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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잘못되거나 왜곡된 기존의 이해에 대한 바로잡음의 샘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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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두었도다!
주제 : 예수님으로부터 시작되는 하나님 나라의 특징
성경 : 요 2:1-11
예배 :
장소 :
시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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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문의 구조 및 특성 : 이 부분의 내용은 본문의 특성이나 문맥상의 위치 또는 전체적인 배경 등의 전이해를 위한 것입니다. 참고 이해 정도로 보시되, 필요시 설교 본문 중에 설명 자료로 쓸 수도 있습니다. - 요한복음 2장의 ‘가나의 혼인 잔치’ 기록은 의외로 본디 본문이 전하고자 하는 가르침의 초점이 많이 왜곡되어서 선포되는 경우 중 하나이다. - 이 본문은 마리아의 믿음이나 하인들의 순종에 대한 가르침을 전하려고 기록된 말씀이 아니다. 이는 전적으로 예수님으로부터 시작되는 하나님의 나라에 관한 특성을 전하려는 것이다. - 각 복음서에 있어서 예수님의 공생애의 시작, 즉 대중에게 공개적으로 등장하는 장면에 대해서 정밀한 의도와 계획으로 기록하는 것처럼(마 5-7장, 막 1장, 눅 4:15이하 등), 요한복음에 있어서도 바로 본문인 2장이 그러한 성격을 지닌다. 따라서 이 본문은 다른 복음서들처럼 예수님의 공개적인 등장에 관하여 그 정체성, 곧 예수님의 메시야됨과 그러한 분이 가지고 오시는 것이 무엇인지에 관한 설명에 초점을 맞추어진 정교한 장치에 의한 기록이다. 그것을 잘 찾아서 이해하는 것이 말씀의 본질을 따르는 것이다. - 요한복음에는 다른 공관복음서에 없는 기적 사건이 두 개가 기록되어 있는데, 하나는 바로 본문의 사건이고, 다른 하나는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기적(11장)이다. 이 두 가지 모두 요한복음이 강조하는 기독론에 관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 전자는 예수님의 메시야됨을, 후자는 그 메시야가 이룰 부활의 메시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 요 2-4장은 요한복음 내에서 하나의 큰 단위이다. 가나에서의 첫 번째 기적과 그 이후 여러 장소에서의 예수님의 활동을 나타낸 후 다시 가나에서의 두 번째 기적으로 마감하고 있기 때문이다. 가나가 첫 번째와 두 번째 이적의 장소가 되는 것에 대해서는 참고 부분의 ‘요한복음의 대치신학 - 가나의 의미 이해’를 참고할 것! - 본문은 그 안에서도 22절까지가 하나의 기본 묶음이다. 이유는 1절에서 19절까지가 inclusio로 묶여 있기 때문이다. 그 묶음의 키워드는 “사흘”이다. - 요한복음 2장에 기록된 예수님의 첫 번째 기적에 관한 기록은 앞서 1장에서 예수님을 만난 나다나엘에게 예수님이 보여주시겠다 하신 내용, 곧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라는 말씀(1:51)에 대한 대답이다. 이 말씀은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한 하나님의 나라를 말하는 것이고, 그것의 예표로서 혼인잔치의 기적이 나다나엘의 고향인 가나(21:2)에서 일어난 것이다. 따라서 이 사건은 바로 나다나엘에게 보여주시겠다 하셨던 대로 하나님 나라가 예수님 자신으로부터 열리는 것을 보여주신 사건이다. - 동시에 요한복음에 의하면 예수님의 두 번째 기적 또한 가나에서 일어난 것이라 하는데(4:54), 이는 바로 나다나엘이 있는 그 자리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시작되었다고 하면, 그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곳이면 어디든지 자기가 있는 그 자리가 이제 왕의 신하의 아들을 고치시는 기적처럼 회복의 역사로 채워짐을 이르는 것이다. - 요한복음에서는 사건과 시간과 관용구로 ‘이튿날’이라는 부사를 자주 사용한다. 그런데 본문에는 ‘사흘째’라는 시간 관용구가 사용된다. 