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회 수상자 : 김서현
수상 일시 :2023년 12월 01일 오전 11시
수상 작품 : 말[⾔] 값
말[⾔] 값
며칠 전, 친구의 전화를 받았다. 우리 집 근처로 이사를 했다고, 조만간 얼굴을 보자며 45분 2초로 통화는 짧게 끝났다. 보통은 1시간 반을 훌쩍 넘는 통화에 차마 내가 먼저 끊자고 할 수 없어 난감할 때가 종종 있었다. 이제 61세인 내 나이에 78세가 2명 74세 1명, 76세 1명 이렇게 4명이 지난날 각기 다른 인연으로 친구가 되었다. 나는 그들을 친구님이라 부른다.
친구란, 나이 국적 성별이 없다고 말을 하지만 사실 흔치 않은 조합이다. 몇 년 전, 집 앞 공원에서 문화제 행사가 있었다. 그날 저들 중 가까이 사는 친구님을 초대하여 일행과 기다렸다. 얼마의 시간이 지나자 저 멀리 친구님이 보였다. 빨강 원피스에 하얀 볼레로를 입고 챙이 넓은 모자를 쓴 70대 중반의 소녀가 강아지와 함께 봄 나비처럼 걸어오고 있었다. 내가 친구님을 향해 손을 흔들자 그들은 갑자기 커다란 눈으로 저분이 친구냐며 되물었다.
4명의 친구와 나는 수종이 다른 공원의 나무처럼 각자의 특징이 있다. 서로 스승이 되어 삶의 경험을 배우며 때론 빛과 그늘을 나누기도 한다. 처음 한동안은 그저 평화롭기만 할 것 같던 우리의 관계는 대화를 나누다 보면 엉켜버리곤 했다. 한동안 나는 친구님들의 이야기를 듣는 게 아니라 고대 이집트 상형문자를 보고 있는 것처럼 낯설었다. 서로의 대화에 편하게 흡수되는 게 아니라, 돌에 그려진 그림으로 상대의 언어를 이해해야 할 것 같은 묘한 느낌이었다.
이런 만남이 서서히 숨이 막혔다. 마치 내가 소나무 군락지에 들어와 있는 것처럼 자기 생각의 그늘 영역만큼 다른 식물이 뿌리내리는 걸 허락하지 않는 경직된 불통에 질식할 것 같았다. 턱없는 나이 차 탓에 속 시원히 하지 못한 말을 삼키며 나는 슬슬 친구님들과의 만남을 이 핑계 저 핑계로 피했다. 사실 나도 자라는 소나무인 것을 망각하고 말이다.
이젠 그랬던 친구님들을 이해한다. 오랜 시간 혼자 생활하다 보니 대화의 상대가 없었던 탓이다. 좋은 일 슬픈 일이 있어도 들어줄 귀가 없고, 왜 그러냐고 묻는 입도 없다. 그러면서 유일하게 소리를 내며 상대의 의중과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종일 떠들어대는 TV를 닮아 가는 것이었다. 그러니 친구님들 가슴에 쌓아 두었던 익지 않은 언어의 형상들이 온몸의 기운을 빨아올리며 목전에서 입이 열리기만 기다렸을 게다. 나이 들어가며 이해되니 세상사 경험만큼 큰 스승은 없다.
친구님들과 산책을 하고 음식점에 가서 내가 먼저 계산하려 하면 하나같이 “나이를 먹으면 입은 닫고 지갑은 열어야 해.” 하면서 말린다. 그런데 친구님들은 절대로 입을 닫지 않는다. 그래서 나도 지갑을 열고 같이 떠든다. 말값을 내는 것이다.
사회적 거리두기의 억울한 시간을 건너서 만난 친구님은 무엇이 그리 급한지 그새 얼굴에 시간의 흔적이 묻어있다. 나뭇가지는 바람이 없는 하늘에 죽은 듯 드리우고 있다. 그 가지 중간에 앉은 새가 기우는 마지막 볕 바라기를 하는 오월의 늦은 오후가 몇 년 전, 친구님이 빨강 원피스를 입고 공원을 환하게 하던 그때 그 무렵이다. 챙이 좁아진 모자를 쓰고 막걸리 두어 잔에 복숭앗빛으로 물든 친구님의 얼굴이 참 곱다. 술 탓인지 나비 같았던 그 모습이 막걸리가 담긴 노란 양은 대접에서 맑게 고여간다. 공원의 그늘은 서서히 짙어지고 우리의 대화는 새가 되고 구름이 되어 흐르고 싶은 대로 흐른다.
서로를 바라보는 시선이 낮추고 더 많이 들으려 하니 세대의 벽 틈새가 넓어졌다. 그 틈새에서 지식으로 배울 수 없는 지혜와 삶을 녹여낸 인내며, 무성한 잎을 떨쳐낸 빈 가지가 주는 순수한 여유를 나는 오늘도 배운다.
지금 우리는 고령화 시대에 살고 있다. 특히 친구님들과 나의 세대가 부양에서 독립 사이의 말 그대로 낀 세대다. 예전엔 드물었던 혼자 남은 일인가구가 이제는 주변에서 흔하게 볼 수밖에 없고 나도 그들 중 한 사람인 것이다. 아무리 극진한 부부애로, 가족으로 살았다, 해도 결국 누군가는 홀로 남게 되어 있다. 그렇게 남은 자의 몫은 외로움인데 그 외로움이 남자와 여자란 이성 때문만이 아닌, 말하고 들어주는 입과 귀가 없어 외롭고 슬픈 것이다. 때론 싸움조차 그리운 게 혼자 남은 사람의 몫이다.
익숙하면서도 무심히 지나는 날들은 우리에게 외로움을 덧입히고 냉정하게 생의 겨울을 아련하게 들어낸다. 모든 사물엔 심연이 있다. 그 끝엔 생명의 무상에서 오는 죽음의 두려움이 있고, 그 두려움보다 더 몸서리치게 하는 게 노년의 외로움일 게다.
김서현 miwha0819@hanmail.het
『한국수필』 등단(2014).
『시조생활』 신인문학상(2023). 한국문인협회, 지송문학회, 군포문학회 회원. 첫 수필집 『비어있는 의자』.
수상 소감
‘상 값’을 해야한다는 무게
평온한 오후 전철을 타고 가다 습관처럼 열어본 손전화에 ‘올해의 작가상’ 수상 통보를 받았습니다. 언감생심 엿보지도 않았던 소식에 꿈을 꾸나 싶었습니다. 기쁨도 잠시 냉정하도록 차분해지는 감정은 이젠 글 하나를 써도 ‘상 값’을 해야 한다는 무게가 밀려왔기 때문일 것입니다.
가을은 자연만 아니라 사람도 물들입니다. 이리저리 바쁘던 삶의 걸음을 사유의 바닥에 놓이게 하고 봄꽃과 가을꽃에 머무는 시선의 색이 다르고, 기쁨에도 조심성이 따르니 말입니다.
저의 한 생을 돌아온 육십갑자인 올해 저는 저 자신에게 큰 선물을 하고, 또 이렇게 큰 상까지 받게 해 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께 고개 숙여 감사의 말씀 전합니다. 토시 하나에도 머뭇거리며 따뜻한 글쓰기에 혼신을 다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