자가 바로 저의 제자인 터에 간접화법 보다 직접 앞장서해주어야지요. 중이 제 머리 못 깎지요. 나는 한 평생 모든 사람 변호하고 다닌 투쟁의 일생이었지요. 대담자처럼 뜻있는 제자들이 제 속마음을 읽고 앞장서야지 흔적인지 바램인지 그게 활성화가 되겠어요. 많이 부탁합니다. 돈 가지고 되는 일이라 관의 연줄 뭐 그런데 협력을 얻는 일... 허지만 난 별로 그런 일에 소질이 전무하거든요. 더구나 요즈음 세상은 정직한 자 몫이 아닌 듯해요. 아무튼 광주나 화순 무등산 밑에 사니까 맑고 바른 생각으로 깨끗이 살아야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