요한복음 전체에서 이 말은 오늘 본문의 2장에서만 단 2회 사용되었는데, 그 나머지 한 번은 바로 뒤에 이어진 19절의 말씀, 곧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는 예수님 자신의 말씀에 나온다. 이는 이 ‘사흘’이라는 말이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가리키는 말로써, 이 가나의 혼인잔치 기적이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으로부터 시작되는 하나님 나라를 가리킴을 말한다. - 이점에 있어서 학자들 간에 이 가나의 혼인 잔치가 유카리스트, 곧 최후의 만찬과 예표와 유비의 관계가 있다고 보는 의견들도 있다. - 이 기적 사건이 어떤 목적으로 일어난 것인지는 결론부의 11절이 직접 명시하고 있다. 곧 모든 초점은 예수님이 하신 일이다. 그 외의 다른 이들에 관한 것은 이 사건을 일으키신 예수님의 목적에 합당치 아니하다. 그 자세한 내용은 설교 본문 참고. |
Structure A. 예수님으로부터 시작되는 하나님 나라 (1-5절) “사흘째 되던 날...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 B. 율법 대신 복음 위에 세워지는 나라 (6-8절) “돌 항아리 여섯” C. 변화의 기쁨이 충만한 나라 (9-11절)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두었도다” |
Introduction
* - 가나의 혼인잔치 기적 - 이 비유는 관점이 문제이다!
이것이 마리아의 믿음이나 하인들의 순종에 대한 이야기일까? 우리들이 기적을 보려면 철저하게 순종해야 한다는 가르침일까?
아니다. 이 이야기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맛보게 되는 하나님 나라이다.
예수님이 메시야이시며, 그러한 메시야를 통해서 그리스도인의 삶에 시간에 들어오게 될 하나님 나라는 어떤 모습인지가 이 기적을 일으키신 주님의 중요한 목적이다.
- 그런 점에서 예수님이 첫 이적을 혼인잔치 자리에서 베푸신 것은 바로 하나님 나라의 잔치가 어떠한 것인지를 보여주시기 위함이다.
- 미쉬나 문서를 통해서 알려진 바와 같이 유대인들의 결혼 잔치는 일주일 이상 계속되었었다. 그런데 결혼 풍습 상 서로 간에 물물교환의 흔적이 강한 이 예식에서 포도주가 모자랐다는 것은 상대방에 대한 무시로 신랑 측이 피소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고 한다.
이런 문제 앞에 오늘 주님께서 그 자리에 계셨고, 거기서 주님의 공생애 첫 번째 기적이 펼쳐졌다. 이 첫 번째 기적 사건에서 주님께서 자신을 통해서 시작되는 하나님 나라의 특징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셨는데, 그것이 무엇인가를 들어보아야 한다.
먼저, 1-5절을 읽자!
1st DT A. 예수님으로부터 시작되는 하나님 나라 (1-5절) “사흘째 되던 날...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 1) 사흘째 되던 날 갈릴리 가나에 혼례가 있어 예수의 어머니도 거기 계시고 2) 예수와 그 제자들도 혼례에 청함을 받았더니 3) 포도주가 떨어진지라 예수의 어머니가 예수에게 이르되 저들에게 포도주가 없다 하니 4)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 5) 그 어머니가 하인들에게 이르되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하니라 |
Explanation
- 1-2절, 신약성경에서는 이를 것도 없고, 구약성경에서도 메시야를 통해서 도래하는 미래의 구원의 때는 혼인예식이라는 상징으로 예표되었다(호 2장, 사 62장 등). 따라서 예수님이 직접 개입하게 된 본문의 혼인잔치의 기적은 바로 하나님 나라에서 일어나는 기적을 보여주는 것이다.
* - 3절, 유대의 랍비들은 ‘포도주는 기쁨이다’라는 금언을 남겼다. 혼인잔치에서 포도주는 그러한 기쁨의 상징이었고, 그것이 떨어진다는 것은 그래서 기쁨이 사라지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기 때문에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포도주는 종말적인 기쁨과 삶의 풍요를 미리 맛보는 것이며, 그러한 관점에서 이 본문에서 포도주의 풍요로움은 바로 하나님 나라의 기쁨에 연결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말씀 가운데서 포도주는 자기에게 속한 사람들, 곧 장차 하나님 나라에 초대된 사람들에게 선물로 주시는 생명과 또한 선물로서의 성령을 가리키기 때문이다(7:37-39 등).
