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 시절
요즘은 워낙 채널이 많은 시대이다. 나 어릴 때만 해도 공중파 방송, 그러니까 KBS, MBC가 전부였고 이후에 SBS가 합류했다. 이쯤 얘기하고 보면 본의 아니게 나이를 드러내는 꼴이 된다. 어쩔 수 없는 ‘옛날 사람’이다. 그래서 다양한 것들을 볼 수 있는 시대이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딱히 볼 것을 선택하지 못하는 소위 ‘선택장애’가 발생하는 시대이기도 하다.
어쨌거나 채널이 많은 덕에, 오로지 기억에만 존재하는, 다시는 보지 못할 방송 프로그램들을, 한참 지난 지금에서도 볼 수가 있다. 그래서 나는 최근에, 따지고 보니 대략 십 년쯤은 된, 드라마 <빛과 그림자>를 다시 보고 있다. 당시에 인기가 상당했었고 부모님과 함께 방송일을 기다리며 꼬박꼬박 챙겨봤던 기억이 있다. 그해 연말 시상식에서 주연배우가 당연히 대상을 타리란 대중의 기대를 뒤엎고 예상치 못한 다른 배우가 상을 탄 것에 의문을 가졌던 기억 또한 함께 존재한다. 상을 받지 못한 배우도, 상을 받은 배우도, 몹시 당황스러워하던 표정이 기억난다. 다시금 이 드라마를 보면서 당시 대상의 수상자가 예상과 달라진 그 연유가 정치적인 무언가가 작용한 까닭이 아니었을까, 라는 확인할 길 없는 상념이 스치기도 한다. 그리고 그 상념은 최근 흥행을 거둔 영화, <서울의 봄>으로 이어진다. 이러한 생각의 흐름이 언뜻 이해가 안 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 드라마’와 ‘그 영화’의 배경은 실상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드라마 속 ‘강기태’가 살던 시대가 ‘서울의 봄’을 꿈꾸던 그 시대이기 때문이다. 드라마는 긴 이야기를 한다. 강기태의 철없는 시절부터 철이 단단히 든 시절까지, 거의 이십 년에 가까운 시간을 그리고 있다. 실상 그 시간은 박정희씨를 거쳐 전두환씨가 정권을 잡았던 시간이기도 하다. 그 시간 안에는 영화가 구현했던 쿠데타도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이 드라마는 한 인물의 인생 역정 혹은 성공기를 담은 드라마이기 때문에 정치적 상황이 구체적으로 연출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대사를 통해 놓치지 않고 당시의 상황을 전달해주고 있다. 당시 드라마를 볼 때는 그런 점을 크게 인지하고 보지는 않았던 것 같다. 이제 와 다시 보니 그 시대를 살아낸 ‘강기태’가 얼마나 험난한 시간을 견디며 살았던 것인지 새삼스레 달리 보인다.
건달과 폭력배가 활개를 치고 독재정권은 부패하여 서슴지 않고 공포를 조장하고 권력과 결탁한 검은 돈이 검은 곳으로 무수히 흘러들어가며 세상을 하염없이 검게 만들던 시절이었다. 그 와중에도 사람들은 혁명을 꿈꾸었고 꿈을 꾼 대가가 너무나 가혹했건만 그럼에도 또 다시 꿈을 꾸며 세상을 바꾸려 했던, 그래서 감히 ‘서울의 봄’을 기다렸던, 처절한 시도와 도전들이 있었던 시절. 그리고 그러한 시간을 이 악물고 견뎌낸 숱한 ‘강기태’들이 살았던 시절. 그 야만의 시간이 드라마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모르고 보면 보이지 않던 것들이 알고 보면 보인다더니, 드라마도 다르지 않다. 그때도 아주 모르고 보지는 않았지만 지금에서 다시 보니, 또 다른 것들이 보인다. 시간이 이만큼 흘렀으니 그만큼 더 알게 된 것이 많아진 탓일 터이다.
또 다른 방송을 봤다. 지나간 시절의 노래를 소개하고 들려주는 음악 프로그램이었다. 소개하던 노래 중에 2002년 월드컵 때 엄청나게 불러댔던 응원가도 있었다. 화면에 나오는 장면들은 눈에 익은 것들이었다. 당시 나도 광장에 나가 두어 번쯤 응원을 하기도 했다. 그때는 정말 다들 미친 것 같았다. 참으로 다시 봐도 짜릿하고 신나는 경험이다. 내가 그 시간을 직접 겪은 세대인 것이 다시 생각해도 뿌듯하고 기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들려준 음악이 ’88올림픽 주제가 ‘손에 손 잡고’였다. 지금 들어도 노래가 참 좋다. 그때는 어려서 잘 몰랐는데, 그 노래를 불렀던 그룹 ‘코리아나’가 노래를 참 잘하는 가수라는 것을 새삼 느꼈다. 그런데 그때가 1988년이라는 사실이 문득 새롭게 다가왔다. 그러고 보니 <빛과 그림자>에서도 올림픽을 다루는 내용이 나왔다. 드라마에서 보여주었듯, 생각해보면 그 시기는 참으로 엄혹한 시절이었다. 1987년에 민주화운동이 전국적으로 일어났고, 그래서 마침내 전두환씨가 대통령직에서 물러나고 직선제를 도입했던 엄청난 변화를 겪던 시기였음에도, 올림픽을 준비하여 나름 성공적으로 대회를 마무리했던 걸 보면 참으로 놀랍고 신기할 따름이다. 독재정권과 후진적인 시스템 속에서, 또한 엄청난 격변 속에서, 어떻게 그 세계적인 행사를 꽤나 그럴듯하게 치러낼 수 있었는지,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기적적이라는 생각이 들 뿐이다. 정말 ‘저력’이라는 것이 있는 건가, 모를 일이다.
옛날 드라마와 옛날 노래를 들으며,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아무것도 몰랐던 그때를 떠올려보는, 회상의 시간을 가졌다. 올림픽이 열렸던 그때, 그저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올림픽이라는 세계대회를 개최한다는 사실에 감격해 무척이나 자랑스럽게 중계를 지켜봤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그 행사 이면의 모습을 떠올리자니 참으로 무시무시한 역사의 강이 흘러가고 있었음에 절로 숙연해진다. 돌이켜 생각하면서 한편으론 내게 많은 시간이 흘렀다는 것이 씁쓸하고, 한편으론 그나마 그때보다 나은 시절인 것 같아 다행스럽다. 하긴, 요즘들어 꼭 그렇지도 않은 것 같아 속상하기도 하지만. 여하튼 이제 드라마도 끝이 나고 노래도 끝이 났으니 그만 현실로, 현재로, 지금의 나로 돌아와야할 모양이다. 지나간 시간들을 더듬는 사이 어느새 시간이 이만큼이나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