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의 여의주라 불렸던 태봉산은 1967년 경양방죽 매립 시 사라진다. 태봉산이 1967년까지만 존재한 이유다. 태봉산은 깎아 없앨 만큼 조그마한 산이었다. 높이 52.9미터, 넓이 3,000평 쯤 되는 산이라기보다는 나지막한 언덕에 가까웠다. 무등산을 뒤 배경으로 찍은 옛 사진을 보면 마치 고구려의 수도 집안의 장군총(장수왕릉)처럼 둥글납작하게 보인다.
태봉산이 광주시민들의 사랑을 받았던 것은 용이 물고 승천하는 여의주의 형상을 닮았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무등산을 품고 있는 광주의 지형은 풍수적으로 학과 용의 형국으로 설명된다. 증심사에서 제1수원지 뒤의 바람재와 조선대학교 대학병원 뒤를 거쳐 전남대학교 병원까지 뻗은 산줄기를 학의 형국 즉 학강으로 부른다. 또 하나는 원효사의 화암봉과 지산동 뒤 꾀재를 돌아 장원봉, 중군봉으로 뻗은 줄기다. 이 지형은 뱀 두 마리가 오랜 세월을 거쳐 이무기가 되고 다시 용이 되어 여의주를 입에 물고 하늘로 오른다는 화룡승천의 형국이다. 이 뱀이 오랜 기간을 지나 이무기가 되고 용이 되려면 물이 있어야 하고 또 여의주를 물고 하늘을 올라야 하는데, 그 물이 경양방죽이고 여의주가 태봉산이라는 것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도 지역민들은 경양방죽을 메우기 위해 태봉산을 헐 때 완강히 반대한다.
아이의 태를 묻은 산이라는 뜻을 지닌 태봉산은 꽤 오래전부터 알려져 왔다. 18세기 후반 제작된 지승지도에 실린 광주목 지도에도 태봉산이 주변의 산보다 자못 웅장하게 그려져 있다. 그 태봉산에 묻힌 태의 주인공이 누구인지는 정말 우연히 밝혀진다.
1928년 여름, 광주는 큰 가뭄이 든다. 극심한 가뭄에 시달리던 마을 주민들은 가뭄의 원인이 태봉산에 누군가 몰래 무덤을 써 생긴 일로 생각한다. 몰래 쓴 무덤을 파헤치면 비가 온다는 속설에 따라 열이 난 동네 아낙들이 호미를 들고 무덤을 파헤친다. 그런데 아뿔사! 그 무덤 속에서 높이 62센티미터, 너비 130센티미터의 거대한 태실이 나온 것이다. 그 안에는 태를 담은 백자 항아리와 지석, 그리고 금박 한 장도 들어 있었다. 지금 태실은 광주시립민속박물관 앞에, 유물은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주인공의 정보를 담고 있는 지석에는 ‘황명천계4년9월초삼일진시 탄생왕남대군아지씨태 천계5년3월25일장(皇明天啓四年九月初三日辰時 誕生王男大君阿只氏胎 天啓五年三月二十五日藏)’이라는 글이 새겨져 있었다. 명나라 연호인 천계 4년은 인조가 즉위한 지 2년째 되는 1624년으로, 이괄의 난이 일어난 해다. 지석에 적힌 글을 해석하면, “1624년 9월 3일에 태어난 왕남대군 아지의 태를 이듬해인 1625년 3월 25일에 묻었다.”는 내용이다. 어떻든 열혈아줌마들 덕에 태가 묻힌 지 300여 년 만에 태의 주인공이 드러난 셈이다.
궁중말로 아기씨 대군 정도로 읽히는 1624년 9월생의 대군아지는 누구일까? 알려진 바에 의하면 인조에게는 4명의 아들이 있었다. 첫째가 소현세자, 둘째가 효종 임금이 된 봉림대군이고 셋째가 인평대군, 그리고 넷째가 용성대군이다. 태는 1622년에 태어난 셋째인 인평대군의 것은 아니다. 따라서 아기씨 대군은 인평의 동생으로 결혼 전에 죽은 용성대군일 가능성이 크다. 비운의 왕자 용성대군, 그는 왜 한양에서 머나 먼 광주 태봉산에 그 태를 묻어야만 했을까?