- 그런 포도주가 혼인잔치에서 떨어졌고,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가 예수님께 처리를 부탁했다. 그때 주님께서 하신 말씀은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 하는 말씀이었다.
* - 다시 1절, 요한복음은 어떤 사건을 시작할 때, ‘이튿날’이라는 표현을 습관적으로 사용한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는 ‘사흘째 되던 날이라고 시작한다. 이는 요한복음서에는 특별한 경우이다. 요한은 다른 모든 곳에서 ‘이튿날’이라는 표현을 사건 전개의 시점 표시로 사용하고 있는데, 유독 가나에서의 첫 번째 이적과 두 번째 이적에서만은 ‘사흘’의 시간 표시를 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사흘은 예수님의 십자가로 인한 죽음의 시간을 이중적으로 의미하는 말로 요한복음에서 사용되었다.
- 4절, 그러므로,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때는 십자가의 때를 말한다. 주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면, 그것은 곧 십자가로 가는 길이므로, 십자가의 때를 말한다. 그리고 십자가의 때는 온 인류의 구원을 완성하는 때이며, 그래서 하나님 나라가 도래하는 시점이다. 구원의 완성은 필연적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오게 만든다. 그리고 그런 하나님 나라는 아직은 이르지 아니하였지만, 오늘 본문의 기적 사건을 통해서 이미 현재에서도 누릴 수 있는 ‘표적’이 되는 것이다.
➜ 그런 좋은 하나님의 나라는 오늘 이 사건의 주인공이 되시는 예수님으로부터 시작되는 나라이며, 그 예수님의 십자가로 세워지는 나라이다.
그 나라는 혼인잔치와 같은 기쁨이 가득한 나라이다.
예수님이 메시야로서 그렇게 십자가의 때를 향하여 서 계시기에 우리에게 그런 혼인잔치와 같은 기쁨이 있는 하나님 나라가 우리에게 지금 이 자리에 임하게 된 것이다.
그것을 나타내 보이시려고 혼인잔치에서 예수님의 첫 공생애의 기적이 시작된 것이다.
Illustration
- 4절에서 예수님이 자기 어머니 마리아를 ‘여자여’라고 부른 것은 그것이 여성에 대한 존칭이라 하더라도,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는 시점이기에 이제 개인적인 어머니와 아들의 관계를 넘어서서, 공적인 관계로 부르는 호칭이다(19:26에서도). 곧 본문의 이 시점부터는 예수님은 ‘어머니의 아들’이 아니라 ‘사람의 아들’ 곧 ‘인자’로서의 삶을 시작하신다는 것이다.
- 예수님이 ‘인자’로서의 삶을 시작하셨기 때문에, 이제 기적이 일어나고, 그 기적이 하나님 나라를 겨냥한다.
Application
-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심으로 우리에게 임하는 것이다.
그 오심이 십자가를 향한 것이며, 십자가 사건에서 이루어지는 죄에 대한 승리로 인하여 하나님의 나라에 우리가 들어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죄의 문제가 해결된 사람만이 들어가는 곳이기 때문이다.
* - 그러한 예수님과 함께 하는 시간에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를 이제 여기서 누릴 수 있게 된다. 궁극적인 예수님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어도 하나님의 나라가 가나 혼인잔치에서 시작되는 것을 볼 수 있었듯이, 오늘날 우리도 우리 주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면 그러한 하나님의 나라를 지금 여기서 시작하여 누릴 수 있는 것이다.
- 과연 우리에게 천국의 삶을 누리는 누림이 있는가?
지금, 여기서, 이 땅위에서 하늘의 기쁨을 누리고 있는가?
그러지 못하다면 우리가 예수님에 대한 신뢰가 부족한 셈이라 할 수 있다.
- 예를 들어,
선교사는 도를 자기가 누리지 못하고 그 도를 전하기에 바쁜 사람이다.
사랑을 행하기보다, 사랑을 전하는 사람, 십자가의 도를 누리기 보다
십자가의 도를 전하기에 바쁜 것이 오늘 나의 모습일 수도 있다.
