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삶의 마지막 여행

[이봉희]

                                                                 이 봉희

      가을이 구름을 타고 떠날 채비를 하고 있다. 이 가을에 하고 싶었던 많은 일들을 하지 못한 채 서성이는 나를 싣고 흐르고 있다. 내 삶의 가을 끝자락에 서 있어서일까? 뒷마당의 감도 아직 영글지 못 하고 있는데 어느새 가을은 떠나려 하고 있다. 왠지 채워지지 않은 내 삶을 보는 듯 아련한 마음마저 든다. 삶의 여정속에서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싶은데 마음뿐인 내게 이 가을이 선물을 주고 떠나려 하고 있다.

  내 삶의 꿈 많고 아름다웠던 봄날도, 꿈을 이루려 던 열정의 여름도, 한 잎 한 잎 삶의 무게에 잎을 떨 구는 가을에 머물며 다가오는 겨울을 맞으려 하고 있는 나. 지난 시간 속에 이루지 못한 많은 일들이 스쳐가지만 최선을 다하며 살았기에 그저 감사 할뿐이다. 누군가 지금 제일 두려운 것이 무어냐고 묻는다. 나는 운전을 못하게 되는 것이라며 앞을 볼 수 있는 눈과 브레이크를 밟을 발과 핸들을 잡을손이 소중하다고 말한다.

  헌데 얼마나 웃기는 말인가? 온전한 정신을 지니지 못한다면 육신이 건강한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 요즘들어 나이와 함께 잦아지는 건망증에 가끔 치매가 찾아오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이 살짝 나를 두렵게 하고 있다. 가을은 나의 두려움을 구름 속에 실어 떠나고 있다. 치매는 두려운 질병이 아닌 마지막 여행이라 속삭인다. 이 세상의 모든 인연들의 얽힌 그물 속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떠나는  여행이란다. 지나온 삶의 굴레를 벗고 훨훨 혼자만의 세계속에서 마음껏 춤을 출 수 있는 엄마 품같은 평안함을 주는 질병 아닌 질병이라는 깨달음을 선물로 준다.

  치매는 노년에 살그머니 찾아와 건강한 사람을 병들게 한다. 사회적인 신분도, 부유함도, 가난함도 가리지 않아 누구도 비껴갈 수 없다. 치매도 여러 모습으로 온다. 어린아이처럼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오는 순한 치매, 불같이 화를 내어 간호하는 이를 힘들게 하는 나쁜 치매도 있다. 곁에서 지켜보는 이들에게는 어떤 모습이든 안타까운 아픔이다. 얼마나 힘들면 10년을 간호하던 남편이 아내를 자신의 손으로 먼저 보내고 따라 갔을까. 자녀들에게 짐이 되기 싫어 선택했겠지만 너무 가슴 아픈 소식이다.

 어쩌면 치매는 삶의 끝자락에서 추억의 앨범 한 장 한 장을 넘기며 과거로 돌아가는 여행이 아닐까? 평생의 한이나 엉킨 마음들을 한 올씩 풀어나가며 상처를 덮어주어 빈 마음으로 돌아갈 수 있는 혼자만의 여행. 그래서일까? 치매 환자는 구비 구비 살아오며 힘들었던 일들은 깨끗이 씻기어 버린 듯 어린아이 마냥 맑은 미소를 띄며 지내고 있다.

   엄마의 마지막 거처인 양노원에 들어서면 현관문을 붙들고 애원을 하는 할머니가 있다. 자신의 이름도, 아픈 육신조차도 기억하지 못한다.  항상 나 좀 나가게 문을 열어 달란다. 일년에 한 번도 찾아오지 않는 아들을 기억하지 못하고 집에 가서 아들 밥해주어야 한다며. 젊은 시절 교장선생님이었다는데.. 보는 이를 아프게 한다. 어쩌면 그 할머니의 치매는 떠나버린 아들이 주는 큰 아픔을 덮어주며 그녀를 감싸주고 있는것 같다.

