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지(禪旨)의 대요’라고 하는 『신심명(信心銘)』은 중국선종의 제3조 경지승찬(鏡智僧璨, ?∼606) 스님의 찬술이다. 선불교(禪佛敎)가 아직 완전한 형태를 갖추지 못한 시대에서 심원한 선(禪)의 정신을 문학적으로 표현한 146구의 운문(韻文)으로 구성된 선철학의 시이다. 선의 근본적인 입장을 간명직절하게 설해 놓고 있으므로 교리마저 음미하게 될 뿐만이 아니라 종교적 정조에 잠기면서 선미(禪味)에 젖게 한다.
이 『신심명』의 요의는 ‘신심(信心)’ 두 자에 있다. ‘신심’의 심은 불심(佛心), 본래심(本來心)이며, 신은 결코 의심(疑心)이 없는 신이다. 심을 대상적(對像的)으로 ‘믿는다’는 의미가 아니다. 내 스스로가 살아가는 범부(凡夫)의 심이 그대로 불심임을 절대 의심함이 없이 이 몸이 바로 부처라고 확신하는 ‘신심’이다. 선불교는 달마(達磨)와 혜가(慧可)의 ‘안심문답’ 이래 심을 문제로 하고 불성(佛性 = 本心, 佛心)을 철견하고 불타(佛陀)가 되는 것을 설한다. ‘직지인심 견성성불(直指人心 見性成佛)’은 이를 말한다. 그러한 선불교의 ‘신심’을 격조 높게 노래한 것이 바로 『신심명』이다.
『신심명』은 석가모니의 일대설법을 비롯하여, 조사에 의해 검토된 선문답(禪問答) 1700공안(公案) 모두 이 『신심명』에 융화되어져 있다. 실로 일대불교의 요약(要略)이며 대승선(大乘禪), 조사선(祖師禪)의 원천이며 귀결이기도 하다. 불교의 선의 근본정신이며 최고의 이상인 중심점(中心點)을 ‘신심’ 두 자로 요약하고 이 두 자가 보인 도리를 자신의 생활로 삼았을 때, 비로소 궁극(窮極)의 이상경[至道]에 도달한다고 하는 것을 현창하고 있다.
스님의 혈육의 서(書)인 『신심명』에는 『이입사행론』에서 설한 것보다 한층 명확한 단적인 선사상이 약동하고 있는 것이다. 스님은 북주폐불에서 수의 흥불에 걸친 파란만장한 인생을 산 것이다. 그 가운데서 스님은 달마의 행실과 사상을 혜가 스님으로부터 얻었다.
스님은 산중에서는 선풍을 지켰지만 사상에 있어서는 ‘하나를 고수하지 않았다.’ 사상과 현실과의 괴리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북주에서 수대를 살았던 선사의 이러한 고뇌가 불교의 사상과 어울러져 『신심명』을 낳은 것이리라. 선사상은 달마의 이입사행에 의해 명확히 제시 받았지만 거기에 실천력은 없었다. 달마에게는 사상은 필요없었다. 벽관만이 있을 뿐이다. 이것에 비해 스님의 사상은 도도하다. 이 한편에 스님의 ‘신심’적 사상이 꽉 차있다. 방관(房琯)의 비문에 의하면 스님은 ‘뢰락불기(磊落不羈, 뜻이 커서 작은 일에 구애하지 않는 것)하고 유마거사 같은 분’이라고 한다. 이러한 스님의 기품이 그대로 『신심명』에 현현하는 것이다. 일체의 종아(宗我), 아견을 버리고 허심(虛心)으로서 『신심명』을 읽을 때, 불심은 ‘신심’으로서 화현한다. 일체를 버린 그곳에 ‘신심’이 있고 이것이 『신심명』의 선사상이다. 『신심명』의 이해없이는 『벽암록』, 『종용록』을 말할 수 있을까? 선의 대요가 『신심명』에 있기 때문이다. 선의 요의를 설파한 『신심명』은 성당(盛唐)시대 시성(詩星) 이백, 두보 그리고 왕유, 중당(中唐)시대 한산습득의 작품에 그 향기가 일고 있다.
선불교의 요의를 쓴 스님의 출가는 40세를 넘긴 나이였고 거사의 몸으로 혜가스님을 상견한 것이다. 이미 세상의 모든 것을 버린 몸이므로 잡다한 의식이 사라진 채, 병든 몸과 마음으로 스님을 만난 것이다. “저는 풍질에 걸려 있습니다. 과거의 죄업 때문으로 알고 있습니다. 스님! 저를 위해 죄를 참회하게 해 주십시오.” 혜가스님은 덤덤히 “죄를 가지고 오시오. 그대를 위해 참회하리다.”라고 말씀하셨다. 거사는 잠시 묵묵히 있다가, “죄를 찾아도 찾지 못하겠습니다.”라고 말한다. 2조는 말씀하신다. “나는 그대를 위해 참회했소.” 거사는 출가하고 2조를 시봉하기를 2년, 혜가스님의 법을 얻는다. 그 즈음 북주무제의 파불(574) 이후 은거의 세월이 연속된다. 어느 날 스님은 큰 재일에 한 손으로 나무줄기를 붙잡고 홀연히 시적했다. ‘지도무난(至道無難)’의 모습을 그대로 보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