내가 목회할 때 그곳에 그 목회의 즐거움을 누림이 있는가?
내가 사역할 때, 나는 사역자로서 사역의 기쁨을 누림이 있는가?
나는 그리스도인으로서 그리스도인된 나의 삶을 누림이 있는가?
-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늘 우리에게 하나님 나라의 기쁨을 가져다 주시는 분이시다. 오직 그분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게 해 주시는 참 메시야이시다. 오직 그분이 우리로 하여금 지금 여기에서 하나님 나라를 누릴 수 있게 해 주시는 나의 참 구주이시다!
Transition
주님은 우리에게 하나님 나라의 삶이 누려지기를 원하신다. 그래서 혼인잔치 자리에서 첫 번째 기쁨을 선사하셨다!
이제, 주님께서 우리에게 가져다 주신 더욱 누릴만한 즐거움이 무엇인가 찾아보자. 6-8절을 함께 읽는다.
2nd DT B. 율법 대신 복음 위에 세워지는 나라 (6-8절) “돌 항아리 여섯” 6) 거기 유대인의 정결 예식을 따라 두세 통 드는 돌항아리 여섯이 놓였는지라 7)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 하신즉 아귀까지 채우니 8) 이제는 떠서 연회장에게 갖다 주라 하시매 갖다 주었더니 |
Explanation
- 6절, 예수님은 어머니 마리아의 부탁에 정결 예식으로 쓰이는 돌 항아리 여섯에 물을 채우라고 하셨다.
7절, 그리고 그 물이 포도주가 되게 하셨다.
* - 왜 예수님께서 유대인의 정결 예식에 사용되는 돌항아리를 사용하셨을까?
그냥 다 비워진 포도주통에 물을 붓게 하는 것이 통상적인 조치였을 것이다.
그러나 주님은 굳이 돌항아리를 쓰셨다. 그 이유는 그 돌항아리가 바로 유대인들이 정결 예식에 사용되는 것, 곧 율법 예식에 사용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여기에 주님의 첫 번째 기적의 비밀이 있다!
새 포도주는 주님의 가르침에서 새 언약을 일컫는다. 새 포도주를 낡은 부대에 넣는 이가 없다고 하였다. 그러니 이는 율법에 쓰이는 돌항아리의 물을 주님의 피로 이루게 되는 새 언약, 곧 은혜로 바꾸어 버리신 것이다.
새 포도주는 옛 언약을 새 언약으로 바꾸심을 말하고, 다시 말하면, 율법의 질서를 은혜의 질서로 바꾸심을 말한다. 이것이 메시야 되신 예수님께서 가지고 오시는 하나님 나라의 근본적인 패러다임 쉬프트이다!
➜ 하나님의 나라는 율법 대신 복음 위에 세워지는 나라이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가져오신 복음의 은혜 가운데 세워지는 나라이다.
Illustration
* - 율법의 정결례에 쓰이는 항아리를 다른 목적으로 사용하면 일시적으로 부정하게 되는 것이었다. 예수님에게는 율법의 의식보다는 혼인잔치에 있어야 할 하나님 나라의 기쁨이 더 중요하였다. 예수님이 은혜로 혼인잔치 자리를 더욱 기쁜 자리로 만드신 것이다.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율법 대신 은혜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게 되었다는 것이 어떠한 것인가!
* - 이 기적 사건의 본질은, 결코 믿음으로 순종했더니 기적이 일어났다는 것이 아니다(예수님이 일으키신 수많은 기적 사건들을 잘 보면, 믿음으로 순종해서 기적이 일어나기도 하지만, 믿음이 없는 상태에서도 기적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그러니 믿음이 기적의 필요조건은 아닌 셈이다).
이런 생각은 조건적인 신앙이다. 그렇게 바라보는 시각 자체가 율법주의에서 나왔다. 모든 조건은 율법주의이다.
- 이미 모든 율법주의에는 조건이 붙고, 인과관계가 성립된다.
내가 기도를 열심히 했더니 기도에 응답이 있었다. 아니다! 내 열심이 부족하더라도 주님께서 은혜로 응답하신 것이다.