아지 왕자의 태가 태어난 이듬해 봄인 1625년 3월 25일, 공주 계룡산에서 광주 태봉산에 옮겨 묻히게 된 데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진다.
“이괄의 난이 일어나 공주로 피난 중에 인조는 왕자를 얻는다. 그러나 왕자의 잔병이 심해 중전의 수심이 가득했다. 이에 불심 깊은 중전인 인열왕후는 왕자를 안고 100일 기도를 드린다. 며칠이 지난 어느 날 백발의 노승이 나타나 ‘음탕하고 사악한 땅 기운이 계룡산에 묻힌 왕자의 태를 괴롭히니 이대로 두면 돌을 넘기지 못할 것’이라며, ‘왕자의 태를 광주 고을 북쪽의 여의주 모양을 한 둥글고 작은 산에 손바닥 만한 금 조각을 태와 함께 안장하라’고 일러주고 사라진다. 인열왕후는 하늘이 왕자를 살리기 위해 보낸 노승이라 여기고 즉시 노승의 말대로 거행할 것을 명한다.”
전설은 1928년의 우연한 발굴로 전설이 아닌 사실로 확인된다. 손바닥 만 한 금 조각을 태와 함께 안장하라는 노승의 말처럼, 실제 태실 안에는 놀랍게도 길이 12.3센티미터, 넓이 4센티미터 크기의 금 조각인 금박이 들어 있었다.
대군 아지가 태어난 1624년은 공신 책봉에 불만을 품고 이괄이 난을 일으킨 해다. 인조가 공주로 피난가다 얻은 대군 아지의 태를 경황 중에 계룡산에 묻었다가, 난이 진압되자 명당을 물색한 후 태봉산에 안장한 것으로 보인다.
이괄이 태봉산 말고 광주에 남긴 것이 또 있다. 이괄의 반란군을 소탕하고 인조를 구한 이가 바로 광주 출신 정충신이다. 이 일로 정충신은 진무공신 1등에 책정되고 금남군이라는 군호를 받는다. 정충신에게 내려진 금남은 광주 제일의 번화가인 아시아문화전당 앞의 중심 도로명이 되어 광주사람들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있다. 역사는 얽히고설킨 실타래처럼 재미있다.
태봉산, 유래비로 남다
52.5미터에 불과한 신안동의 조그마한 야산이 왕실의 태 자리로 선택되어진 이유는 여전히 궁금하다. 그런데 헌종개수실록의 “들 가운데 둥근 봉우리를 골라 그 꼭대기에 태실을 만드는 것이 우리나라의 풍습”이라고 했다는 기록은 그 궁금증을 조금이나마 해소시켜 준다. 또한 태종실록에도 “태봉은 산과 맥이 이어지지 않은 곳을 잡아야 한다.”고 했다. 산과 맥이 이어지지 않은, 들 가운데 우뚝 솟은 둥근 봉우리인 신안동의 태봉산이 딱 그런 위치다. 이는 죽은 이를 위한 명당과 산사람의 태를 묻는 길지인 명당은 그 위치나 생김새가 다름을 말해준다.
태봉산을 헐어 경양방죽을 메웠던 1960년대의 행위는 도시의 미래도, 시민들의 정서도 고려하지 않은 개발 독재의 만행이다. 그렇게 사라져버린 태봉산은 이제 없다. 그러나 흔적마저 도려낼 수 는 없다. 북구 신안동에는 태봉이라는 이름을 가진 태봉 초등학교와 태봉 파출소가 있다. 이름 태봉은 그 언저리에 있었을 태봉산과의 관련 때문에 붙은 이름이다. 그러나 초등학교와 파출소에 붙은 태봉이라는 이름은 태봉산의 정확한 위치를 잡아내는 데는 큰 도움은 되지 못한다. 다행스럽게도 산의 한 가운데 지점에 태봉산유래비(광주역에서 전남대 사거리 사이)가 서 있어 주위 3,000여 평 규모의 여의주의 형상을 닮은 태봉산을 그려 볼 뿐이다.
태봉산이 나이 많은 어르신들의 기억 속에 머물 날도 얼마 남지 않은 것 같다. 나이 든 어른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지는 순간, 태봉산은 빛바랜 몇 장의 사진으로 남아 전해지다 전설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