ㅁ 시집 『혼자 춤추는 이방인』
적선(謫仙)과 천손 신화
구 중 회
(시인. 공주대학교 교수)
당나라 시인 이 백은 자신을 적선(謫仙)이라 비유했다. 송강 정철도 자신을 취선(醉仙)이라 비유했다. 우리나라를 처음 연 단군이나 신라말의 고운 최치원은 죽어서 신선이 되었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단군은 1908을 살았고 최치원은 죽음과 삶이 구분되지 않았다.
사람은 나면 죽는다. 그러나 천인(天人)은 죽지 않는다. 사람은 땅에서 살지만 천인은 하늘에서 산다. 그런데 사람과 천인 중간에 방외인(方外人)이 있다. 신선이 바로 그런 존재다. 신선은 몸만 사람이지 영원하다는 점에서 천인이다. 또 천인 중에는 환인(桓因)이나 환웅(桓雄)처럼 인간 세계를 그리워하는 부류가 있다. 그리워하는 정도가 아니라 홍익인간을 적극적으로 꿈꾸며 유도하기도 한다.
신선이나 천인은 그러므로 다 하늘에 근원을 두고 있는 부류들이면서 땅 즉 인간과 깊은 관련이 있다. 도교에서 꿈꾸는 인간은 신선이고 이 신선사상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장수를 극대화하게 되었다.
신선과 천손(천인 중에서 인간이 그리워 지상에 온 사람이다.)은 그 삶의 자세에서 앞에서 이미 말한 것처럼 정반대의 위치에 있다. 신선은 천인을 지향하지만, 천손은 인간을 지향한다. 신선은 하늘의 풍속과 관행을 못잊어 하고 천손은 인간의 몽매함을 께치기 위해 인간 세계에 참여하며 창조와 개혁을 도모한다. 신선은 소극적이고 축제적이나 천손은 적극적이고 규범적이다.
나는 시인을 신선과 천손과 같은 존재라고 생각 한다. 그러나 시인은 근원적으로 하늘에 속해 있을지라도 인간이기 때문에 천상계의 풍속과 관행을 버리고 지상계의 풍속과 관행을 취하는 것이 편하게 생각된다. 세속화된 삶이 어떤 면에서 편한 탓이다. 그러나 인간세계에 안주해 있으면 결국 고향인 천상계의 꿈이 어른거리니 어찌할 것인가. 시인이 시를 쓰지 않으면 허전한 것은 이 때문이리라. 시는 말하자면 천상계의 언어라고 할 수 있다.
이를 수긍한다면 시인은 신선계와 천손계가 있는 게 아닐까. 그 표현하는 자세에 있어 차이가 나는 것은 이런 까닭에서이리라. 60년대 ‘순수’와 ‘참여’의 논쟁이 치열했는데 신선계를 ‘순수’쪽이라 하고 천손계를 ‘참여’쪽이라면 이해가 될지 모르겠다.
내가 김송배의 『혼자 춤추는 異邦人』을 이러한 논쟁의 대상으로 삼은 것은 신선과 천손의 부류로 설명하기에 알맞았기 때문이다.
앞에서 신선과 천손을 시인과 비유하면서 적선(謫仙)이라는 말은 사용하지 않았다. 적선이란 ‘유배온 신선’이 아니겠는가. 그러면 어디에서 어디로 유배온 것인가. 그것은 하늘에서 땅으로 유배온 것이다.
유배 생활을 하는 사람은 늘 유배생활이 풀리기를 기원한다. 유배자인 방외인이 아닌 관객인으로 살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유배인이지만 유배생활으 lwoal 또한 전연 없는 것은 아닐 것이다. 어쩌면 유배에서 풀려야겠다는 생각보다 생활 자체의 재미가 훨씬 많다고 보아야 하리라. 다만 유배인이 아닌 관객인으로서에 대한 인식이 명징하고 철저할 뿐이다.
김송배는 천상계보다는 지상계에 있음에 대하여 가장 치열하게 저항의 몸짓을 보이고 있다.