내가 믿음이 좋아서 이렇게 능력있는 사역을 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아니다. 나의 나 된 것이 주님의 은혜가 아니었던가?
내가 열심히 신앙생활하면 하나님이 복 주신다? 아니다. 주님께서 그 한없는 자비로우심으로 복 없으면 살 수 없는 인생에 복을 주시는 것이다.
Application
* - 모든 조건적인 신앙으로부터 은혜의 자유로움으로 나아가는 것이 율법 대신 복음으로 세워진 하나님 나라를 제대로 누리는 것이다.
우리를 주님의 일에 뛰어들게 만드는 것이 사명감인가? 의무감인가? 아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를 기억함이다.
은혜가 사역을 하게 하지 사명감이 사역을 하게 하는 것 아니다. 의무감으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수는 없다. 주님의 일을 할 수는 없다.
주님의 은혜 없이 하는 모든 사역은 그 자체로 짐만 될 뿐이다.
* - 율법의 멍에에서의 은혜의 자유로움을 누리라!
돌항아리는 여섯이라고 하였다. 여섯은 유대인의 숫자 관념으로 완전한 일곱수에 하나 부족한 수이다. 부족함의 수이다. 인간의 노력으로 완전하려고 하였지만 무엇인가 부족한 그런 수!
실제로 율법주의로는 아무리 수고하고 노력하여도 무엇인가 부족함을, 허전함을 느낄 수밖에 없다. 아무리 사명감으로 노력해도 허전하다.
Transition
이제, 주님께서 우리의 삶에 주신 누림의 결과가 무엇인지 살펴보자. 9-11절을 함께 읽자.
3rd DT C. 변화의 기쁨이 충만한 나라 (9-11절)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두었도다” 9) 연회장은 물로 된 포도주를 맛보고도 어디서 났는지 알지 못하되 물 떠온 하인들은 알더라 연회장이 신랑을 불러 10) 말하되 사람마다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고 취한 후에 낮은 것을 내거늘 그대는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두었도다 하니라 11) 예수께서 이 첫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의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 |
Explanation
- 주님이 물로 만드신 포도주는 최상의 포도주임에 틀림이 없었다.
프랑스산으로는 4등급이 있는데, 그중 최고등급은 이렇게 표시한다.
지명 앞 뒤에, Appellation과 Controlee를 붙여서 이름으로 부른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가나에서 물로 만드신 포도주는 Appellation Cana Controlee 등급일 것이다.
왜냐하면, 최후에 가장 좋은 포도주가 나왔기 때문이다.
* - 이 결말에서 헬라적 이념과 대치되는 바, 기독교의 구원에 관한 패러다임을 볼 수 있다. 헬라적 이념에 의하면, 최초의 것을 최상의 것으로 본다. 땅의 초인이 오기 전에 하늘의 기인(起人)이 온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이적적으로 새로운 구원을 인간에게 제시한다. 하나님은 최최고의 술을 최후까지 지키신 것이다.
- 주님은 언제나 우리의 마지막을 더 아름답게 하신다. 그 끝에 하나님 나라가 있는 것이다. 그것이 주님의 역사가 이루는 본질적인 모습이다!
하나님 나라를 맛보고 체험하는 모든 이들이 변화의 열매를 이루게 된다.
그리하여서 그 다음이 이전보다 더 기쁨이 가득한 변화로 채워지는 것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나중이 될수록 더 좋은 결과를 보게 하신다. 그것이 기독교신앙과 헬라적 사상과의 차이점이다.
➜ 하나님의 나라는 나중이 더 좋은 변화가 가득한 나라이다!
Illustration
* - 히브리인들은 ‘최후’(אַחֲרִ֥ית 아하리트)는 말을 ‘미래’라는 말로, 하나의 낱말로 두 가지 의미를 모두 사용한다. 하나의 끝은 그 다음 시간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라는 사상을 지니고 있는데(마치 서구에서 대학 졸업식이라는 말을 시작하다는 의미의 ‘commencement’로 쓰는 것처럼), 하나님을 믿는 이들에게는 진정한 의미에서 최후는 없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사람의 최후는 단지 하나님의 미래를 여는 시작일 뿐이라는 믿음이 배어 있는 말이다.