  자녀들이 많은 울 엄마는 모든 이들의 부러움을 샀지만 치매는 비켜갈 수 없었다. 가끔씩 어디론가 여행을 떠나는지 소설을 쓰곤 했다. 어느 날엔 심각한 얼굴로 “봉희가 온다 했는데 어제는 안 와서 밥을 못 먹었어 넌 아니?“ ” 어제도 왔었는데... 조금만 기다리면 올 거야. 밥 먹으며 기다리자. 엄마.“하면 금 새 웃으며 맛있게 먹었다. 잠시 후 나갔다 들어와 “엄마, 나 왔어.” 하면 “넌 엄마 놀리니? 조금 아까 밥 먹여주었잖아. 나 치매 안 걸렸다.” 맑은 눈을 살짝 흘기는 엄마. “어? 엄마가 아니고 내가 치매 걸렸나봐 어쩌지?” 하고 능청을 떨면 안 된다며 엄마는 두 손으로 내 얼굴을 쓰다듬고 우리는 함께 웃곤 했다.

  몇 십 년을 함께 한 우리 부부에게도 살짝 놀러왔다 가는 것일까? 언제부터인지 서로 대화가 어긋날 때가 종종 있다. 나는 정기 검진을 하며 치매 검사는 어떻게 하느냐 물었다. 의사는 아직은 필요 없다며 우리를 보더니 남편에게 물었다. 곁에 함께 있으니 제일 잘 알 텐데 그런 느낌을 받느냐고. 헌데 남편이 정색을 하고 나를 보며 하는 말이 본인이 들으면 실망 하겠지만 사실은 요즈음 심한 것 같단다. 허나 나는 안다. 결코 내가 아니란 것을. 어제도 남편의 엉뚱한 소리에 집에 CCTV를 달아야 하는 거 아니냐며 웃었는데... 어느 때는 정말 궁금한 것이 있다. 누구 말이 맞는 것 일까?

  요즈음 나는 늙어가며 느낄 수 있는 신체의 변화를 거울을 통해 매일 마주하며 살고 있다. 붙잡고 싶은데 조금씩 나를 외면하고 떠나는 근육들. 운동을 해야 되는 것을 잘 아는 나. 헌데 오늘은 피곤해, 오늘하루 안 한다고...괜찮아. 하며 핑계를 합리화하는 것도 모자라 “평생 힘들었는데 쉬고 싶을 때 쉬어도 돼”라며 매일 쉬고 있다. 어둠이 내려앉으면 하루를 잃어버린 듯 허전해 하면서도 되풀이하고 있다.

  하루하루 지나며 맞이하는 다른 변화처럼 언젠가는 나에게도 치매가 벗하자며 찾아오는 날이 있으리라. 그때가 오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하나? 죽음을 비켜갈 수 없듯이 찾아오는 치매 또한 어느 누가 피할 수 있을까? 그래도 피할 수만 있다면 그 마지막 여행은 건너뛰고 싶다. 허나 한 세상 살면서 어느 무엇 하나 내 뜻대로 할 수 없었음을 잘 알기에 그 또한 두려워하지 않으리라.

  삶의 무게에 눌려 힘들 때도 있었고, 행복에 겨워 춤추던 때도 있었다. 이 세상을 떠나기 전, 치매로 이제까지 입었던 옷들을 모두 벗어 버리고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며 돌아갈 수 있다면. 지난 날 이루지 못한 아쉬움도, 나누지 못한 마음들도 허공에 날리고 저 하늘, 저 먼 곳으로 떠날 수 있으리라.

  그때에는 삶을 사랑하며 살아온 예쁜 나를 가슴으로 안아주며 마지막 벗이 될 치매를 말없이 고이 맞으리라. 내 삶의 마지막 여행이기에. 이 가을이 내게 주고 가는 선물은 나에게 치매의 두려움에서 벗어나 주어진 오늘을 감사함으로 채우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