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보지 않은 길, 가보고 싶은 여정
"오카리나와 함께 하는 오카라이프"
강길호/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
송긋송긋 맺힌 땀이 등줄기를 따라 주르륵 흘렀다. 교수직 임용의 마지막 관문인 최종 면접 못지않은, 아니 그때보다 더한 긴장감이 온몸을 휘감는다. 입술도 마르고 여기저기 몸이 뻣뻣해지는 건 어쩔 수 없나 보다. 이제 곧 시작할 연주를 앞두고 바싹 마른 입술을 혀로 한번 빠르게 훔친다. 독주도 아니고 합주인데도 오는 긴장감을 막을 수 없다. 임영웅이 부른 ‘별빛 같은 나의 사랑아’의 첫 연주를 마치고, ‘휴’할 틈도 없이 연이어 두 번째이자 마지막 연주곡인 박강수가 부른 ‘나는 행복해’라는 무척 감미로운 곡의 연주가 시작된다. 연주를 모두 마무리 짓자 안도감이 몰려오며 이제야 긴장감이 풀린다. 무식한 자는 용감하다고 했던가. 오카리나를 배운 지 3개월쯤 지나 첫 연주 무대에 섰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면, 무모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태어나 사람들 앞에서 해본 첫 무대 연주의 느낌이 아직도 생생히 살아있다.
은퇴 후 새로운 길로 이끈 건 엉뚱하게도 코로나 시국이다. 코로나로 무료한 나날을 보내던 중, 오카리나를 만났다. 평생학습의 시범도시였던 경산에서 오카리나 무료 강습을 한다는 경산시의 홍보를 보고, 고민고민 하다가 용기를 내어 수강 신청을 했다. 첫 수업에 들어가니 수강생들은 남자 두 사람을 제외하곤 모두 나이 지긋한 아주머니나 할머니들이었다. 젊은 대학생들과 늘 함께 수업을 해 온 터여서 강의실에 앉아 있는 것 자체가 무척 낯설고 서먹했다. 오카리나가 여성들이 선호하는 생활음악 악기라는 것을 모르고 있었기에 첫 수업이 무척 당혹스러웠던 기억이 있다. 수강생 중 두 사람만 청일점이었기에 다른 수강생들의 주목을 받는 것 같이 느껴졌다. 행동 하나 하나가 조심스러웠고 수업에도 성실히 임할 수밖에 없었다. 수업 전부터 열심히 해야 할 동기가 이미 존재했던 셈이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남자라서 주목받을 것이라는 생각은 잘못된 억측으로 수강생들끼리는 서로 아무런 관심이 없다는 걸 나중에 알게 되었다. 서로에 대한 무관심은 나이든 수강생들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오카리나는 이탈리아어에서 나온 말로 ‘작은 거위’라는 뜻이다. 생김새가 흡사 거위의 머리 모양을 닮아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작은 거위의 머리 모양인 오카리나에는 14개의 구멍이 뚫려 있다. 오카리나의 구멍을 손가락으로 막는 것을 운지라고 한다. 음악에 진입해 본 적 없는 나에겐 운지 같은 음악 용어는 대부분 낯설다. 오카리나의 14개 구멍 중 하나를 취구라고 하는데, 이 취구에 입술을 대고 바람을 불어 넣어 오카리나의 소리를 만든다. 그리고 피리처럼 오른손과 왼손의 손가락으로 나머지 구멍을 막거나 열면서 음의 높낮이인 음정을 조절하며 음률을 만든다. 오카리나의 이러한 특징 때문에 입으로 부는 바람의 세기와 양 그리고 손가락의 움직임이 절묘하게 맞아 떨어질 때 가장 아름다운 소리를 낸다. 오카리나의 음색은 맑고 청아하며 따뜻하고 다정다감한 색채를 띤다. 한마디로, 여성스러운 느낌이 물씬 풍기는 악기라고 할 수 있다. 오카리나는 입으로 부는 악기이니 관악기의 하나임은 물론이다.
오카리나는 매력이 넘치는 악기이다. 악기를 부는 사람마다 입술 모양이 다르고 입술로 바람을 부는 방식이 제각각이어서 취구에 바람을 넣은 양과 강도도 다 다르다. 이렇게 사람마다 다르니 같은 악기라도 소리의 음색이 연주하는 사람마다 다르다. 또한, 배운지 얼마 안 되는 초보자 시절에서 제법 연주 능력을 지니고 있는 중급자 시절로 진화함에 따라 음색의 변화도 실감하게 된다. 연주 이력이 길어질수록 대체로 음의 질감이 풍부해지면서 더욱 맑고 청아한 소리를 낼 수 있게 된다. 오카리나를 배우면서 스스로 자기 자신의 음색과 음의 질감이 좋은 방향으로 바뀌는 것을 알아 가는 재미도 쏠쏠하다.