- 또한, 예를 들어, 건강한 자아는 지난 시간 보다 지금을 더 좋아한다는 교육심리학의 연구결과가 있다. 그래서 다음의 잠언이 일반적으로도 명언인 것이다.
➜ 전 7:10) 옛날이 오늘보다 나은 것이 어찜이냐 하지 말라 이렇게 묻는 것이 지혜가 아니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받아들인 이들이라면, 이러한 변화의 기쁨을 누릴 줄 알아야 한다.
Application
* - 우리 인생의 문제도 그렇게 하신다. 우리는 점점 더 아름다워지고, 점점 더 성숙해진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가져다 주신 주님이 그렇게 만들어주실 것이다.
나중이 좋은 것이 좋은 일이며, 나중이 좋은 사람이 진정으로 좋은 사람이다.
이것은 결과만 좋으면 다 좋다는 말이 아니다. 나중이 좋은 하나님 나라를 누린 이들이 결과물이라는 말이다.
- 그러므로, 이 혼인잔치에서 나중이 좋은 기쁨과 그것을 가져온 변화를 보았다면,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서 우리에게 가져올 변화가 있는 좋은 나중을 믿음으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 - 변화는 마지막을 바라보는 소망이다!
나 자신도 변화하지 않는다면 삶의 기쁨은 없는 셈이다. 하나님 나라를 진정으로 누리는 사람이라면 변화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교회도, 공동체도, 우리 모두도 하나님 나라의 변화를 체험하고 누려야 한다.
Conclusion
- 오늘 본문의 결론은 성경 말씀 자체에 들어있다. 바로 11절의 말씀으로 이 기적이 나타나게 된 목적과 결과가 우리에게 들린다.
11) 예수께서 이 첫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의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
그 목적은 바로 예수님이 영광을 받으심이고, 그 결과는 제자들이 믿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 예수께서 행하신 것은 하나의 표적이다. 여기서 단순히 하나의 기적을 보고 놀라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 기적이 나타내는 '표징' 곧 예수님이 그러한 하나님 나라를 가져오시는 분이심과, 그 하나님 나라가 어떠한 것인가를 알고 믿는 것이 중요하다.
- 그러한 기적은 이미 이 땅에서 시작되었다. 마치 예수님의 때가 아직은 아니되었지만 친구의 혼인잔치에서 이미 시작됨을 우리도 알고 우리의 삶에서 믿을 수 있어야 한다.
* - 예수님이 이렇게 ‘표징’으로 드러내셨던 하나님의 나라와 그것을 가져오시는 기적은 이제 당시 사람들에게나, 요한복음의 독자들에게나, 그리고 우리에게나 그것을 믿을 수 있는 지의 여부를 묻는 시험대가 된다. 그 시험대에서 믿음을 인정받은 이들은 그것을 누리게 될 것이다.
* - 그 누림이 없이 사는 것은 삶을 그저 소진시키는 것에 불과하다.
우리 예수님이 우리에게 가져다 주시는 하나님 나라의 삶을 누릴 수 있어야 한다. 궁극적인 미래의 삶을 지금 여기에서, 하늘의 삶을 지금 이 땅에서 누릴 수 있어야 한다.
