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지촌 여성의 삶을 노래하다
1945년 일본이 물러가고 미군이 들어오면서 미군을 상대로 ‘가족의 생계 유지를 해야 하거나 먹고 잠잘 곳이 없어 머무는 곳’이 기지촌의 출발이었다. 한국전쟁 이후에는 미군을 상대로 매춘이나 미군상대 서비스 활동을 하면서 생계유지를 했다. 나라가 전쟁 중이었고 모든 것이 폐허가 됐을 당시, 먹고살기 힘들어 택했던 기지촌은 자의가 아닌 타의에 의해 어쩔 수 없이 행해졌던 직업이었다.
미군을 상대해야 하는 여성들은 그들에 의해 수많은 피해를 당해야만 했다. 미군에 맞아죽는 여성도 있었고, 포주들의 강압에 의해서 마약과 술에 찌들어 약물중독으로 죽기도 했다. 그러나 우리사회는 그녀들을 철저히 외면했다. 미군의 폭행과 범죄에 무방비로 노출된 미군의 범죄 대상이었지만, 언론은 미군에 의해 저질러진 그녀들에 대한 범법행위를 단 한줄 제대로 기록하는 적이 없었다.
경기도 송탄의 경우 1970년 후반 약 2500여명의 매춘여성을 포함해 6만 명의 주민 중 80%이상이 미군으로 인해 생계를 유지했다고 한다. 미국의 닉슨독트린 이후 주한미군 철수가 가시화되자 정부는 1971년부터 1976년까지 5년간 정부주도의 ‘기지촌 정화운동’을 벌였다.
그러나 그 정화운동은 여성들의 사회복귀나 사회활동을 장려하기 위한 정화운동이 아니었다. 미국은 날로 증가하는 기지촌 여성들의 성병에 대해서 일본 오키나와 기지촌을 예로 들면서 성병 방지를 위한 대책강구를 요구했다. 이에 정부에서는 기지촌 여성들에 대한 검진을 강화한 것이다. 기지촌 여성들에게 검진증을 발급했다. 이 검진증은 기지촌 여성들에게 주어진 영업허가증이었고 정부가 이를 적극 장려한 셈이었다.
1960년대 기지촌 여성들의 외화 수입은 대략 970만 달러나 된다는 조사가 있다. 당시 한국경제의 규모가 1억 달러에 불과한 시절, 기지촌은 한국경제의 약 10%를 담당하는 경제수입원이었던 것이다. 이 수입원에 대해서 정부는 정화운동이라는 포장 속에서 국가가 직접 성매매를 주관하고 강요하도록 요구한 것이었다.
기지촌 여성들의 성매매가 증가하면서 한국 사회에는 또 다른 사회적 문제가 등장한다. 바로 혼혈아 문제였던 것이다. 외국인들과의 자연스런 가정 관계 속에서 탄생한 혼혈아라면 사회적인 문제가 될 이유가 없다. 그러나 단일민족이라는 민족성과 가부장적 유교주의가 강한 한국사회에서 혼혈에 대한 사회적 인식은 일반 외국인 가족도 색안경을 끼고 보게 만들었다. 따라서 기지촌에서 태어난 혼혈아는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아야 했던 것이다.
전국적으로 미군이 주둔한 모든 지역에 함께 공생했던 기지촌은 운이 좋을 경우 미군의 제대와 함께 미국으로 건너가 가정을 이룰 수 있었지만 이런 경우는 극히 미약했다. 대부분은 강제적인 낙태를 종용받거나 아이를 낳아도 숨어서 키울 수밖에 없는 사회적 약자의 위치에 놓였다. 68년 경향신문 기사에 의하면 미군과 관련된 혼혈아만 7천8백여 명이라고 조사됐다. 이들 대부분은 사회적으로 멸시의 대상이었다. 그들에게는 당연히 기지촌 여성의 자식이라는 수식어가 붙어 다녀야만 했기 때문이다.
가정을 꾸려나가야 할 피폐한 사회 속에서 한국의 여성들은 기지촌으로 흘러갈 수밖에 없었고, 정부는 미국과의 동맹강화라는 구호 속에서 그녀들의 성매매를 적극 권장했다. 그리고 그녀들에게 애국자라는 이름을 붙이고 미군을 상대로 더 많은 돈을 벌 것을 강요했다. 그러나 정부와 사회는 그녀들의 인권이나 그녀들의 사회적 복귀를 외면한 채로 방치시켰다.
혼혈의 문제와 기지촌 여성의 삶을 이야기한 인순이의 자전적 소설인 ‘에레나라 불리운 여인’의 O.S.T로 제작된 ‘비닐장판위의 딱정벌레’는 1987년 세상에 나왔다. 혼혈이라는 딱지 속에서 남들보다 두 배의 노력에도 사회적으로 50%의 인정밖에 받지 못하는 혼혈의 아픔을 다룬 음반이다.
검정색 에레나가 황색피부의 사람들 앞에 나갈 수 없어 언제나 방 안에서 망상만 해야 하는 아픔. 아직 우리사회는 에레나에 대한 미안함을 모르고 살아가고 있다.
비닐장판 위의 딱정벌레 - 인순이
https://youtu.be/tE3Mmtn3gOY