오카리나는 MR(Music Recorded)이라는 일종의 이미 녹음된 반주에 맞춰 연주한다. 음악적 감각이 뛰어나거나 어린 시절부터 음악에 노출된 사람이라면 다르겠지만, 대체로 MR에 맞춰 연주하는 것은 아마추어들에게 쉽지 않은 일이다. 이제 중급자 수준을 흉내내는 나에겐 반주에 정확히 맞춰 오카리나를 연주하는 것은 여전히 숙제거리로 남아있다. 첫 수업 때 반주를 틀고 연주하는 것을 처음 경험하면서 심심할 때 홀로 소일거리로 연주하기 위해 배우려던 내 배움의 의도가 너무 낭만적인 생각임을 알고, 속으로 약간의 스트레스를 받았던 기억이 있다. 음악에는 중요한 세 요소가 있는데 음정, 박자 그리고 리듬이 그것이다. 연주곡 악보에 맞추어서 음정, 박자, 리듬이 정확할 때 오카리나가 반주와 조화를 이뤄 음악적 감성을 최고조로 끌어 올리는 악기로 작동한다. 음악의 세 요소를 실수없이 맞추면서 연주하는 것은 결코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부단한 노력만이 이를 실현할 수 있는 길임을 아직 배우고 있다. 비록 반주와 정확히 조화를 이루며 연주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지만, 세상일이 모두 양면성을 지니고 있듯이, 반주와 조화를 이루어 가는 스스로의 능력이 조금씩 발전되어가는 모습을 발견하는 것도 오카리나의 빠질 수 없는 매력이기도 하다. 반주에 잘 맞춰 연주를 자유롭게 하는 날이 내가 오카리나를 손에서 놓은 날이라는 심정으로 오늘도 오카리나를 만지고 있다.
오카리나의 가장 큰 묘미는 뭐라 해도 다양한 사람을 만날 수 있다는 점이다. 여성분들이 많이 배우는 악기라서 여성분들이, 특히 나이 드신 여성분들이 주류를 이룬다. 여성분들이 가정에 평생 헌신하다가 아이들을 다 키운 후, 소일 삼아 쉽게 시작하는 악기가 오카리나인 것 같다. 물론 직장 생활하는 여성분들도 적지 않지만, 가정주부가 상대적으로 많은 편이다.
배우러 온 이들의 사연도 가지가지이다. 나이가 들면서 여유 시간이 많아져 배우러 온 순박한 뮤즈도 있고, 손가락 운동이 치매 예방에 도움이 된다는 믿음을 갖고 배우러 온 건강에 관심이 넘치는 뮤즈(여성 수강생)도 있고, 하루라도 젊었을 때 악기를 배우는 것이 노년 생활을 윤택하게 보내는 길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바쁜 시간을 쪼개 쓰는 뮤즈도 있다. 보수적인 남편을 두어서 삼시세끼를 차려주고 가정일을 다한 후, 시간의 일초를 아껴써야 하는 안스러운 뮤즈도 있고, 여유가 넘쳐 오카리나뿐만 아니라 에어로폰, 하모니카, 장구 등 여러 악기를 배우며 종일토록 음악에 빠져 사는 뮤즈도 있다.
가정주부라서 그런지 이들은 연습 모임 시간 때에 꼭 간식을 가지고 온다. 과일이며 커피와 차 그리고 주전버리까지 다양한 간식을 많이도 가지고 온다. 다른 회원분들의 눈치 보며 체면치레 때문인 것 같긴 하지만, 그 심정은 정확히 아직 잘 모르겠다. 그 덕분에, 우스개 소리로 “오카리나 실력은 안 늘고 뱃살만 는다”고 말하곤 하면서 자주 농담한다. 남자든 여자든 오카리나를 배우는 사람은 음악을 사랑하는 사람들이어서 그런지, 모두 순박하고 사심없이 사람을 대하며 늘 웃음이 넘친다. 이들 모두가 만나면 언제나 반가운 친구이다.
오카리나를 배우며 그리고 연주 다니면서 교수 생활을 할 때 느끼지 못한 세상의 많은 것들을 느끼고 깨닫고 있다. 주간보호센터나 요양원 등에 가서 봉사 연주를 할 때엔 힘겹게 박수치며 우리의 연주를 듣는 아프신 분들을 보면서 이분들이 미래의 나일수 있다는 연민으로 눈물을 흘리기도 하고, 거리의 버스킹 연주를 할 땐 흥에 겨워 손뼉 치고 어깨춤을 추는 관객을 보며 함께 즐거움에 흠뻑 빠지기도 한다. 여러사람들이 함께 합주를 할 땐 연주자들 하나하나를 마음으로 껴안으면서 이들을 포용할 때 가장 아름다운 화음을 이룬다는 걸 깨달으며 삶의 이치를 배우기도 한다. 오카리나는 단순한 악기가 아니라 희노애락의 숨결이 깃들어 있는 인생이다. 오늘도 오카리나를 만지작 거리며 하루를 시작한다. 그리고 인생을 배운다.
앞으로 팬플룻에 도전해 보려 한다. 팬플룻을 배우며 그 속에 담겨 있는 세상을 알아 가려고 한다. 다가올 팬라이프를 기대하면서... 우리 모두 악기 하나씩 배워 봅시다. 멋진 인생 2막을 위해.
첫댓글 옥고 감사드립니다. 교수님의 글은 읽는 사람이 율동을 느낄만큼 튀는 운율이 있네요. 정년하시고 나서 가장 유쾌하게 사시는 분 가운데
한분으로 보여서 그 생활을 듣고 싶었는데, 솔직히 나누어 주셔서 고맙습니다. 가끔 facebook에 연주 장면들이 올라올 때마다 부러워했는데, 모두 악기 하나씩 하자고 초대하시네요. 팬플릇의 활약도 전해듣는 날을 기대합니다. 요즘 이곳저곳에서 연주하시느라 경황이 없으신 것 같은데...... 원고 서둘러주신 마음에도 감사드립니다. 부담 벗어나서 훨훨 날으는 날이시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