※ 참고 : 이 부분은 해당 성경 본문과 관련된 추가 이해나, 또는 설교 본문의 방향을 보강하거나, 또는 다른 방향의 인사이트를 제공합니다. 따라서 이 부분의 내용을 중심으로 설교의 초점이나 방향을 바꿀 수 있습니다. ----------------------------------------------------- - 고대 몇몇 사본과 중세 사본에 의한 기록을 종합해 보면 마리아는 오늘 본문의 신랑의 이모였으며, 신랑의 어머니 곧 마리아의 자매는 살로메였다고 한다. 그 내용에만 따른다면, 오늘 본문의 신랑은 바로 다름 아닌 요한 자신이라는 말이다. 그러나 본문에는 그러한 암시는 없으며, 대신에 그 혼인집 사람들이 적어도 예수님 집안과 친척이거나 친구이기에 초청받은 것은 거의 분명하다. - 사흘째 되던 날! = 19절/22절까지가 한 단락이다! 거기에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라는 ‘사흘’로 앞뒤가 묶여진 inclusio(인클루시오, 문단이나 단위의 앞부분과 뒷부분에 같은 문장이나 주제, 낱말을 반복해서 하나로 묶는 문학 기법)가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사건은 성전 정화사건과 연결해서 읽어야 한다. 그러므로, ‘내 때’란 십자가의 때를 말한다! - 요한복음은 이튿날이라는 표현을 습관적으로 사용한다. 그런데 오늘....사흘 되던 날이라고....이것은 또한 부활의 날을 겨낭하고, 동시에 부활로 인하여 오게 되는 하나님 나라의 승리를 말한다. - 또한, 요 2-4장은 가나에서 가나로! 가나에서 첫 번째 이적을 행하고, 팔레스틴땅을 옮겨 다니시다가 두 번째 이적인 왕의 신하의 아들을 고쳐주신 이적을 가나에서 다시 행하신다. 첫 번째 이적, 두 번째 이적을 모두 가나에서 행하신 셈이다! - 가나라는 장소가 첫 번째와 두 번째 기적 사건의 장소가 된 것은 요한복음의 ‘대치’ 신학 때문이다. 율법의 상징인 예루살렘이란 장소를 가나로 대치하였다. 이는 예수님의 첫 번째 표적이 갈리리에서 갈릴리 사람에 의하여 갈릴리 제자들 앞에서 펼쳐짐을 통해서, 장차 메시야에 의해서 세워질 하나님의 나라가 예루살렘의 율법과 지역을 넘어서는 확장을 이룰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율법주의에 갇힌 세계를 넘어서고, 그 이데올로기에 갇힌 사람들을 넘어서는 복음으로 세워지는 나라이다. - 이와 관련하여, 항간에 ‘가나’라는 지명의 이름이 ‘창조하다’라는 의미이며, 그래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는 창조의 기적이 일어난 것이라고 하는 잘못된 내용이 돌아다니고 있는데, ‘가나’라는 지명의 본디 뜻은 ‘갈대’라는 말이다. 또한 1절의 ‘사흘째’라는 말도 그런 해석에 이어붙여서 창조사역 중에 3일째에 있었던 물과 땅을 분리하신 날이 유대인들에게 최고의 축복의 날이어서 결혼식을 하는 날이므로 그 ‘사흘째’라는 말이 안식일로부터 3일째인 오늘날의 ‘화요일’에 해당하는 날이라는 풀이까지 하는 경우가 있다. 전혀 근거가 없는 황당한 풀이이며, 오히려 보통은 일주일이나 계속되는 유대인들의 혼인잔치 시간상 포도주가 떨어지는 시점은 오히려 주간의 말미일 가능성이 높고, 더욱이 본문에 나오는 ‘사흘’의 상황적인 시간 순서는 그에 앞서 1장에서 나다다엘이 예수님의 제자가 되던 날로부터 계산된 시간을 말하는 것일 가능성이 높다. 곧 그 사흘째란 이미 혼인잔치가 시작된 후의 말미의 어느 시점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중적 의미에서 요한복음에서 이 ‘사흘째’의 의미는 설교 본문 내용 참고. - 예수께서 오늘 본문에서 자신의 어머니에게 사용한 “여자여”(γύναι 귀나이)라는 호칭은 당시 헬라어 관습에서는 귀부인을 일컫는 극존칭이었다. 따라서, 예수님이 자기 어머니를 하대하거나 낮추어 부르는 것이 아니다. - 4절의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라는 구절의 헬라 문장은 글자 그대로 직역하면, ‘나와 당신에게 무엇(입니까)?’인데, 이는 일종의 관용구로 예수님과 마리아 ‘사이에’ 무슨 상관이 있냐는 뜻도 될 수 있고, 반면에 예수님과 ‘동시에’ 마리아에게 무슨 상관이 있느냐는 뜻도 될 수 있다. 전자면 예수님과 마리아 사이의 일로, 후자면 포도주에 대한 예수님과 마리아의 공동 입장을 나타내는 것이다. 