갈대처럼
천성적 연약함으로 너는
비옥한 저 들판에서
서지 못하리라. 서지 못하리라
어느 늪 속, 미풍에도
흔들리는 눈물처럼
온몸을 전율하는 생명
돌밭에서 싹틔워진 연약함일지라도
그 귀중한 생명을 끌어안고
잘못 뿌려진 씨앗을 탓하지 않으리라
다시 바람이 부는 늪에서
진흙으로 어둠을 삼킨 채
오늘은 다만 노래 한 소절만 부르리라
눈물로 흔들리는 노래
갈대의 노래.
-- 「갈대, 눈물로 흔들리다 . 1」 전문
갈대는 우리의 일상에서 밀려나 있는 이방인과 같은 존재다.
김송배는 천상계에서 쫓겨나왔다는 의식이 치열하다. 천성적으로 약하다는 것은 지상계가 본래의 자기의 고향이 아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귀화인’이라고나 할지 모르겠다. 그래서 작은 바람이나 늪에 처해서 흔들린다. 그리고는 자학에 가까운 ‘잘못 뿌려진 씨앗’이라고 단정한다.
그가 『혼자 춤추는 이방인』 이라고 제목을 붙인 것은 그래서 너무 아프다. 「갈대, 눈물로 흔들리다 . 1」에서 노래를 한 소절만 부르겠다고 한 대목은 비장하기까지 하다. 눈물로만 흔들리는 노래를(겉으로는 흔들리지 않는 것처럼 가장하면서) 부르겠다는 것은 너무나 아파서 시리기까지 한 그의 자세다.
허연 뼈 조각이 어둠 속에 툭툭 불거진다
광기 하나로 이어진 인생의 저쪽
피는 피와, 사랑은 사랑과
서로 몸 부비며 살아온 날들이
그렇게도 허무라는 성숙된 이름으로
이젠 예리한 뼈 조각으로 버려졌다
바람 한 점에도 미칠 수 있는
목련꽃잎 하나 밟으며 열병을 앓았어도
그것이 순리려니
그것이 한 삶이려니
광기로 뛰다가 깨어진 나의 분신
이 어둠을 밝히는 듯
허연 거품으로 툭툭 밟혀진다.
-- 「그릇, 그 몇 가지 실험 : 광기의 잔해」 전문
김송배는 확연히 천상계와 지상계를 구분해서 보고 있다.
‘광기 하나로 이어진 인생의 저쪽’
이 인용에서 ‘이쪽’과 ‘저쪽’을 판별하고 있음을 알 것이다. 앞에서의 시 「갈대, 눈물로 흔들리다 . 1」에서도 ‘나’와 ‘너’라는 이분법을 썼는데 같은 논리라 하겠다 요새 말로 자기의 객관화이지만, 천상계의 풍습이나 관행에 대한 그리움이라 보아야 할 것이다.
고향이 아니고 타향인 즉 이방인이라는 생각이 허연 뼈 조각으로 바래진다는 데까지 이르면 극심한 경우가 아닐 수 없다. 피는 피라고 생각하고 사랑은 사라이라고 생각했는데 서로 몸 부비며 살아왔는데 남은 것은 허무뿐이다. 피, 살 다 필요한 부분을 섭취하고 영양가 없는 허연 뼈도 버리다니 얼마나 ‘성숙된 이름’인가.
바람 한 점에도 미칠 수 있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고 결국 목련꽃잎 하나에 의지하여 열병을 앓으면서 순리려니 참았다는 사고(思考), 이것이 이방인의 의식이다. 결국 광기 하나로 뛰다가 깨어진 자기의 분신, 즉 허연 뼈 조각을 본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자각이야말로 시인으로서 그를 더욱 성숙시키리라. 허연 거품으로 툭툭 밟혀지는 걸 의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눈앞에 밀려오는 가시거리는 안개뿐이라고 외치게 된다.
지금 可視거리엔 밀려오는 안개뿐이다
---(중략)---
가늠되지 않는 길 저 너머 얼룩지는
웃자란 잡초 한 무리의 어색한 미소
안경을 벗고 다시 눈을 부비며
비로소 허옇게 짓누르는 꿈을 내뱉고 있다
그래서 지금 우리들 오목렌즈의 초점은 어둠뿐이다.