새번역이나 공동번역은 상반된 번역을 취하면서 동시에 대체 번역을 난외주로 달아놓았다. - 4절의 ‘때’라는 말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두 종류의 시간, 곧 일반적인 시간의 흐름인 크로노스도, 특정한 때를 가리키는 카이로스도 아니다! 이것은 요한복음 저자가 예수님의 고난, 죽음, 부활, 승천의 때를 일컬을 때 전용으로 사용하는 단어 - ‘호라’(ὥρα)가 쓰였다. 이 낱말은 요한복음의 17개 구절에서 나오는 전용어이다. - 5절에 나타나는 마리아의 태도는 그때까지 아무런 기적도 행하지 않으셨던 예수님에 대하여 분명히 마리아의 믿음이 예사롭지 않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본문의 의도는 그 믿음을 강조하기 보다는 예수님의 기적을 이루기 위한 하나의 과정으로 등장하는 것이다. 그 믿음이란 실제로 이 기적의 갈무리 구절인 11절에 가서야 그 기적을 보고 제자들이 믿게 되는 그 태도를 겨냥하고 있기 때문이다. - 6절의 ‘한 통’ 이라는 양은 약 40리터이다. - 물을 ‘채우는 것’과는 달리 ‘떠서 주는 것’에는 분명히 믿음의 요소가 있다. 아무리 모른다 해도 시키는 대로 할 수 있는 것도 믿음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본문의 강조점이 그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5절에서 마리아가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라고 말하는 것도 분명히 믿음의 요소이지만 역시 본문의 강조점은 아니다. - 본문의 ‘포도주’가 예수님의 만찬상의 포도주를 예표하는 것이라는 해석이 가능하지만, 요한복음의 컨텍스트가 거기까지 겨냥한 것인지는 단언할 수 없다. - 11절의 ‘표적’이라는 말(σημεῖον 세메이온)은 요한복음의 특징 중 하나이다. 요한은 결코 ‘능력’(δύναμις 뒤나미스)이라는 낱말을 쓰지 않는다. 이 후자는 하나님의 능력을 드러내기 위하여 이적을 설명하는 공관 복음에 가장 많이 쓰이고 역시 좋아하는 언어이다. 요한복음이 이러한 용어 사용의 특징을 보여주는 것은 예수님의 기적이 하나의 ‘사인’(표징)으로서 사람들이 그 ‘사인’의 의미를 믿고 따르느냐에 강조점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 사 1:22) 네 은은 찌꺼기가 되었고 네 포도주에는 물이 섞였도다 - 요한복음에서는 공관복음서와는 달리 예수님이 지낸 세 번의 유월절이 기록되어 있다. 본문은 그 중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신 첫 번째 유월절 참여에 대한 기록인데, 그런 점에서 가나의 혼인 잔치에 이어지는 성전 정화 사건이 예수님의 공생애의 첫 기적 이후에 배치되어 나온 것은 이 역시 하나님의 나라를 예비하기 위한 조치임을 알려주는 연결점이다. 즉 하나님께 온전한 예배를 드리는 하나님의 집은 바로 하나님 나라의 특질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나타내 보이고자 하는 두 사건이 요한복음에서는 가장 중요한 시작이었던 셈이다. - 독일산 포도주에는 6등급이 있는데, 그중 최고등급은 Qualitaswein Mit Pradikat라고 한다. |
※ 본문 살피기 : 이번 주는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며 처음으로 기적을 베푸셨던 사건, 곧 가나의 혼인잔치의 말씀을 듣게 됩니다. 이 본문의 강조점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방향과는 조금 다른 곳에 있습니다. 본문에서 본질적으로 우리에게 들려주고자 한 교훈이 무엇인지 듣기에 앞서 다음의 질문들을 통하여 본문을 미리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 이 사건은 어떠한 자리에서 일어난 일입니까? - 예수님께서 자신의 어머니에게 사용한 호칭은 무엇이었습니까? - 마리아의 요청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은 무엇이었습니까? - 물을 채우기 위하여 쓰인 돌 항아리는 본디 무엇을 위한 것이었으며, 모두 몇 개였다 합니까? - 물로 된 포도주가 얼마나 좋은 것이었는지를 연회장은 어떻게 표현하였습니까? - 11절에 따르면, 이 표적의 목적과 결과는 무엇입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