--「근시안」 일부
이 시는 말하자면 천상계에 대한 그리움을 다른 말로 표현한 것에 불과하다. 자기 자신의 심리적, 사색적, 사회적 모습은 범주를 좁혀서 자신의 욕망과 존재를 집중적인 모습으로 보였다. 결국 이 시적인 요소는 적선(謫仙)의 이미지를 보였다는 것이다.
시인은 꿈꾸는 자이다. 그때 꿈은 천손이나 적선이란 점에서 볼 때 천상계에 대한 선험적 실체라고 할 수 있다. 말하자면 시인이란 머리는 천상계에 두고 발은 지상계에 둔 존재이다.(무속신화에서는 인체와 하늘을 직접 연결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 시사적이다. 하늘의 북두칠성은 귀, 코, 입, 눈 등 7구멍과 대응하며 삼제석은 피, 살, 뼈와 대응하고 인간의 몸으로 혼(魂)은 하늘과 백(魄)은 땅에 대응한다.)
그런데 시인은 여기서 선택을 요구받게 된다. 시인이 근원적으로 천상계의 부류이기는 하지만 어디에다 비중을 두느냐하는 점이다. 지상계는 천상계를 원본(原本)으로 삼을 때 고통스럽고 상스러운 모습이지만 ‘살’이 속해 있는 절대 영역임에는 틀림없는 세계이다.
시인이 천상계와 지상계 중 무엇을 우선적으로 취급하느냐하는 문제는 곧 그의 개성이고 색깔이다. ‘개성’이고 ‘색깔’의 의미가 좁은 용어라면 ‘자세’라고 바꾸어도 좋을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김송배는 지상계에 대해 천착하는 시인으로서 이승에 대한 애정은 역설적인 바가 있다. 이방인이기 때문에 더욱 적극적으로 실험하는 정신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사고를 가지게 된다.
내가 가는 길은 오직 지팡이 사랑이다
더듬이를 잃어버린 한낱 미물의 제자리 찾기
두 눈을 부릅뜨고도
파아란 하늘이 보이지 않는 너
길게 뻗은 신작로 지워진 뒤
아스라하게 시간이 달려가고
감지되는 방향은 눈물겹도록 우우
바람 소리 들리는 교성곡뿐이러니
어쩐지 오늘은 유년의 풀꽃만 더듬으며
길섶에 뿌리는 눈물 한 웅큼
네가 가늠하는 먼 길 행방이
내가 비로소 찾아 나서는 한 송이 뜰꽃일지라도
아아 지팡이의 예비된 흔들림
어쩔 수가 없구나
두 눈을 감은 채 사랑을 찾아 나서는 일은
오직 함께 지탱해야 할
가녀린 지팡이뿐인 것을
하마 삭아버린 바람결인 것을.
-- 「迷路實驗 전문
장님이 지팡이 하나에 의지하며 살아가듯 지팡이를 두드리며 사는 것이 인생이 아닐까. 최근에는 많은 대형사고가 빈번하다. 삼풍백화점과 성수대교 붕괴사고, 대구 가스폭발사고, 서해안 패리호 침몰사고, 목포의 비행기 추락사고 등등 헤아릴 수조차 없다. 이런 일을 당할 때마다 누가 살아 있다고 자신하겠는가. ‘살아 있음’이야말로 시인에게 있어 시의 핵심에 놓이는 명제가 아닐까. 죽음을 생각해 보지 않았거나 경험을 해보지 않은 사람은 이 지팡이 두드리는 느낌을모를 것이다.
지팡이를 두드리며 찾아나서는 것이 비록 보잘것없는 들꽃일지라도 이 또한 피할 수 없는 일이다. 지팡이를 의지하는 사람조차 ‘미물’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김송배는 지팡이를 두드리는, 즉 ‘춤추는 이망인’이라고 본인은 생각하는 것이리라.
그러나 나는 이 글을 마무리하면서 천상계와 지상계로 이분법한 것에 대해 내심 썩 마음에 들지 않는다. 너무 고루하고 국수적인 생각이라고 우길 분이 있다면 그 설명을 하루 이틀 동안 해도 결코 할 수 없다고 말하고 싶다.
이 점에서 사상사적으로 시인들이 천상을 꾸미는 기술을 지적한다면 김송배는 불교와 유교류 등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유배자의 유배 생활에 좋은 글벗이 생기기를 빈다.(’94.『심상시인사화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